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7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라. =========================================================================
밤늦게까지 내일 파티 준비를 점검하고 연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와 거기서 살을 덧붙인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영은이는 물론이고 다른 연인들과 누나도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은 정말 굉장하시구나. 참모진이 10일이 넘도록 머릴 맞대고 짜낸 계획과 비슷한 내용을 아버님 혼자서 내놓으시다니. 정말 참모장으로 영입하고 싶은 정도인걸?”
음. 비슷한 내용을 영은이도 청와대 참모 회의를 통해서 도출해낸 듯 싶다.
“아무튼, 아까 말했던 것처럼 751 연구소 사건 때문에 일본의 명분은 이미 갈가리 찢겨나간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내일 내 생일 파티 때 초대받은 이들이 모인 장소에서 위상석공급 중단의 이유로 영은이랑 누나가 했던 말 그대로 일본이 벌인 일에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고 말을 꺼낼 거야.”
“아아! 그리고 그랑 블루 임시 연구소에서 드와이트 박사가 분석한 전술 마도탄의 기본 이론을 퍼트릴 거구나? 일본이 전술 마도탄으로 이득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끔!”
누나도 내가 하는 말의 흐름을 읽더니 한 번 크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응. 이런저런 대가를 받으면서 재보기보단 그냥 확 공개해버릴 거야. 거기다 마지막으로 최고위나 초위급 이형종이 발생할 경우에 서로 힘을 모아 퇴치를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자고 이야기를 꺼내야지.”
“그거… 좋구나! 강대국에 능력자 연합까지 끌어들여서 만들면 최고겠는걸?! 어차피 최고위 이형종과 초위 이형종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서하 뿐이니 그 기구의 의장에는 서하가 올라가고 우리나라를 포함 영국 미국 러시아는 상임 이사국으로 올라가는 거야.
만약 초위 이형종이 나타난다면 서하가 스케일러들을 이끌고 최대한 도와주고 가입국의 원조를 받겠다는 약속으로! 그 기구를 만들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중 하나로 일본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률과 조약을 UN과 IWO, 능력자 연합의 주도로 승인을 받아내면 일본은 최소 20년은 국력이 후퇴하게 될 거야!”
영은이도 눈을 번뜩이며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계획을 순식간에 구상해낸다. 프랑과 화연이도 좋은 의견이라고 여기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게 기구가 완성되고 현실에 최고위 이형종이 나타났을 때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면 더욱 서하의 명성이 올라가겠네요!”
“거기에 기구 의장에 서하가 올라가면 서하의 영향력 또한 더욱 커질 테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 같다.”
“좋아! 내일 있을 파티 때 쓸 대본을 만들어봐야겠구나! 시하야, 도와주지 않으련?”
“물론이에요!”
씻으러 올라왔을 영은이와 누나는 흥이 잔뜩 난 모습으로 사이좋게 서편의 집무실로 달려가 버리고 프랑은 이미 계획이 성공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지 눈을 감고 손을 꼭 잡은 채 길다란 한숨을 내쉰다.
긍정적인 해결방안이 생기자 답답함이 가신듯한 모습이다. 그녀들도 답답하긴 나와 마찬가지였나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저택. 개인을 위한 국가 편애의 최종 형태라는 수식어와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무력과 재력을 지녔다고 해서 현대판 왕궁, 신촌궁이라 불리는 내 집에 수십 대의 고급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선다.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생일 파티에 시간을 맞춰 줄줄이 정원으로 입장하는 초호화 세단들과 저택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그 모습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기자와 방송사 직원을 보고 있으니 내 영향력이 새삼 장난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생일 파티에 각국의 대사들이 모이고 그들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찍으면서 생방송으로 뉴스를 내보내는 방송국 기자들이라니.
