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415화 (415/517)

00415  바다 속의 마을  =========================================================================

으음? 뭔가 눈을 찌르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수평선에서 새빨간 태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위상력을 8,202개까지 셌던 거 같은데 언제 잠들었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니 내 배 위에 웅크리고 있던 암흑이가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아우으아으….=

허우적거리는 녀석을 침낭 위에 올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위상력을 돌리며 간단하게 몸을 풀고 있는데 아까부터 공간 지각에 뭔가가 꼼질꼼질 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형종은 아니라서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더니 해안선을 가득 채울 만큼 늘어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붉은 바닷가재가 썰물에 의해 드러난 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공간 지각으로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는데, 그러는 순간 바닷가재의 평균 크기가 머릿속에 들어온다. 큰놈은 집게발을 제외하고 몸길이가 130cm가 넘고 작은 것도 100cm를 넘어간다!

이형종은 아닌데? 대충 살펴봐도 대부분이 1m 내외를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런 놈들이 500마리가 넘게 모여 백사장을 메우고 있어서 하얀 모래가 아니라 검붉은 융단이 펼쳐져 있는 거 같다.

그 신기한 광경에 쪼그려 앉아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일단의 이형종 무리가 백사장으로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잠에 취해 으에에 거리는 암흑이를 어깨 위에 올리니 잠결에도 꿈지럭거리며 옷깃을 잡고 늘어진다.

침낭과 에어 매트리스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공간의 벽을 바닥만 남기고 다 치운 뒤에 편히 앉아 아래를 지켜보고 있으니 악어, 물소, 표범에 원숭이, 털이 다 뽑힌 닭처럼 생긴 놈에 코끼리와 호랑이, 코뿔소 등등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신기하게도 동물과 이형종이 사이좋게 섞여 있었는데, 그중 맹수로 분류되는 것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최하위 이형종 들이었다. 그런데 그 수가 50을 헤아린다.

그놈들은 백사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닷가재를 향해 돌진했다.

바닷가재도 평범하게 20cm 크기가 아닌 거의 대형견만치 큰 놈들이라 달려드는 최하위 이형종 들과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이형종들도 바닷가재의 앞발에 잡히지 않게 주의하며 등껍질을 깨부수고 앞발 관절을 물어뜯어 무력화시키고 그 살을 파먹는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바닷가재의 집게발에 잡혀 사지가 뜯겨나가고(!!) 허리가 부러져 죽는 놈들도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잠시간의 혈투 끝에 몰려왔던 50마리가량의 동물과 이형종 연합 중에 살아남은 건 고작 15마리. 바닷가재도 100마리가 넘게 죽었다. 이형종 들은 죽인 바닷가재나 죽어가는 바닷가재들의 집게발이나 꼬리를 물고 질질 끌어서 숲으로 들어가 버렸고 바닷가재들도 죽인 이형종의 시체에 몰려들어 파먹기 시작했다.

“쩐다….”

뜬금없고 이해가 안 가는 구도의 전투였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아 구경꾼의 마음으로 그냥 관전하다 보니, 뜻밖에 바닷가재들의 껍질이 두껍지 않다는 걸 알았다.

평범한 동물에서부터 이형종 들도 바닷가재를 잡아먹는 걸 보니 그냥 먹어도 되겠다 싶어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몇 마리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는 뭐… 해먹을 방법도 모르고 요리해줄 사람도 없으니 집에 가져가면 연인들이 맛있게 요리해줄 거다.

“어디 보자~.”

폴짝 뛰어내려 놈들어 머리 위 7m쯤에 내려선 뒤에 돌아다니며 공간 지각으로 크고 살이 가득 든 튼실한 것들로만 골라서 푸른색 공간의 벽을 쳐서 가둬나갔다.

따닥!

“허헐.”

뭔 새우도 아니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발밑에서 바닷가재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날 향해 집게발을 따닥하고 휘둘렀다가 떨어진다. 거의 5m 가까이 뛰어올랐지?

“이 정도나 되니 이형종 들이 당하는 거지.”

