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23화 (423/517)

00423  오트로스  =========================================================================

여러 개로 분화되며 작아진 소용돌이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바다가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 때 공간의 벽을 치우고 인어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헤엄쳐나갔다.

소용돌이에 땅이 온통 뒤집혀 시야가 엉망이었지만 뛰어난 기억력으로 인어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니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물방울같이 생긴 게 공간 지각에 들어왔다.

크기는 훨씬 작지만 200명은 충분히 들어갈 법한 물방울 속에 인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끌어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인어들은 다들 멀쩡했는데, 굴절률 때문인지 생각보다 오트로스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거대한 소용돌이의 영향이 적어서 버틸 수 있었나 보다.

그런데 뭐가 그리 무서워서 떨고 있는 거지?

잠시 생각해보니 물속을 떠다니는 부유물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건 없고 땅은 지진 난 것처럼 떨리고 괴성과 폭발음과 미친 사이즈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누구나 무서워할 거 같다고 생각했다.

물방울을 뚫고 인어들 앞에 내려서니 인어들이 흡사 귀신을 본 사람 같은 표정으로 후다닥 물러섰다가 날 확인하고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인어들 사이로 뤼아르네가 빠르게 헤엄쳐와 울먹이며 날 끌어안았다.

- 서하 님!!

죽은 줄 알았던 서방님이 살아 돌아와도 이렇게 격한 반응은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며 내 가슴을 끌어안고 울먹이는 뤼아르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왜 그러냐?”

- 지진이, 폭발이… 흑. 서하 님께 큰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걱정도 많네.”

눈물을 글썽이면서 훌쩍거리는 뤼아르네의 등을 토닥거려 진정시키고 있으니 알드리치가 좀 멍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어왔다.

- 정말… 오트로스를 잡은 거요? 이 짧은 시간에?

“응. 못 봤어?”

- 허어. 오트로스가 다리를 한번 휘둘러 땅을 후려친 뒤에는 흙탕물이 뿌옇게 올라와 시야가 가려졌었소. 그 뒤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폭발음과 함께 오트로스의 포효가 여기까지 들리더군. 마지막에는 조류가 급격하게 빨라지며 용왕류龍王流가 생겨나길래 설마 했는데… 그대는 정말로 대단하군!

용왕류가 뭐지? 마지막에 놈이 쓴 메일스트롬을 말하는건가?

“아무튼 오트로스는 죽었으니 이걸로 안심하고 살 수 있겠지?”

- 물론이오. 그대의 조력에 감사드리오!

그제서야 오트로스가 죽었다는 거에 실감이 나는지 알드리치는 환해진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악수를 해주며 고마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인어들은 아직 오트로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와 알드리치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던 뤼아르네는 조금 진정한 표정으로 눈 밑을 훔치더니 자랑스레 웃으며 말했다.

- 알드리치, 이제 서하 님이 사도 님이라는 걸 인정하죠?

- 아아. 그대라면 그 누구보다도 사도에 걸맞는 자요.

사도 아니래도 자꾸 그러네.

“난 너희가 소용돌이에 휩쓸리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멀쩡해서 다행이야. 이 물방울이 너흴 지켜준 거야?”

- 네! 해신의 보호는 일족 중에서도 무녀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비술이에요. 해신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저희도 소용돌이에 휩쓰렬 봉변을 당했을 거에요.

아, 역시.

그리고 인어들도 한 박자 늦게 사실을 받아들이고 제각기 놀란 표정으로 정말 오트로스가 죽은 거냐고 서로 수군거리더니 매력적인 수컷을 보는 암컷처럼 날 보며 눈을 반짝인다.

“어쩔래. 죽은 놈을 확인하러 갈래? 흙탕물이 좀 끼어있지만 안내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 보고 싶어요! 안내해주세요!

- 용자님, 정말 오트로스가 죽은 건가요?

- 볼래요! 그놈의 시체에다 침을 뱉어줄 거에요!

- 쿠에에~ 하던 소리가 오트로스의 비명이었나요?!

“어, 음.”

