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94화 (394/517)

00394  디버프debuff  =========================================================================

미호들 방에 들어가 녀석들의 잠자는 모습을 보니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색 땡땡이 잠옷을 입고 잠들어있는 미호는 잠버릇이 나쁜지 잠옷 상의가 가슴께까지 밀려 올라가 작은 유두가 노출되어 있었고 잠옷 바지도 허벅지까지 내려가서는 파랗고 작은 팬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역동적인 자세로 매끈하고 통통한 배를 드러낸 채 콜콜 자는 미호와 그런 미호의 배 위에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는 암흑이.

암흑이의 몸 안을 공간지각으로 쭉 훑으니 역시나 나나 프랑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뮈르딘의 지팡이 찌르기의 효과 덕을 본 건지 프랑보다는 덜하다. 프랑이 중앙선에서 교통사고가 난 4차선 도로의 정체라면 암흑이는 6차선 도로의 정체쯤?

침대맡에 서서 암흑이를 살펴보고 미호의 밀려올라 간 잠옷을 내려주자 미호가 눈을 번쩍 뜨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 흐웅…? 주인님? 주인님이…! 으갹!

콰당!

=꾸엥!=

눈을 비비더니 곧장 내 품에 돌진하려던 미호는 잠옷 바지 끄트머리를 밟더니 호쾌하게 자빠졌고 그 덕에 미호의 배 위에서 자고 있던 암흑이도 미호한테 깔려 납작해져 버렸다.

그렇게 뭉개져버린 암흑이를 미호는 눈길도 주지 않고 파다닥거리며 걸리적거리는 잠옷 바지를 벗어버리더니 내 가슴에 뛰어든다.

- 쥔님~! 우헤헹~.

=……이… 망할 호냥이가!=

자다가 봉변을 당한 데 격분한 암흑이는 촉수를 뽑아내 조막만 한 팬티에 살포시 가려진 미호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날 끌어안고 킁킁거리던 미호는 암흑이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이유를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맞은 부분을 북북 긁더니 성질을 부리는 암흑이를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 검은 물이 빠졌어! 깨끗해졌어!

=진화한 거거든! 아니, 원래 깨끗했거든?!=

그렇게 소리치며 촉수를 손바닥 형태로 만들어 미호의 뺨을 후려치니 미호도 꼬리를 바짝 세우며 암흑이를 움켜쥐고 좌우로 힘껏 잡아 늘려대기 시작한다. 암흑이도 질세라 촉수를 주먹 형태로 만들어 미호의 머리에 꿀밤을 마구 먹이기 시작했다.

- 아우! 으엥! 히이!

=으그그그그그~!!=

만나자마자 또 투닥거리는 두 녀석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억지로 떼어내며 말했다.

“그만해. 그만! 미호는 얼른 바지 입어!”

연인들이 로우라이즈 팬티를 자주 입으니까 미호도 풋내나는 몸매면서 똑같은 걸 입은 덕에 그곳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보여 진짜 민망하다.

구겨진 채 팽개쳐져 있는 잠옷 바지를 주워주니 암흑이가 먼저 시작했다고 징징거리면서 꼬리를 말미잘처럼 너울거리며 바지를 입지 않으려 든다. 그래서 드레스 룸에 밀어 넣으려고 해도 두 발을 쭉 뻗으면서 버티기까지 하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녀석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안아 올리며 다독여주니 그제서야 내 옷깃을 잡으면서 히히 웃었다.

미호를 드레스 룸에 데려다 놓고 나오니 이번에는 암흑이가 징징거리면서 내 다리에 달라붙어 왔다.

돌아가면서 한숨 나오게 해주네 진짜.

어쩔 수 없이 입이 댓발만큼 튀어나온 녀석을 안아 올려서 고양이 턱을 간지럽히듯 아래턱을 간질간질 해주니 꺄르르 웃으면서 바둥거린다. 그래. 귀여우니까 참는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화가 어느 정도 풀린 녀석에게 말했다.

“이제 저주를 풀어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알았지?”

=넹.=

녀석을 들고 공간 지각으로 다시 한 번 녀석의 위상력 덩어리의 위치와 크기를 쭉 훑어봤다.

나랑 눈을 마주하고 깜빡깜빡하는 녀석은 몸이 작은 만큼 덩어리진 위상력의 밀도가 높아서 마나 시브를 바늘이 아니라 창으로 만들어야 할 거 같다.

마나 시브를 준비해놓고 정신을 집중한 다음 암흑이의 굳어있는 위상력을 쿡 하고 찔렀더니 곧바로 요상한 소리가 암흑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끼읔.=

…굳어있는 위상력을 찔러 터트릴 때마다 게륵거리거나 꺄욱, 께힉, 뿌잉하는 이상한 소릴 연달아내던 암흑이는 절반 정도의 위상력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더이상 못 견디겠다며 사지를 버둥거리면서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 용을 쓰기 시작했다.

