소설리스트

클로저스-479화 (479/517)

00479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  =========================================================================

4층 거실로 돌아오자 갈증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연회장이 보이는 창문 앞에 서서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서 뒤로 던져버리니 뒤따라온 누나가 넥타이를 주워서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놀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서하야. 방금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말로만 끝내기가 뭐해서… 사람들 굳어버린 몸이나 풀어줄 생각으로 힐링 웨이브를 쏜 건데 젊어지다니, 깜짝 놀랐어.”

“하지만 평소의 힐링 웨이브랑은 달랐는걸?”

“그냥 쏘긴 밋밋하잖아. 그래서 시각 효과 준다고 마나 오러을 켜고 B 클래스에서 쓸 수 있게 된 힐링 웨이브 8단계를 쏘아낸 거야.”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누나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럼 사람들이 회춘한 건 8단계 힐링 웨이브의 효과인 거니?" 하고 물었다.

“모르겠어. B 클래스에 들어서서 8단계까지 쓸 수 있게 된 건 알고 있었지만 써본 건 처음이라서. 그러고 보니 E 클래스 때 힐링 웨이브를 배운 뒤로 최대 5단계까지밖에 안 써봤네.”

정신 조작을 소피아한테 연습하다가 두통에 괴로워하는 소피아한테 5단계 힐링 웨이브를 썼을 때를 생각하며 중얼거리니 누나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양손을 허리에 올리면서 말했다.

“자기 능력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3단계로도 손실된 신체를 회복하는걸 봤단 말야. 회복 능력이 제대로 기능하는 걸 알았는데 그 이상이 필요해?”

“……그건 그렇지만 넌 특별하잖아. 만약을 대비해서 확인은 해봤어야지. 아무튼, 네 힐링 웨이브가 회춘 효과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난리 나겠다.”

“난리?”

누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창밖으로 연회장을 보니 소동을 일으킬 것 같은 귀빈들을 영은이와 화연이, 프랑이 진정시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셋 다 신체 강화 B 클래스, 프랑은 초위급 신체 강화 타입이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귀빈 중에 능력자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G 클래스에서 E 클래스 사이니까.

“10년 정도지만 회춘을 하잖아. 돈 많고 나이 많은 부자들이 너도나도 접근해올 거야. 자기들도 회춘시켜 달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누나는 그들을 대상으로 받아낼 게 뭐가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소란이 좀 컸는지 스케일러 한 마리가 연회장 근처로 다가와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거대한 날개 달린 뱀의 모습에 빠르게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0호 저놈은 사람들한테 되게 관심이 많은 거 같네.”

“윙 바이퍼 말이지?”

“응. 저번에 창원에 내려갔을 때도 도로변에 붙어서 지나다니는 차나 오토바이 구경하더니 이번에도 저러네.”

박쥐 날개 같은 커다란 날개는 몸통에 바짝 붙이고 대가리만 위로 쭉 올려서 연회장을 두리번거리며 혀를 날름거리자 근처에 있던 숙녀들이 작게 비명을 지른다.

저렇게 호기심을 보이다 사고 칠까 약간 걱정 드는데 히아리드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가 손바닥을 내민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히아리드를 보고 움찔한 녀석은 히아리드가 입 근처를 만져주니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숲속으로 되돌아간다.

“어쨌든… 발표의 효과는 좀 있어 보여? 내가 보기엔 충분히 먹힌 거 같은데.”

“마지막의 힐링 웨이브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각국 대사들의 머릿속에 기구 신설에 대한 내용이 각인됐을 거야. 그런데 니가 마지막에 쏜 힐링 웨이브 때문에 다 망가져 버렸어. 언니랑 프랑하고 화연이가 니가 발표할 내용에 맞는 분위기를 애써 잡아놨었는데.”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굉장히 어수선해진 연회장을 가리키는 누나한테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힐링 웨이브 덕분에 난리 날 거라며? 오히려 화제성이 더 올랐으니 주의가 더 쏟아지겠지.”

“어휴.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나저나 뭔가 좀… 마실 거 없나? 갈증 때문에 목이 마른 데.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호가 아까 남기고 간 얼음이 떠 있는 콜라를 집어서 벌컥벌컥 들이키자 타는듯한 갈증이 조금 식는 거 같다.

갈증과 울렁거림때문에 신경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손을 이마에 대고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 누나에게 물었다.

“그러는 누나는 어쩔 생각으로 그런 거야?”

“뭐가?”

“레이드 단지.”

“…….”

여기서 그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누나는 찔끔한 표정을 짓더니 못 들은 척 창가에 조금 다가간다.