말이 끝나자마자 우르르 달려들어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는 수십 마리의 인어들에게 오트로스는 확실하게 죽었다고 대답해주었더니, 내게 오트로스의 사망을 확인받은 인어들은 알드리치에게 오트로스의 사체를 확인해야 한다며 녀석의 등을 마구마구 떠밀어댄다.

인어들의 독촉에 알드리치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인어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오트로스는 죽었지만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긴장하라! 전투를 상정하고 오트로스의 사체로 이동하겠다!

흙탕물이 전혀 가라앉지 않아 주변 분간이 안 되는데 어떻게 가는 건가 싶었더니, 인어들은 앞으로 헤엄쳐나아가며 물을 부드럽게 조종해 흙탕물을 침전시켜 정화해나간다.

백수십 마리의 인어들이 정화해나가니 바닷속을 떠다니던 흙탕물들은 빠르게 정화되며 얼마 가지 않아 맑고 투명한 바닷속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로 헤엄쳐가는 인어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공간 도약으로 먼저 가 있을까 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뤼아르네가 내 손을 잡고 웃으면서 앞으로 헤엄쳐 나간다.

서로 두 손을 맞잡으니 뤼아르네는 - 꼭 잡으세요! 하고는 무언가 주문을 외우더니 여기에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총알같이 쏘아져 나갔다.

“우와아?!”

엄청 빠르다! 내가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거 같아!!

날 등에 업고서도 순식간에 인어들의 선두로 나선 뤼아르네는 두 손을 펼치더니 또다시 주문을 외워 흙탕물을 광범위하게 정화하기 시작했다.

- 아아! 정말 죽었어!

- 오트로스가 죽었다!!

- 와아아아~!!

- ……!! ……!!!

뤼아르네의 힘으로 흙탕물이 수 킬로미터 범위로 정화되어나가니 반쯤 깍여나간 해저산에 몸을 기댄 오트로스가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죄다 뜯겨져나간 문어 발의 이곳저곳은 마나 포에 패여서 덜렁거리고 끊어진 곳이 있는가 하면 몸통에 달린 두 눈은 동그랗게 파내진 것마냥 구멍이 뻥 뚫린 데다 머리 주머니는 한여름의 불알 주머니처럼 축축 늘어진 채 수십 미터짜리 구멍이 송송 나 있고 찢어진 모습이라 누가 봐도 살아있다고 여기지 못할 모습이다.

수많은 인어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뿌리며 기뻐하는데, 흘린 눈물이 아롱지며 동그란 구슬처럼 변한다?

맑고 투명한 보석처럼 변한 눈물을 보고 신기해하는데 뤼아르네가 간단하게 손짓을 해서 그 구슬들을 몽땅 모으기 시작했다.

언제 챙겨왔는지 얇고 투명한 보자기? 같은 걸로 눈물 구슬을 모으는 걸 지켜보는데 앞서 나갔던 알드리치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목청껏 소리높여 외쳤다. 녀석의 눈꼬리에도 얇지 않은 눈물이 맺혀있는 게, 그가 느끼는 환희와 격정이 어느 정도인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을 수준이었다.

- 마을을 괴롭히던 저주받을 최악의 마물들이 드디어 죽었다! 이제… 이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못했어도 좋은지 알드리치는 주먹을 있는 힘껏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인어들도 서로를 껴안은채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뿌리며 환호했다.

잘됐네, 잘 됐어.

인어들은 작업을 통해 오트로스의 사체를 산산조각내기 시작했다. 작게는 인어의 몸집의 100배에서 크게는 1,000배까지 다양한 크기로 자르면서 나와 오트로쓰의 싸움 때문에 사방에 도망가버린 바다 생물들을 불러모아 마을로 운반하는 일에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오트로스의 사체 일부분을 아공간에 집어넣어 챙겨가려고 했지만, 살펴보니 그냥 덩치만 클 뿐이지 껍질의 조직력이나 머리 주머니에 왕관처럼 솟아 나와 있던 뿔들이나 다리의 곳곳에 붙어있던 비늘들은 형편없는 방어력과 강도를 지니고 있어서 가져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렇다고 연구재료로 쓸법한 내장도 죄다 분해해버려 남아있는 게 없고… 그냥 인어들에게 선물로 줘버렸다.