잔디만 깔려서 휑하니 넓기만 하던 정원에는 온갖 조경수와 야생화꽃이 심어져 마치 국립 공원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인조 공원이 조성되어있었는데, 호화 차량들은 안내 표지판을 따라 정원 한 쪽에 마련된 임시 주차장에 들어서며 고용인들의 인도에 따라 차례대로 주차하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자국에서 영향력이 강하다는 귀빈들과 그들의 파트너는 숲을 연상케 하는 주차장을 돌아보며 놀랍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눈다.
-세상에. 이게 정말 개인 소유의 저택에 딸린 정원이란 말인가요?-
-한국에서 가장 넓고 큰 정원이라더군요. 이 정도라면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용인의 주의를 들었습니까? 함부로 숲속에 들어갔다간 회장이 사육하는 이형종을 만나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절대 길을 벗어나지 말라더군요.-
-들었습니다. 세계 최고 레이드 팀의 주인이자 최강의 레이더다운 스케일 아닙니까. 정원에 이형종을 풀어 키우고 거기다 완벽히 굴복시키기까지 하다니.-
-그 이형종 들을 스케일러라고 한다지요? 듣자 하니 종종 스케일러간의 박진감 넘치는 격투가 벌어진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저도 한번 구경하고 싶어 그랑 블루에 요청을 해봤었지만 아쉽게도 관람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정말 아쉬운 일이지요.-
초대된 귀빈들이 안면이 있는 이들과 함께 석괴로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를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공간 지각으로 느껴진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가?-
봄으로 넘어가는 포근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고 길 좌우로 노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길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답다.
멀리서 맑은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한 중년 여성은 감탄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집 정원에 이렇게 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을 수 있다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이윽고 거대한 저택에 도착한 귀빈들은 저택의 규모에 한 번 놀라고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프랑을 비롯한 연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또 한 번 놀라며 안면이 있는 연인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연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드레스 복장으로 귀빈들을 맞이하며 귀빈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아 한켠에 차곡차곡 쌓으며 메이드를 통해 저택 뒤편의 연회장으로 들여보냈다.
하하 호호 웃으며 분위기 좋게 연회장으로 향하는 귀빈들이나 만면에 미소 띤 얼굴로 이들을 맞이하는 연인들과 누나를 보니 입이 삐죽 나올 거 같다.
오늘의 주인공인 나는 4층 거실에 짱박혀있고 연인들만 저렇게 손님을 맞이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지만 연회 시작 전까지 나오지도 말라니, 너무한 거 아냐?”
- 우웅? 너무한 거야?
“…너무한 거겠지?”
하얀색 드레스로 공주님처럼 꾸미고 있는 미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각종 간식에 행복해하다가 내 말을 듣고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그마한 암흑이도 손목과 목에 금색 수실로 예쁘게 리본을 매고 몸도 미호처럼 드레스 형태를 잡은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미호와 함께 간식을 냠냠 먹고 있다가 히죽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쥔님은 어리광쟁이.=
“아니거든?”
요즘 들어 부쩍 인간의 감정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해서 그런지 암흑이는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며 건방지게도 히죽거린다. 그게 묘하게 밉상이라서 녀석을 집어올려 녀석을 액션 피규어처럼 가지고 놀자 가느다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내 마수魔手에 안간힘을 다해 저항한다.
낑낑거리면서 내 손가락을 밀어내려는 암흑이의 꼼질거림을 느끼면서 인큐베이터 쪽을 보니 히아리드는 천사처럼 단장한 모습으로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있는 알케마의 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알케마의 알 속 멍울은 점점 커져가며 무언가 알 수 없는 형태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히아리드도 그게 느껴지는 걸까?
무릎을 굽히고 앉은 히아리드의 뒤태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쓱 훑어보고 내 허벅지 위에 놓여있는 B4 크기의 종이로 신경을 돌렸다.
종이에는 큼직하고 유려한 글씨로 연설문이 적혀있었는데 영은이와 누나가 밤에 머릴 맞대고 고민하며 만들어준 거다.
