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6 바다 속의 마을 =========================================================================
“저기 인어 마을이 보인다.”
날 습격하려다 맥없이 죽어버린 거대 바다뱀의 꼬리를 잡고 해구로 뛰어내리며 말하니 암흑이가 어깨 부분에서 머리만 드러내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본다.
=어디 어디?=
“저기 저쪽.”
=우웅, 멀어서 그런지 전 안보여여.=
“좀 있으면 보일 거야.”
그나저나 물 속인 데 인어들이랑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나? 첫째 인어랑 대화해본 경험을 보면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갑자기 인어 마을이 부산스럽게 변한다.
산호 밭에서 작업 중인 머메이드들이 허겁지겁 동글동글한 집으로 숨어들고 마을 안을 헤엄치며 놀던 어린 인어들이 어른들의 손에 잡혀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나와 있던 인어들은 황급히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 집 안으로 피하지만 멀리 나가 있던 이들은 다급히 마을에서 멀어지는 게, 내가 접근하는 걸 눈치채고 나에게 마을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밝게 빛나던 물바울도 급속도로 어두워지더니 마을 전체가 시커먼 암흑에 물들어버린다.
“아무래도 불청객이 된 거 같네.”
=왜염?=
“우리가 해구에서 뛰어내리니까 인어들이 다 집 안으로 도망쳐서 숨고 밝게 빛나던 마을도 어두컴컴해졌어. 거리가 5km 가까이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눈치챈 거지?”
=인어들 중에 고위 이형종이 있는 게 아닐까여? 고위 이형종이 주인님이 접근한다는 걸 눈치챈 거에여!=
“말도 안 돼. 내 공간 지각에는 위상력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
=……비술 중에 위상력을 숨기는 비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여.=
위상력을 숨기는 비술이라, 생각도 못 했다.
“100마리가 넘는 인어들 전부가, 쬐끄만 어린 인어들도 남김없이 같은 비술을 쓴다? 하나도 예외도 없이?”
내 대꾸에 잠시 침묵하던 암흑이는 가 보면 알게 될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이미 가는 중이잖냐.”
=힣.=
정말로 위상력을 숨기는 비술이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배워야 할 거 같다.
해구의 바닥에 도착한 뒤에 암흑이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고받으며 일직선으로 인어의 마을로 향하고 있으니 머메이드 한 마리, 두 마리가 집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불안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고개를 집어넣는다.
이쯤 되자 인어의 마을 전체가 공간 지각 범위안에 들어와서 쓱 살펴보며 성인 인어의 숫자를 세어보니 100마리를 간당간당하게 넘기는 거 같다. 밖으로 도망간 녀석들도 있으니 숫자는 더 늘어나겠지만… 그렇다고 막 수백 마리씩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남은 거리가 4km 정도 되자 굳은 표정으로 머메이드들이 하나둘씩 건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가 3km가 되었을 때 머맨들은 죄다 마을 중앙의 가장 크고 튼튼해 보이는 3층 동글이 건물 속으로 숨어버리고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던 머메이드들이 이형종의 껍질이나 가죽으로 만든 상체 방어구를 입기 시작했다.
2km가 남았을 땐 방어구를 걸친 머메이드 수십 마리가 산호 창을 들고 내가 다가오는 방향을 노려보며 싸울 채비를 마치고 긴장하는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싸울 준비를 마친 머메이드를 하나하나 공간 지각으로 살펴봤는데 내 공간 지각을 감지할 만큼 뭔가 정신적으로 뛰어난 것들은 아닌 거 같다.
근데 뭐야. 남자가 숨고 여자가 나서는 거야? 뭐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8 정도 되는 거 같으니 남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본데.
왠지 부럽다! 여초 현상이라니!
…잡생각은 치우고 이 이상 다가갔다간 진짜 싸움이 날 거 같아 끌고 오던 바다뱀 이형종을 놓고 놈의 몸통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주인님. 더 안다가 가여?=
“더 가면 싸움 날 것 같아. 싸우러 가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서 여기서 누가 나오길 기다려야지.”
=그냥 공간의 벽으로 다 가둬버리고 인어들을 지배해버리는 것도 좋을 거 같은뎅.=
헐… 암흑이 이 녀석이 이렇게나 막무가내 파였나?
“지배해서 어쩌게. 현실로 다 데려가서 바다를 지배할까?”
…라는 말을 꺼냈더니 생각외로 혹하는 기분이다. 그럴싸하잖아, 인어로 이루어진 해양 특수 이형종 부대!