인어 본인들도 짊어지고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른 이형종이 습격해오진 않을까 지켜주려 하니 알드리치가 다가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 비록 오트로스가 우리의 저주에 걸린 상태였으나 그놈이 이 근방의 패왕覇王이었던건 부정할 수 없소. 그 때문에 이 근방에는 이형종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지.

“그래? 그럼 오트로스가 뒈졌으니 다른 이형종 들이 몰려오는 거 아냐?”

- 그렇겠지. 이 일대를 지배하던 패왕이 죽었으니 다른 이형종 들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할 거요. 허나 우리는 이제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것들과 싸워나가며 점점 강해질 것이오. 그리고 이 근방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해비 일족이 되게 할거요.

“그래. 힘내.”

부리부리한 눈으로 절반 가까이 해체된 오트로스를 보며 주먹을 꾸욱 쥔 알드리치는 날 돌아보며 고마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 그대에게 무어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소. 배물리얌에 이어 오트로스까지 잡아주다니.

“신경 쓰지 마.”

대해의 창이라는 적당히 쓸만한 무기도 얻었고 위상력도 1,000만 가까이 늘렸다. 연인들을 좀 더 강하게 해줄 비술도 확보했으니 이 정도면 하루를 써서 얻은 이득치고는 평타 이상이잖아?

처음에는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 나빴고 뤼아르네한테 저지른 실수까지 더해져 마음에 부담이 심했는데 이걸로 속 편해질 수 있겠다.

알드리치는 내 말을 겸양으로 받아들였는지 정말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 이토록 대범한 그대를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 차있던 내 옹졸함이 창피해지는군.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았으니 부끄러워 하지 마. 어쨌든 내가 더 도와줄 건 없지?”

이렇게 말하니 내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져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쿨하게 대응했다.

- 없소. 그런데 그걸 물어보는 이유는… 바로 떠날 생각인 거요?

“뤼아르네한테서 비술에 관해 몇 가지만 더 확인해보고. 걔 먼저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 있어도 되지?”

- …그러시오. 이곳에는 내가 있으면 되니까. 그리고 떠나기 전에 꼭 찾아와주시오.

왜 찾아오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저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니 들어는 줘야지. 알드리치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바로 옆에서 세 마리의 인어가 영차영차 하면서 수백 미터짜리 문어 발을 짊어지고 가는 모습을 보며 오트로스의 사체를 해체하는 뤼아르네한테 다가갔다.

오트로스를 잡은 뒤에 시간이 얼마 없다는 핑계로 비술을 더 외우기 위해 뤼아르네와 함께 먼저 마을로 돌아온 나는 그녀와 단둘이 3층 동글이 건물 위에 앉아 비술을 마저 배워나갔다.

배운 게 아니라 외운 거다. 실험 삼아 모두 한 번씩 써보려 주문을 외우면서 시도해봤지만, 먹통이 되어버린 휴대폰처럼 반응조차 안 하더라. 그래서 그냥 나가면 연인들이랑 누나한테 가르쳐줄 생각으로 달달 외우기만 했다.

내가 배운 건 네 가지.

위상력을 숨기는 불견시不見視의 비술과 비술을 펼칠 경우 자신을 중심으로 일정 공간이 비술을 펼친 생명체가 살기 적합한 장소로 만드는 안전공간창조安全空間創造의 비술. 그리고 물의 정령과 계약해서 정령을 부리는 비술도 외우고 물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비술.

특히 정령 창조는 계약이 아니라 창조의 형태였다. 처음 비술을 외우면 주변의 물의 성질에 따르는 물의 정령이 탄생하게 되고 그 뒤로 쭉 함께 동고동락하며 힘을 키워나가는 육성형이라는 말에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배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역시나 반응도 안 하더라.

쳇.

그리고 안전공간창조는 해신의 보호라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물방울의 하위 버전이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시전자가 살기에 알맞은 주변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에 외웠다.

