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21화 (421/517)

00421  오트로스  =========================================================================

멋쩍어하는 알드리치는 내 옆에 서 있기 쑥스러웠는지 블로어페치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사이 무언가의 비늘로 이어 만든 갑옷으로 드러난 피부를 모두 가리고 소라 껍질 같은 투구를 쓴 뤼아르네는 산호로 만든 지팡이로 3층 동글이 건물 주변에 부산스럽게 모여있는 인어들을 정렬시키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으로 보이는 인어들이 무기와 방어구로 무장하고 뤼아르네의 지시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는 모습은 언젠가 봤던 군대의 사열식을 생각나게 한다.

무기와 방어구로 무장한 머메이드를 구경하고 있으려니 3층 동글이 건물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알드리치가 금색으로 번쩍거리는 창을 들고나오더니 내 옆에 서서 팔짱을 낀다.

잠시 근엄하게 서 있던 알드리치는 곧 해가 지는 밤에 싸움을 시작하려는 게 걱정되는지 내 정수리를 힐끔 보며 물었다.

- 곧 저녁인데 괜찮겠소? 뭍에 사는 생물은 밤눈이 어둡다는 이야기를 블로어페치에게 들은 적이 있소만.

알드리치의 성향이 나쁘지 않다는걸 알게 되고, 나이가 어려서 생각이 짧아 저지른 실수를 금방 뉘우치고 고치는 모습에서 녀석에게 품었던 안 좋은 감정은 털어버렸다. 녀석도 내게 앙심 같은 건 품지 않고 뻣뻣한 태도도 많이 사라진 모습이라 한결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해서 나이에 맞게 고쳐볼 생각 없냐고 물었더니 일족의 장을 맡은 자는 그 품위에 걸맞은 어휘를 사용할 의무가 있다나? 그것도 맞는 말이라 그 뒤로는 더이상 권하지 않았다.

“괜찮아. 내가 여길 찾아올 수 있게 해준 능력 덕분에 시야 같은 건 크게 상관없어.”

- 그건… 다행이군.

다행인가? 어차피 심해바닥이라 햇빛이 안 닿는데 밤이나 낮이나 차이없잖아. 거기다 마나 비전을 키면 빛 한점 닿지 않는 심해라고 해도 회색의 명도차이뿐이긴 하지만 잘 보이고.

살아온 햇수로 따진다면 나와 비슷하거나 더 어린… 아, 난 실제로는 31살인가? 하지만 민증으로는 19살인데, 아무튼 인어 167마리가 무기와 방어구를 끼고 광장에 사열한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곧장 웅성웅성 날 손가락질하며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해하는 인어들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준비 끝났으면 가자. 후딱 처리하고 할 일 해야지.”

뤼아르네가 인어 무리에서 솟아올라 내 옆으로 헤엄쳐와 우아한 자태로 내려서자 알드리치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어들을 보며 목청 크게 소리쳤다.

- 해신의 아들딸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노라! 우리의 아비와 어미를 잔혹하게 학살하고 우리를 억압하던 오트로스의 심판의 날이!!

와아아아아!!! 꺄아아아!!!

- 우리에게 자유를 줄 영웅은 바로 여기!! 무녀 뤼아르네의 구원자이자 사악한 배물리얌의 토벌자! 오트로스에게 종말을 선사할 육지의 용사!!!

서!하!! 서!하!! 서!하!!

…으아. 오글거려서 온몸에 닭살이 솟는다. 멘트가 너무 유치찬란한데 그 멘트에 쓰이는 수식어 전부가 날 향하는 거다 보니 닭으로 변신해버릴 것만 같다!

- 아쿠르, 서하!!

우와아아아아~!!! 서!하!!  서!! 하!!! 서!!! 하!!!!

그만해…! 내 hp는 이제 0이라고…!!

구령을 붙이듯이 내 이름을 연호하며 무기를 치켜들며 호응하는 인어들은 눈동자에 격렬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작 백 수십의 인원이 만들어내는 환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우렁찬 소리가 마을 광장을 가득 메운다.

