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31화 (431/517)

00431  앞으로 한걸음.  =========================================================================

저택으로 들어서니 미호와 암흑이가 도도도 달려와 어딘가 모르게 엉성한 꽃다발을 내밀었다.

- 주인님, 졸업 축하해!!

=축하염!!=

여느 꽃집에서 파는 그런 꽃다발이 아니라 여기저기 흙이 묻어있는 게, 색색이 화사한 아름다움이 아닌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수수한 꽃이라 직접 돌아다니며 꽃을 따서 만든 꽃다발인 걸 알 수 있었다.

꽃다발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겉은 수수하지만 강한 꽃향기가 마음에 든다.

“예쁜데. 미호가 직접 만든 거야?”

- 응!

히히 웃는 녀석들의 얼굴 이곳저곳에 진흙이 약간 묻어있어 손수건으로 닦아주니 몸을 배배꼬며 좋아하던 녀석들은 마중 나와 있던 소피아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이동하는 엄마와 아빠한테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제자리에 선채 미호와 암흑이의 수제 꽃다발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고 있으니 누나와 연인들이 다가와서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한다. 조심스러운 기색이 느껴져서 그녀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조심스런 모습이야?”

“어젯밤이랑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위상 세계에 관해서 다른 고민이 생긴 거야?”

“아… 별거 아냐. 그냥 평소처럼 걱정을 사서 하는 거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꽃다발을 옆에 있던 메이드 누나한테 건네주면서 꽃병에 장식해 4층 거실에 가져다 놓으라고 부탁하는데 화연이가 뒤에서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의 걱정은… 이제 단순한 걱정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맞아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요즘 들어 서하의 직감은 간단히 넘겨서는 안 될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껴져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예지 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프랑과 화연이의 말에 황당해하고 있으니 누나가 손날로 내 머리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예비 신부들 걱정 끼치지 말고 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봐.”

진짜 별…거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데…. 빤히 날 바라보는 세 쌍의 눈동자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1년 사이에 현실에 퍼져있는 위상력의 농도가 2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댔잖아.”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귀를 기울이는 그녀들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살짝 웃었다.

“지난 215년간 쌓였던 위상력이 고작 1년도 안 돼서 두 배로 늘어났단 말을 듣고 내 활동에 따라서 위상력이 폭증한 건 아닐까 생각한 거야. 내가 활동을 계속할 때 마다 위상 세계와 단절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지 않을까, 하고.”

“그걸…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긴, 니가 위상 세계에서 벌인 사건의 규모는 장난이 아니니까 나비효과라도 일어났나 의심해볼 만 하지.”

누나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프랑은 그렇지 않은지 그건 좀 아니라는 얼굴로 누날 보며 말했다.

“서하가 생각하는 건 너무 과민반응 아닐까요? 경우의 수를 생각해본다면 위상 세계 통합도 원래 일어났을 현상이었는데 우연히 서하가 한 행동의 시기와 맞아떨어진걸 수도 있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도록도록 굴리다가 내 멘탈을 생각해서 입을 여는 프랑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절로 피어난다.

“그래서 일련의 일들이 네 탓이라고 생각해서 기분이 다운되어있었던 건가?”

“반쯤은. 그렇다고 해도 시작한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지금까지 해왔던게 있는 만큼 하던 일은 마무리 지어야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니 누나와 프랑, 화연이는 살짝 웃으면서 맞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식당에 들어서니 소피아와 요리사들의 솜씨가 발휘된 만찬이 준비되어있었다. 어림잡아 평범한 사람 50명은 먹고도 남을 양이지만 우리들이 평소에 먹는 양을 생각해보면 다 못 먹을 양도 아니다.

나와 프랑, 화연이도 평범한 사람의 5배는 될 양을 먹는 데다 음식 진공청소기인 미호와 암흑이까지 있으니까.

흙투성이로 식당에 들어왔다고 엄마한테 혼나던 미호는 물을 만들어내서 자기 몸을 후다닥 씻었고 우리가 들어오고 얼마 안 돼 히아리드와 알케마가 식당으로 들어오다 알케마를 처음 본 엄마가 작게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사건 없이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졸업기념 점심을 들 수 있었다.

영은이가 바빠서 빠진 게 좀 아쉬웠다.

