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29 앞으로 한걸음. =========================================================================
일시 정지 시켰던 영상이 이어지며 바람 속성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 상공에서 찍은 화면이 나왔는데, 십수 킬로미터에 달하던 성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시간의 흐름에 파묻혀 눈 사이로 극히 일부분만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일부 외에는 무성한 잡목림에 뒤덮이고 그 위로 눈이 두껍게 쌓여있어 아까 본 장면이 아니었다면 메오 아지토스들의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을 연상해내지 못했을 거다.
“…저곳에 가볼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줄 알고 4일 뒤에 입장 쿨타임이 끝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놨다.”
“고마워.”
위상 세계에서 내 위치를 특정지을 수 있게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푸른 피부의 악마, 메오 아지토스들에 대한 실마리. 뮈르딘이 말한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건 이걸 뜻하는 거였을까?
…확신을 못 하겠다.
말없이 화연이가 찍어온 영상을 보고 있으니 프랑과 누나가 내 양옆으로 걸어와 사이좋게 팔짱을 껴오며 물었다.
“저기서 위치를 확인하고 니 위상 세계로 돌아가면 악마들은 금방 찾을 수 있겠네?”
“바로 잡으러 가실 거에요?”
누나와 프랑의 말을 듣자 아직 연인들과 누나한테 누호디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잠시 연인들의 기색을 살피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누호디한테 들은 게 있는데 말야.”
한밤중에 잠이 깨서 누호디와 이야기를 나눈 것들, 메오 아지토스들의 특성과 행동 양식에 관해 이야기해주니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같은 여성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거에 분노한 표정이다.
“그런 천벌을 받을 악마들이….”
“그 자식들은 여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용하게 분노하는 프랑과 격렬하게 분노하는 누나가 손에 힘을 주며 내 팔을 잡는 게 느껴진다. 아니, 내 팔이 메오 아지토스는 아닌데….
입은 열지 않았지만, 화연이랑 영은이도 굉장히 분노한 게 느껴져서 황급히 말했다.
“그래서! 내 위상 세계에서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좌표를 잡을 수 있게 됐으니까 저곳에 가서 위치만 확인 하면 금방 갈 수 있겠지만, 바로 잡으러 갈 생각은 없어.”
분노하던 연인들은 화도 잊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뜻밖이네? 위치를 알게 되면 바로 달려가서 덮칠 줄 알았는데.”
“백청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백청한테도 죽을뻔해 놓고 또다시 막무가내로 달려갈 만큼 바보는 아니야.”
인증기의 공개 제한 정보에 따르면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이 활성화되어있는 시간대일 경우, 위상급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항목이 있다.
사비 종족처럼 신수를 섬기는 강력한 자들이 지키는 곳을 서슴없이 공격해온 메오 아지토스나, 그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다른 신수를 섬기는 종족들과의 트러블까지 감내하면서까지 신수의 땅이라는 오르빈치의 일부를 띄워 올린 플라비우스의 행동을 봤을 때 그놈들의 본거지를 습격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결론밖에 안 난다.
“그래서 일단은 위치만 확인해둔 뒤에 예정대로 메리아놀을 찾아가 볼 셈이야.”
“드워프 같은 존재가 있다면 무기 방어구 개발을 의뢰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고 메오 아지토스에 대해 정보를 좀 더 수집할 생각이거든. 플라비우스가 그놈들을 피하려고 다른 신수를 섬기는 종족과 트러블을 일으켰던 점은 주시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 그놈들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정신 계통 능력은 꽤나 성가실 게 분명하잖아? 어쩌면 비술도 다룰 수 있을지도 몰라.”
내 행동에 대한 이유를 들은 누나와 연인들은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이 컸다며 흐뭇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이제는 진짜 그랑 블루의 회장으로 전면에 나서도 될 정도인걸?”
“막강한 힘에 자만하지 않는 성격과 약간 부족했던 신중한 태도에 빠른 머리 회전이랑 눈치까지, 내가 잡으려 했던 인재다워.”
