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9 눈 밭 속의 던전 =========================================================================
시무룩해져 있던 미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둔지를 빠져나온 뒤 하나뿐인 출입구를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마저 막아버리고 눈보라 속의 행군을 시작하자 미호는 내 손을 맞잡고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옮기며 일곱 개의 꼬리를 사정없이 나풀거렸다.
“그러고 보니 미호는 한때 북극여우였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눈이 좋아?”
- 응. 추운 건 별론데 눈은 좋아.
이제는 신고 있는 설피가 어색하지 않은 동작으로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지만, 프랑과 화연이는 복잡한 표정으로 미호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따라온다.
-미호와 서하 사이를 좀 떼어놓는 게 좋을까요?-
-강제적으로 떼어놓는 방침을 취한다면 금방 눈치채고 반항할 거 같습니다만… 미호의 서하에 대한 감정은 새끼 새가 어미 새를 보는듯한 평범한 감정이 아닌 거 같습니다. 프랑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저도 비슷한 의견이에요. 거기에 서하의 TP는… 미호에게 있어 임프린팅보다 더한 현상을 일으킨 듯 보여요.-
-그 현상은… 사랑이겠군요.-
-정말로요….-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귓가를 윙윙거리는 상황이지만, 미호의 귀에 대화가 들어갈세라 프랑과 화연이는 독순술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걸 엿보고 있으려니 대화의 방향이 점점 이상해져 간다?
-서하는 정말 예쁘고 귀여운 생물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처음 미호를 발견했을 때도 자기 손을 물고 있는 미호를 어찌 못하더니 나중에는 연구소에서 데려나오질 않나!-
-그때 말이군요. 서하는 어렸을 적에도 버려진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가 보이면 대책 없이 데려가서는 키우겠다고 떼를 쓰다 아버님께 혼나곤 했었지요.-
-아휴. 그래서 미호나 히아리드나 암흑이를 막 줍는 걸까요? 이러다가 새끼 드래곤도 주워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 드래곤이 알고 보니 암컷이어서, 서하의 TP를 먹고 진화했더니 인간 여자 형태가 되어 달라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부정할 수 없네요.-
부정하라고! 부정하란 말야! 아무리 나라지만 그 부분에서는 좀 부정해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연인들 사이에 내 평판이 마구 떨어지는 거 같다! 이거 뭔가 수를 써야 해!!
지금 바로 뒤돌아보면서 정정해줄까? 아냐, 내 입으로 정정하는 건 너무 구차해 보일 거야. 어떻게 행동으로 보여야 평판이 바뀌지?
격하게 추락하는 내 평판에 눈물이 날 것처럼 눈 밑이 시큰거리지만, 꾹 눌러 참으면서 지하 던전 입구가 파묻혀있는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눈보라가 거칠어진다고 느껴질 즈음 던전의 입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던전은 수 미터 두께의 눈에 파묻혀있었는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눈을 치워버려야 한다.
이번에 미호를 데려온 이유를 실천하기 위해 미호에게 바람으로 이 주변의 눈을 모두 날려버리라고 시켰다.
- 응!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난다는 듯이 거대한 불을 일으키길래 그게 아니라 바람으로 날리라고 정정시켜줬다. 불로 눈을 증발시켜버리면 남아있는 지열에 내리는 눈이 녹아서 온통 빙판이 되어버릴 테니까.
두 손을 하늘로 쭉 뻗어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미호는 근방에 4m 가까이 쌓인 눈만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활약을 선보였고 땅의 먼지나 흙은 한 톨도 날리지 않는 신기에 가까운 컨트롤로 대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에헴!
콧대를 세우고 우쭐거리는 미호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준 뒤에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박윤호 팀장에게 말했다.
“발밑에 통로가 있는데, 바로 구멍을 뚫을까요?”
발밑에 통로가 있단 말을 해주자 박윤호 팀장은 흠칫 놀라더니 공간의 벽으로 통로를 만들려는 나를 황급히 제지하며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밀폐된 공간에 통로를 만들면 길이 생기는 그 순간 내부에 고여있던 유독가스가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던전 내부의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방도가 없고 자칫 잘못하면 기압의 차이로 인한 대류 현상으로 던전 안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으니 멀리서 길을 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죠.”
“미호 양은 회장님께서 길을 만들면 내부로 공기를 밀어 넣어주시겠습니까?
- 알았어!
옆에 서 있던 화연이는 곧 대원들을 뒤로 물리기 시작하는데, 좀 멀리 떨어지니 눈보라에 가려져 사람들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호박색 공간의 벽을 쳐서 눈보라를 차단해버리니 내부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눈들이 나풀거리며 바닥에 쌓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연인들과 대원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호박색 공간의 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날 돌아봤다.
옆에 서 있는 박윤호 팀장을 보고 신호를 보낸 뒤에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원래 던전의 입구였을 법한 계단의 형태로 만들….
우워어어어어어어엉…!! 쿠구그그그극! 두두두두두. 쿠구궁….!
…었는데, 구멍을 내자마자 괴물의 포효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주변 암반이 무너지며 막대한 양의 공기와 토사가 함께 입구로 떠밀려 들어간다.