졸업식이 끝나고 이틀 뒤 오랜만에 리디아를 볼 겸, 겸사겸사해서 만찬을 준비해 수한과 소피아의 가족도 초대하고 그랑 블루의 주요 간부와 그랑 블루 연구소의 중요 인물들도 저녁에 초대했다.

저택 서편의 1층에 마련해둔 대형 실내 연회실이 50명 정도는 간단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라 다행이다. 여기가 아니었다면 3월의 한겨울에 가든파티를 벌일 뻔했으니까.

내가 보낸 리무진을 타고 하나둘씩 연회장에 도착한 손님들은, 시 외곽이긴 하지만 어지간한 동 단위 행정구역 두세 개를 합친 규모의 정원과 그런 정원에 고즈넉하게 서 있는 대저택의 모습에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이형종 들을 보고 놀란 겁니다만?”

까칠하게 정정하는 김표충 부장은 어쩐 일인지 굉장히 말쑥한 정장 차림이어서 굉장히 놀란 척 김표충 부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챙겨주는 분이라도 생겼어요? 오늘은 굉장히 깔끔하시네요.”

“…평소의 제가 어때서요.”

“후줄근하기가 육교 아래 노숙자 꼴이었잖아요.”

“그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만?!”

내 말에 발끈하는 김표충 부장을 보고 실실 웃으면서 만찬장을 돌아보며 손님들에게 외쳤다.

“김표충 부장님이 평소에 거지꼴로 다녔다는 데 동의하시는 분은 손 번쩍 들어주시죠!”

내 목소리에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너도나도 손을 번쩍 든다. 그 숫자가 초대된 손님들 전원이었다.

“보이시죠?”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든 손님들을 가리키니 김표충 부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초대한 손님한테 이런 희롱이 어딨냐고 따지자 만찬장은 다시 한 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투덜거리는 김표충 부장에게 결혼식 때 축의금으로 특별한 선물을 해주겠다며 달래주고 놓아주니 소피아의 가족들과 오소은 박사와 알티나 박사가 함께 다가와 덕담을 건넸다.

“저택이 완공된 걸 축하드려요,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정말 예술적인 저택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저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역사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하면 좀 창피하거든요?”

단정한 예복을 입은 드와이트와 아주 살짝 속이 비치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알티나와 오소은 박사는 만찬장 한쪽에서 툴툴거리며 샴페인을 들이키는 누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품위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드와이트 박사와 이치카 부부의 세 자식인 세리아, 아롤, 에단도 예복을 차려입고 말쑥한 모습으로 미소를 띠고 있는 게 다행히 불만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잘 지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하하. 이 저택도 베르사유 궁전의 전 주인에 못지않은 유명한 분께서 기거하는 곳이니 비교해보면 무엇하나 뒤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박사님들?”

“솔직히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들보다 우리 회장님이 더 대단하시죠.”

“여러모로 대단하신 분이지요.”

입을 맞춘 것처럼 칭찬만 늘어놓는 박사들, 그러고 보니 7명 중에 이치카 만 빼고 전부 박사네.

“제 얼굴에 금칠은 그만해주세요. 그보다 지내시는 데 어려움이나 불편은 없으세요?”

“전혀요. 설비는 훌륭하지, 지원은 빵빵한 데다 원하는 연구와 실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지금 상황에 불만이나 불편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남의 연구소에 얹혀사니까 편하지만은 않겠죠. 조만간 연구소도 완공되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세요.”

“올해 여름에 완공된다죠? 저 연구소가 얼마나 대단한지 벌써부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요. 오죽하면 알음알음 연구소에 들어올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오는 친구들도 있겠어요!”

알티나는 서쪽 태평동에 얼핏 보이는 대규모 건축현장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띈 채 날 물주 보듯 바라본다.

“친구들이면 역시 유능한 박사님들이겠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아, 성격도 좋으면 금상첨화겠고요.”

“그래요? 호호호. 좋아요! 저만 믿으세요!”

호오, 믿으라니… 이거 잘하면 맷돌… 아니, 공돌이가 알아서 굴러들어오겠는데.