불에 끓는 물처럼 화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견해 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연인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내 무식한 행동의 결과가 부모님과 연인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는 거라면 말야.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노골적인 칭찬은 좀 민망해서 화제도 바꿀 겸, 화연이가 촬영해온 동영상을 보면서 인어들의 마을을 보며 의심했던 부분이 진실이라고 느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인어의 마을을 보다가 생각났건데 말야. 어쩌면 내가 있는 위상 세계가 최초에 가까운 시간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무슨 이야기야? 자세히 말해봐.”
내 말을 들은 누나는 뭔가를 느꼈는지 진지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설명을 재촉했고 프랑 들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위상 세계의 폐허들 말야. 다른 능력자들이 간간히 발견하는 던전이나 도시의 흔적, 폐허 같은 거. 그런 건 모두 지성체들이 모두 몰락해버린 흔적이 아닐까? 그들이 버리고 떠났든, 몰살당해 사라졌든 간에 말야.”
“확실히 네 위상 세계는 다른 능력자들의 세계보다 과하게 지성체의 존재가 많아. 거기에 다른 능력자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수의 던전과 폐허가 지성체가 존재했단 증거가 되면… 니 세계가 위상 세계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여태껏 지성체를 발견한 것은 웃기지도 않은 닉네임을 쓰는 영국인 하나뿐이고 수백만 명이 활동하는 위상 세계의 시간대를 봤을 때 서하 너랑 그 영국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없다는 걸 보면… 일리 있는 말인걸.”
영은이와 누나의 말을 듣고 있던 프랑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크orc로 의심되는 종족을 지인이 발견했단 이야기를 서하의 인증기 커뮤니티에서 본적이 있는 걸요?”
“프랑.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게 없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순진하게 믿어주면 놀림감 밖에 되지 않아요.”
“아, 으읏.”
성정이 순진한 프랑은 화연이의 지적에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한숨을 폭 내쉰다. 잠시 프랑과 화연이를 바라보던 누나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습관이 됐는지 옆머리를 귀 너머로 흘려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서하의 시간대가 위상 세계의 기원 origin이라면, 시간대 통합이 서하의 위상 세계를 기준으로 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통합? 다른 이야기가 나온게 있어?”
“응. 점점 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걸 일반 능력자들도 느낄 정도인가 봐. 덩달아서인지… 현실의 위상력 농도가 예년의 평균치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통계청의 분석도 나오고 있어.”
그거… 심각한 거 아닌가? 위상력 농도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면 일반 동물들의 이형종 각성도 비례적으로 늘어날 거 같은데.
“그 일 때문에 정부도 고심 중이란다. 위상력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의 효율성을 높이는 프로젝트는 지금 진행해야 할 타이밍인데 마땅히 맡길 기업이 없거든.”
“저번에 누나랑 혜령이 이모가 있는 데서 무기 개발을 위한 땅을 사는 걸 허락했었잖아? 누난 기술 개발을 위한 기술자를 모은다고 했었고. 우리가 개발한다고 안 했었어?”
“우리가 진행 중인 B 프로젝트는 정확하게는 탄환의 효율을 개량 및 개선하는 거구, 언니가 말씀하시는 건 무기 개발이잖아.”
조금 이해가 안 간다. 탄환의 효율을 올려서 생산 단가를 낮추고 위력을 증가시키면 일반인들도 이형종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잖아. 그걸 두고 무기랑 탄환이랑 따로 나눌 필요가 있나?
“지금 총알만 개량시켜 단가를 낮추면 무기가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지?”
“응.”
귀신같이 내 생각을 읽은 누나는 내 이마를 검지로 살짝 누르면서 설명해준다.
“네 말대로 둘 다 동일시할 수도 있지만, 지금 정부가 원하는 건 총기류뿐만 아니라 레어 등급 이상의 무기류를 양산할 수 있는 프로젝트인 거야. 위상 에너지를 결정화시켜서 총알로 사용하면 한 발 쏠 때마다 막대한 양의 비용이 들지만, 근접용 무기로 만들면 그렇지 않으니까.”
…결국 탄환을 만들어내는 비용보다 도검류를 만들어 사람에게 들려줘서 싸우게 만드는 쪽이 비용면에서 덜 든다는 건가. 사람 목숨보다 돈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건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 표현해 영은이의 기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 기분을 눈치챈건지 영은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덧붙였다.