그와 함께 반사작용으로 싯누런 연기 같은 게 듬뿍 뿜어져 나오는걸 보고 미호에게 누런 연기를 모두 하늘에 쳐져 있는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날려버리도록 시켰다.
고오오오오….
주변을 뿌옇게 물들여가던 누런 연기가 미호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공간의 벽에 분해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윤호 팀장은 곧 무너져내린 지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흠. 지반이 내압에 상당히 강했군요. 통로가 생기면서 생겨난 기체의 평형 이동 현상 때문에 크레이터 붕괴까지 일어나다니.”
“음. 내부가 좀… 공기가 밀려들고 진동 때문에 망가진 게 보이네요.”
“별수 없잖습니까. 여기가 고고학적 가치가 있어 문화재처럼 보존해야 할 장소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하.”
글쎄, 역사학적으로는 가치가 있지 않으려나?
지반이 무너져내리자 미호는 몸 주변에 바람으로 꼼꼼히 둘러싼 채 지름 20m가량이 동그랗게 무너져내린 곳 근처를 기웃거리며 바람을 밀어 넣을 구멍을 찾았다.
내가 만든 구멍은 무너진 흙과 바위, 토사에 다시 막혀버린 상태여서 공간의 벽을 한 번 더 쳐서 잔해를 지워 통로를 넓혀주자 그곳에다가 시킨 대로 바람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공간 지각으로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살펴보는데, 진공 상태로 보관되던 물품에 공기가 닿으니 역시 급격한 산화 현상이 발생한다.
무기고나 방어구 창고에는 레어급으로 분류될법한 희미한 위상력을 지닌 아이템들도 몇 개 있었는데 예외 없이 부식되어 공기의 움직임에 잘게 부스러져버리고 남은 건 보물 창고 안의 보석이나 금과 은 같은 귀금속들뿐이다.
“에이….”
완전히 못쓰게 망가져 버린 장비들을 보며 투덜거리니 박윤호 팀장이 왜 그러시냐고 물어본다.
“무기랑 방어구 창고에 레어급은 되어 보이는 아이템이 있었는데 죄다 부식됐어요. 완전히 부스러져버려 복구 캐비닛으로도 복구를 못 하겠는데요.”
“으아. 그건 아쉽네요.”
둘이서 망가진 무구들을 아쉬워하고 있으니 프랑과 화연이가 대원들을 이끌고 다가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길래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니 그녀들도 조금 아쉬워했다.
처음에는 미호가 바람을 통로로 밀어 넣자 반대급부로 눈에 띌 정도로 싯누런 연기가 치솟아 올라왔었는데 그게 30분쯤 지나자 눈에 띌 만큼 옅어지더니 1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는 연기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저것도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분해가 되던데… 가스가 차있는 곳만 확인할 수 있으면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처리할 수 있을 텐데 공간 지각에는 그냥 공기나 가스나 구분이 안 가서 원.
…그냥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다 채워버리면 안 될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이 눈에 보일 만큼 자욱한 연기가 대충 걷혀나가니 박윤호 팀장이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슬슬 진입해도 될 거 같군요.”
그의 손에는 프리저브 마스크라고 불리는 해골 형태의 마스크가 들려있었는데, 그걸 머리에 뒤집어쓰니 피부가 드러난 곳이 한 군데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특이한 형태의 방한복인가 싶었는데 손에도 얇고 탄력 넘치는 장갑이 소매와 일체화되어있었고 목과 프리저브 마스크도 이음새 없이 딱 붙어버려 이제서야 특수 환경 작업용 슈트라는 걸 알게 됐다.
마스크가 정상 작동하는지 체크한 박윤호 팀장은 나와 화연이를 돌아보며 손을 들어 경례를 올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저렇게 자기 할 일이 생겼다고 좋아하는데 일감을 뺏기도 그렇고, 그냥 나중에 대충 탐사가 끝나면 나 혼자 와서 공간의 벽으로 처리하고 살펴봐야겠다. 그동안 쉬지 뭐.
박윤호 팀장은 빠르고 날랜 움직임으로 구멍 안으로 사라졌는데, 미호는 구멍과 날 번갈아 보더니 빠르게 내 쪽으로 날아와 내 품에 안겨 왔다.
- 켁켁! 아우. 목따가워.
“밀폐가 잘 안된 거니?”
기침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미호에게 프랑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서 물어보자 혼내려고 다가온 건가 싶은 미호가 제풀에 놀라며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으우?! 아냐! 연기가 더는 나오지 않길래 바람 막을 풀었는데 풀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던 거야! 그 전에는 완벽해써!
난 기침 같은 거 안 했다는 다부진 표정으로 프랑을 바라보는 미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을 해주었다.
“잘했어. 많이 도움 되는걸?”
- 진짜? 히히.
던전 내부에 정말 유령 타입의 이형종이 있을지 의문이지만 없다면 전투 경험 대신 이런 잡다한 경험을 시켜주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유독가스를 대비 없이 들이마셔서 그런지 계속 켈룩콜록거리길래 힐링 터치로 녀석의 코와 목을 어루만져주니 눈을 감고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내 손길을 즐기기 시작했다.