=으아앙~! 이 이상 하면 내가 아니게 되어버려~!=

암흑이가 아니게 된다고?! 깜짝 놀라서 저주를 푸는 걸 중단한 뒤에 내 가슴에 안겨있는 암흑이를 잡아올렸…더니 내 손가락을 물고 빨고 얼굴을 비비고 난리가 난다.

그런 뜻이었냐…….

=TP, TP가 부조카당!=

흥분해서 반쯤 녹아내린 모습으로 내 팔을 감싸던 암흑이는 미호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꾸물거리면서 내 몸을 휘감고 있다가 미호가 물 속성의 꼬리를 번뜩이며 물벼락을 쏟아부어 암흑이를 깨웠다.

나도 홀딱 젖어버린 건 덤이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벼락을 십수번 끼얹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암흑이와 미호를 데리고 캠핑 트레일러로 돌아왔더니 미호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내 팔을 껴안으며 물었다.

- 요기서 뭐할 거야?

“프랑이랑 다 씻고 나오면 할머니 집에 갈 거야. 그러니까 암흑이랑 놀고 있어.”

다행이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볼 일을 끝마칠 수 있었으니까 할머니한테 세배하러 가야지.

- 응!

H라인 데님 스커트에 트임 없는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미호는 해주의 여파인지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암흑이를 납치하듯이 잡아당기고서 겨울꽃이 핀 정원을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바비 인형 같은 꼴이 된 암흑이의 썩은 표정이 참 볼만하다.

얼어붙은 냇가를 따라 노란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꽃 장난을 치는 미호와 수선화를 입에 넣는 암흑이를 구경하고 있으니 목욕 중에 정신을 차린 프랑이 영은이의 부축을 받아 트레일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몸은 어때? 그렇게 자극적일 줄 알았으면 좀 천천히 할 걸 그랬지?”

“…몰라요.”

작게 흥. 하고 앙탈을 부리는 프랑을 보고 히죽 웃으며 허리가 풀려 영은이의 어깨에 기대 서 있는 프랑의 등줄기를 슬슬 어루만져주니까 날 보며 입술을 작게 비죽이더니 내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줬다.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둘이 앉을 의자를 만들어주고 그녀들이 완전히 앉는 걸 본 뒤에 말했다.

“한 번에 저주를 다 풀지는 못하겠다. 며칠간 쉬었다가 다시 하고 그래야겠어.”

“네에. 나머지를 한 번에 다 풀면 저도 미쳐버릴 거에요….”

“우흥. 그렇게 좋았어?”

질린 표정의 프랑에게 영은이가 짓궂게 물으니 붉어진 얼굴로 "몰라!" 하고 외치면서 영은이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프랑.

“아흣!”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정확히 후려친 덕분에 몸을 배배꼬며 기괴한 춤을 추는 영은이를 구경하다가 힐링 터치를 일으켜 등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화연이는 언제 레이드에 들어갔어? 언제 나오는데?”

어지간히 아팠는지 부르르 하고 몸서리를 친 영은이는 귀밑 머리를 사르륵 쓸어넘기면서 대답했다.

“서하가 들어가고 2일 뒤인 2월 1일이야.”

“지금이 10일이니까 들어간지 좀 됐네? 보통은 5일짜리더니.”

“대규모의 이형종 부락이 발견됐잖니. 그래서 이번은 한 달을 계획했다고 들었어. 팀도 6개 팀이 한 번에 투입됐고 준비도 잔뜩 해갔기 때문에 29일에나 나올 거래.”

“장기 토벌전이구나.”

“규모로만 따지면 타임 리버랑 화랑을 다 합쳐서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우리도 대규모야. 서하가 도와주지 않아도 그랑 블루가 자체적으로 고위 이형종 토벌전을 치를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것도 있어서 더욱 집중하고 있을지도? 어쩌면 더 늦어질지도 모르구.”

그런 기념비적인 토벌전이 될 내용을 말하는것에 비해 영은이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그래서 손을 뻗어 뺨을 쓸어주면서 물었다.

“다른 이유라도 있어? 이야기에 비해 표정이 별로 밝지 않은데?”

“음. 어제 이야기했던 거 때문에….”

“위상 세계에 이상한 소문이 들린다는 거? 확실하지 않다며. 단순한 루머 아냐?”

“그냥 루머로 치부하진 못할듯해. 단지 사실 확인을 위한 기간 중이랄까….”

- 야아! 다 먹지 마~!

=왜지? 생물은 먹느냐 먹히느냐로 존재의 의의를 가지는 거다!=

- 으, 으의? 아, 아무튼 아냐! 할머니가 예쁜 꽃은 손대지 말고 눈으로 즐기는 거랬어!