양어깨가 노출되고 목에는 칼라만 달랑 붙은, 등이 훤히 파인 검은색 비단 드레스를 입은 누나는 창가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그 움직임에 매끈한 등골을 따라 계곡이 생긴다. 탄산음료 덕분에 약간이지만 갈증이 가셨는데 저 뒤태를 보니 다시 갈증이 일어난다. 손가락으로 저 계곡을 훑고 싶다. 만지고 싶다. 핥고 싶다.

컵에 남은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먹어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

“기왕 확장 하는 거 대단위로… 히양?!”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검지로 등골의 홈을 따라 주욱 훑어내리니 보드랍고 따스한 피부가 부르르 떨리면서 누나의 입을 통해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후다닥 등을 가리고 되돌아선 누나는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내게서 주춤거리면서 떨어지려 한다.

“무, 뭐하는 건데!”

“뭐가?”

누나가 떨어지는 만큼 내가 다가가며 거리를 좁히니 금방 유리창에 등이 닿아버린 누나는 움찔하고 창문을 돌아본다.

그 순간 누나의 머리 옆으로 손을 뻗어 유리창을 짚으니 누나는 바로 앞에 서 있는 날 겁먹은 강아지처럼 올려다보기 시작한다.

누나의 드러난 어깨에 입술을 가져가며 말했다.

“기왕 확장하는 거 대단위로 뭐? 전 세계를 통틀어 제일 큰 레이드 팀이라도 만들 거야?”

민어깨에 입김이 닿으니 누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왜, 왜이래애… 너, 너두 허락한거잖아아.”

“누가 뭐래? 그냥 물어보는 거 뿐인데. 아무튼, 대답 안 해줄 거야?”

다른 손을 뻗어 누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고 등의 맨살을 더듬자 누나는 작은 새처럼 파르르 떨며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진다.

내 앞에서 언제나 강한 척하던 누나의 약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의 무엇인가가 깨져 나가려 하는 거 같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행동은 뭔가 이상하다.

아까 수많은 사람 앞에서 한 선언의 영향인가?

그들 하나하나가 지능이나 지식의 활용 능력에 관해서는 나보다 뛰어나고, 나보다 오래 산 연륜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나라에서 정치적인 영향력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겠지.

그런 이들이 내 말 한마디에 놀라고 경악하며 어찌할 줄 모르던 모습은 내 가슴 한켠에 쌓여있던 우울함을 풀어주면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그 흥분이 고스란히 정신적인 고양감으로 이어져서 누나를 이렇게 희롱하는 거 같다.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노는 거 같은 기분도 들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라 손을 내려 누나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기자 가냘픈 누나의 육체가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며 누나의 풍만한 가슴이 얇은 옷자락 너머로 내 가슴팍에 이지러지는 감촉이 느껴진다.

누나는 내 품에 안긴 순간 흠칫하며 몸을 경직시켰지만 금방 몸에 힘을 빼더니 품 안에서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뻗어 내 등을 끌어안는다. 가슴에 눌리는 압박감이 조금 더 강해졌다.

“너 진짜 나빠.”

“응.”

손으로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누나의 등을 어루만지고 입술과 뺨으로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어깨에 비비다가 누나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니 청량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그득 맡아진다.

“깜짝 놀랐잖아.”

“응.”

“그랑블루 컴퍼니는 처음부터 그랑블루의 간부들하구 도시 및 교통설계 전문가들이랑 밑바탕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준비한 계획이야.”

“응.”

“…올림픽 공원을 포함해서 오륜동 전체를 아무런 대책 없이 땅부터 사둔 건 아니었어. 전부 계획대로 진행 중이구, 토지가 준비됐으니 이제 부정부패 없고 튼튼한 건설사를 선택해서 시공을 시작할…건데.”

“응.”

“……듣고 있어?”

“응.”

“안 듣고 있지.”

“응.”

“…….”

누나가 뭐라고 하든 응응거리며 끌어안고 있었더니 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서 날 보려 한다.

따뜻한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싫어 누나가 못 움직이게끔 팔에 힘을 줘서 세게 끌어안으니 누나는 숨이 막히는지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내 등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윽. 다, 답답해. 힘 주지 마.”

“응.”

“…어휴.”

이렇게 저택 안에서 누나를 끌어안고 마인드 힐링을 받는 동안 영은이는 겨우 진정시킨 귀빈들을 이끌고 저택 동편 대연회실로 이동을 시작했다.

수십 개의 사각 테이블 위에 올려진 만찬에 정신줄을 놓고 퍼먹고 있던 미호와 암흑이도 프랑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히아리드와 화연이는 귀빈들이 엄한 곳으로 빠지진 않을까 좌우에서 호위하듯 인도해간다.