=너도 당첨!=

암흑이가 떨어지는 놈을 조그만 손가락으로 가리키길래 놈도 푸른색 공간의 벽을 얇게 쳐서 가둬버리고 그 뒤로도 날 공격하려고 뛰어오르는 싱싱한 놈들을 하나하나 잡으면서 돌아다니는데… 으잉?

=우와. 탑을 쌓고 있어여!=

암흑이 말대로 바닷가재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지 서로 몸을 쌓아나가며 날 경계하기 시작했다.

높이가 40~50cm짜리 들이 몰려드니 7m 높이까지 솟아오르는 건 순식간이다. 수백 마리가 한데 모여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리는 걸 보며 저기다 마나 탄을 쏘아내면 싹쓸이의 쾌감이 느껴질 거 같아 살짝 욕망이 생겼지만, 생태계를 박살 내고 싶진 않아 바닷가재 탑을 피해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체크해둔 놈을 향해 다가갔다.

바닷가재를 가장 고통 없이 빠르게 잡는 방법이 머리를 세로로 쪼개는 거라던가? 눈에서 꼬리 쪽으로 5cm 정도 위치에서 쪼개는 거랬으니….

마나 레이저를 아주 얇고 짧게 뿜어내며 놈들의 머리를 세로로 잘라버리니 바르르 떨던 커다란 집게발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좋았어.”

즉사한 놈의 사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돌아다니며 공간의 벽에 가둔 실한 것들을 죽이고 아공간에 집어넣길 반복하고 있는데 암흑이가 깜짝 놀라며 작은 손바닥으로 내 뺨을 약하게 찰싹찰싹 때리면서 외친다.

=우와, 우와! 주인님! 바닷가재 탑이 움직여여!!=

“헐, 대박.”

어느새 9m까지 쌓아 올라간 기괴하면서도 웃긴 바닷가재 탑을 보며 크크크 웃고 있으니 슬금슬금 날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놈들의 기괴한 모습을 인증기로 촬영하고 있으니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바닷가재 탑은 어떻게 공격하나 궁금해졌다. 어쩌려나 지켜보고 있으니 나한테 접근할수록 탑의 외벽을 담당하는 놈들이 날 향해 집게발을 딱딱거리기 시작하고 꼭대기 부분이 내가 있는 쪽으로 휘어지기 시작하는 게 떨어지면서 덮칠 것으로 보였다.

…했더니 역시나 쏟아져 내린다!

행동이나 움직임이 가재 같지 않게 대단하긴 했지만 저런 거에 당해주면 나한테 죽은 백청이 황천에서 땅을 치고 억울해할 거다.

이번엔 20m 높이 정도로 뛰어올랐더니 날 쫒아 계속해서 서로의 몸을 지지대 삼아 탑이 높아지는데, 이형종이 아닌 생물의 한계인지 아래에 깔린 놈들만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 같다. 그래도 9m짜리를 옮긴 게 어디야.

놈들은 높이 쌓일수록 폭이 급격하게 좁아지더니 18m까지 쫒아 올라왔지만,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지 휘청휘청하더니 우르르 무너져버린다.

=꺄하하하!=

그제서야 날 못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바닷가재들이 죽은 이형종의 사체를 잡아끌고 물속으로 도망간다.

S자로 출렁이다 무너져내린 바닷가재 탑이 웃겼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폭소하다 굴러떨어지는 암흑이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호기심에 바닷가재들의 뒤를 따라갔다.

죽인 이형종을 절반은 먹고 절반은 멀쩡하게 남겨놨다. 거기다 사체를 질서정연하게 끌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도 평범한 가재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백사장에 나와 있던 이유도 이형종을 유인하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이형종도 아닌 바닷가재가 그런 걸 생각하고 행동할 만큼 지능이 뛰어날까?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니고 작은 백사장 하나를 가득 채울만한 수가?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저 바닷가재들을 조종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다.

내가 바닷가재의 뒤를 쫓는다는 걸 눈치챘는지 웃다가 지친 암흑이가 안주머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날 보며 물었다.

=주인님. 지금 바닷가재들 쫓아가시는 거에여?=

“응. 저놈들을 저렇게 움직이게끔 명령을 내리는 녀석이 있을 거 같아서.”