내가 접근하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싸우기 위해 나서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호전성도 갖추고 있고 이형종 들이 많이 사는 바닷속 한복판에 마을을 만들 만큼 능력도 갖추고 있다. 저것들을 죄다 현실로 데려가서 부대를 꾸리면 세계정복도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고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거라고 영국의 탐험가가 그랬잖아. 지금도 전 세계 물동량의 90% 이상을 해로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저 인어들 전부를 현실로 데려가 버리면 저 마을은 폐허가 되어버리겠네.
“……응?”
뭔가 중요한 걸 떠올린듯한 기분이….
=왜 그러세염?=
“아냐, 잠시만 조용히 해봐.”
방금 뭔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언뜻 머리를 치고 지나갔단 말야.
……아. 위상 세계의 폐허 같은 것들은 그런 식으로 생겨난 거 아냐? 다른 시간대의 위상 세계를 탐험하는 능력자들이 발견한 던전이나 도시, 폐허 등은 모종의 사건으로 지성체들이 모두 몰락해버린 흔적.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화가 가능할 만큼 지성체는 절멸해버리고 남은 건 본능에 충실한 짐승 같은 이형 종들 뿐. 그렇게 지성체가 몰락한 마을과 도시는 그대로 폐허가 된 거고 그 덕분에 우리 세계의 학자와 능력자들이 지성을 가진 이형종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거지.
그럼 내가 있는 이 세계가 시간 축의 기준이 되는 기원origin이 되는 건가?
어? 그럼 이 위상 세계에서 미국이랑 캐나다의 국경선에 있는 오대호 근처로 가면 누호디가 살던 도시인 달부가 있을지도?
……그렇다고 치면 그곳에 이스펙트를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부분은 여기서 나가면 연인들이랑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쥔님. 인어 세 마리가 다가와여.=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약간 긴장과 경계심이 가득 묻어나는 모습으로 세 머메이드가 천천히 헤엄치며 다가오는 모습이 공간 지각에 감지됐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물빛과 검푸른 빛, 녹옥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세 마리가 보인다.
세 머메이드는 내가 깔고 앉아있는 바다뱀을 보더니 경악에 찬 모습으로 허둥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날 발견했는지 움직임을 딱 멈추더니, 그중 선명한 녹옥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머메이드가 갑자기 환한 표정으로 산호 창을 내팽개치고 꼬리지느러미를 파다닥거리며 빠르게 헤엄쳐와 날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들었지만, 환희에 찬 표정에 부정적인 감정이라곤 모래 한 알만큼도 느껴지지 않아 경계 수준을 한 단계 낮추며 날 끌어안은 녹옥빛 머리카락의 머메이드를 내려다봤다.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거야?
녹옥빛 머리카락의 머메이드 옆에 있던 물빛 머리카락의 머메이드는 깜짝 놀라며 팽개쳐 친 산호 창을 잡았고 검푸른 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머메이드는 한층 더 경악한 얼굴로 녹옥빛 머메이드를 바라본다.
그러든가 말든가 녹옥빛의 머메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고 싶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신의 사도님! 보고 싶었어요!
“……어어? 뭐야. 너 첫째 인어야?”
날 신의 사도라고 불렀던 건 그 녀석 뿐인데? 그랬더니 녹옥빛 머리카락의 인어는 기쁘다는 듯이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맞아요! 사도님이 살려주셨던 세 자매 중 첫째에요! 절 기억해주시다니, 기뻐요!
“어어.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그런데 첫째 인어는 분명 이형종이었는데? 지금 다시 살펴봐도 첫째 인어의 몸 안에는 위상력은 개미 눈곱만큼도 안 보인다. 어떻게 된 건지 의문을 떠올리다 갑자기 내 머리를 세게 끌어안으며 행복해하는 첫째 인어의 행동에 살짝 놀랐다.
내 머리를 끌어안고 꼬리지느러미를 파닥거리는 첫째 인어는…흠흠. 8개월 동안 바람직하게 자랐구나.
- 혹시 사도님이 이 마수魔獸를 잡으신 건가요?!
“얘가 마수야? 별거 아니던데.”
- 역시…! 역시 신의 사도님이시네요! 이리로 오세요!
첫째 인어는 흥분과 설렘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 손을 잡아끌어 물빛과 검푸른 빛의 인어에게 데려가더니 기뻐하는 목소리로 날 소개했다.
- 마르네, 아리네. 이분이 제가 말씀드렸던 신의 사자님이세요!
- …신의 사자님?
- 정말 그분이야?
- 키가 조금 더 커지셨지만, 신의 사도님이 맞으세요!