야외 연회장보다 더욱 정갈하게 준비된 대연회실로 자리를 옮긴 영은이는 귀빈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에 내가 발표했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영은이의 직위상 이런 질의를 받는 건 맞지 않고 누나가 해야 옳은 거지만 누나는 지금 나한테 잡혀있어서 꼼짝도 못 한다.

프랑의 좁은 범위 공간 지각에 누나가 나한테 잡혀있다는 걸 들은 영은이는 바로 자신이 나서기로 한 듯 했다.

질문 중 야외 연회장에서 내가 썼던 능력에 대한 것은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영은이가 대답해준 것은 전술 마도탄의 공개 방식에 대한 것과 내가 만들겠다고 한 기구의 활동 범위만이었다.

-전술 마도탄의 공개는 전면적인 공개가 아닙니다. 일반 시민들이 전술 마도탄의 설계도를 입수해 사제 제작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지금도 국지전이 빈번히 일어나고 전쟁지역으로 지정된 국가에 해당 설계도가 흘러들어 가는 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여 특수한 상황에 처한 국가를 제외한 국가의 경우, 그랑 블루 레이드 팀에 대사를 파견하여 기술의 전수를 요청한다면 몇 가지 형식적인 보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즉시 전술 마도탄의 설계도면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술 마도탄의 공개에 중국 대사는 미묘하게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힘 깨나 있다는 나라에서 온 대사와 장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앉은 자리 앞에 미니어처 사이즈의 해당 국가 국기와 이름이 적힌 깃발이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튼, 그들이 저렇게 불쾌해하는 이유는 이미 전술 마도탄의 설계도를 모종의 대가를 치르고 입수했기에 보이는 감정일 테지.

“대연회장 보고 있는 거니?”

소파에 앉아 누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고 있으니 누나가 내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어본다. 천장을 빤히 보고 있어서 눈치챈 거 같다.

“응. 전술 마도탄을 공개한다니까 영은이한테 좀 불쾌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놈들이 있네.”

누나는 내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 하더니 손님들의 반응이 나쁘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날카로워진다.

“중국하고 유럽 연합에 속해있는 몇몇 나라 맞지? 그만 놔 줘. 나도 대연회장으로 돌아가 봐야 해.”

뭐야. 누나도 공간 지각을 쓸 줄 아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자신의 허리에 감겨있는 내 손을 쿡쿡 찌르면서 하는 말에 놀란 눈으로 누날 보니 왜 그렇게 보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든다.

“언니랑 계획을 짤 때부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간단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어.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였구. 지금부터는 내가 나서기로 했던 부분이야.”

“좀 더 있어 주면 안돼?”

“……아, 안돼. 가봐야 해.”

내 애원에 순간적으로 고민에 휩싸였던 누나는 이런 기회를 날린다는 게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대신 날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살그머니 입술을 겹쳤다. 립스틱이 아니라 립글로스를 발랐는지 촉촉하고 약간 미끄러지는 감촉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으니 누나의 혀가 수줍은 듯이 침입해온다.

“으음.”

그리고 내 혀와 만나자 부끄러운 듯이 살짝살짝 건드리더니 금방 빠져나가 버린다.

연인들과 비교하면 서툴고 짧은 딥키스였지만 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연인들과의 키스 못지않은 만족감을 주었다.

붉어진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쉰 누나는 내 뺨을 잡고 눈을 마주하며 조용히 말했다.

“언니의 입장이란게 있어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타국의 부처 장관들에게 강하게 나갈 수가 없어. 대외적으로 너의 대변인으로 인식되어있는 내가 나서야 해.”

“아깝지?”

“…으으. 아까우니까 얼른 놔~.”

애교부리듯 뺨을 살짝 부풀리고 앙탈 부리는 누나를 놓아주니 누나는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약간 구겨진 검은 비단 드레스를 편 뒤 나한테 메롱 하고 혀를 내밀고는 종종걸음으로 거실을 나갔다.

누나가 섀도 점프로 층과 층을 뛰어넘으며 대연회장에 도착했을 땐 분위기가 무척이나 어수선해져 있었다.

영은이는 자신의 말이 안 먹힌다는 걸 이미 예측했었는지 이런 분위기에 화가 난다거나 짜증 난 표정은 아니었지만 누나가 언제 오나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누나가 도착한 걸 보고 얼굴이 살짝 밝아지더니 누나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속 시원한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간다.

단상에 오른 누나는 잠시 말없이 웅성거리는 귀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는데, 조용해지기는커녕 분위기가 조금 더 산만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몇 마디를 꺼냈다.