그 뒤로 줄을 서듯 혜령이 이모도 건강해진 남편과 함께 찾아와 인사를 했고 하유철 부장도 로맨스 그레이를 뽐내듯이 정정하고 세련된 차림으로 다가와 저택의 완공을 축하해주었다. 수한도 의붓할아버지인 주한 할아버지와 함께 와서 인사를 건넸다.

“경축드립니다, 회장님.”

“어서 오세요, 주한 할아버지. 요즘도… 건강하시네요.”

슬쩍 공간 지각으로 할아버지의 몸을 스캔해보고 힐링 터치로 약간 안 좋아 보이는 곳을 쓰다듬어주니 할아버지는 푸근하게 웃으시며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셨다. 옆에 서 있던 수한이 고마움이 잔뜩 담긴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슬쩍 미소를 지어주고 뒤에 다가온 유채린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유채린도 여성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OL 룩은 무척 어울리더니 파티드레스는 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축하드립니다.”

누가 전직 군인 아니랄까 봐… 아, 군인은 아닌가?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차소영을 만날 수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타임리버에서 그랑 블루로 넘어온 뒤에 몇 번 못봤더니 얼굴 까먹겠어요.”

“제 얼굴은 잊으셔도 되니 유화연 보스만 잘 챙겨주십시오.”

“그래도 쉬지않고 레이드를 도는건… 좀 무리지 않아요?”

“오히려 이정도가 저에게 적당합니다. 염려는 감사합니다만 배려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슬렌더 타입의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꽤 흐른 탓인지 그녀의 잘 다듬은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넘어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바지 정장을 입고 찾아와 조용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기 위치는 화연의 그림자라는 듯이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손님은 박지웅 보스였는데 그의 옆에는 어깨에 키가 겨우 닿을랑 말랑하는 깜찍한 미소녀가 귀여운 파티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는데…. 설마?!

“안녕하세요, 회장님. 평소 그이의 말을 듣고 꼭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인사드리네요. 주효진이에요.”

“아, 예. 박지웅 보스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말씀대로 무척 귀엽… 아름다우시네요.”

“호호. 제가 조금 작지요?”

작다마다! 겉만 봐서는 완전 중3? 고1 정도로밖에 안 보이잖아! 당신은 웃지 마! 그 웃음은 로리콤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이 로리 보스야!

“회사에 출근하면 박지웅 보스의 명패를 바꿔야겠네요. 하하.”

“어흠. 제가 사랑한 사람이 이런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모습이라 안사람을 사랑한 건 아닙니다.”

“제가 뭐랬나요? 괜히 찔리니까 발뺌하지 마시죠.”

“호호.”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끝나자 다들 평소 호감이 있는 사람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프랑은 영은이랑 혜령이 이모와 함께 셋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화연이는 소피아와 소피아의 부모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소피아의 세 남매가 보이지 않아 어디 있나 찾아보니 알티나 박사와 함께 음식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어치우는 미호와 암흑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면서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유철 부장과 김표충 부장은 혜령이 이모의 남편과 함께 그 옆에서 음식을 집어 먹으며 취미 생활… 낚시? 이야기를 나누는가 했더니, 연회장을 바삐 오가는 메이드 차림의 히아리드에게 시선이 향하는 게 보인다.

그나저나 리디아는 어디있…나 싶었는데, 새하얀 민소매 미니 드레스를 입은 리디아는 내 쪽은 눈길도 주지 않고 누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눈에서 하트를 뿅뿅 쏘아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세쌍둥이와 유채린의 표정에서 한숨이 보이는 거 같다.

…리디아도 분명 마나 비전의 영향을 받았는데 나보다 누날 더 좋아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진짜 대단한 녀석이구만.

하얀색 레이디라이크 룩의 드레스를 입고 한껏 예쁘게 꾸민 누나는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마냥 떨어지려 하지 않는 리디아에게 붙잡혀 어디에도 못 가고 살짝 난감한 얼굴로 리디아와 어울려주고 있었다.

손님으로 초대받았으면서 주인에게 인사도 하러 오지 않는 괘씸한 현직 공주에게 걸어가니 누나가 날 발견하고 리디아 몰래 얼른 도와달라고 손짓을 보낸다.

“뭐해?”

“앗, 서하 경.”

뒤늦게 날 발견한 리디아는 손으로 가슴골을 가리며 살짝 무릎을 굽혀 공주다운 우아한 면모로 인사한다. 누나의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아 우스꽝스럽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인사다.

