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13 9회차! =========================================================================
아침 일찍부터 스케일러들과 드잡이질을 벌이는 미호를 구경하던 암흑이를 데려온 뒤에 누나가 007가방에 챙겨온 타이즈슈트를 입었다.
“이건 저번에 니가 입었던 터틀락 슈트의 분화 버전이야. 물리 방어력을 낮추는 대신 속성 저항력을 크게 끌어올렸어.”
“그래?”
“B 클래스 속성 능력자가 전력으로 쏜 속성 탄에도 수월하게 버티니까… 도움이 될 거야.”
조금 자신 없는 모습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타이츠 슈트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고무도 아니고 천도 아닌 게 촉감이 묘하네.
조금 작았지만 입으니 내 몸의 굴곡에 맞춰지는 게 그러니까… 보정 속옷? 같은 걸 입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입으니까 전신을 압박하는 불쾌한 감각이 아닌 게 맘에 든다.
아무래도 백청의 벼락에 죽을뻔한 데다 공간의 벽이라는 물리적인 방어수단이 있다 보니 속성 방어에 중점을 두고 만든 듯하다.
전신에 찰싹 달라붙은 타이츠 슈트를 입은 다음 옷을 챙겨입는데 은은한 홍조를 띄우고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가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니가 원한 조건의 검을 몇자루 찾긴 했는데 구매하는 데는 실패했어.”
“검?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안 돼?”
“응. 그들도 돈에 구애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돈만 가지고는 안될 거 같아.”
천총운검이 박살 난 뒤에 백청을 토막 내는데 썼던 기술을 재현해보기 위해 위상력이 깃든 검을 찾아봐 달라고 누나한테 부탁했었는데, 세상에 위상력이 담긴 무기는 많이 없었고 그중에 검은 더욱 적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수준의 검을 가진 사람들은 다들 검으로 한가락 한다거나 집안의 가보로 여기고 있어서 금전적인 요소로는 구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하는 수 없지, 뭐.”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랜슬롯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아론다이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맺힌다. 묘하게 익숙했던 느낌을 주는 그 검이라면 기술을 재현해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계속 구해는 볼게. 그리고 서하야.”
“응?”
“능력자 연합에서 서하 니가 자꾸 이형종을 위상 세계에서 데리고 나오니까 위기감이 느껴지나 봐. 본부장이 반출을 자제해줬으면 좋겠다는 문서를 보내왔어.”
본부장이라면 아란 셰이커군. 겁나 잘생긴 서양 남자가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문서라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한테 편의를 많이 봐준다고 했지만 이번에 (그들이 보기에는)고위 이형종을 알케마를 포함해서 19마리나 데리고 나온 건 그들 재량으로도 봐주기 힘들다는 걸로? 그런데 누나의 표정은 그런 거랑은 좀 거리가 먼 거 같다.
“확실히 그동안 나한테 많이 굽히고 들어오긴 했지. 데리고 나온 건 어쩌고? 되돌려 보내래?”
프랑이 건네주는 포스레더 가죽바지와 재킷을 걸치면서 물으니 누나는 팔짱을 껴서 가슴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능력자 연합 대리인의 말로는, 상부에서는 니가 그 이형종 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폭주해서 날뛰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고 해. 이형종이 날뛰어서 피해가 생기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엄연한 능력자의 일원인 너를 연합은 변호해주기 힘들대.”
“뭐야. 그러니까 이형종이 날뛸 상황이 될 거 같으면 알아서 처분하란 뜻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 고민하고 있으니 뒤에서 식후 커피를 쪽쪽 마시고 있던 영은이가 한심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니 그게. 완전히 "지금까지 우리가 너한테 협조를 많이 해줬으니 앞으로도 우리 협조를 받으려면 이무기의 사체를 나눠달라." 이거니?”
“그건 너무 노골적이구요. 제가 살펴본 대리인의 모습에는 우려스럽다는 이유가 7할 정도에 다른 사심이 3할가량 섞인 거 같아요.”
…갑자기 백청의 사체 이야기가 왜 나오지? 초위 이형종의 사체가 나오니까 욕심이 나서 일부러 건드려본다는 거야? 누나의 대답에 영은이는 연합의 수작이 같잖다는 듯이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서하가 어떤 존재니? 홀로 미국과의 파워게임에서 이긴 존재잖아. 그런 인물에게 "우리는 이무기의 사체에 관심이 많으니 연구 표본을 제공한다면 이전과 같이 비호해주겠소~." 하는 속내를 지닌 자를 파견할 리 없잖니. 본부장이 시하 너에게 직접 통화를 하지 않고 대리인을 시켜 문서를 전달하게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일걸?”
