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8 변화하는 세계 =========================================================================
내가 암흑이를 위상 세계에 데려가는 바람에 통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그리 생각하는 건 영은이뿐만이 아닌지 누나와 프랑도 침묵한 채 진지한 얼굴로 거실의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위상 세계 통합은 역시 나 때문이구나 해서 의기소침해지려는데 영은이가 빙긋 웃으면서 내 앞에 다가와서 허리를 숙여 뺨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통합은 우리 서하 잘못이 아니란다. 위상 세계가 나타나고 216년이 지났잖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통합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어.”
그런…거야? 위로받는 느낌에 영은이를 올려다보니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도 영은이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며 입을 열었다.
“너 말고도 정신 조작 능력자가 조사와 해부를 위해 현실로 살려서 데려온 이형종도 많아. 그것들은 능력자 연합의 검수를 받아 현실에 위협이 되지 않을 특정 이형종만 데려온 거였지만. 그리고 능력자 연합에서 애완용으로 사육이 허가된 최하위 이형종을 키우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거든?
정신 조작 능력자가 생체 연구 표본을 목적으로 현실에 데려온 이형종이나 애완용으로 키우기 위한 이형종들이 위상 세계로 다시 넘어갈 확률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어.”
영은이는 앞으로 흘러내려 날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리고 암흑이보다 앞서 현실로 넘어왔다가 다시 위상 세계로 돌아간 이형종이 있었을지 몰라요?”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다만 자기 위상 세계의 시간대로 되돌아갔을 뿐이었겠지.”
아… 여름방학 전에 체육 시간때 아이들과 타임 패러독스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게 떠올랐다.
“그런 건가. 암흑이는 하철수가 데려 나온 녀석이었고 그 녀석을 내 위상 세계로 데려간 덕분에 암흑이가 존재하던 시간대 이후가 모두 통합되어버린 거구나. 그러니까 타임패러독스가… 위상 세계의 통합이란 형태로 나타났다는 거네.”
“……!”
“어…?!”
내 혼잣말에 누나와 영은이의 머리 위로 전구가 하나 떠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을 큰 소리가 나게 마주친 누나는 확신에 찬 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런 거였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많았었는데…! 니 말대로라면 아귀가 맞아!”
“아직 한 가지 더 확인해볼게 남았잖니? 암흑이가 존재하던 시간대 이후가 암흑이의 시간대에만 통합되었는지, 아니면 죄다 밀려오면서 우리 서하의 위상 세계와 같은 시간대에 통합되어가는지를 검증하는 게 중요해.”
“그걸 확인하는 건 간단하지 않을까요? 레이드 팀 내에 가장 위치 확인이 쉬운 장소를 골라내서 진입시킨 뒤에 서하더러 그 장소에 찾아가라고 하는 거예요!”
“맞아. 지금 당장 추산에 들어가야겠는걸.”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누나는 바로 거실을 뛰쳐나가 버렸고 영은이도 "이럴 때가 아니지. 오늘은 쉬려고 했지만 나도 출근해야겠어!" 라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아래층으로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그러니까, 나무뿌리에 비유하면 한 곳을 지점으로 그 부분에서 뻗어 나간 뿌리가 모두 사라진다는 이야기지? 내가 말해놓고서도 헷갈리네.”
“그런 거 같아요. 으음. 조금 당황스럽네요.”
“나도 그래. 근데 누나나 영은이나 저렇게 급하게 나갈 이유가 있나 모르겠어. 통합되면 그냥 통합되는 거지.”
“후후. 통합으로 생겨날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게 아닐까요? 영은도, 시하 님도 보통 사람은 아니니까요.”
“아~ 난 전혀 모르겠는데. 누나랑 영은이가 내 사람이라는 게 참 다행이야.”
자리를 옮겨 프랑의 옆에 앉아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중얼거리니 프랑이 새침한 표정으로 내 콧등을 살짝 누르면서 칭얼거렸다.
“저는요? 저는 필요 없는거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
히죽 웃으면서 힘껏 안아주니 프랑도 배시시 웃으면서 내 이마에 입을 맞춰줬다.
점심이 지났을 때 엄마와 아빠가 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시고 저택을 구경하러 찾아오셨기에 소피아를 앞세워 저택 안내를 시켜드리는 김에 나도 따라다니며 아직 잘 모르는 저택 내부를 구경했다.
“세상에, 세상에!”
할머니와 아빠, 외할아버지는 그냥 "놀랍구나." 한마디만 하시고는 덤덤하게 소피아와 두 명의 메이드 누나에게 안내를 받으면서 저택 내부를 구경했는데 반대로 엄마랑 외할머니는 온갖 예술품으로 장식된 복도와 고급 가구가 채워지는 동편의 손님방, 서편의 편의시설을 보며 연신 호들갑이셨다.