첫째 인어의 말에 바다뱀을 보며 당혹과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두 머메이드도 표정이 변하면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 몸을 살펴본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첫째 인어는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주인님이 신의 사도였어여?=
그 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지켜보던 암흑이가 입을 열자 당장 소란이 터져 나온다.
- ?!
- 어디서 들린 말이지?!
- 내 귀가 이상해졌나 봐!
- 나, 나도 귀가 이상해진 거야?!
암흑이의 말에 날 내버려 두고 자기 귀를 만지작거리며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머메이드들을 조금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내 시선을 눈치챈 첫째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내 팔을 잡고 마을로 향했다.
- 얼른 가요! 마을을 소개해드릴게요!
“어어. 잠깐, 저 바다뱀은 너희들한테 선물로 주려고 잡은 건데.”
- 네! 그건 마을의 주민들에게 옮겨오라 시키겠어요! 그러니 어서 마을로 가요!
어느샌가 불이 켜져 환해진 마을에 건물 안에 숨어있던 머맨과 머메이드들, 인어들이 밖으로 나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첫째가 내 팔을 잡고 헤엄치기 시작하자 맞은편에는 물빛 머리카락의 머메이드가 다가와 팔을 잡고 좀 더 빠르게 꼬리지느러미를 젓기 시작했다.
날 끌지 않는 검푸른 머리칼의 머메이드는 먼저 마을로 빠르게 헤엄쳐 들어가더니 다른 머메이드 여럿을 데리고 나와 바다뱀의 사체로 헤엄쳐간다.
우르르 지나가는 머메이드들을 보다가 첫째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지금까지 첫째로만 알고 있었는데.”
첫째 인어의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물으니 첫째는 감격한 얼굴로 내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 제 이름은 뤼아르네에요! 둘째는 카르네, 셋째는 실레네지요!
- 저는 마르네에요.
이름이 죄다 레자 돌림이네. 물어보지도 않은 물빛 머리카락의 인어도 자기 이름을 말하는 걸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니 마을을 감싸고 있는 찬란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두 인어에게 이끌려 물방울 속으로 들어가니 갑자기 사방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태양 아래 서 있는 포근한 기분이라 물방울 밖을 바라보니 쪽빛 물결이 막에 비치고 있었다.
수심 2km 심해의 수압도 느껴지지 않고 햇빛이 닿지 않아 겨울 바다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수온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이 물방울은 틀림없이 비술로 만들어낸 생존을 위한 보호 구역 같은 거다.
마을의 중심부로 다가가니 수많은 인어들이 신기한 동물을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와중에 상어 형상의 머맨이 11마리의 각양각색의 머맨을 이끌고 머메이드들의 사이로 걸어왔다.
상어 머맨은 키가 4m에 달할 만큼 컸는데, 팔다리는 비늘이 붙어있지 않아 정말 사람의 팔다리같이 생겼다. 거기다 근육질이라 물리력도 꽤 강해 보인다. 하지만 위상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어찌 된 거야? 정말 비술의 효과인가?
- 뤼아르네. 로스무스를 데려오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 알드리치. 이분은 로스무스가 아니에요. 신의 사도님이세요.
가까이 다가온 상어 머맨은 굳은 표정으로 뤼아르네를 나무랐지만, 곧 되돌아온 대답에 당혹해 하는 게 느껴진다.
알드리치라는 상어 머맨은 당당한 모습의 뤼아르네가 곤란한지 팔짱을 끼고 상어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날 뚫어져라 살펴보더니 중후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입을 열자 보이는 톱날 같은 이빨이 무시무시하다.
- 당신이 말한 그분 말입니까. 당신 자매들의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외부자를 마을 안으로 데려오는 것은 마을의 규율에 어긋납니다. 그게 설령 당신이 무녀라 해도 말입니다. 무녀의 위位를 이어받은 당신이라면 잘 알 사실이지 않습니까.
- 무녀라서 잘 알기에 그런 거에요. 신의 사도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 ……그렇다 해도.
- 신의 사도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증명하셨다구요!
- 증명이라니, 무엇을 말입니까?
곤란 해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티는 알드리치를 향해 내 옆에 서 있던 물빛의 머메이드도 나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알드리치? 사도님은 이미 사악한 베물리얌을 물리치고 그 시체를 선물로 챙겨오신 분이에요.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못된 베물리얌을 물리치신 점만 봐도 손님으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요?
- 베물리얌을… 혼자서 물리치셨단 말입니까?
간단히 믿지 못하겠는지 상어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리는데, 평소라면 기분이 나빴을 반응인데도 웃음이 나오려 하는 건 상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일 거다.
그만큼 희귀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질 지경이다!
