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6 눈 밭 속의 던전 =========================================================================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연인들과 미호의 몸은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럽고… 하여튼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부드러워 그녀들의 몸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누워있었더니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하고 날 서 있던 정신이 치유되는 거 같다.
프랑과 화연이한테서는 막 씻은 물기에 젖은 싱그러운 향기가, 미호에게서는 어린아이 특유의 젖내 같은 게 체취와 함께 흘러나와 기분 좋은 냄새를 텐트에 가득하게 채우고 있었다.
미호가 있어 연인들과 찐한 사랑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체취와 체온에 그저 나란히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왼쪽에는 미호를, 오른쪽에는 프랑을, 화연이는 미호를 사이에 두고 나와 나란히 누워있으니 따스함과 포근함이 느껴졌지만 반대로 정신은 말똥말똥해져 간다.
문어처럼 달라 붙어오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보니 녀석은 광속으로 꿈나라를 향해 떠나버렸고 그녀들도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다 사르르 잠에 빠져들었는데 난 왜 이러나 모르겠다. 평소라면 이미 잠들었을 시간인데 말야.
경계 경비 중인 대원의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5번째로 지나갔을 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를 나왔다. 잠도 안 오는데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누워있는 건 고역이야.
빠져나오는 중간에 미호가 옹알이를 하긴 했지만 연인들을 깨우지 않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잠기운을 좀 불러볼까 싶어 잠시동안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경계근무 중인 대원들과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건 잠기운을 부르는 게 아니라 쫓는 거 같지만… 뭐 어때.
그런데 무언가가 자꾸 내 신경을 잡아 끄는 거 같다.
텐트 입구에 서서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주둔지를 둘러보는데 획득품을 모아둔 곳에 시선이 지나가는 순간 둥그런 무언가가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
골렘에게서 뽑아낸 골렘의 핵. 핵에게 원인 모를 이끌림을 느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다가가 골렘의 핵을 어루만져보았다.
정말 완벽하리만치 원을 그리는 골렘의 핵은 몸체를 이루는 재질과 똑같은 검붉은 색이다. 그런 핵의 표면에는 무엇인가로 태운듯한 자국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마냥 엉망으로 그려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별로 신경을 안 썼었는데 지금은 이게 이상할 만치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입자가 고운 모래를 만지는듯한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골렘의 핵 표면을 어루만지는데, 이게 어째서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걸까 궁리해봤지만… 아무래도 이유라면 화연이가 말했던 거랑 같은 이유겠지.
내 성격이 그렇게 상처 입기 쉬운 세심하고 여성스러운 성격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피식 웃으며 텐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프랑의 풍만한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어찌어찌 잠들 수 있겠지.
그 순간 골렘의 핵에서 미약한 진동이 흘러나왔다.
“……?”
공기 중으로, 땅의 표면으로 떨림이 전달되는 느낌에 의아해하면서 뒤돌아서서 두 개의 골렘의 핵을 다시 바라봤다.
방금 진동은 꼭 가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골렘의 핵이라는 건 정확하게 어떤 거지? 핵에 골렘의 의지 같은 게 깃들어있는 건가? 있다고 해도 왜 날 잡은 거지? 난 놈들을 부순 장본인인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쭉 핵을 지켜봤지만 진동 같은 건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화연이한테 골렘의 핵에 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는데.
우웅.
또다시 떨림이 퍼져 나온다.
“…뭐야. 너 살아있는 거냐?”
핵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아까의 떨림은 착각이었다는 듯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 키만 한 둥그런 핵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려보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살펴봤지만 특이점 같은 건 안 보인다. 그래서 다시 몸을 돌리니 또다시 우웅하고 울어서 내 발을 잡았다.
“야. 날 불렀으면 뭔가 성의라던가 행동이라던 가를 보이란 말이야. 돌아가려 할 때만 부르지 말고.”
…….
와, 답답하네.
돌아가려 하면 웅웅거리면서 내 발길을 잡고 다가가면 아무 반응도 없고. 간 보기 당하는 어장 속의 물고기가 된 거 같은 느낌에 살짝 짜증이 나려고 한다.