백수십 마리의 인어의 뜨거운 시선에 내 고질병인 시선집중싫어병이 도질려는 찰나 길이 3m짜리 황금색 산호 창이 내 앞에 내밀어 졌다.

뭐 하는 거냐고 알드리치를 올려다보니 진지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 받으시오. 용사인 그대에게 어울릴 단 하나뿐인 무기요.

두 손에 황금색 산호 창을 받쳐 들고 나에게 내미는 알드리치의 모습에 오늘 하루 봐왔던 소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마을의 무녀에 어울리는 경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뤼아르네를 돌아보며 이걸 받아야 하는 거냐고 시선으로 물었다.

- 대해의 창으로 부디 증오스러운 오트로스의 목숨을 끊어주시길 부탁드려요.

“…음.”

내게 무기는 별로 의미가 없는데. 괜히 짐만 될 거 같아 거절…하려다 이 분위기에서 거부하면 찬물을 끼얹는 행동일거 같아 얌전히 산호 창을 들었다.

와아아~!! 와와!!

역시나 창을 집자마자 인어들의 귀청이 떨어질 거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분위기상 받는 게 정답이었군. 나중에 돌려주던가 해야……

응? 이거 뭐야?

창이… 이거 유니크 템이다.

- 출진!!

환호성이 무색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 알드리치는 뤼아르네와 함께 박차올라 해구 밖으로 헤엄쳐 올라가기 시작한다. 나도 정신 차리고 암흑이의 촉수 프로펠러의 도움으로 그 뒤를 따르자 뒤를 이어 167마리의 인어들도 아가미로 물거품을 내뿜으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수압이 떨어지니 살짝 눈이 아프고 머리가 윙윙거리며 어지러워지는 잠수병이 찾아왔지만 마나 시브로 위상력을 돌리고 신체 강화를 좀 더 단단하게 하니 잠수병은 금방 사라졌다.

그러는 와중에 해구 밖으로 빠져나와 해저 사면을 따라 심해로 내려가던 알드리치는 해저 평원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남쪽으로 반나절 가량을 내려가면 오트로스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오.

“알았어.”

반나절을 가야 시야에 들어온다고? 얼마나 떨어져있는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빛이 닿지 않아 기괴하게 생긴 심해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외계가 이럴까 싶을 만큼 기이한 문양처럼 보이는 해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소름 끼치기도 해서 신경을 돌릴 겸 대해의 창으로 불리는 산호 창을 다시 살펴봤다.

대해의 창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황금색의 산호 창은 장창 수준의 길이에 창날은 산호를 갈아서 붙인건지 뭔지 창대에서부터 창날까지 온통 황금색이다.

확실하다. 위상력이 꽤 많이 쌓였으니 능력은 확실히 유니크 급은 될 거다. 이 창에 어떤 효능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지는 찰나 알드리치가 대화를 걸어왔다.

- 대해의 창이 마음에 드시오?

“응? 음. 뭔가 특이한 느낌이 들긴 해. 그런데 이게 마을에 단 하나뿐이라며. 나한테 줘도 돼?”

아니, 나한테 준거 맞긴 한가? 이걸로 죽여 달랬지 준다는 말은 없었긴 한데.

- 그대에게 어울릴 단 하나뿐인 무기라고 했지 이것 하나뿐이라고는 하지 않았소만.

저거 봐. 준거라는 말은 없잖아.

- 그렇다고 해도 우리 마을의 보물인 건 변함이 없소. 사악한 배물리얌을 물리쳐준 대가라 여기고 받아주시오.

아, 준거구나.

일단 유니크 급이라고 판단되는 무기라 겸양 따윈 떨지 않고 냉큼 고맙다고 한 뒤에 산호 창을 다시 쭈욱 살펴봤다. 옆에서 헤엄치는 알드리치는 내가 대해의 창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살펴보고 있으니 조금 기쁜듯한 얼굴이었다.