뤼아르네와 마르네와 약간 흥분에 넘치는 모습으로 상어 머맨, 알드리치를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이 마을을 책임지는… 그러니까 촌장 같은 존재라고 봐야겠지. 그런 알드리치의 고민을 해결하고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물방울을 비집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800m짜리 거대 바다뱀의 사체였을 거다.
알드리치의 지시에 따라 머메이드들이 거대 바다뱀의 배를 갈라 내장을 뽑아내고 뼈에서 살을 바르는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졌던 뤼아르네가 두 머메이드 소녀를 이끌고 돌아왔다.
뤼아르네의 손에 이끌려온 두 머메이드 소녀가 쭈볏거리며 다가와 고개를 푹 숙였다.
- 신의 사도님? 카르네와 실레네에요!
- 아, 안녕하세요….
- …….
반년이 넘는 시간 만에 재회한 둘째 카르네와 막내 실레네는 내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하긴, 나한테 친밀감을 과하게 느끼는 뤼아르네가 이상한 거지. 저 친밀감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적극적인 모습이다.
덕분에 인어 마을에 우호적인 평판으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말야.
- 카르, 실레. 보고 싶어 하던 그분이야. 부끄러운 거니?
- 아, 아니야아아.
그나마 둘째는 허둥거리면서 말이라도 하지만, 막내는 큰 언니의 뒤에 숨어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 보고 싶어 했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하냐?
……아.
대충 그 이유를 알 거 같다. 그게 나 때문인지, 아니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암흑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력한 이형종의 기세를 느껴서겠지.
이 마을에 사는 인어들은 이형종인 게 확실하다. 이형종이라면 당연히 드러내야 할 위상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암흑이의 말대로 어떤 비술로 틀어막아 놓았다거나 아이템의 효과를 빌린것일테지.
아무튼 이형종인 두 작은 머메이드 소녀는 내게서 예전의 모습을 느낄 수가 없어 어색한데 거기에 더해서 강력한 기세에 눌려 저러는 거다. 하지만 뤼아르네는 내 덕분에 진화를 이룬 데다 생명의 구함까지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까지 마련해준 나에게 호감을 크게 가지고 있어 헤어지기 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보여주는 거겠지.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상황이 파악되자 인어의 마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침이 순식간에 정해졌다.
무서워하는 애들한테 억지로 다가가 친한척할 만큼 내 얼굴 가죽이 두껍거나 애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간단히 웃으면서 두 아이에게 인사해주고 겁먹은 동생들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보는 뤼아르네에게 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너희들한테서 위상력이 안 느껴지는데, 뭔가 특별한 비술이라도 쓰는 거야?”
원래는 지능이 낮은 생물을 조종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접근한 건데, 이제는 위상력을 숨기고 있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마침 호감도도 넘칠 만큼 높으니 바로 물어보자!
- 아, 그것은….
- 뤼아르네. 설마 그것을 말할 셈은 아니겠지요.
막 입을 열려 하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내 뒤에서 알드리치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초를 친다. 표정은 부드럽지만, 목소리와 분위기는 그것을 말 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었다.
아니, 딱 이야기 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드는 건 뭐냐?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알드리치는 부드럽지만 딱딱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더니 조금은 냉정하게 느껴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대가 우리 마을의 근심을 하나 덜어주었지만, 그대가 궁금해하는 그것은 마을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하고도 중한 요소요. 이것이 유출된다면 저희 마을의 존망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을 두시는 것은 지양해주시길.
상어 이미지답지 않게 중후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마친 뒤에 사뿐히 돌아서서 이제 뼈만 남은 거대 바다뱀의 사체로 헤엄쳐가는 알드리치.
저 자식… 5초만 늦게 올 것이지.
뤼아르네는 내게 위상력을 숨길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 주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알드리치가 한 이야기와 뒤에서 팔과 가죽 갑옷을 잡아당기는 두 동생 때문에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인사가 끝나자 콩 까… 카르네와 실레네는 도망치듯이 달아나버렸고 뤼아르네도 자신이 마을 안내를 시켜주고 싶어 했지만 무녀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알드리치와 함께 가장 크고 동글동글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을의 인어들은 암컷 수컷 할 것 없이 전부 바다뱀을 해체해서 냉장고 건물로 줄줄이 나르고 있어서 날 신경 쓰는 인어들은 없다.
손님으로 받아들였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내팽개쳐진 덕분에 한가로이 이국적…이라고 하기도 그러네. 이종적인 마을의 풍경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수압은 없지만 물흐름이 없어서 움직이기 되게 불편하네.”