확실하게 주문과 사상법思想法(주문을 외우기 위한 사상이라는데 이해가….)을 외운 뒤에는 바닷속 생물을 조종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뤼아르네의 말로는 불러들인 것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하며 떨어져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리가 최대 1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 가볍게 포기했다.

그 뒤에는 블로어페치를 찾아가 메리아놀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다.

블로어페치는 내가 오트로스마저 잡았다는 이야기에 작은 몸뚱아리를 잔뜩 부풀린 채 환희에 떨다가 내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는,

- 북쪽의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끊임없이 따라가다 보면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가 나온다고 하네. 그곳에는 대지의 힘이 가득한 신령스러운 산이 있다 하는데, 메리아놀의 순례자들의 마지막 목적지가 그곳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네. 그들을 쫓는 것이라면 그 산을 찾아가야 할걸세.

라는 말을 해주었다. 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반도에 신령스러운 산이라… 뤼아르네가 한 이야기랑 비슷하군.

그녀는 순례자들이 해안선을 따라 동쪽이나 바닷길을 따라 북동쪽을 향하다 보면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것이라고 했었지?

확실한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나저나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라니, 그거 되게 익숙한 지형 설명인데 말이야.

블로어페치는 마을의 근심이 덜어졌으니 축제가 벌어질 거라며 며칠 쉬었다 가라고 날 잡았지만, 손사래를 치면서 할 일이 많다는 말로 사양했다.

3층 동글이 집을 나오니, 블로어페치에게 질문을 할 때부터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던 뤼아르네는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덥썩 움켜잡으며 긴장되고 간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 저도 서하 님을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허락해주지 않으면 안 놓겠다는 듯이 힘을 줘서 내 팔을 잡은 모습에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넌 이 마을의 무녀잖아. 무녀가 막 마을을 나오고 그래도 돼? 그리고 니 동생들은 어쩌고?”

- 무녀의 자리는 다른 일족에게 넘겨주면 돼요! 동생들도 곧 성인이라 제 앞가림은 다 할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엔 안 그런 거 같은데? 지금 뒤에서 놀란 모습으로 굳어있는 카르네와 실레네가 안보이냐?

내가 뤼아르네의 집에서 비술을 외우고 있을 때 자기 몸집의 200배가 넘는 크기의 살코기를 짊어지고 돌아왔던 카르네와 실레네는 계속 우리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는데, 자기 언니가 떠나려 하는 모습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특히 실레네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듯이 굵은 눈물을 방울방울 메달고 있었다.

사실 능력만을 따져보면 이 녀석을 현실에 데려가면 도움이 많이 될 거다. 인어이면서도 뭍에서 생활할 수도 있고 물과 관련된 생활적인 비술도 많이 알고 있고 무엇보다 예쁘고 귀여워서 눈 호강도 되니까.

하지만 이 녀석을 데리고 현실로 나갔다간 내 주변에 두 개의 파벌이 생길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숫자도 딱 맞잖아. 누나, 프랑, 화연이 영은이 이렇게 넷에 미호, 히아리드, 알케마, 뤼아르네.

암흑이나 누호디는 제외하고.

4:4에 위상력적인 면에서도 얼추 비슷하게 된 데다 자기 자신만의 색이 강한 연인들이나 내 노예들… 종… 에이, 하녀라고 하자. 하녀들이 내가 언젠가 본 환영처럼 서로 대립하며 파벌이 형성된다는 예감이 든 거였다.

지금은 초위급이 된 프랑을 중심으로 화연과 영은이가 있고 그 주변에 미호와 히아리드들이 포진해있는 권력 집중제 형태라 다들 사이좋게 지내는데, 이게 사람과 이형종 간에 파벌이 나뉘고 거기서 날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고?

파벌이 없는 지금도 연인들이 때때로 이유 없이 날 괴롭히곤 하는데… 무슨 왕도 아니고 처들과 첩의 파벌 전이 벌어진다니, 절대 사양이다.

“…안 되겠다. 생각해봤는데 널 데려갈 수는 없어.”