“시하 말대로인것도 있지만, 이번 무기 개발의 목적은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이 이형종을 상대기 위한 방책의 일부분이야. 최하위나 하위급은 솔직히 잘 훈련받은 군인이 무기를 들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아무튼, 이런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과정 같은 이야기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사람에게 실망하게 될 일이 많은 분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말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영은이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누나는 내게서 지난 5일간의 촬영 영상을 받아가면서 말했다.
“어쨌든 정부의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우리가 수주할 일은 없어. 우리는 레이더지 웨폰 스미스는 아니니까. 그리고 위상 세계의 통합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으니까 지질표 작정을 위해서라도 넌 계속해서 위상 세계의 지형을 열심히 조사해줘.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확실히 자기가 잘하는 분야를 맡는 게 일의 해결에 크게 도움되는 거라, 위상 세계의 통합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나 위상 세계 간의 통로의 단절에 대한 대비책은 누나들한테 맡기고 나는 최대한 내 목적인 메오 아지토스의 토벌과 동시에 위상석의 수집과 블루 스톤의 생성에 신경을 쏟는 게 좋을 거 같다.
하지만….
“그럴게. 그리고 사람 목숨보다 돈을 먼저 하는 건 싫어. 총알을 개량하는 기술자분들한테도 그 점을 강조해줬으면 좋겠어.”
“…으응. 알았어.”
덧붙인 내 말에 예쁘게 웃어주는 누나들을 보니 목덜미가 근지러워진다.
“자, 그럼.”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 8시다. 조금 더 있으면 씻고 자야 하니 그전에 뤼아르네에게 외워온 비술을 가르쳐줄 때가 왔다.
미호들이 어디 있나 쓱 둘러보니 2층 놀이방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게 보인다. 공간 도약으로 미호와 히아리드, 암흑이를 데려온 뒤에 가르쳐줄 비술에 대해 설명했다.
“비술을 가르쳐 준 인어는 프랑이랑 화연이랑 미호도 아는 녀석이야.”
“저희도 아는 인어…라구요? 혹시?”
“……그때 서하가 구해준 그 인어인가? 미호를 진화시키러 들어갔을 때의?”
자기 이름이 나오자 미호는 귀를 쫑긋하며 화연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어. 그 녀석들 중에 첫째였어.”
짧은 대답에 화연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그때 구해준 인어와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던 거군.”
- ……??
미호는 기억이 안 나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바라본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고 입을 열었다.
“내가 외워온 비술은 총 네 가지야.”
위상력을 감추는 불견시不見視, 시전자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을 생존에 적합한 환경으로 바꾸어주는 안전공간창조安全空間創造와 물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의사조작意思操作, 그리고 정령을 만들어내서 다룰 수 있는 정령창조精靈創造.
누나를 포함한 연인들과 히아리드는 네 가지 전부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한 비술이라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고 미호는 그냥 내가 가르쳐주니 좋다는 모양새였지만, 나처럼 비술을 못 익히는 암흑이만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비술 그까이꺼, 주인님만 있으면 못 배워도 상관없어영.=
“맞아. 내가 못 쓰면 쓸 수 있는 사람이랑 같이 다니면 되지.”
맞는 말을 했다고 칭찬해주니 암흑이는 우히히 웃으면서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겨 왔다.
잔뜩 기대 중인 연인들이 모두 외울 수 있도록 사상법에서부터 비술의 주문을 반복해서 알려주다 보니 여기서 천재성이 확실히 나누어졌다.
그녀들 중 가장 먼저 외우고 이해한 건 역시 누나로, 단 한 번만 듣고서는 거의 20분에 달하는 분량 전부를 외워버렸고 두 번째에는 프랑이, 세 번째에 화연이와 영은이가 동시에 외웠다.
미호는… 녀석의 자존심을 위해 비밀로 해두자.
녀석에게 붙어서 모두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이야기해주고 있으니 네 종류의 사상법과 주문을 모두 외운 연인들은 각자 하나의 비술을 선택해 익히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또 성격에 따라 선택한 비술이 달라졌다.