“하지만 저번에 만난 본부장은 모사가로는 보이지 않았는걸요? 본부의 행정이 본부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권력집중제인걸 생각했을 때 그의 의사와 다른 처리가 내려질 거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어쩌면 다른 이유, UN의 입김을 받았다거나 IWO에서 언질이 있었다거나 할 수도 있지만, 견제 목적이라는 건 확실할 거야. 그리고 시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존재가 속이 얼마나 썩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해.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일수록 속이 썩어있거나 진하게 썩을 자질을 크게 갖추고 있다는 걸 이해하렴.”
북극의 겨울바람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말에 누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누날 간단히 고뇌에 빠트린 영은이는 날 향해서는 벛꽃이 필 무렵의 봄바람처럼 훈훈한 미소를 보여주며 입을 연다.
“물론 우리 서하는 그런 썩은 음식물쓰레기 같은 자들과는 다르지만.”
예쁘게 웃는 영은이한테 얼떨떨한 기분에 마주 웃어주니 한참 고뇌하던 누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더니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중요한 사항은 최고책임자가 결정해야지. 어떻게 할래?”
“음, 그러니까 연합한테 뇌물을 줘서 이번 트러블을 막자는 이야기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앞으로 연합의 비호를 받지 못하면 언론적으로 뭇매를 맞을 일이 많이 생길지도 몰라. 일반 시민들은 위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혜텍만을 볼 뿐이지 더 깊은 방향은 생각을 하지 않으니 연합이 너에 대해 악의적인 비방을 쏟아내면 거기에 휘둘려 악의적인 글들이 쏟아질 게 뻔하거든.”
“우와 그거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이야긴데.”
“맞아. 상당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야. 그러니 연합에게 적당히 떡고물을 던져주면서 지금 관계를 지속해나갈지, 아니면 연합의 비호가 필요 없는 만큼 그들과 척을 져서라도 우리 행동을 제지하려는 그들에게 제동을 걸지 정하라는 거야.”
흠…. 딱히 사서 적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맥없이 끌려다니며 휘둘리는 건 사양이다.
“지금 당장 척을 지면 누나가 말한 귀찮은 일들이 많이 벌어질 테니 우리도 적당히 대책을 세우고 대책을 실행할 때까지만 친하게 지내. 타국과의 관계야 우리가 에너지 수출국이 되면 눈치 안 봐도 될 테고 우리나라 국민만 쓸데없는 소리에 휘둘려서 나한테 개…강아지 소리만 하지 않게 해놓으면 상관없어.”
황급히 욕설을 순화하는 걸로 말을 돌리니 누나가 곱게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쪽으로 돈이 많이 들 텐데, 예산이 어디 보자….”
“내 배당금은 집 짓는데 빼곤 거의 안 썼지? 그걸 전부 써도 괜찮으니까 연합이 쓸데없는 수작질을 부리더라도 피해가 없게끔 대책을 확실하게 세웠으면 좋겠어.”
잠깐 생각해둔 걸 이야기하니 누나도 싱긋 웃고 영은이도 잘 컸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그쪽은 나한테 맡겨.”
“나도 돕게 해주렴.”
“아주머니가 도와주시면 무서울 게 없죠.”
두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무시무시한 여자 둘이 손을 잡은 모습을 보니 능력자 연합이 불쌍해질 정도다. 나중에는 본부장이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게 아닐까?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프랑은 이야기가 끝나자 손에 들고 있던 갈아입을 옷과 속옷 등이 들어있는 가방을 내게 건네준다.
아공간에 가방을 집어넣고 누나와 프랑과 영은이랑 정원으로 나오니 탁 트인 정원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토지가 하도 넓으니 종합 운동장이 다섯 개가 들어서도 넉넉할 만큼 크지만 들어선 건물이라고는 북쪽 끝의 저택과 남서쪽 끝의 화연이 수련용 체육관, 남동쪽 끝의 스케일러들이 있는 허니콤과 그 옆의 알케마의 연못뿐이다.