골렘에 대해서 누호디한테 물어볼까…? 텐트 내부 한구석에 세워진 화연이의 창을 떠올리며 지금 가져와 볼까 고민하다 보니 누호디가 환장하는 한 가지가 생각났다.
“…….”
시도해도 되려나? 내 TP가 묻었다고 재생하거나 파워업해서 날뛰는 거 아냐? 주변을 쓱 살펴보면서 경계 근무 중인 대원들과 비번인 대원들이 자는 텐트를 살펴보다가 골렘의 핵만 챙겨서 공간 도약으로 하늘 높이 도약했다.
지상에서 1km 높이라면 부활해서 날뛴다고 해도 괜찮겠지. 푸른색 공간의 벽을 넓게 펼쳐놓고 그 위에 핵을 내려놓은 뒤 주변을 살펴봤다.
발밑은 온통 순백색으로 물들어있고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달빛 한 점 없는 것이 어두컴컴하다.
그런 하늘 한복판에 놓인 사람보다 약간 더 큰 검붉은 색 동그란 구슬을 보니 기분이 조금 으스스해졌지만 침을 꼴깍 삼키고 마나 시브를 돌려 신체를 강화했다.
어느 쪽 골렘의 핵에 먼저 TP를 주입하지?
…이 경우에는 역시 레이디 퍼스트지. 골렘한테 성별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외형은 암컷이었으니까.
조심스레 여성형 골렘의 핵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TP를 조금씩 주입하니 골렘의 핵의 표면에 그려져 있던 시커먼 탄 자국 같던 선이 푸른 빛에 침식되기 시작한다.
구름이 잔뜩 껴서 달빛 별빛도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 반짝이는 푸른색 선이 둥글게 그려지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신비였다.
TP 주입을 중단하고 잠시 상황을 살펴봤더니 차츰차츰 밝아지던 푸른 선이 다시 어두워져 간다.
“…갈 데까지 가보자.”
한 번에 왕창 집어넣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조금씩 계속해서 주입해가니 골렘의 핵 표면에는 어느샌가 신비로운 푸른빛을 뿌리는 선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푸른 빛이 뿌려지며 내 몸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TP를 집어넣고 있으려니 골렘의 핵에 떨림이 생겨난다.
멈출까 계속할까 극심하게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TP를 꾸준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입한 TP의 양이 10만이 넘었을 무렵 골렘의 핵이 갑자기 붕 하고 떠오르더니 찬란한 푸른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 바로 공간의 벽으로 지워버리려 준비하고 있는데 골렘의 핵을 중심으로 푸른색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안개처럼 뭉게뭉게 흘러나오며 한데 뭉쳐져 간다.
…저건 여자 가슴? 가슴이 만들어지고 잘록한 허리가 만들어지더니 앙증맞게 생긴 배꼽과 자궁을 보호하기 위해 살짝 튀어나온 아랫배. 그리고 이어지는 한 줄기 골짜기도 만들어진다.
그 밑으로 다리가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 가슴 위쪽으로도 어깨가 생겨나더니 말랑말랑해 보이는 겨드랑이 살이 생겨나고 부드러워 보이는 팔꿈치와 매끈한 팔뚝, 가늘고 고운 손가락도 만들어졌다.
몸통과 사지가 생겨난 뒤에서야 쇄골 위로 목이 생겨나더니 차례대로 턱, 입, 코, 눈과 귀와, 이마. 정수리가 만들어져가는데.
몸매는 100점 만점에 99점을 받을 멋진 몸매인데 얼굴은 좀 많이 평범하게 생겼다. 그래도 여성형 골렘이 맞나 싶을 만큼 크나큰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악마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무난하게 생긴 게 특이하다.
크기는 메오 아지토스의 본을 딴 골 렘보다 좀 작아 5m 정도인 거 같다.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니 위상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골렘의 핵은 내부 장기를 기준으로 잡았을 때 심장이 있어야 할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딜가도 볼 수 있을 평범한 얼굴의 안개… 골렘은 공중에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으니 눈을 감고 있던 안개골렘은 눈을 스르륵 뜨는데, 눈에서 시퍼런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정상 접속 감지. 구동 오류 발생.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 유기물로 인한 신체 구성 확인. 긴급 조치 기동.]