나에게 거부당한 뤼아르네는 사랑하는 님에게 버림받은듯한 처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해왔다.

- 흑…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에요? 서하 님께 도움이 될 자신이 있어요! 매일 밤 서하 님께 몸을 바치면서 만족을 드릴 자신도 있어요! 다른 남자들의 씨도 받지 않을게요!

큰일 날 소릴!!

“응. 안돼. 나와 너는 살아갈 장소가 달라. 그리고 앞으로 커나갈 마을에 너만 한 녀석이 빠지면 그 공백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안가? 넌 나보다 마을과 네 동생들에게 더 필요한 존재야.”

- 제게는 서하 님이 더….

“거기까지 해.”

…솔직한 마음을 말하라면, 녀석의 너무 개방적인 성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안 되겠다. 그런 짓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고 정신 조작으로 행동을 조종하는 것도 싫다.

……..

어쨌든 이 녀석의 반응으로 보면 마나 비전의 호감도 영향이 확실하게 들어간 거 같다. 바닷물에 눈알 드러내고 했던 게 삽질이 아니었다는 거지.

마을 한복판에서 신파극을 찍고 있으니 오트로스의 살점을 창고로 옮기던 인어들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구경하기 시작한다. 거기다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 운반 업무가 지체되기 시작하니 알드리치까지 찾아와 한숨을 내뱉었다.

- 뤼아르네, 사도께서 곤란 해하신다. 네 마음은 알지만 네 욕심 때문에 용사님의 앞길을 막아서야 쓰겠나.

지원 사격 나이스!

- 흑. 으으.

알드리치의 일침에 흔들리는 동공으로 날 올려다보는 뤼아르네는 아직 결심을 내리지 못하는 거 같다. 결국, 쐐기를 박는 건 내 손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니가 생각하는거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야. 너는 나에게 도움이 된다 자신했지만, 나는 누구의 무력적인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존재거든. 그리고 그 외의 부분에서 너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난 부족하지 않아.”

무력이 아닌 부분에서는 연인들과 누나가 보조해주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이 녀석이 서류 작업에 뛰어날 거 같지도 않고.

조금 잔인하게 내뱉은 말에 뤼아르네는 결국 눈물을 뿌리며 내 손을 놓고 자기 집으로 헤엄쳐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카르네와 실레네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내게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는 언니의 뒤를 쫓아간다.

인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좀 껄끄러워진 기분에 뒷머리를 긁적이니 알드리치가 한숨을 쉬며 이해해달라는 말을 건넸다.

- 미안하오. 뤼아르네는 마을로 돌아온 뒤로 뤼의 이름을 받을 때까지 그대를 잊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소. 그러는 중에 그대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소. 다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저러는 것이니 이해해주시오.

“…알았어.”

고개를 숙였다가 시야 한 편에 뭔가 반짝이는 걸 발견하고 바라보니 뤼아르네가 뿌리고 간 눈물이 동그랗게 말리면서 맑고 투명한 보석처럼 변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물의 결정을 줏어드니 알드리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눈물방울을 챙기라고 말했다.

- 우리 일족 여성체의 눈물방울은 뭍의 생물들에게 생명 연장의 비약이라고 불린다더군. 일정량을 복용하면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해주며 장수할 수 있게 해준다니 필요하다면 챙기시오.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다. 저 설명대로라면 신체 강화 능력이 없는 누나한테 먹이면 젊은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산다는 이야기잖아? 그러고 보니 아까 오트로스가 죽었을 때 인어들이 눈물을 무진장 흘렸었는데?

아, 그거 전부 뤼아르네가 챙겼….

제길! 그런 건 미리 말하란 말이야! 이 상어 대가리야!! 뤼아르네가 저렇게 도망가버렸는데…. 아아. 다음에 찾아와서 달라고 하면 주려나?

이마를 감싼 채 한숨을 푹 쉬니 알드리치가 피식 웃으면서 3층 동글이 집에 들어가서는 얇고 촉촉한… 해파리 머리 같은 주머니를 가지고 나왔다.