암흑이가 수선화를 다 먹으려 드는걸 막는 미호를 바라보던 영은이는 이쪽과는 다른 분위기에 엄마 미소를 지었다가 곧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사건이 처음 발생한 곳은 미국이지만, 그 숫자가 많은 곳은 단연 중국이야. 문제는 미국이랑 중국은 이번 정부랑 사이가 굉장히 소원해져서 거리를 두고 있는 데다 정보의 취급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서 자세한 건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영국이랑 러시아 소속의 정보부 요원들이 말야….”

“요원들이?”

“능력자들이 같은 위상 세계에서 마주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상부에 올린 것으로 파악 중이야.”

“…그게 진짜야?”

“응. 거기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주쳤다는 한쪽은 똑같은 장소에 입장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고 해.”

이게 무슨 이야기지. 시간대가 나뉘어있을 위상 세계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만난다고? 이해가 가지 않아서 영은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프랑이 설마 하는 얼굴로 영은이에게 물었다.

“그 말은 위상 세계의 시간대가 통합되고 있다는 거야?”

“……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랑이 꺼낸 한마디에 영은이는 뭔가 깨달음이 온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능력자들이 서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봤을 때 위상 세계 평행 차원 설과 시간 축의 비틀림 이론 설 중에 능력자들은 각자가 다른 시간 축의 위상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 주목받고 있었는데 프랑 말대로 시간대가 합쳐져 통합되고 통합된 세계에서 능력자들이 서로 마주치고 있다면 현실은 위상 세계가 무언가의 원인으로 하나로 모이고 있다? 모이는 기준점이 되는 시간 축은? 모든 시간대가 합쳐졌을 때 나타날 상황으로 예상되는 것은?”

그러다 갑자기 인증기를 켜더니 누군가에게 비상 대책회의를 소집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캠핑 트레일러에 뛰어들었다. 그 뒤를 쫓아가니 프랑도 놀란 눈으로 따라온다.

“영은아?”

“뮈르딘이 했던 말! 현실의 위상력이 안정되면 자연히 위상 세계와 현실 간의 통로가 막힌다는 거, 지금 상황이 그 전조일지도 몰라.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정보를 모아야겠어.”

워커홀릭 시스템이 발동한 건가. 아직 아침 6시밖에 안 됐는데 바로 출근하려는 건지 평범한 스웨터와 바지를 훌렁훌렁 벗어 매력적인 란제리 차림이 되더니 군청색 정장을 꺼내 입기 시작하는 영은이를 도와주면서 물었다.

“설날인데도 출근하려고?”

“설 연휴 반납하고 일하는 애들이 있어. 그 아이들을 모아서 1분 1초라도 빨리 정보를 모아야 해.”

“…오늘 할머니 집에 같이 가자고 하려 했는데.”

내가 건네준 바지를 받아서 탄력이 넘치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입던 영은이는 눈 모양이 초승달처럼 변하더니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입술에 진하게 키스를 해줬다.

“서하네 할머님한테 인사드리는 건 다음에 할게. 이 일은 그냥 두면 안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어.”

“…힘내.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고.”

이 말을 기다렸는지 영은이는 프랑을 보며 은근하게 웃더니 그 상태로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다녀오면 서하의 자지밀크를 윗입 아랫입으로 잔뜩 마시게 해주면 돼. 후우~”

읔. 어후.

야애니에서나 봤지 처음 들어보는 노골적인 단어에 나도 프랑도 얼굴이 붉어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영은이는 키득거리면서 빠르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갔다.

“다녀올게~?”

정말 저 모습을 누가 100살 넘은 할머니라고 볼까. 영은이가 탄 검은색 페라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프랑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도 출발할까?”

“네에.”

조금 놀래켜줄 요량으로 연락하지 않고 할머니 집에 도착했더니 마당에서 차례상에 올릴 나물을 뜯던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달려와 날 안아주셨다.

“우리 강아지 왔네~! 급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일은 다 끝냈어?”

“네. 운이 좋아서 금방 처리했어요.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일 끝내자마자 온 거에요.”

“그래그래. 참 잘했다. 너…도 어서 오너라. 그간 키가 많이 자랐구나?”

“일이 생겨서 키가 40m까지 자랐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거에요.”

내 뒤에 서 있는 프랑을 올려다본 할머니는 저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커진 게 이해가 안 되시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셨다가 키가 40m라는 이야기에 할머니는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호호 웃으시며 우리를 집안으로 밀어 넣으셨다.

“추운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미호 너도.”

- 응! 아, 네!