=저 가재들을 조종하는 거라면 이형종이 아닐까여? 근데 저는 위상력이 안느껴져여.=

“…응?”

바닷가재들은 바다 밑바닥을 기면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데, 내 공간 범위 안에는 진행 방향 쪽에 이형종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가야 하나 싶었는데, 위상력 감지 범위가 15km나 되는 암흑이의 감지에도 이형종이 안 느껴진다고?

나도 공간 지각을 최대한 확장시켜 위상력만 감지해봤더니 정말 나아가는 방향 쪽에는 위상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형종이 아니라면… 돌연변이로 지능이 겁나 늘어난 대왕 바닷가재라도 있나? 아니면 굉장히 멀리에서 조종할 수 있는 능력? 그것도 아니라면 비술로 저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패밀리어화 시켰을 가능성도 있겠네.”

만약 이형종이 조종하는 거라면, 바닷가재가 아무리 이형종이 아닌 일반 생물이라고 해도 최소 조종 거리가 15km라면 정말 대단한 거다. 아이템이든 스킬이든 능력이든 뺏거나 배우거나 정신 조작하거나 해서 데려가면 현실에서도 꽤 많이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하게 말해서 현실의 바다에서 이형종을 수색하는데 쓸 수도 있겠지. 심해 같은데는 아직도 사람이 진출하지 못했으니까.

어디에 쓰면 좋을까 생각해보면서 몸을 튕기면서 나아가는 바닷가재들의 뒤를 따르는데 갑자기 일제히 멈춰 선다.

“엥?”

고작 300m를 이동하고 멈춰선 바닷가재들의 움직임에 의아해하면서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니 웬 물고기 인간 한 마리가 보인다!

“뭐야?”

=먼가 보이세여?=

“어. 물고기 인간… 머맨 한 마리가 있는데, 위상력이 안 느껴지네.”

그 머맨은 고등어로 보이는 머리와 몸통에 비늘에 뒤덮인 사람의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생김새는 완전 이형종인데?

놈은 왼손에는 붉은 산호로 만든듯한 작살 창을 들고 오른손에는 소라로 만든 나팔 비스무리한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소라 나팔에서 기이한 느낌이 든다. 위상력은 아니고… 뭐지?

머맨은 바닷가재들을 둘러보더니 괴상한 웃음을 짓고서는 나팔을 부르며 한 방향으로 헤엄쳐나가기 시작한다.

고등어 꼬리를 파닥거리면서 수영하는 머맨의 뒤를 따라 바닷가재들도 전부 이동할 줄 알았는데, 이형종을 끌고 있던 바닷가재만 머맨의 뒤를 따르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갔다.

7개의 이형종 사체를 바닷가재들의 먹이로 남겨두고 어디론가 향하는 고등어 머맨의 뒤를 쫓으니 얼마 안 가 지진이 나서 쩍 벌어진 것처럼 생긴 해구로 진입했다.

그 해구는 깊이가 2km나 될 만큼 깊었는데, 머맨이 향하는 방향으로 공간 지각을 샅샅이 훑어보니 해구의 널따란 바닥에는 동그란 물방울이 꽤 큰 마을 하나를 감싸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마을의 주민은 인어였다는 거다!

공간 지각 범위 안에 약간 들어온 인어 마을을 살펴보며 머맨은 내버려 두고 예쁘장한 머메이드들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니 위상력은 코딱지만큼도 안 느껴진다.

집으로 보이는 건축물은 회백색의 동글동글한걸 여러 개 이어붙인 독특한 모양이었는데 집집이 몇 마리의 새끼 머맨이나 머메이드들이 공간 지각에 감지된다.

인어들의 마을을 이루는 건물도 되게 특이한 게, 대부분이 지름 3~4m 정도의 회백색 동그란 구슬 같은 게 세 개 혹은 네 개가 이어진 모습이었다. 구슬마다 구멍이 두 개 혹은 세 개씩 붙어있었는데 그곳으로 들락거리는 거 같다.