내용은 연인들이 귀빈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만들어두면 내가 미호와 히아리드를 데리고 가서 기습적으로 발표한다는 계획이었다.
다들 자기 나라에서 힘 좀 쓰고 머리도 좋은 사람들이니 대충 이러이러할 거다, 하고 운만 떼주면 알아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테니 일부러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줄 필요는 없고 간략한 흐름만 잡아주면 된다는 설명이 뒷장에 적혀있었다.
끊임없이 정원으로 들어오던 귀빈들의 차량도 어느새 끊기고 저택 뒤편 잔디공원에 준비된 연회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니 연인들도 계획대로 연회장으로 이동해 귀빈들을 상대하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한다.
귀빈들은 연인들의 밝지만 조금 굳으면서도 긴장한 모습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거라는 예감을 받는지 연인들이 지나가고 나면 살짝 굳은 얼굴로 주변 사람들과 조용히 속삭인다.
“자. 저쪽 준비가 대충 다 돼가는 거 같으니 우리도 나가자.”
- 웅?! 아, 앙댕~! 나 아직 다 안머거떠!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하니 입안 가득 케이크를 물고 있던 미호가 포크를 들고 허우적,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어리석기는. 밖에 나가면 이것들보다 더 맛난 거 많을 건뎅.=
- !!
미호는 암흑이의 핀잔에 깨달음을 얻고서도 간식을 남기고 가는 건 싫은지 1/3이나 남은 딸기 생크림 홀케이크를 손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놀리며 순식간에 퍼먹더니 입가에 생크림을 가득 묻히고 후다닥 달려왔다.
=아이고. 돼지가 누나 하겠당.=
기막혀하는 암흑이를 어깨 위로 올리고 티슈로 입가를 미호의 입가를 닦아준 뒤 문을 열자 히아리드도 조용한 걸음으로 뒤따라 걸어온다.
문밖으로 나서니 안내 담당 메이드 누나가 날 데리러 오는 게 보였다.
이제 시작이다.
곱게 깔린 자갈길을 따라 야외 연회장이 준비된 정원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축구장만 한 넓은 야외 연회장에는 수십 개의 테이블이 눈부시게 흰 테이블보가 씌워진 채 아치를 그리며 놓여져있고 그 위에는 온갖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스탠딩 파티로 이루어졌지만, 몸이 불편하거나 노인들을 위해 한쪽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장소도 마련해놨고 연회장 구석에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악단이 교향곡을 연주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수제 흑맥주에서부터 한 병에 수백만 원짜리 양주와 와인같은 각종 알콜이 쌓여있는 칵테일바도 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술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이지만 다들 술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정갈하면서도 품위 있는 메이드복으로 바꿔입은 메이드 누나들이 칵테일 잔과 한입 크기의 쿠키와 크래커, 카나페가 올려진 쟁받을 받치고 귀빈들 사이를 움직이고 있고 조리장에서 연회장으로 음식을 나르는 가정부들 하며 귀빈들이 불편한 점은 없는지 편의를 봐주는 집사들도 많이 돌아다닌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있으니 각자가 한마디씩만 해도 와글와글거리거나 시끌벅적한 소음이 날 텐데 배경에 깔아둔 음악이 선명히 들릴 정도로 다들 예의를 지키는 모습에서 오늘 파티의 의미를 생각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멀리서 본 연회장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누나와 연인들이 열심히 분위기를 조성한 덕분이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말소리가 뚝 멈추고 악단이 연주 중인 교향곡만 울려 퍼진다. 귀빈들이 날 발견한 거 같다.
나 혼자 이동하고 있었다면 손님들이 날 발견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을 테지만 양옆으로 미호와 히아리드를 대동하고 움직이고 있으니 둘이 발산하는 강한 존재감 덕분에 귀빈들이 날 순식간에 발견한 거다.