그 순간 마치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듯 묘한 거리감의 목소리가 골렘의 핵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상황 인식 오류 발생. 수정 중.]
[유기물의 구성정보 검사 중…. 검사 완료. 신체 구성 적합도 97.16% 신체 균형 재조정 중…. 재조정 완료]
[허가되지 않은 자의 구동 확인. 명령권자에게 경고 알림. 제1 명령권자 확인 중… 부재. 제2 명령권자 확인 중… 부재. 제3 명령권자 확인 중… 부재.]
어? 뭐, 뭐야? 누구한테 알린다고? 근데 다 부재不在야?
[명령권 소유자 존재확인 불가. 긴급상황 발동.]
약간 반투명한 안개 골렘은 기계적인 언어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어 중간에 끼어들 상황이 아닌 거 같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바로….
[큐브 구동자 확인. 구동자 페식스 순도 검사 중…. 99.21% 순수혈통 확인. 임시 통수권자임을 확인.]
……여자 안개 골렘은 멍하고 흐릿한 시선을 내려 날 보며 말했다. 큐브 구동 자는 날 말하는 거지? 페식스는 내가 주입한 TP인가? 그런데… 순수혈통이란 말은 뭐야?
[상황 인식 오류 수정 완료. 대체 0순위 명령권자 조정 중… 조정 완료.]
[명령권자의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이름? 내 이름을 알려달라는 이유는 뭐야? 그래도 일단 말해주자.
“정서하.”
[제 2 지역 1형 보물 수호자 에리식 정상구동 완료되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고귀한 왕족이시여.]
안개 골램의 무기질적인 여자 목소리는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상황 인식 오류 수정 완료. 대체 0순위 명령권자 조정 중… 조정 완료제 2 지역 2형 보물 수호자 카라직 정상구동 완료되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고귀한 왕족이시여.]
혹시나싶어 두 번째로 기동시킨 녀석은 에리식이라고 자칭한 여자 골렘처럼 반투명한 안개로 이루어진, 벌거벗은 남자 형태의 골렘이었다. 얼굴도 빻거나 다져진 듯한 얼굴이 아니라 나만큼이나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다.
깨어난 카라직 역시 에리식의 행동과 한치도 틀리지 않고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날 순혈왕족이라고 불렀다.
저 말이 뜻하는 건 뭘까. 저놈들은 메오 아지토스가 만들었으리라 짐작되는 골렘이다. 내용은 간단히 말했을 때, 내 능력이 메오 아지토스들과 비슷하다거나 내가 마나 시브로 운용하는 위상력이 메오 아지토스들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놈과 똑같단 말이 아닐까.
99.21%라면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왠지 입맛이 쓰다. 아버지는 내가 의사라는 작자의 강간을 통해서 태어났으리라 추측하셨지만 결국 그 이야기는 틀린 거였다. 나는 어머니와 메오 아지토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놈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잖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알몸의 두 안개 형태 골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단순히 내 능력이 왕족에 버금가는 능력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저놈들은 단순히 내 능력의 순도를 보고 왕족이라고 하는 거니까.”
그렇다 해도 빌어먹을 사실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그 말은 어머니를 덮친 개새끼 중에 그놈들의 왕족이 있단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 말은… 내 능력은 그놈들한테서 온 건가?
“…씨발. 내가… 놈들의 왕족이라고?”
[페식스 순도 99.21%의 순수혈통 왕족임을 확인. 단, 현 명령권 보유자는 왕족 목록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입니다. 순위권 정보 재조정을 요구합니다.]
…뭐래. 혼잣말에 멋대로 대답하는 에리식을 아니꼽게 노려보며 되물었다.
“너희를 만든 놈들이 메오 아지토스 아냐? 내가 그놈들의 왕족이라는 건 그 말이잖아?”
[메오 아지토스, 존재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단어 정보 재조정을 요구합니다.]
“아오 씨…. 널 만든 개새끼들이 푸른 피부의 악마가 아니냐고!!”