아무튼 대해 大海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창이 나한테 어떻게 어울리는지 의문이라 그걸 물어보니 대답은 뒤에서 따라오던 뤼아르네에게서 나왔다.

- 서하 님의 스펙스는 바다처럼 넓고 호수처럼 잔잔한 느낌이에요. 그야말로 어머니인 바다와 흡사한 모습이지요. 대해의 창은 스펙스가 얼마나 넓고 차분한가에 따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창이라 서하 님의 스펙스와 무척이나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한 거에요.

강한 힘이라. 확실히 강철마냥 단단하고 나뭇가지마냥 가벼운 산호 창이라 평범하진 않긴 하다.

대해의 창의 모습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3m가량의 창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가죽이 감겨있었고 창날은 재질을 알 수 없는 비금속 재질로 트라이던트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마치 황금처럼 번쩍거리는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척 봐도 산호로 만든 창처럼 보이지만 단순 조잡한 모습이 아니라 묘하게 예술품처럼 느껴질 만큼 곧게 뻗은 선에서 미적 감각도 느껴진다.

하지만 단순 장식품이 아니라 날카롭기도 꽤 날카로워 보여 슬쩍 소매를 잘라보니 상위급 이형종 가죽으로 만든 포스레더 재킷이 서걱하고 베여져나간다.

“와, 날카롭네.”

공간 지각으로 산호 창을 천천히 살펴보니 예전에 쓰던 천총운검만큼은 아니지만 이스펙트보다 많은 위상력을 품고 있었다. 손을 떼고 있을 땐 몰랐는데 창대를 잡아보니 확실히 알 수 있다.

“힘은 어떻게 발휘하는데?”

- 창을 두 손으로 쥐고 창날을 앞으로 향하며 스펙스를 일으켜보세요.

스펙스를, 위상력을 일으켜보라고? 뤼아르네의 말대로 산호 창에 위상력을 살살 밀어 넣으려 하니 알드리치가 기겁하며 창날을 아무것도 없는 심해로 방향을 돌린다.

그 직후 창대가 푸른색으로 물들면서 부르르 떨리다가 창날의 끝에서 직경 10m는 될 법한 거대한 와류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전방으로 뻗어 나간다!

큐류류류류류!!

기이한 물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며 거센 물살에 몸을 겨우겨우 가누고 있으니 옆에 있던 알드리치와 뤼아르네가 헛숨을 마시는 게 들렸다.

- …무슨.

- 아아! 역시 사도님이세요! 저나 알드리치가 썼을때완 비교도 되지 않을 위력이네요!

“사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 정말… 대단하군. 오트로스의 물화살에 버금가는 소용돌이를 이렇게나 간단히 펼친다니…. 그대는 정말로 그분의 사도일지도 모르겠소.

“사도 아니야.”

거친 물살에도 뤼아르네나 알드리치와 다른 인어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전방으로 폭사 되던 와류를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나도 좀 놀랬다. TP를 5만 남짓 밀어 넣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다니, 이것만 있으면 현실의 바다에서는 무적이겠는걸.

그리고 방금 TP를 밀어 넣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이것도 TP 소비량을 좀 줄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 외에는 몸이 약간 가벼워진 거 같고… 밀어 넣은 TP 때문인지 물속에서 몸을 가누는 게 조금 편해진 기분이다. 물을 움직이고 신체를 조금 강화하는 능력이 있는 건가?

한번 사용해본 결과, 인어들이 이걸 대해의 창이라고 부를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말 이걸 나한테 줘도 돼? 이 정도라면 너희한테도 굉장히 강력할 텐데.”

- 그만한 위력을 내는 건 사도… 서하 님뿐이세요. 과거 그 창을 만들어내신 초대의 무녀님도 그만한 위력을 내지 못하셨다고 했거든요.

- 그대의 스펙스가 대해의 창과 어울려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기에 그런 위력이 나온 거요.

아, 그런가. 근데 아까 듣고 넘기지 못할 이야기가 나온 거 같은데.