누나는 가장 먼저 위상력을 감추는 불견시를 익히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고 프랑은 정령창조를, 화연이는 의사조작을, 영은이는 안전공간창조를 익힌다.
서로 고른 듯이 하나씩 나눠 익히는 그녀들을 보다가 히아리드를 돌아보니 녀석은 정령창조와 의사조작 사이에서 고민하더니 정령창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 주인님, 나 뭐부터 배워?
“넌 뭐 배우고 싶은데?”
- 주인님한테 도움되는 거!
“그럼 불견시부터 익혀.”
- 응!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위상력 감지 범위 안에 들어온 위상력을 감지하는 이형종 들을 생각했을 때 불견시부터 먼저 익혀야… 아니, 지금 뭐하는 짓이래.
내가 미호한테 하는 말을 들은 누나는 '역시 그렇지?' 하며 우쭐해했고 프랑과 화연이, 영은이는 외우던 걸 그만두고 불견시를 먼저 익히기 시작한다.
어차피 전부 배울 거 아닌가? 나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겠다고… 푼수 같은 그녀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미호 너는 불견시 다 익히면 다음은 익히고 싶은 거 차례대로 익혀."라고 말한 뒤에 거실에서 나 있는 작은 발코니로 나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셔츠를 훑고 지나가는 걸 느끼며 화연이가 보여준 영상을 되새김질했다.
검은 성이 무너져있다는 건 뭘 뜻하는 걸까. 그 장면을 내 행동의 결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내가 성공적으로 메오 아지토스들을 토벌했다는 거?
그렇다면 나로 인해 무너져내린 벨티칼 산은 다른 능력자들의 세계에는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게 되는 걸까 아니면 내 행동으로 인해 나와는 다른 시간대에 있는 능력자들의 세계에 이변이 생겼을까.
인증기를 켜서 능력자 커뮤니티에 들어가 벨티칼 산의 키워드가 될 만한 단어로 검색을 해봤지만, 여전히 영양가 없는 잡담과 흰소리만 검색되고 대기권을 뚫을 듯이 솟은 거대한 산이 갑자기 무너졌다거나 난데없이 어마어마한 홍수가 일어나서 뒈질 뻔 했다거나 그런 게시글은 안 보인다.
능력자가 그 사건에 휩쓸려 죽어버린 바람에 올릴 사람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애초에 무너져있어 이변을 알아채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알 도리가 없고 무엇하나 확실한 거 없이 가정에 가정뿐이니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등 뒤에서 연인들의 익숙한 위상력이 살짝 출렁거리며 농도가 옅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불견시를 성공한 건가? 단번에 위상력을 감추진 못하는 걸 보니 처음 익혔을 땐 지금처럼 옅게 느껴지다가 나중에 익숙해지면 인어들처럼 공간 지각으로도 느끼지 못하게끔 위상력의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 있게 되는 건가 보다.
뒤돌아서 난간에 등을 기대고 거실 안쪽을 바라보니 히아리드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게 보였다.
정령 창조를 익히던 히아리드는 몇 번의 실패 끝에 손바닥 위로 손톱만큼이나 작은 물 덩어리를 소환해냈는데, 그 물 덩어리 속에서 위상력이 조금씩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게 감지된다.
…….
히아리드의 가느다란 손가락 위에서 작은 물 덩어리가 하늘거리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펴서 TP를 집중했다.
액체처럼 손바닥의 움푹한 곳에 고이는 TP는 아름다운 푸른빛을 뿌리며 작게 찰랑인다. 이걸 저 정령에게 먹이면 금방 커지려나? 근데 내 TP의 영향을 받으면 계약자랑 정령의 사이에 별로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진 않은데.
발코니에서 거실 안을 바라보고 있으니 불견시를 성공한 연인들이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미호는 불견시가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지 울상을 지으면서 프랑의 배에 뛰어들듯이 다이빙하더니 징징거리고 있었다.
불확실한 것 투성이 인 삶이지만… 저렇게 착하고 현명한 데다 똑똑한 연인들과 귀여운 가족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그리고 연인들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강해져야지.
손바닥에 고여있는 TP를 회수하고 연인들이 기다리는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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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물의 정령이 있으면 참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