[명령권 보유자의 품위를 위하여 상스러운 단어의 사용은 자제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저 놈… 저년이랑 대화하다 보니 복장이 터질 거 같다. 사람과 대화할 정도의 의사가 있다면 좀 적당히 알아서 들어주면 안 되냐.
그러고 보니 골렘주제에 대화가 가능한 게 대단한데 다른 사실에 놀라서 그 부분은 그냥 넘거버렸네.
속에서 끓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한 단어씩 끊어가며 또박또박 말했다.
“크으으…. 널, 만든, 놈이, 푸른, 피부의, 종족들이 아니냐고.”
[검색 자료 과다. 푸른 피부의 종족은 그 숫자가 많기에 특정 단어를 지칭해주시길 요구합니다.]
“크악!!”
저 씨ㅂ…. 아오…! 확 깨부셔버릴까…!!
분노로 손이 덜덜 떨린다. 손안에 응축시킨 마나 포를 저년의 면상에 집어 던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골렘을 상대로 화내는 것도 병신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분노를 억눌렀다.
애초에 저놈은 그냥 우리 세계의 컴퓨터나 마찬가지다. 받은 질문을 주입받은 단어에 대조해서 최대한 알맞다는 판단이 내려진 대답을 해주는 프로그램.
…그렇게 나 자신을 세뇌하며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분노를 다스리느라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널 만든 종족의 이름이 뭐냐.”
[볼굴입니다.]
볼굴! 알케마가 말했던 그 단어! 그게 정식 이름이었나. 메오 아지토스는 누호디의 시대에 전해진 이름이었나 보군.
“그래. 내가 볼굴의 왕족이라는 증거는?”
[명령권 보유자의 페식스가 가진 블루어의 순도입니다.]
처음듣는 명사가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페식스는 뭐고 블루어는 뭔데?”
[페식스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원의 힘입니다. 블루어는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힘으로써 순도가 높을수록 소유 능력을 큰 폭으로 증가시켜줍니다. 볼굴의 왕족만이 순도 90% 이상의 블루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뮈르딘은 세계를 구성하는 에너지는 위상력이랬는데… 아니다, 위상력은 내가 먼저 꺼낸 말인데, 날 위해 단어를 바꿔서 이야기해준 거였나? 그럼 위상력이나 뤼아르네가 말한 스펙스나 저년이 말하는 페식스도 모두 같은 건가?
“이게 페식스라고?”
손에 TP를 뽑아내서 물어보니 [지극히 순수한 블루어의 결정체입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위상력이 페식스고 블루어는 TP가 그 의미에 가장 근접한 단어 같다.
대충 간 보기는 끝났고 대답도 꼬박꼬박 해주는 걸 알았으니 이제부터 중요한 질문을 던져봐야겠다.
“너희들의 기록은 언제부터 시작됐지?”
꽤 오랫동안 에리식에게 질문을 던졌고 대답을 들었다.
그중 중요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녀석들은 볼굴이라는 종족이 전성기일 때 만들어졌고 정말 오랜 시간을 파수꾼으로 지냈다고 했다.
[저는 카라직과 동시대에 제작되어 수많은 파수 임무를 맡았습니다. 많은 종족과의 전투에도 참여했지만, 기본 임무는 보호자였기에 지금으로부터 1725년전 몰파진의 보물창고 파수를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발견된 곳이 몰파진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녀석에게 어째서 몰파진이 망한 거냐고 물어봤다.
[몰파진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뭔소리야. 니가 있던 곳이 몰파진이라며.”
[그렇습니다.]
“그럼 망한 거 맞아. 성이고 뭣이고 하나도 없고 폐허만 남아있다고. 1700년 동안이나 지켰다며?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냐?”
[……정보갱신 완료.]
시간이 1700년이 넘게 지났는데 그게 잘도 남아있겠다고 쏘아줬는데, 조금 침묵을 가진 뒤에 대답이 나온 건 뭘 뜻하는 걸까. 그냥 단순한 단말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혹시 볼굴의 다른 도시에 대한 정보는 없어?”
[해당 자료는 1726년 전, 최상위 명령권 소유자에 의하여 삭제되었습니다.]
“애초에 그곳에 처박아놓을 생각이었구만.”