“집이 크다 크다 했지만 이 정도나 클 줄은 몰랐구나! 우리 막둥이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됐어요. 그렇지 않나요, 사돈?”
“그렇지요. 우리 강아지가 사는 곳이 왕궁이라고 불린다니 참으로 대단하지요.”
“이 정도는 돈만 있으면 되는데요 뭐….”
외할머니의 호들갑이랑 할머니의 대꾸에 민망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더니 외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시며 내 어깨를 두들겨주셨다.
“이만한 토지를 주택용으로 사용허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는 가뜩이나 땅이 좁아 산을 허물고 바다를 메워 토지를 늘리지 않느냐. 이만한 집을 가진 것만으로도 네가 쉬이 볼 수 없는 사람이 된 증거인 게야.”
그 뒤로 뒤뜰에 있는 테니스장과 온수 풀장에 헬기 포트와 주차빌딩에 저택 뒤뜰에 꾸며진 산림욕장까지 구경하셨다.
저택 내외부를 돌아보는 데만 1시간 가까이 걸려 조금 지치신 할머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쿨하게 집 구경을 다 했으니 그만 돌아가시겠다고 하셨다.
“벌써 가시게요? 오셨으니까 며칠 쉬시고 가시지.”
“이렇게 넓은 집은 정신이 산만해서 힘들구나. 할미는 그냥 집이 편해.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렇게 말씀하시며 프랑을 보고 빙긋 웃으시는 할머니.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눈치챈 프랑은 얼굴이 빨개진 채 선물을 준비했다며 가지고 올 때까지 잠시 쉬시라고 말한 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2층의 응접실로 할머니들을 모시니 이미 메이드가 다녀갔는지 테이블에 먹음직한 다과가 준비되어있었는데 어지간한 아파트보다 큰 응접실에 다들 어이없어하셨다.
고급 소파에 앉아 지친 한숨을 내쉰 외할아버지는 곧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시며 말씀하셨다.
“잘 구경했다. 이렇게 잘 사는 모습을 보니 한결 안심되는구나.”
“당신이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요. 우리가 괜한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똑똑한 아이인데.”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말에 딴지를 거는 외할머니가 못마땅한 듯이 무릎을 탁탁 치시는데 그 모습이 외할머니는 코웃음을 치시더니 날 보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외할미는 다른 것보다 이게 가장 궁금하구나. 지금 여기 있는 아이 중에 여자친구가 있는 거니?
방에는 저택 안내를 해준 소피아와 언제 돌아왔는지 중간부터 저택 안내에 합세한 수한과 미호가 있었다. 프랑은 선물을 준비한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프랑이 없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니 기회라는 듯이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보고 핀잔을 주셨다.
“아니, 보나 마나 아까 선물 준비하러 나간 아이가 여자친구인 게 당연하지 않소! 척 봐도 그 아이가 우리한테 신경을 가장 많이 쓰더니만!”
외할머니는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웃으시는 외할아버지를 비웃으시며 보라는 듯이 손가락질하셨다.
“저거 보렴. 중요한 이야기 세 개가 있으면 꼭 한 가지씩 빼먹고 기억하지. 저게 외할애비의 퀄리티란다.”
외할머니의 역공에 당혹스러워하시는 외할아버지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킥킥 웃었더니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시며 딴청을 부리셨다. 곧이어 프랑 외에도 여자친구가 하나 더 있고 깊은 사이라는 엄마의 설명에 외할아버지는 잘 이해가 안 간단 표정이었지만 프랑의 사정을 듣고서야 수긍하시며 내 어깨를 두들겨주셨다.
“너야말로 남자로구나. 암. 남자라면 책임을 져야지.”
어째 이해 못하신 거 같단 생각이 들지만… 그냥 지금으로도 괜찮겠지. 엄마나 아빠도 가만있는 데다 외할머니도 됐다는 듯이 손을 저으셨으니까.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프랑이 응접실로 돌아와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하며 선물이 무거워 차에 실어놓았다고 말했다. 방을 나오며 프랑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했냐고 물어봤다.
“쇠고기에요. 어머님이 조모님과 외조부모님께서 쇠고기를 좋아하신다구 귀띔해주셨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근에 수십만 원하는 최고급 쇠고기 선물세트를 한가득 준비했고 이무기의 살코기도 예쁘게 포장해놨었는데 그것들을 할머니랑 외할아버지의 차에 실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잘했어.”