- 그대의 표정을 보니 이게 많이 필요해 보이는군. 그동안 모아둔 눈물방울이오. 원한다면 전부 가져가시오. 아까 오트로스의 앞에서 흘린 눈물도 합친 거라 양이 제법 되는군.

너, 좋은 녀석이었구나! 어림잡아 10ℓ는 될법한 눈물의 결정… 눈물방울을 확인하곤 잽싸게 받아 챙겼다.

“사양 안 할게. 고마워!”

- 내 실수도 눈감아주고 우리 마을의 근심을 모두 해결해준 그대에게 이 정도는 사례의 축에도 끼지 못하오.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배로 갚는다는 우리 일족의 방침상 그대에게 성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지만… 마을이 오랜 기간 황폐했던 터라 보상을 해주고 싶어도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이 보잘것없다 보니 줄 게 없어 슬플 따름이군.

응? 이 패턴은….

- 그대는 우리 일족의 용사이자 영웅, 우리는 절대 그대를 잊지 않고 세상이 끝날 그 날까지 그대를 기억할 거요. 그러니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우리 마을을 다시 한 번 방문해주시오. 그땐 지금 받은 은혜에 제곱하여 사례해주겠소.

“어, 응.”

-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 떠나기 전에 찾아와달라고 한 것이었는데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군.

그런 거였어?

이야. 칼카쿰네 사비 일족에 이어서 알드리치의 해비 일족도 나한테 은혜를 갚겠다고 하네. 평판도 좋아지고 마음의 빚도 지워뒀으니 언젠가는 이 빚을 쓸 날이 오겠지?

자기 집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고 있는 뤼아르네와 그런 뤼아르네를 다독이는 카르네와 실레네를 공간 지각으로 보면서 이 틈에 그냥 떠나야겠다.

알드리치에게 녀석을 잘 달래라고 부탁하니 히죽 웃으면서 대답한다.

- 걱정하지 마시오. 그녀는 그대를 마음에 품었으니 언제까지고 그대를 기다리며 그대만을 생각할 거요.

……이거 책임지라는 말이야, 신경 쓰지 말란 말이야? 껄쩍지근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화법에 찜찜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내 속도 모르고 인어들이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 용사님~! 다음에 꼭 들려주세요~!

- 그땐 저도 안아주세요!!

- 저도 용사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 잘 가세요~~!! 담에 또 봐요~!

어느새 인어들이 모두 돌아왔는지 하룻밤을 꼬박 새면서 오트로스의 사체를 옮긴 인어들이지만 육체적으로 피곤할지언정 정신적인 피곤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날 향해 환호와 작별을 건넨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인어는 하나같이 눈이 충혈된 모습이라 피식 웃으면서 힐링 웨이브 1단계를 쏘아내니 인어들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푸른 빛무리에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다가 금방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서 신기해한다.

알드리치도 놀라서 자기 몸을 더듬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간다. 잘 지내.”

- 다음에 꼭 한 번 들러주시오! 약속이오!!

“알았어, 알았어. 생각나면 들르도록 할게.”

암흑이의 프로펠러로 두둥실 떠오르며 손을 흔들어주니 다시금 인어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뤼아르네도 자기 집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눈물이 가득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기에 녀석에게도 손을 흔들어주고 암흑이에게 신호를 보내 빠르게 수면으로 솟아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콰앙!

- 어둡고 음침한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바닷물에 잔뜩 젖은 녹옥빛의 아름다운 미소녀가 나신으로 뛰어든다.

R모양: 시나리오 쓴 새끼 나와!

A모군: 네?

R모양: 너야? 왜야! 왜냐고!!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후줄근한 남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R모양.

A모군: 켁켁. 자, 잠시 좀 흥분하신 거 같은데 진정하시고...

R모양: 진정이고 나발이고 왜 나만 떨어트린 거야!! 흰 비늘 덩어리도 편입했잖아! 왜 나만 뺀 거냐고!

A모군: 그, 그거야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니까요!

R모양: 이 시발놈이 어디서 약을 팔어?!

그뒤로 소녀는 후보에 끼워달라고 오랫동안 난리쳤다는데, 믿거나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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