보물을 지키는 데 쓴다고 몇 가지 정보는 지운 건가 싶어 중얼거렸는데 이번 중얼거림에는 별반 대꾸하지 않는다.
“너한테 입력된 자료 중에 지도도 있냐?”
[대륙 지도가 입력되어있습니다.]
오, 지도! 지도라니! 에리식과 대화를 하다 보면 엿 먹는 기분이 종종 들어서 부숴버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안부 시길 잘했다!
그때부터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좀 잦아든 상태라 눈보라까진 아니었지만,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문득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출생의 비밀 따위가 없었다면 그냥 따뜻한 데서 내 능력으로 잔뜩 벌어들인 돈을 연인들과 함께 펑펑 쓰고 사치나 부리면서 살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어머니를 죽게 한 개새끼들은 용서할 수 없지.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땅으로 내려와 눈을 몽땅 치운 다음 맨땅에 에리식에게 니가 기억하고 있는 지도를 땅에 그려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 접수.]
에리식은 카라직과 함께 공중을 떠다니며 손끝에서 시퍼런 레이저 같은 걸 쏘아내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지형이 그려질수록 갑갑함이 두 배로 쌓이기 시작한다.
“씨발. 야, 때려쳐.”
[때릴 대상을 지정해 주십….]
“그만두라고!!”
[명령을 취소합니다.]
아씨. 저거 진짜 나 놀린다고 저러는 거 아니지?
왠지 엿을 무진장 먹는 거 같아 분노가 끓는 점을 넘어 폭발점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씩씩거리면서 에리식과 카라직이 그리다 만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이건 진짜… 중세시대 지도도 아니고 아주 형이상학적인 모양이다. 무슨 대륙이 하나뿐인 데다 하나뿐인 대륙도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세계지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창작 지도냐?
분명 이 세계의 기본적인 지형은 현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지도랍시고 그린 걸 보니 볼굴 그 새끼들도 정확한 지리 같은 건 몰랐나 보다.
“이딴걸 지도라고 진짜….”
이빨을 부드득 갈면서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 고생길이 끝나려면 아직 멀은듯 하다.
마음에 안 드는 에리식을 노려보고 있으니 주둔지가 조금 부산스러워지며 누군가가 프랑과 화연이와 미호가 잠들어있는 텐트 앞에서며 화연이를 부르는 게 공간 지각에 감지됐다.
미호는 꿈쩍도 안 하고 프랑과 화연이는 그 부름에 눈을 뜨더니, 내가 자리에 없는 걸 알고 벌떡 일어나서는 텐트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너희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있냐?”
[최우선 상황은 보물의 수호. 차선은 침입자의 제거, 말선은 볼굴을 제외한 감지된 생명체의 말소입니다.]
이대로 주둔지에 데려갔다간 큰일 나겠군.
“너희들한테 내려진 명령은 수정할 수 있어?”
[0순위 명령권 보유자로써 새 명령 순위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안된다고 했으면 그냥 부숴버렸을 텐데. 살짝 아쉬워하면서 이놈들이 대원들을 공격하지 못하게끔 명령을 변경했다.
“최우선 명령은 내가 지시할 때 외에는 어떤 생명체도 공격하지 마. 차선은 내 명령만 들어. 그 외의 명령은 모두 삭제.”
[최우선 명령이 갱신되었습니다. 차선 명령이 갱신되었습니다. 기타 명령이 삭제되었습니다.]
“아참. 그리고 나 외에 다른 명령권자 대기 순위 있지? 그것도 모두 지워버리고 명령권은 나만 갖고 있게 해놔.”
[명령권 대기열이 삭제되었습니다. 현재 명령권 보유자는 0순위, 왕족, 정서하 님 뿐입니다. 수정과 등록을 원하신다면 명령권 보유자 등록을 하여주십시오.]
왕족이라는 말은 듣기 싫은데.
녀석에게 왕족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더니 [접수.] 라는 말로 알았다는 표현을 해왔다. 카라직한테도 똑같은 세팅을 해두고 두 녀석과 함께 주둔지로 공간 도약을 펼쳤다.
이번에 주운 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쓸데는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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빻은 얼굴을 평범하게 만들어주는 기적의 치료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