어떤 건물은 동글이가 5개가 넘게 붙어있고 어떤 건 7개가 붙어있고 그 동글이 건물마다 어린 인어들이 놀고 있거나 어른 인어가 있는 걸 봐서 그게 집의 역할을 하는 거 같다.

어떻게 위상력도 없는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형종도 아닌 존재가 마을을 이루고 살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다시 꼼꼼하게 인어의 마을을 포함해 주변을 살펴봤다.

인어들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동그란 물방울은 내 공간지각에 들어온 부분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지름이 1km에 달할 만큼 컸다.

내 공간 지각 범위 안에 들어온 물방울 속에는 120채 정도의 동글동글 건물이 서 있었고 알록달록 색색별 산호가 복잡하게 잔뜩 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밭인지 머메이드들이 산호를 상대로 가지치기를 하거나 접붙이기를 하고 알록달록한 산호에 달려있는 무지개색 동그란 열매 같은 것을 따고 있었다.

머맨들은 대체로 작살 창을 들고 마을 밖을 헤엄쳐 다니며 어패류를 채집하고 있었고 몇몇은 내가 쫓아온 머맨처럼 바닷가재, 바다거북, 해달 같은 것들과 함께 이형종의 사체를 끌고 오고 있었다.

“굉장해.”

=넹?=

“해구 깊은 곳에 인어들의 마을이 있어. 위상력이 없지만 마을을 이루고 집단생활을 하는데?”

=호옹? 위상력이 없어서 이형종 들의 목표가 되지 않나 보네여?=

“어? 음, 그럴지도.”

위상력이 없다고 해도 기본적인 전투력은 있으니까 저렇게 살 수 있는 거겠지.

동화에서나 보던 인어들의 마을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원래 계획은 동물이나 생물을 조종하는 방법을 알아내려 한 거였는데 솔직히 말해서 좀 폭력적인 방법도 염두에 뒀지만… 저렇게 인어라는걸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 흔들린다.

거기다 내가 구해줬던 인어들에게서 받은 착한 이미지 때문인지 더욱 꺼려졌다. 어쩌면 저 마을이 내가 구해준 세 인어 자매들의 마을일 수도 있고.

…응? 근데 내가 구해줬던 인어들은 전부 이형종이었는데?

알쏭달쏭하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마을을 훑어보니, 이 근처에서 이형종이 없는 이유를 알겠다.

머메이드 다섯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척 봐도 이형종으로 보이는 거대한 생선을 해초를 묶어 만든 끈으로 꿰어서 끌고 오는 게 보인다.

그 머메이드들은 마을에 있는 머메이드들처럼 상체를 완전히 노출한 게 아니라 무언가의 가죽으로 만든듯한 갑옷을 걸치고 머리에도 산호나 소라, 조개 같은걸 잇고 깎아 만든듯한 투구에 산호 창을 들고 있었다.

저렇게 사냥해온 이형종의 사체나 어패류는 마을 중심에 있는 초대형 동글이 건물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기 시작하는데, 공간 지각으로 초대형 동글이 건물 안을 살펴보자 안에 사체들이 살짝 얼어있는 걸 발견했다. 냉장고인가?

거기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도 보였는데 그 속에는 마을의 10배는 넘는 어마어마한 공동이 있었다. 무언가가 살고 있는 흔적인가 싶어 샅샅이 조사했지만 공간 지각으로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내가 위상력을 못 느끼고 놓친 건가 다시 자세히 감지해봐도 위상력의 흔적이 안 보인다. 거기다 저렇게 냉장고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라니, 그렇다면 인어들은 위상력이 없는 대신 비술을 사용하는 건가?

조금 접근의 방향성을 바꿀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위상력을 가진 이형종이라면 무서울 게 없지만 내가 잘 모르는 미지의 능력인 비술을 사용한다면 맞붙는 건 피해야겠지.

계속 바라만 봐서는 아무 해결도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안주머니에서 꼬물거리는 암흑이를 불렀다.

“암흑이 방어구 형태.”

=옙!=

턱 아래를 암흑이가 빈틈없이 감싸고 아공간에서 인어의 진주를 꺼내 입에 문 다음 물속을 뛰어들려다가 멈칫했다.

“암흑아. 너 물안경 형태도 될 수 있어?”