말하지 않아도 어르신들께 선물을 챙기는 모습에 웃으면서 프랑의 손을 잡아 쓰다듬어주니 프랑도 배시시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차에 가득 실린 선물을 본 할머니들은 뭐 이런 걸 다 준비했냐고 성화셨다. 거기다 외할머니가 소고기를 보더니 얼마나 비싼건지 눈치채시고는 우리 먹으라고 선물을 다 내려놓으려 하셨지만, 외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말리셨다.
“손주가 우릴 생각해서 챙겨주는 선물이잖소. 기쁘게 받읍시다.”
음, 이무기 고기를 말하면 외할아버지도 안 받을 거 같아 나중에 문자로 먹는 방법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배웅해드리니 할머니도 이만 가시겠다고 말을 꺼내셨다.
“여기서 강릉까지 돌아가려면 오래 걸리잖아요.”
“멀어봤자 얼마나 된다고. 배웅은 필요 없으니 나오지 말아라.”
“하지만….”
여기서 며칠 쉬다 가시라는 말에도 내 집이 강릉에 있고 돌봐야 할 묘도 강릉에 있다며 돌아가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할머니의 고집을 잘 아는 아빠는 그냥 얼굴만 찡그리고 있었고 엄마도 어찌 못하는 모습이라 내가 할머니를 공간 도약으로 모셔다드릴까 하는데 수한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어르신을 강릉까지 모시겠습니다.”
“이름이 수한이라고? 그래. 시간이 되면 부탁합니다.”
수한이 도와주는 걸 받아들이는 할머니가 놀라워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프랑이 수한에게 말했다.
“차고에 푸른색 그걸 쓰세요. 할머님? 수한 씨가 잘 모실 거에요.”
“그래. 다음에는 며칠 쉴 요량으로 찾아오마.”
…신기하게도 수한이나 프랑의 말은 바로 받아들이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니 푸근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이사하느라 아직 번잡하더구나. 다음에는 넉넉잡고 올 테니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시는 할머니는 무척 정정해 보였다.
아빠랑 엄마도 이만 돌아가겠다며 잘 지내라고 말한 뒤에 자가용을 타고 가버리자 그 잠깐동안 시끌벅적하던 저택에 침묵이 깔린듯한 느낌이라 마음이 허전해졌다. 프랑도 아쉽다는 듯이 내게 팔짱을 껴오며 말했다.
“정말 말씀 그대로 구경만 하고 가셨네요. 저녁이랑 잠자리도 준비해놨는데….”
“아직 완공되고 정리가 다 안 돼서 머무르면 우리가 신경 쓸까 봐 그러신 거야. 그렇게 배려 안 해주셔도 되는데.”
“다음에 또 오신다니 그땐 배려해주시지 않으셔도 될 만큼 준비해서 대접해드려야겠어요.”
“응.”
누나랑 영은이가 위상 세계 통합에 관한 증거와 대응을 세우느라 주말을 바쁘게 보낼 동안 나는 프랑과 함께 한가한 겨울 방학의 마지막을 보냈다.
미호는 고위 아종 18마리들에게 스케일러scaler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비늘이 없는 녀석들도 있는데… 어쨌든 명사에 대명사를 붙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미호는 알케마와 암흑이를 더해 스케일러들과 드잡이질을 벌이며 실전 경험을 쌓아나갔다.
아침 일찍 튀어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미호는 나를 향한 관심이 약간 줄어든 거 같아 조금 시원섭섭했지만, 덕분에 프랑이랑 단둘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 좋았지!
나랑 프랑이 단둘이 유원지며 공원에 데이트를 한다는 걸 알게 된 영은이가 울먹이면서 나중에 자기랑도 데이트해달라고 떼를 쓰는 사건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개학 날인 20일까지 4일간을 프랑과 단둘이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대관람차에서의 스릴넘치는 행위나 수풀 건너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짜릿한 행동이나… 처음에는 프랑도 울상을 지은 채 질색했지만, 나중에는 프랑이 먼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짝 키스를 해올 정도로 푹 빠져든 모습을 보였다.
이대로 적응시켜나가면 야외 플레이도 가능하려나…?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지만, 고3의 특성상 수업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가벼운 마음으로 등교했다.
애초에 수능이 끝나고 겨울 방학하기 전에도 수업은 거의 없이 문화활동이나 자기계발에 시간을 쏟던 상황이었으니까. 어쨌든 개학하고 프랑과 함께 설렁설렁 학교에 나가는데… 어째 등굣길에 3학년이 안보여서 의아해했는데 교실에 도착했더니 등교한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한 명도 나오지 않았네요… 수유리 씨는 매일 가장 먼저 학교에 나온다고 들었는데.”