영은이는 내게 특별한 표정 관리나 행동에 주의점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연회장에서는 어떤 행동을 보여도 괜찮지만 한 가지, 말투는 정중함을 꾸며달라고 부탁했다.
그랬기에 별다른 감정을 떠올리지 않고 자갈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음악 소리와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들릴 정도로 사람들이 날 지켜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흐음. 영은이를 찾아갈지 아니면 손님들 중에 무작위로 한 명한테 말을 걸지 고민하는 데 익숙한 위상력의 여성이 공간 지각에 걸렸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고운 자태의 보브컷 여성, 능력자 연합 한국 총괄 지부장인 윤해화다. 부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서울까지 날 보러 올라온 건가?
잘됐다 싶어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손님들에게 너무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인상이 박히면 안 좋을 테니까.
내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걸 알아챘는지 윤해화 아줌마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칵테일 잔을 두 손으로 잡고 침을 꼴깍 삼켰다.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나와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예. 저야 무탈하지요. 하지만 회장께서는 몸이 약간 안 좋아지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아요. 그냥… 인간에게 조금 실망한 것 뿐이니까요.”
말하면서 옅게 웃으니 해화 아줌마는 물론이고 알게 모르게 이쪽으로 관심을 주던 외국인들도 흠칫하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어? 하는 간단한 놀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움찔하면서 마음을 쓰는 그런 느낌이다.
놀란 것도 잠시였고 해화 아줌마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곱게 허리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늦었지만 능력자 연합을 대표해서 회장님의 생일을 축하드려요. 생일 선물을 준비했지만 서하 경의 능력에 비하면 별것 아닌 선물인 거 같아 조금 창피하네요. 모자란 분 만큼은 마음을 담았으니 모쪼록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택 입구에서 연인들이 접대하며 귀빈들한테 뭔가를 자꾸 받더니 그게 전부 내 생일 선물이었나보다.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으면 언제나 즐겁죠. 감사합니다.”
“어머. 너무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텐데.”
곤란한 미소를 짓는 해화 아줌마한테 나도 희미한 웃음으로 답해주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영은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이 가는 방향을 같이 바라본 해화 아줌마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반걸음 옆으로 비켜준다.
“편히 쉬다 가세요. 전 대통령님한테 볼일이 있어서.”
“네. 회장님께서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가볍게 목례를 해주니 해화 아줌마도 단아한 파티용 드레스 자락의 한쪽을 잡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조금 전만 해도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사라졌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자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살짝 목례를 한다.
해화 아줌마랑 대화하면서도 일부러 표정을 자제했더니 그 효과가 있는듯하다.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아주면서 오른쪽 어깨가 훤히 노출된 진줏빛 드레스를 예쁘게 입은 영은이에게 다가가니 영은이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내게 시선을 주며 대화가 잠시 중단된다.
네 명 모두 비싼 수제 양복을 입은 거 하며 소매의 커프스나 손목시계를 보니 꽤 부유한 사람들인 것 같다. 옷에 사람이 묻힌 느낌이 아니라 옷이 맵시를 살려주는 듯한 모습이 저런 고급 정장을 자주 입어본 듯한 태가 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오는데, 남자는 중년을 넘어서는 나이고 다른 한 명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색기가 넘치는 여자다.
그러니까… 영국 외교부 장관과 러시아 외무부 장관이었나?
여자는 약간 붉은 기가 감도는 롱웨이브 펌에 반지며 팔찌며 목걸이에 귀걸이에 어마어마한 장신구를 끼고 있어 좀 허영기가 보이는 거 같다. 거기다 핏빛처럼 강렬한 붉은 빛 정장에는 황금색 브로치가 달려있어 보기만 해도 온몸에서 색기를 줄줄 흘린다.
그런 그들 역시 내 안색을 확인하더니 살짝 안색이 굳어졌지만 금방 웃는 얼굴로 돌아간다. 무표정이 꽤 효과가 좋은데?