그녀와 리디아의 호위 역인 세쌍둥이의 인사도 손을 들어 받아주면서 리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는 화연이를 좋아하더니 이젠 누나로 타깃을 바꾼 거야?”

“화연 님은 저의 우상이시지요! 그렇지만 시하 님도 여자로서 정말 존경하고 흠모함에 있어 모자람이 없는 최고의 여성이신 걸 알게 되었어요. 정말 두 분의 아름다움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아하하… 고마워요, 공주님.”

“아이참. 리아라고 불러주시라니까요!”

누나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기쁘다는 듯이 웃음 지으며 하는 말에 누나가 반은 울상으로 반은 웃으며 얼른 구해달라고 신호를 마구마구 보낸다.

리디아도 서양 인형처럼 귀여워서 두 동서양의 미녀가 밀착해있는 모습은 상당히 보기 좋지만, 대체 이 공주의 머릿속은 어떻게 꾸며져있는건지, 성장 과정이 어떻길래 취향이 백합화 되어있는 것인지 진짜 궁금해졌다.

=서하 님. 음료수 드시겠습니까?=

그때 등이 훤히 비치게 개조한 하늘하늘한 메이드 복을 입은 히아리드가 여섯 장의 날개를 살랑이며 다가와 칵테일 주스가 담긴 잔을 건네주는데, 리디아의 시선이 날 벗어나 히아리드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누나를 선망이 담긴 눈길로 바라본다.

그냥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 아무튼, 누나가 꽤나 곤혹스러워하고 있어 도와줄 겸 연회장 바깥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보다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둘이서 볼까?”

“둘이서 말인가요?”

아무리 누나에게 빠져있어도 내 말을 무시할 순 없는지 리디아는 조금… 아니, 굉장히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나와 누나를 번갈아 보더니 살그머니 누나의 팔을 놓는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랬다간 니가 곤란 할 거 같아서.”

“…네.”

살짝 의문을 품은 얼굴이었지만, 테라스로 걸음을 옮기니 순순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리디아의 마수에 겨우 벗어난 누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가 할 말에 궁금증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리디아의 뒤를 살금살금 뒤를 쫒으려다 유채린의 손길에 제지당하는 모습이 테라스로 나가는 창문의 유리창에 고스란히 비쳐 보인다.

곧이어 엄마와 아빠한테 붙잡힌 누나는 어디론가 끌려가며 이쪽을 향해 미련이 넘치는 눈빛을 보내왔다.

지나가는 메이드의 쟁반에서 음료수를 하나 더 집어 테라스로 나와 리디아에게 건네주니 빙긋 웃으며 두 손으로 잔을 받아간다. 세쌍둥이는 테라스 바깥까지 따라 나오진 않고 경비를 서듯 테라스와 연결된 문 앞에 서서 등을 보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등이 깊게 패인 파티 드레스를 입어 미끈한 등골이 훤히 보이는 쌍둥이들을 바라보다가 리디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 대규모 레이드에 참가했었다며?”

“네. 화연 님은 제가 참가하는 것에 위험하다며 난색을 보이셨지만 저도 그랑 블루 소속의 레이더니까요.”

“어땠어?”

“역시 화연 님은 존경을 받을 분이셨어요!”

꽤 오랫동안 보지 못해 약간 서먹해진 분위기도 해소할 겸 잡담 삼아 꺼낸 이야기였는데 그게 리디아의 어떤 스위치를 올렸는지 10분 동안 쉬지 않고 화연이의 대단함에 대해 열변을 토해낸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질리는 기분이 들어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화연이는 정말 대단하긴 하지.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과 영재교육을 받았다지만 몇 명의 동료와 함께 레이드 팀을 만들고는 전 세계에서 수십 위 안에 드는 강력한 팀으로 일으켜 세웠으니까.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화연이를 칭찬하는 이야기에 눈을 다시 반짝이며 입을 열려 하는 게 보여서 빠르게 본론을 꺼내니 "묻고 싶은 거요?" 하며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다.

“응. 아론 템페스트 공작이 A 클래스로 올라간 조건 말이야.”

“……!”

“그 조건이 무엇인지 내용은 짐작하고 있지만, 이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줄 대답이 필요해.”