혹시 내가 시간을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시계를 봐도 오전 8시다. 평소라면 교실이 아이들로 절반 넘게 채워져 있을 시간인데도 아무도 없어 황당한 마음에 교실을 나와 교무실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 나왔을 줄 꿈에서도 몰랐는지 날 본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넌 왜 왔니?' 하는 반응을 보여주셨다.
“왜긴요… 오늘 개학이잖아요.”
“으응? 서하는 가정 통신문을 못 받았어?”
“…가정통신문이요?”
이게 무슨 소린가. 갑자기 불안함이 밀려온다. 설마 학교 안 나와도 된다거나…?
내 반응에 소리 없이 웃으시던 선생님은 책상 서랍을 열어 A4용지 한 장을 꺼내주셨다.
“응. 이거 말이야. 학부모님께 직접 전달되도록 등기로 보냈는데.”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통신문을 보니 고3이라 졸업식까지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아나 진짜! 엄마는 말해주지도 않고!”
이걸 알았으면 오늘도 늦잠잤을 텐데! 어젯밤에도 프랑과 영은이와 찐하게 노느라 늦잠 잤는데…!
가정통신문을 다시 읽으면서 구시렁구시렁 투덜거리니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기왕 온 김에 학창시절 마지막 개학식을 보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해주셨다.
“교실에서 방송을 보면 될 거야.”
“아,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선생님의 권유에 툴툴거리고 있으니 우리 담임 선생님 옆자리의 학생 주임 선생님이 "원래라면 강당에서 개학식을 봤을 텐데 3학년 중에 학교에 나온 건 너뿐이라 강당에 나 혼자 설 수 없어서…. 따로 자리를 마련해줄까?" 하는 말에 기겁하면서 교실로 도망쳤다.
3학년의 그 넓은 자리에 나 혼자 있으라고요? 제가 총 맞았어요?! 그런데 있게!!
프랑과 단둘이서 교실에 앉아 여전히 댄디하신 교장 선생님의 개학식 훈화를 들으니 기분이 참 거시기하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다가 문득 엄마한테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증기를 켜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들, 미안해~. 엄마가 깜빡했네.]
“…3학년중에 학교에 나온 건 나뿐이라고.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호호호호.]
“웃지마! 고2 때 따돌림당하던 기억이 떠올라서 화나고 슬프단 말야!!”
[우리 아들, 나중에 동창회에 나가면 이야기할 거리가 생겨서 좋겠네?]
“하나도 안 좋거든?!”
끝나지 않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면서 엄마한테 짜증을 부리니 엄마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깔깔 웃으면서 내 복장을 뒤집어놨다.
“집에서 같이 안 살고 독립해 나왔다고 이렇게 복수하는 거지?!”
[어머나~ 엄마가 지금 바빠서 통화를 오래 못하거든~? 학교 마치면 늘 푸른 재단으로 나와서 엄마 좀 보고 가렴. 알았지? 아들, 사랑해~.]
“어, 엄마? 엄마!”
능청스레 일방적으로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전화에 침묵한 채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다가 폭발하듯이 외쳤다.
“우어어어~! 화난다! 이거 틀림없이 엄마의 계획범죄야!!”
책상 모서리를 잡고 덜컹거리면서 난동을 부리다가 입을 가린 채 킥킥 웃고 있는 프랑을 홱 돌아보니 찔끔하면서 나랑 시선을 피한다.
“프~랑~?”
“네, 네네?”
“프랑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저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프랑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도 진짜, 독립했다고 이렇게 심술을 부리다니 어른답지 않아!!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프랑은 배시시 웃으면서 뒤에서 내 목을 살포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전 어머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걸요? 서하는 독립한 뒤에는 어머님이랑 이야기를 나누신 적이 거의 없으시잖아요. 안부 전화도 거의 하지 않았구요.”
“……알았어. 화 안 낼게.”
프랑 말대로 집을 나와 연인들이랑 살기 시작한 뒤에는 부모님한테 신경을 못 썼던 게 사실이다. 엄마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안부 전화 한번 안 했으니 저렇게 심술을 부릴 만 하지.
…그래도 너무 어린아이 같은 심술이잖아! 그냥 전화해서 보고 싶으니 집에 한 번 오라고 하면 될걸!
화를 안 낸다고 했지만,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엄마한테 심통을 부렸다가 울리기라도 하면 아빠한테 죽을 테니 가만히 있자.
============================ 작품 후기 ============================
프랑이 그곳에 힘을 주면 기둥이 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