=제가 도와드릴까영?=
“도와줘? 어떻게?”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암흑이 덕분에 상당히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큐루루루
=어떠세여?=
“진짜 좋은데?!”
등에 몇 가닥의 촉수를 꺼내 모터보트의 엔진에 달린 프로펠러처럼 회전하기 시작하니 물살을 밀어내며 앞으로 죽죽 나아가기 시작한다. 지상에서처럼 날라다니는 수준으로 이동은 못 하지만 그래도 일반인이 달리는 속도의 두 배가 넘고 편해서 만족스럽다.
적당히 어깨를 틀어 방향을 바꾸면서 움직이는 법을 익힌 뒤에 지름이 1.7km인 마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니 중심에는 냉장고 건물과 가장 큰 건물이 세워져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는 백 채가 넘는 동글이 건물이 모여있었다. 아무래도 인어들이 들락거리는 걸 보니 저 건물이 집의 역할을 하는 거 같다.
동쪽과 남쪽에는 울긋불긋 알록달록한 산호 밭이 펼쳐져 있었고 산호에는 무지개색 동그란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있다. 이 산호들이 인어들의 식량 생산공간인듯하다. 아까 머메이드들이 한두 개씩 따서 가져가거나 먹는 걸 봤는데 저게 주식이겠지.
딱히 도로랄 만한 것은 없었지만, 중심의 건물을 기준으로 십자 형태로 폭이 50m 정도 되는 커다란 길이 있어 그걸 구획으로 삼은 거 같다. 마을을 대충 둘러본 뒤에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푸른색 공간의 벽을 치고 그 위에 앉아 한숨을 내뱉었다.
“바다 생물을 조작하는 능력이 있으면 어딘가 쓰기야 하겠지만 없어도 별로 상관 없을 거 같은데… 위상력을 숨기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을까.”
위상력을 숨기는 방법은 배워두면 진짜 유용할 거다.
내 호기심과 욕심을 무진장 자극하고 있지만 알드리치가 나름 마을의 중요한 위치 일 거 같은 무녀인 뤼아르네에게 경고까지 할 정도라면 이 마을에서 정말 중요한 비법일 텐데, 그걸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을지 수단이 안 떠오른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으니 암흑이가 다시 머리를 빼꼼 내밀더니 산호 밭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주인님. 저기 산호 밭, 저게 의심스러운데염!=
“뭐가?”
=저게 혹시 위상력을 감추는 비밀이 숨겨진 열매가 아닐까여?=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상어맨의 태도를 봤을 때 저게 그 원인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볼 수 있게 해주진 않았을 거 같지 않아?”
거기다 아까 마을 밖에서 공간 지각으로 살펴볼 때 인어들이 간식 먹듯이 한두 개씩 따먹기도 했고 말야.
=네, 넹? 아, 못 보게 했을 거라구여? 으음!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여!=
“좋은 생각?”
부정어를 연달아 붙여 말하니 헷갈려서 어버버하던 암흑이는 곧 진지한 척 목소리를 쫙 깔고 말했다.
=그 상어맨을 정신 조작해서 인어 마을의 비밀을 몽땅 캐내 버리는 거에여!=
“안돼. 그 녀석의 등급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그리고…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인어들이 비술에 뛰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내가 정신 조작을 걸었다는 걸 알아낼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윽. 네엥….=
그다지 도움은 안 됐지만 날 위해 의견을 내준 기특한 암흑이한테 칭찬을 한 뒤에 설명을 해줬다.
“거대 바다뱀은 고위 이형종이었고 그 녀석을 마을의 위험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라면 알드리치도 그다지 등급이 높진 않을 거야. 내가 정신 조작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인어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몰라서 그래.”
=조금 전에 말씀하신 거처럼 무언가 신비한 비술이 있을까봐여?=
“응.”
내가 자기네들 동족을 조종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도 몽땅 사라질 테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변해 날 공격해올 수도 있다.
플라비우스 종족처럼 아무 연관 점이 없고 적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면 막 나가는데 거리낌이 없겠지만 뤼아르네라는 연관 점이 있는데 함부로 학살하기가 좀….
=그럼 그런 비술이 있나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에여?=
“……그러네?”
그 상어맨이 비밀로 하라는 건 위상력을 숨기는 수단이었으니까 다른 비술이 있나 물어보면 되는 거 아냐? 이게 바로 발상의 전환인가!
잘했다고 암흑이를 칭찬해주고 돌아앉아 뤼아르네가 중앙 건물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나오면 물어봐야지.
============================ 작품 후기 ============================
머맨 = 남자 인어
머메이드 = 여자 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