대략 차 한잔을 마실 시간 동안 박윤호 팀장은 거침없이 물 흐르는 듯 유연한 모습으로 입구 근처의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동그랗고 하얀 막대기를 꺼내며 휘휘 젓더니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나 싶었는데 금방 돌아 나와버린다.
우리가 있는 곳에 되돌아온 박윤호 팀장은 3팀 팀원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물로 씻어달라 하고는 우리에게 다가와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
“푸후. 이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군요.”
“뭐죠?”
“좋은 소식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오염된 공기가 없을 거 같다는 겁니다. 나쁜 소식은 오염된 공기가 공기보다 비중이 가벼운지 위쪽에 모두 몰려 있어서… 이대로는 진입이 불가능 할 거 같습니다.”
“그럼 미호와 함께 바람 능력자를 투입해야겠군.”
일부러 나서지 않고 있었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화연이는 곧장 뒤돌아보며 두 사람을 부르는데, 방한복을 껴입어 남녀의 구분이 되지 않는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선다.
“두 사람은 미호와 함께 던전 내부의 오염된 공기 배출 작업을 시작합니다. 남은 사람들은 이곳에 임시 진지 구축 작업을 시작하세요.”
“예!” “네!”
화연이가 명령을 내리는 사이 박윤호 팀장은 미호에게 가까이 가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호 양? 내려가면 제가 부탁할 때 바람으로 가늘게 파이프를 만들듯이 만들어서 바깥으로 배출해줄 수 있을까요? 이런 모양으로 말입니다.”
손짓으로 이상한 꽈배기 모양을 그리는 박윤호 팀장을 빤히 바라보던 미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만 하면 돼?
“예. 같이 해야 할 작업은 그겁니다.”
- 우웅… 알았어.
미호는 '들어줘야해?' 하는 눈빛으로 날 돌아보길래 고개를 끄덕여주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박윤호 팀장은 두 명의 바람 속성 능력자와 미호를 데리고 던전으로 다시 내려갔고, 전투 3팀의 팀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챙긴 뒤에 입구 근처에 긴장된 자세로 대기하기 시작한다.
“3팀은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 진지 구축에 힘을 보태세요.”
“예? 아, 옛!”
“서하는… 알지?”
“응. 아까부터 이형종이 나타나면 손 쓰려고 하고 있었어.”
“그래.”
생활 보조 능력자 몇 명이 백팩에서 몇 가지 은색 판을 꺼내 뚝딱뚝딱하니 자그마한 휴대용 난로 같은 게 순식간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 뭔가 고체 연료 같은걸 집어넣으니 곧 휴대용 난로가 전체적으로 뜨뜻한 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윤호 팀장의 명령에 두 명의 바람 속성 능력자가 내부의 공기를 새끼줄처럼 꼬아서 입구 밖으로 날려 보내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미호도 그들을 흉내 내며 그들이 몇 곱절은 더 큰 새끼줄 형태로 만들어 빠르게 밖으로 날려 보내기 시작한다.
-우와. 미호 양은 정말 대단하군요.-
-흐흥. 이 정도는 껌이야!-
귀엽게 잘난척하는 미호를 구경하며 내부의 공기 정화 작업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미호가 귀를 쫑긋하더니 시퍼런 여우 불을 만들어내 어느 한 곳을 지져버린다.
-어엇?!-
“어?”
그 순간 시퍼런 여우 불이 있는 곳 주변에 위상력이 실체화되려 하더니 그대로 녹아내려 버렸다.
-…!!-
-헐.-
-이거 뭐야? 유령이야?-
눈을 끔뻑거리던 박윤호 팀장은 바닥에 녹아내린 뭔가 점액질 비스름한걸 손가락 끝으로 찍어서 만져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 엑토플라즘이군요. 유령 계열입니다.-
-별거 아니네.-
시큰둥한 미호의 말에 얼이 빠진 모습의 두 능력자와 박윤호 보스는 멋쩍게 웃으며 대단하다고 미호를 추켜세워준다. 그중 한 명이 어떻게 유령이 다가온 걸 눈치챘느냐고 물어봤다.
-그냥 느껴지던데?-
-그냥입니까….-
헛웃음을 지은 세 사람은 한결 든든하다는 모습으로 다시금 작업을 이어나간다.
-미호 양. 유령이 다가오면 아까처럼 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그들의 행동을 빤히 지켜보고 있으니 프랑이 뒤에서 다가오더니 궁금함이 엿보이는 얼굴로 날 들여다본다.
“서하? 왜 그러세요?”
“유령이 나타났대. 그런데 내가 감지하기도 전에 미호가 여우 불로 녹여버렸네.”
“어머. 저도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미호는 감이 뛰어난가 보네요. 이것 좀 드세요.”
“고마워.”
프랑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이면서 내부 작업자들을 계속해서 공간 지각으로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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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 두 명의 여인.
그리고 주인공의 마음대로 해결되는건 오직 쌈박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