“그런데 오트로스의 물화살이 내가 방금 쏘아낸 거랑 비슷한 위력을 가졌다고?”

- 그렇소.

…어째 조금 불…안해할 필요는 없겠지. 그냥 속전속결로 공간의 벽을 써서 지워버리면 될 테니까.

해저 사면을 대충 1시간가량 헤엄쳐서 내려오니 눈앞에 해저평원이 펼쳐졌다. 마나 비전으로 물속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보니 해저 지평선이 눈에 보일 정도다.

- 서하 님. 잠시만 멈춰주세요.

그때 뤼아르네가 날 부르며 멈춰 세웠다. 알드리치와 다른 인어들도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모습에 왜 그러나 싶어 뤼아르네를 바라보니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눈을 감더니 알아듣지 못할 말을 30초 정도 웅얼거리다 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어?”

뭔가 묘한 느낌이 날 뒤덮는다. 나와 암흑이를 동시에 가리는 느낌이 드는 게, 혹시 이게 위상력을 감추는 불견시라는건가? 암흑이도 그걸 느꼈는지 다른 인어들이 눈치 못 채게 아주 살짝 꿈틀거렸다.

- 스펙스를 숨기는 불견시의 비술이에요. 혹시 모르니 서하 님도 싸우기 직전까지 비술을 받아놓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역시… 위상력을 숨기는 방법이 비술이었구나.”

아까 블로어페치가 이형종과의 사투의 역사를 설명해줄 때 들은 거지만 역시나 비술이었다. 이러면 난 또 못 배우겠네.

내가 못 배운 비술이 벌써 세 개다 소인화에 명상법에 이번에 위상력을 숨기는 방법까지. 조금 억울해서 짜증이 살짝 나려고 했지만 뭐… 못 배우는 건 못 배우는 거지.

다행이도 이건 다른 사람한테도 써줄 수 있는 거 같으니 연인들한테 가르쳐주고 필요해지면 써달라고 해야겠다. 내 중얼거림에 살짝 미소 지은 뤼아르네는 맞잡은 손을 꼬물거리며 주의하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 스펙스를 활발히 움직이면 불견시不見視의 비술이 풀리니 조심해주세요.

“풀릴 때마다 새로 써야 하는 거야? 넌 비술을 썻는데도 불견시가 안 풀린 거 같은데?”

-자신이 쓴 비술은 스펙스가 유지될 동안에는 풀리지 않아요.

제길, 버프로 받는 거에만 페널티가 붙는 건가!

위상력을 감지에서 숨겨주는 불견시를 받고 다시 이동을 시작하며 뤼아르네에게 다른 비술은 어떤 게 있는지 물어봤다.

- 음. 산호를 잘 자라게 하거나 마을을 뒤덮고 있는 물방울을 만들거나 유지, 보수하는 거랑 물의 정령을 부를 수도 있고 바다 친구들을 계약으로 부리는 비술도 있어요.

그 외에는 위상력으로도 할 수 있는 보호막을 만들거나 물로 공격하고 물 위를 달리거나 물을 움직일 수 있게 하고 물로 공격하는 등 물과 관련된 능력이 대다수였다. 그중에서도 생활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개껍질이나 산호 열매를 씻는 비술이라니, 그거 진짜 필요한 거야?

그래서 그 비술을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뤼아르네는 알드리치를 바라보고, 알드리치는 내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여 암묵적으로 허락해준다.

녀석의 암묵적인 허락 아래 쓸모 없는 건 빼고 정말 필요하다 싶은 네 가지 비술을 뤼아르네에게서 외우며 이동했다.

진짜 더럽게 멀다… 인어들은 비술을 쓰는지 해저사면을 내려온 뒤부터는 물속에서 엄청 빠르게 이동했기에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턴 뤼아르네의 등에 업혀 이동했다.

인어들의 속도만 봐서는 대충 시속 200km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암흑이의 촉수 프로펠러 추진기가 빠르다지만 시속으로 치면 80km도 안 될 수준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불견시 덕분에 이형종 들은 눈 멀쩡히 뜨고도 인어 무리를 그냥 보내준다는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싸워도 징하게 싸웠을 거다.