“내가 이런저런 덩치가 좀 있는 것들을 많이 데려 나오니까 아예 장소를 하나 마련하면 좋겠는데.”
“위상 세계를 들락거릴 넓고 탁 트인 장소 말이지? 너 들어가 있는 동안 적당한 거 만들어둘게. 허니콤 옆자리면 되지?
“응.”
안주머니 안에서 졸고 있는 암흑이를 확인했다. 녀석은 저택에서 진지한 일 이야기가 오가자 흥미 없다는 모습으로 검은색 가죽 재킷 안주머니에 기어들어갔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잠에 빠져들려 하는 거 같아 주머니 겉을 툭툭 건드려 녀석을 깨웠다.
=우힝.=
“더 중요한 이야기는 없지?”
“응. 돈 많이 벌어와~.”
“그래그래. 난 그냥 돈 벌어오는 기계지.”
몸조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 벌어 오라는 말이 먼저 나오다니, 내심 서운해서 투덜거리니 누나가 까르르 웃으면서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준다.
“돈 많이 벌어오세요.”
윽, 프랑 너마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내 팔을 껴안고 배시시 웃는 프랑에게 이마에 꿍 소리가 날 정도로 박치기를 해주고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영은이한테도 손을 흔들어줬다.
이번 목표는 메리아놀을 찾는 거다! …가능하면.
회차는 일반 능력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고 얼마나 위상 세계에 익숙한지를 나타내는 솔직한 숫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회차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어졌지. 내가 원한다면 5일의 입장 쿨타임 없이 현실 위상 세계 중세 시대를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무한정으로 들락거릴 수 있으니까.
백청을 다시 만났을 때가 5회차였고 죽였을 때는 6회차였지만 그 뒤에 저주 때문에 한번 왕복한 게 7회차, 누나와 함께 위상 세계에 다녀왔을 때가 8회차였다.
그리고 이번이 9회차지.
보통 능력자들은 10회차까지는 뉴비라고 부르는데 난 뭐… 훗.
위상 세계로 넘어가면서 잡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만약을 대비해 내가 나타날 장소 주변을 공간 지각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 결과, 내가 나타날 장소에서 5km 떨어진 언덕 위의 나무에 털이라곤 한 올도 없이 분홍색 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중위급 원숭이 이형종 한 마리가 이쪽을 살펴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위상 세계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니 소리를 내면 들킬세라 입을 꾹 다물고 올라탄 나뭇가지를 위아래로 마구마구 흔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주둥이를 열어 소리를 안 내면 뭐해. 저렇게 나뭇잎이 마구 스치며 부자연스럽게 촤아아 촤악 하는 소릴 내는데.
=주인님. 저기 동쪽에 이형종 한 마리가 주인님을 보고 흥분하고 있어여.=
“응. 나도 봤어. 좀 멍청한 놈이네.”
날 감시하기 위해 있는 녀석 같은데 말야. 녀석은 한동안 난리를 피워 새고 동물이고 다 도망가게 만들더니 나무에서 뛰어내려 근처에 있던 밀림을 향해 두 발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리는 모습이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든 채 목도리도마뱀처럼 두 다리를 번갈아 겅중거리며 뛰어가는 꼬락서니가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생김새는 일본원숭이랑 비슷하게 생긴 주제에 나무를 타고 이동하거나 해야지, 뒤뚱거리면서 땅을 달리는 이유가 뭐야?
그보다 숨어서 기다린다는 건 전혀 이형종답지 않은 행동이다. 뭐를 위해 나무 위에 숨어서 날 기다렸는지, 내가 나타난 걸 확인하고 어딜 가는지 궁금해져서 하늘로 뛰어올라 호박색 공간의 벽을 펼치며 녀석의 뒤를 조심스레 쫓았다.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공간 지각으로만 녀석을 쫓은 지 약 1시간, 그다지 빠르지 않게 이동하는 녀석이 향하는 곳은 거대 실버 뱅이 나한테 잡혔던 커다란 바위 언덕인 걸 눈치챘다. 그도 그럴게 놈은 원숭이인 데다 일직선으로만 달리고 있는데 그걸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암흑아.”
=넹?”
“지금 쫓는 저 원숭이 위상력을 기억해. 조금 기다렸다가 멀리서 쫓아가야겠다.”