=어렵지 않져!=

귀 뒤쪽을 통해 촉수 몇 가닥이 올라오더니 그대로 눈을 감싸며 고글처럼 변한다. 물안경의 원리를 잘 아는지 평평하고 투명해서 바닷속을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오, 좋은데? 잘했어. 물에서 나오기 전까진 이렇게 있어 줘.”

=히히. 넹!=

수심 2km면 어마어마한 수압에 잠수병도 걱정되지만, 신체 강화를 계속 돌리고 있으면 괜찮겠지.

아공간에 챙겨둔 인어의 진주를 입에 물고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다.

턱 아래부터 내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암흑이에 속성 저항력을 높인 타이즈 슈트 덕분에 겨울 바다의 한기가 몸을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얼굴이 문제였다. 하지만 신체 강화를 최대한 돌려 A 클래스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마나 오러도 약하게 돌리니 곧 괜찮아졌다.

호흡은 인어의 진주 덕분에 문제없고 시야도 암흑이가 고글을 만들어 눈에 씌워줘서 앞이 훤하다. 다만 바닷속 깊이 내려가다 보니 시커먼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는 기분이 들어 살짝 무서워져서 마나 비전을 켰더니 바닷속 깊은 곳까지 훤히 보였다.

회색빛이 가득한 해저지만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보단 낫지. 거기다 마나 비전을 켜니 가시거리가 저 멀리 지평선… 해저 지평선까지 보여서 답답함도 사라졌다.

공간 도약으로 바로 인어들의 마을에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적으로 판단하고 공격해올 거 같아서 직접 헤엄쳐서 접근하기로 하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가라앉길 수분, 수심 300m의 대륙붕 바닥에 안착하니 주변이 회색으로 가득한 데다 살짝 기괴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느릿하게 헤엄쳐 다니는 게 눈에 보였다.

걸음을 계속해서 옮기니 대륙붕이 끝나고 해저 사면이 시작되면서 저 멀리 일자로 쩍 갈라진 해구가 눈에 들어온다.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심해에서 마나 비전으로 주변 풍경을 살피며 인어의 마을이 있는 곳으로 팔다리를 놀려 헤엄쳐가는데, 해구 너머 심해 저편에서 길이가 800m에 둘레가 50m는 될법한 바다뱀 이형종이 내 공간 지각 범위 안에 들어오더니 방향을 홱 바꾸며 날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온다!

대가리가 화살촉처럼 뾰족한 놈이 샛노란 불빛이 번쩍이는 눈동자로 날 주시하며 정확히 날 향해 쏘아져 오는 모습에 소름이 끼친다!

녀석은 고위 이형종이었는데, 주둥이를 쫙 벌리고 날 집어삼킬 듯이 접근하는 모습이 고위 이형종답지 않게 소름 끼쳐서 조사고 자시고 바로 호박색 공간의 벽을 놈의 대가리에 쑤셔 넣어 골로 보내버렸다.

“와, 시발. 더럽게 무섭게 생겼네.”

=으. 바닷속은 기분 나빠여…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넘 많아….=

갑옷 상태에서 그대로 앓는 소리만 내는 암흑이를 달래며 대가리가 반으로 쪼개진 바다뱀을 보다가 인어 마을을 바라봤다.

…이걸 인어들한테 선물로 갖다 줄까?

뇌 전체와 두개골 일부가 사라져 밟힌 지렁이처럼 온몸을 배배꼬며 가라앉는 놈에게 다가가서 꼬리를 잡아보니 이걸 잡고 헤엄을 치는건 무리인거 같다.

결국 해저바닥까지 내려가서 바다뱀을 끌어당겨보니 부력이 있는 물 속이라 별로 무겁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끌고 갈 수 있겠다.

거대 바다뱀을 질질 끌면서 한참을 걸어 인어들의 마을이 있는 해구 끝자락에 도착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나 비전으로 보는 회색빛 세상에 유독 밝은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인어 마을이다.

============================ 작품 후기 ============================

홍일점은 꽃이지만 청일점은 개돼지만도 못한 노예... ㅠㅠ 서양도 마찬가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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