그렇게 마을을 나온 지 5시간이 지날 무렵 알드리치가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 고개를 들어 저쪽을 보시오. 오트로스가 보일 것이오.

이동하는 동안 워낙 심심해서 뤼아르네가 알려준 물의 정령을 부르는 법, 위상력을 숨기는 법, 물을 움직이는 비술과 안전지대를 만드는 비술을 어디 잘못 외운 게 없는지 확인하다가 알드리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마나 비전을 다시 발동하니 해저평원의 울퉁불퉁한 지형과 지평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천장처럼 보이는 해수면과 그 위까지 불쑥 솟은 해저산들은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보인다. 그걸 제외하면 숲이 없는 지상으로 봐도 무방할듯한 풍경이었다.

아, 해저 산맥 사이사이에 창 같은 걸로 주욱 긁은듯한 해구가 꽤 보이는데, 이 정도 거리에서 저리 보인다면 실제로는 폭이 수백 미터씩 하는 해구일 거다.

그중에 한눈에 들어오는 건 해저산맥 사이에 불쑥 솟은 산 하나를 여덟 개의 발로 둘둘 감고 있는 무지개색의 거대한 문어였다.

그런데 겁나 크네!

못해도 5km는 떨어져 있는 데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지대가 높은 곳이다 보니 오트로스의 전체적인 형상을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크라켄?”

…진짜 크라켄인데? 알록달록하지만 크라켄 맞다.

- 서하 님은 오트로스 같은 종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 아니, 직접 본건 아니지만, 이야기나 책으로 많이 접했지.”

바다에 등장하는 몬스터중 가장 유명한 걸 꼽으라면 단연 괴물 문어나 괴물 오징어 아니겠어?

두께가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두꺼운 여덟 개의 발. 양의 눈깔이 생각나는 두 개의 눈깔과 여덟 개의 발로 조이고 있는 칙칙한 색의 해저산과는 다른 총천연색의 피부. 가죽 주머니처럼 생긴 대가리에는 뿔 같은 새하얀 뼈가 네 줄씩 일정 간격으로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있었는데 그 마치 뼈로 만든 왕관처럼 보인다.

여덟 개의 발도 군데군데 비늘 같은 각질이 맺혀있어 무척 단단해 보였고 얼핏얼핏 보이는 빨판에는 가시처럼 보이는 게 무수하게 돋아있어 잡혔다간 그냥… 고래라고 해도 고깃조각이 되어버릴 거 같다.

아마도 저 빨판에 붙잡혀 인어들이 빨아 먹혀 죽은 거겠지.

오트로스와 나의 거리를 확인해보기 위해 공간 지각을 확장시켜 최대한 넓혀봤지만, 이런저런 위상력이 많이 느껴져서 저놈을 특정짓기가 힘들다.

눈을 가늘게 뜨고 크라켄을 훑어보고 있으니 알드리치는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이 잔뜩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 그 이야기에 오트로스의 약점 같은 건 적혀있지 않았소?

“약점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어. 공략이라고 해봤자… 저 눈알 근처에 있는 뇌를 공격해야 하지 않을까?”

- 오… 뇌가 저 사악해 보이는 눈알의 근처에 있었던 건가!

- 어쩐지 저 거대한 갓 같은 머리를 공격해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었어요!

- 그래. 뇌가 그곳에 있는데 엉뚱한 곳을 공격했으니 통할 리가 있나! 그곳이 약점이었어!

……별 볼 일 없는 정보에 실망하리라 생각했는데 알드리치나 뤼아르네는 문어도 모르는지 뇌의 위치만으로도 감탄과 희열이 가득한 모습으로 흥분한다. 머리에도 심장이나 주요 장기가 있긴 하지만… 저만한 크기라면 머리 가죽을 뚫기도 힘들어 보이는군.

그보다 크라켄이 문어랑 신체구조가 비슷하긴 한가?