그들의 반응에 영은이는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날 보더니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하 군. 나왔군요.”
서하 군? 아, 여긴 사석이라고 그렇게 부르는 건가.
“조금 늦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다고는 했지만, 영은이는 일부러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만큼 긴장한 티를 내며 대답했다.
영은이의 모습에 네 명 모두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는데, 공간 지각이 아니었으면 알 수도 없을 만큼 표정관리가 뛰어나다. 외교 대사 자리를 돈놀이로 따먹은 사람들은 아닌 거 같다.
과연 한 나라의 외교부 수장들이군. 영은이는 이들과 대화를 편히 나누라는 듯이 살짝 자리를 비키며 몸으로 가리고 있던 사람들을 내 앞에 드러낸다.
그러자 영국 외교부 장관… 아, 이름 생각났다. 필립 하몬스였지? 필립 하몬스가 앞으로 나서며 기쁘다는 듯이 말한다.
“솔직히 이 파티의 주인공께서 언제 등장하실지 일각이 여삼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화상 대화 이후로 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영국 외교부의 필립 하몬스입니다.”
“어마~. 하몬스 경께서는 영국 신사이시면서 레이디 퍼스트도 안 지켜주시나요?”
필립 하몬스가 먼저 나서자 그에게 모습이 가려진 붉은 정장의 여성은 약간 뾰족한 말투로 하몬스 장관을 힐난하더니 그의 옆으로 돌아 나와서 날 보며 환한 미소로 두 팔을 살짝 벌린다.
뭐? 안아달라고? 내가 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니 러시아 외무부 장관으로 알고 있는 여성은 약간 민망한 듯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삐죽이더니 다시 환히 웃으면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다.
“경애하길 마지않는 그랑 블루의 회장님과 이제야 대면하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러시아 외무부의 셀로비치 빅토리아 라프로브예요. 잊지 않으셨지요?”
그리고는 모델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살짝 윙크를 보내는데, 그순간 영은이가 보이지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푸는걸 공간 지각으로 캐치했다.
저 여잔 왜 자꾸 영은이를 도발하나 모르겠네.
“그때 잠깐 뵀었지만 두 분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사실 저는 잘 지내지 못했답니다. 푸친 각하께서 정 회장님을 직접 보고 싶다시며 어찌나 저를 닦달하시는지~.”
그냥 예의상 해준 말에 셀로 비치 장관은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는데 셀로 비치 장관 뒤로 필립 장관이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하는 게 보인다.
셀로 비치 장관의 말은 그냥 웃음으로 받아넘겨 준 뒤 얼굴에 미소를 거두고 필립 하몬스 장관에게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걸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저번 영국의 빠른 행동에는 깊게 감명받았습니다. 그 어떤 나라보다 먼저 나서서 일본의 행동을 비판하시다니. 많이 가진 자들일수록 온갖 이권이 호박 덩굴처럼 엮여서 쉽게 움직일 수 없다던데 영국 총리님은 일본의 패악질을 직접 발표하기까지 하셨지요? 물론 전부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내 이야기에 옆으로 밀려난 셀로비치 장관은 물론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자들까지 다섯이 일제히 웃는 표정 그대로 얼어버렸다.
……?
갑자기 굳어버린 그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영은이를 돌아보니 영은이도 '나 많이 긴장하고 있어요.' 하고 연기라곤 생각이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나는 그냥 칭찬하는 의미에서 한 말인데?
뭐, 저들이 어떻게 오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긴장하면 할수록 나한테 해가 될건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 작품 후기 ============================
영국: 시발, 너무 나댄건가;;
미국: 어;; 난 힘껏 디스했는데...;;; 나 좆된거임;;?
불곰: ㅋㅋㅋ 몸 사리길 잘했닼ㅋㅋㅋ
중국: 이 남자... 탐난다♡
오해하는 세 나라와 딴 생각 하는 중국
그리고 문향 씨는 사랑 아닙니까?(소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