=넹.=
바위 언덕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등급이 높은 녀석이 있을지 모르지만 위상력을 감지하는 이형종의 특성상 날 감지했더라도 의심하지 못하게끔 평범한 날것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나무 아래에 숨어있는 40cm짜리 최하위 도마뱀 한 마리 앞에 뛰어내려 공간의 벽으로 지워버렸다.
이 정도면 별다른 의심을 안 사겠지?
잠시 기다리면서 원숭이가 내 공간 지각 밖으로 나가길 기다렸다가 이번엔 밀림을 벗어나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원숭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놈이 달리던 속도를 떠올리며 천천히 나아가는데 암흑이가 내 뺨을 작은 손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쥔님. 그 원숭이가 멈춰 섰어여.=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겠어?”
=대충 11km 정도 떨어진 거 같아여!=
그 정도면 내 예상과 비슷하군.
=서너 마리가 뭉친 거같이 덩치가 큰 위상력이 원숭이의 앞에 있는 거 같는뎅.=
“…뭔가 보고를 하는 건가?”
어차피 놈들의 이야기를 근처에서 옅들을 수 있을 만큼 내 은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위상력을 감지하는 놈들 특성상 몰래 듣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공간 도약을 연속 두 번 펼쳐 바위 언덕의 하늘 위에 나타났다.
끼이익! 꺄악! 꺄후 까우!
눈에 들어오는 상황은, 바위 언덕 정상에 세 마리의 덩치 큰 원숭이 이형종이 앉아있고 날 감시한 침팬지 이형종은 바위 언덕 아래에서 깩깩거리며 뭔가를 떠드는 모습이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세 마리의 유인원은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어 날 쳐다본다.
“어? 저거, 가운데 있는 놈은 피스터머네.”
스테로이드 먹고 하드 트레이닝 헬스를 한 것처럼 근육을 키운 털이라곤 하나 없는 민둥살의 마운틴 고릴라. 화연이가 타임 리버를 만들기 위해 상대한 고위 이형종과 같은 종이다.
=우엑. 징그럽게 생긴 놈임다.=
암흑이말대로 가운데 사람 거시기같이 생긴 게 덜렁거리는 모습이 진짜 징그럽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마구마구 올라온다.
“저 원숭이가 뭐라고 하는지 알겠어?”
침팬지놈도 그제서야 날 발견했는지 공중에 발판을 만들어서 서있는 날 손가락질하며 꽥꽥거리길래 암흑이한테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그냥 개나 고양이가 멍멍 냥냥거리는거랑 같아여.=
언어를 만들어 대화를 할 만큼의 지성은 없다는 거지? 피스터머는 날 발견한 뒤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핏줄이 돋은 살벌한 눈깔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거 실버뱅 아냐? 피스터머의 뒤에 있는 은색 원숭이는 카멜레온 고위 아종과 싸우다 도망간 그놈인데 살아남았었네.
놈은 나와 피스터머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바위산에서 내려와 밀림으로 사라졌다. 그놈을 잠시 놈을 공간 지각으로 살피다가 다시 피스터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릴라의 단어 학습 능력은 뛰어난 편이라서 2천 자 정도의 단어를 배우고 수화로 간단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라는데, 저놈은 어떠려나?
시험 삼아 녀석에게 마나 보이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왜 부하를 시켜서 날 감시하게 한 거지?]”
우워워워웤!! 우후! 우호우!!
둥둥둥둥둥 쿵쿵둥둥.
내가 입을 열자 곧바로 무지막지한 흉근 위로 주먹을 두드리며 포효를 지른다. 마치 북을 치는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지는 가운데 스텀핑까지 하기 시작한다.
=저놈이 미쳤나?=
고릴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암흑이는 고릴라의 드러밍을 자해하는 모습으로 보는지 어이없어하지만 나는 저 행동의 이유를 알 거 같다.
고릴라의 자기 가슴을 두드리는 행위는 자기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한 거다. 그러니 녀석의 저 행동은 지금 자신이 이 지역의 지배자라고 주장하는 거겠지. 그리고….
“내가 전 두목을 죽였다는걸 아는 거야.”
=전 두목을 잡으신거에여?=
“응. 저번에 누나랑 왔을 때.”