“너희는 문어를 본 적 없어?”

- 무눠가 뭐요?

…내 발음 그대로를 인식하는 걸 보면 비슷한 것도 없나 보다. 문어에 대해 크라켄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대강 설명해주니 뤼아르네와 알드리치의 표정이 있는 대로 일그러진다.

- 그런 하늘 아래 존재해선 안 될 괴물의 새끼라니! 내 맹세컨데 보이는 족족 그 괴물의 새끼를 모조리 죽여버리겠소!

꽤나 격한 반응을 보여주는 알드리치를 진정시키고 오트로스를 계속해서 관찰하며 어떻게 공격해올까, 어떻게 싸워야 하나 머릿속으로 전투를 시뮬레이션해보고 있는데 알드리치가 흥분이 약간 가라앉은 모습으로 날 보더니 씹어먹을 듯이 말했다.

- 깜빡하고 말하지 않았는데, 저 마수 놈은 마치 발에도 지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오. 적으로 인식하게 된 존재가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접근하면 근거리에서는 저 발로 공격하오. 그러다 거리를 벌리면 물화살을, 더욱 떨어지면 여덟 개의 발로 일으키는 소용돌이로 공격해온다 하오.

“음.”

- 블로어페치가 전해준 역사에 따르면 그나마 근거리에서의 공격이 피하기 쉬워 일족의 전사들이 공격을 시도해 발 하나를 자르는데 성공했다 하는데, 그 뒤에 오트로스는 칠흑처럼 시커멓고 까만 것을 뿜어냈고 그 검은 것에 접촉한 일족의 전사들이 하나둘 마비되어 쓰러졌다고 했소.

첫 번째 원정에서 행동의 패턴을 알게 되었고 두 번째 원정에서 발 하나를 자르는 데 성공했지만 먹물에 당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세 번째 원정에서는 발 하나를 자르고 마비 공격까지 피했지만… 두 번째 발을 잘랐을 때 소용돌이를 일으켜 일족의 전사들이 몰살당했지….

알드리치도 그 장면을 본 적이 없을 테지만 자기 일이라 여겼는지 무척이나 사실감 넘치는 동작으로 설명해주었다.

- 전사의 숫자만 충분했다면 어떻게든 오트로스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일족의 수는 계속해서 줄기만 할 뿐이어서 세 번째 원정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시도하지 못했었소. 그러던 차에 그대가 나타난 것이었지.

삶이라는 건 이형종이나 인간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군. 알드리치가 말하는 해비 일족의 역사는 연민이 느껴질 만큼 처절한 이야기지만 난 그냥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 그 이상은 들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봉쇄는 일정량의 충격을 받으면 저절로 풀리게 되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에 하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주저 말고 몸을 피하기 바라오. 봉쇄는 다시 걸면 되는 일이니.

내 일도 아니고 내 가족들이 관련된 일도 아니니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런 말이 나오니 이젠 내가 나쁜 놈이 된 거 같잖아?!

그보다 알드리치가 마지막 성인이라고 안 했었나? 자기가 죽겠다는 말이네?!

내 실패를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 막아주겠다는 말을 듣자 대충하고 튀질 못하게 생겼다. 아니, 진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면 튈 거지만….

어쨌든 알드리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간 지각으로 수심의 깊이를 재보고 저 해저산의 높이와 현재 위치의 거리를 비교해서 대충 어림잡아 놈의 길이를 분석해보니 가장 긴 발 하나의 길이가 2km 정도일 거 같고 머리 길이도 700m 정도 될 거 같다.

더럽게 크다.

바닷속 생물은 원래 이렇게 큰가? 중력의 영향이 덜하면 몸집이 커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거 같긴 한데 말야… 알붐 케투스도 덩치만은 랑그 드란과 버금가는 크기였으니.

잡념 속에 대충 행동할 방침을 정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문어 숙회 먹고싶다... 새콤달콤매콤한 초고추장에 푹 찍어서 소주랑 같이...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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