“그으… 그건.”

더듬거리며 내 시선을 피하는 리디아의 모습에서 꽤나 당혹감이 느껴진다. 그야 당연하겠지. B 클래스에서 A 클래스로 올라가는 조건을 찾지 못해 B 클래스의 벽에 막혀있는 사람만 어림잡아 수백 명이니까. 지금 이야기가 어딘가에 흘러나가면 모르긴 몰라도 리디아는 여왕에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다.

이쪽을 호기심에 힐끔거리는 몇몇 손님에게 시선을 마주해 살짝 웃어주는 걸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A 클래스가 되기 위한 조건, 그건 2가지 이상의 능력을 가지는거지?”

“…정말, 다 알고 계시면서 여쭈시는 건가요? 차라리 여왕 폐하께 직접 연락을 취하시면 될 텐데 굳이 절 거쳐서 연락하실 필요가 있으세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며 볼멘 얼굴로 투정부리는 리디아에게 씨익 웃어주며 아공간에서 고위 위상석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여왕님이랑 직접 대면하려니 좀 그래서 그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아기 주먹만 한 위상석 두 개가 나타나자 리디아는 깜짝 놀랐다가 그 현상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또다시 화들짝 놀란다.

놀란 얼굴로 말하려는 리디아의 입을 막듯이 그녀의 손에 위상석 두 개를 떨어트려 주며 다시 말했다.

“정보료로 낼게. 여왕께 허락을 받아서 대답을 전해줬으면 좋겠어. 지금 바로.”

“어… 아, 정말…. 끄으응…. 에휴! 서하 경이 그렇게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여왕 폐하께서 아시면 무척 서운해하실 거에요.”

살짝 미소를 띠고 있는 내 모습에 리디아는 어쩌지도 못하고 한숨을 폭 내쉰다.

“후우.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리디아는 위상석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서 자그마한 핸드백에 집어넣더니 내게서 서너 걸음 떨어져 인증기를 켜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네, 네. 서하 경은 이미 확신하고 계신….”

“…아공간도… ……고위 이형종만….”

“…네에.”

칵테일 주스를 입안에 머금고 혀로 굴리며 남쪽 허니콤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육고기를 저녁으로 해치우는 스케일러들을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고 있으니 얼마 안 가 통화가 끝났는지 인증기를 종료한 리디아가 살짝 어지럽다는 모습으로 이마를 다소곳이 누르며 다가왔다.

“하아….”

“어때?”

“다 짐작하고 계시면서…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서하 경은 너무 심술궂은 면이 있으세요.”

약간의 투정 뒤에 이어진 뒤, 리디아가 전해준 이야기에는 내 짐작이 맞다는 말과 함께 A 클래스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는 정보를 줬다.

“깨달음… 깨달음으로 B 클래스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거야?”

“템페스트 공작님께서는 B 클래스의 벽에 부딪히신 후 수많은 레이드에 참가해 목숨이 오가는 전투 끝에 깨달음을 얻어 신체 강화와 회복의 중복 능력자로 거듭나셨어요.”

깨달음과 그에 합당한 능력을 얻을 기초가 다져져 있어야 B 클래스를 넘어 A 클래스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

화연이와 영은이는 이미 명상법을 통해 기초를 세우는 중이니 깨달음이 필요하단 말인데, 그 부분은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는 부분이군.

그렇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심장의 위상석이 B 클래스의 한계인 4천만이 되면?

진화해서 인간이 아니게 될까, 아니면 인간을 뛰어넘은 신인류가 되는 걸까.

리디아는 생각이 잠긴 내 모습에 몇 번이나 말을 건네려 했지만 입만 뻐끔뻐끔거리더니 곧 포기하고 조용히 연회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 작품 후기 ============================

이번 주말에... 어머님이 조금 편찮으셔서 보호자 겸 간호를 위해 일주일 정도 집을 비워야 하게 됐습니다.

물론 밖에서도 노트북을 이용해 계속 글은 쓸 거고 예약 등록을 해서 12시 07분에 올라가도록 해놓을 생각입니다만 조금 문제가 생기면 그날 글이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빠진 분량은 다음 날 올릴 때 모아 올릴 테니 양해 부탁드려요

라고해도 개근 연재를 포기할 수는 없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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