피스터머는 몸 안에 위상석이 없는 고위 이형종. 저번에는 거대 실버 뱅이 죽으면서 포효를 질러 일제 공격을 시켰었다. 그 와중에 저놈이 살아남아 두목의 자리를 차지한 거 같은데…. 부하를 시켜 내가 현실로 넘어간 장소를 감시하게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
크와아아아우!!
두두둥 둥둥둥둥
놈의 뒤에 오랑우탄으로 짐작되는 금색 털의 원숭이는 피스터머의 드러밍을 우묵한 눈으로 지켜보더니 손을 뻗어 흥분에서 광분으로 넘어가려는 피스터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웤!!
잔뜩 흥분한 핑크핑크한 피스터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잡은 금색 오랑우탄의 팔을 쳐내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노려보는데, 오랑우탄은 그냥 가만히 피스터머를 바라본다.
…후욱!
“저것도 그냥 꽥꽥거리는 걸로 들려?”
=넹.=
흐음…. 에이, 귀찮은데 그냥 가버릴까.
아니다. 누나는 밀림 밖의 근처에서 현실로 돌아갔잖아. 만약 사고라던가 뭔가 일이 생겨서 혼자 들어올 일이 생기면….
절로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돌아간다. 여자 능력자를 생포해서 생식 도구로 삼는 이형종은 주로 포유류, 그것도 원숭이 과에서 많이 일어나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했더니 살심이 뭉클거리며 퍼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냥 다 죽여버려야겠다. 하는 김에 우리 뒤쪽을 따라오던 검치호도 찾아서 뭉개버려야….
=주, 주인님.=
내 목덜미에 달라 붙어있던 암흑이가 달달 떨면서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퍼트렸는지 겁에 질린 암흑이의 모습에 조금 미안해져서 손가락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피스터머는 딱딱하게 경직되어있었고 금색 오랑우탄은 죽음을 각오했는지 온몸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감시역이던 침팬지 이형종은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아예 다리 사이에 대가리를 파묻고 덜덜 떨고 있다.
“이거, 살기가 점점 강해지는 거 같은데. 중위 이형종이 패닉에 빠질 정도라면 일반인은 심장마비에 걸리겠다.”
=주인님이 진짜루 화내시면 진짜 무서워여….=
“그래. 미안.”
진짜를 반복해서 쓸 만큼 무서웠는지 암흑이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에서 사람을 심장마비 걸리게 만들고 살인자가 안 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이번엔 위상력을 돌리며 호박색 공간의 벽으로 놈들을 고통 없이 보내버리려 하는데, 싸울 기색이 가득해 보이던 금색 오랑우탄이 다급히 앞으로 나오더니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리며 끙끙대기 시작했다.
표정도 한껏 불쌍하게 짓고서 날 바라보며 끙끙거리는 건, 나에 대한 복종을 표시하는 건가?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으려니 금색 오랑우탄은 다리보다 두 배는 족히 긴 팔을 뻗어 피스터머를 잡더니 옆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경직되어있던 피스터머는 금색 오랑우탄의 손에 끌려다니면서도 저항할 생각도 못 한다.
이형종 들은 보통 베이스가 되는 종족의 습성을 많이 따르긴 하지만 저렇게 오랑우탄스러운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이형종이 무력에서 밀린다고 능력자에게 굴복했단 이야기는 한 건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집에 있을 때면 연인들이랑 노닥거리고 맛난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정보 수집마저 게을리한 건 아니다.
=저 원숭이들이 주인님한테 굴복한 거 같은데여?=
“내 몸에 있는 위상석 덕분에 저놈들의 눈에는 내가 유인원의 아종으로 보이나 보다.”
=그래서 주인님한테 복종하는거군여?=
그 말에 머릿속에 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면서 저 녀석이 보여준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 저놈들이 나한테 보였던 특이한 반응들은 전부 원숭이 집단의 룰에 따른 행동이었던 거야.”
가슴을 두드리는 드러밍에 다리로 땅을 내려찍는 스텀핑에 내게 보이던 적의는 적의가 아니라 투기였던 거다. 아니, 전 두목을 쓰러트리고 두목 자리에 오른 내가 영역을 팽개치고 딴 곳으로 가버린 분노도 포함되어있었겠지.
…고개를 조아리는 두 원숭이 놈에 대한 처분을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놈들의 앞에 뛰어내렸다.
============================ 작품 후기 ============================
성격 모난 친구 옆에 있으면 덩달아 뭇매를 맞는 법이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