-여러분들께서는 회장님의 공간 지각 능력을 간과하신듯하네요~?-

그러자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한 사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 어딘가로 전화를 걸던 사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하며 단상 쪽을 바라본다.

생긋 웃으면서 내뱉은 간단한 말이었지만 말에 포함된 내용은 그들 입장에서는 간단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누나의 한 마디에 반응이 확 달라지다니, 많은 나라가 그랑 블루, 나아가서 한국의 실세를 영은이가 아닌 누나로 여기는듯한 반응이다.

아무튼, 누나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며 귀빈들을 다그치거나 뭐라고 협박하는 말을 꺼낼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회장님께서는 공하가 어떤 계기로 출현하셨는지 아시게 된 후로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지셨어요. 인간의 욕심이란 것은 어떻게 이렇게나 추악한지 말 못할 만큼 괴로워하시면서 본인이 가진 능력에 대한 업이라고 생각하시며 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애쓰시던 일 마저 팽개쳐둘 정도였지요.-

누나의 말을 "보고" 있으니 온몸에서 닭살이 일어난다. 저 말만 봐서는 내가 무슨 성인군자처럼 보이잖아?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그 말을 듣고 여럿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거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회장님의 재산은 지금 이 시간에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답니다. 보통의 재벌 가문이 벌어들이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만 증가하는 수치지요.

그 어마어마한 재산, 현금과 귀금속, 현물로 이루어진 재산이 세계 시장에 모두 풀려나면 적지 않은 파문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쉽게 예측하실 거에요. 하지만 회장님은 그러지 않으세요. 수를 쓴다시더라도 어디까지나 시장 경제에 악영향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손을 쓰신답니다. 물론 거기에 [적]은 제외해야겠지요.-

적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자 몇몇 나라의 대사가 움찔하고 안색이 굳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중국하고 러시아, 미국 대사? 미국은 나한테 죄지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지만, 중국이랑 러시아는 왜 저래?

-어린 나이에도 그만한 통찰력을 지닌 분이 이번만큼은 무척이나 분노하셨어요. 미국의 사건에 비교해봐도 밀리지 않을 만큼이나요. 그래서 여러 시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대책으로 내놓으신 결론이 바로 여러 국가가 모여 인륜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자는 내용이었지요. 그것은….-

숨소리도 작게 만들고 누나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누나는 인증기를 조작해서 무언가를 가리킨다. 동작을 봐서는 커다란 홀로그램 창을 만들어낸 뒤 무언가를 보여주는 거 같다.

이어진 누나의 이야기는 내가 설립하려는 기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격 요건, 기구에 가입한 국가의 의무와 권리 등이었는데, 권리 중 현 국가가 감당키 힘든 이형종이 국토에 나타날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을 설명하자 사람들은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최고위나 초위급이 가입국에 나타날 경우 내가 키우고 있는 고위 및 최고위 이형종이 그것들을 처리해주며, 그것으로 부족할 경우 내가 직접 나선다는 이야기에 '어멋! 이건 본국에 알려야 해!'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각 국가의 일본에 대한 대응은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게 회장님의 생각이랍니다. 자칫 잘못해서 인류가 인지할 수 없는 바이러스 형태의 이형종이 발생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형종과 인간에 관한 인체 실험? 이것은 절대 가만히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에요. 훗날을 위해서라도, 후손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사건은 무엇보다 날카롭고 엄정하며 관용 없는 처벌을 이루어 명확한 선례를 남겨야 한다는 게 회장님의 생각이세요.-

누나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대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마른 침만 꼴깍 삼켰다.

나야 먼저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고 있는 거지만, 지금 대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이 전부 누나가 하고자 하는 속뜻을 파악한 거 같다.

일본을 처벌할거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물리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내 체면이 있으니 너희들이 나서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어라.

…그날 내 생일파티에 참석한 각 나라 장관과 대사들은 전술 마도탄의 공개,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치 기능을 하는 기구의 발족과 약 10년 가량 회춘시키는 내 능력. 마지막으로 대량의 인어의 눈물을 회장이 소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발빠르게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내 능력에 관해서는 영은이에게 두어 명이 질문을 던졌다가 노코멘트 대답을 받았을 뿐, 누구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백수십 개의 인어의 눈물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거다.

이만한 사람이 모여있다면 대충 "인어의 눈물을 팔 생각은 있습니까?" 라던가 "인어의 눈물은 얼마에 파실 의향이신지?" 라는 질문이 나올법한데 말이야.

머리 똑똑한 인간들은 대체 사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대사: 내가 살 것도 아닌데 실세한테 질문을 던져서 거슬리면 우리만 손해지.

장관: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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