집 안에서 차례상을 준비하던 엄마랑 아빠도 프랑의 2m까지 커진 모습에 눈이 두배 가까이 커질 만큼 놀라워했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오는 엄마한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니 "얘가 그런 중요한 일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라며 날 나무랐다.

“아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엄마한테 말했어야지~!”

“말하면 걱정했을 거 아냐. 40m였던 모습을 엄마가 봤으면 놀래서 쓰러졌을걸.”

“그건… 아휴.”

“지금도 줄어들고 있으니까 얼마 안 가서 엄마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렇게 엄마를 납득시키자 엄마는 프랑을 잡고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는데 그 상황에 누나가 조인 join 하더니 뒤에 들어온 할머니가 합세하면서 파티 party가 되어버렸다.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프랑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가면서 내게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미안! 우리 집안 여자들은 나도 아직 무서워!

고통은 순간이니까 좀만 더 버텨! 화이팅!!

프랑을 속으로 응원하며 그녀의 구조 요청을 외면하고 아빠를 도와 제기에 견과류를 쌓거나 과일을 깎고 병풍을 세우며 차례를 지낼 준비를 했다.

“우리 강아지가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많이 데려왔으면 좋겠구나.”

할머니는 내가 아빠랑 함께 차례상을 준비하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하셨는지 눈물을 훔치시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차례 준비는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례상을 준비한 뒤에는 다 같이 할머니한테 세배를 드리고 뒤뜰로 나가 가족묘를 성묘했다.

다른 집에서는 차례를 지낸 다음 간단한 차례 음식을 챙겨서 성묘한다고 무덤을 찾아가서 술 올리고 다시 절하고 하는데 우리는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고아 출신이어서 선산이라는 게 없다.

할머니가 간절히 바라기도 하셔서 집 뒤에 가족 묘를 안치했는데 우리는 성묘를 하지 않는 대신 차례를 지내기 전에 할아버지랑 삼촌이랑… 어머니의 묘를 정돈하고 묘비를 씻는 걸로 대신한다.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차례를 지내느냐고 어렸을 때 물었더니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비록 이 할미와 할아비가 일가 피붙이 하나 없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건 누군가의 몸을 빌려 태어난 덕분이 아니겠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부친이자 모친이니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거란다.”

…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주셨다.

크흠. 아무튼  어머니의 묘를 청소하다 보니 가슴 한쪽이 아릿해져 왔지만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놈들을 반드시 죽여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런 날 보는 가족들이 조금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미호와 암흑이가 떠드는 통에 금방 떠들썩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미호 밥팅아! 거기다 물 뿌리면 어쩌냐!!=

- 으, 응? 여기다 뿌리는 거 아냐?

=으이그! 무덤에다 물 뿌리는 게 어딨어! 주인님이랑 주인님 아빠랑 어쩌나 잘 보란 말야! 이 띨빡아!=

삼촌의 묘비를 청소하다 말고 뒤를 돌아서 봉분에 물을 끼얹는 미호를 암흑이가 도끼눈을 뜨고 혼내는 모습에 아빠마저 할아버지의 묘비를 씻다가 피식거리면서 웃는다.

할아버지 묘의 잡초를 뽑던 할머니와 엄마와 누나도 웃음을 참고 있었고 나랑 함께 어머니의 묘비를 청소하던 프랑도 미소를 지었다.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바득바득 우기길래 할머니의 허락 아래 삼촌의 묘를 청소하던 미호가 자꾸 어리버리한 짓을 하느라 시간이 늦어지자 결국 누나가 가세해서 차례를 지내기전에 청소를 끝마칠 수 있었다.

작년만 해도 할아버지와 삼촌과 (그때는 고모라고 생각한) 어머니의 묘를 정돈하다 보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조용한 분위기의 설날을 보냈었는데 올해에는 미호와 암흑이 덕분에 떠들썩한 설날을 보내는 게 마음에 든다.

청소가 다 끝날 무렵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셨었는데 이번에는 저렇게 밝게 웃고 계시니까.

표정만 밝아도 마을에서 제일 가는 미녀 할머닌데 언제나 어두운 안색이었거든.

차례 지내기가 끝난 뒤에 묘비 청소 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건지 할머니한테 달라붙어서 아양을 떠는 미호와 암흑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그러냐고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내니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눈빛을 받아서 따라갔더니 2층 구석의 작은 방으로 날 데려간다.

“저주는 다 해소됐어?”

“난 다 풀렸는데 프랑하고 암흑이는 저주를 해소하는데 좀 과부하가 걸려서 쉬었다가 해야 해. 며칠 더 걸릴 거야.”

“얼마나 쉬는데?”

누나의 질문에 잠시 프랑을 지켜보니 아직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끔 비틀거리는 게 보인다. 저 상태라면 대충 4일에서 5일 정도는 갈 거 같은데.

“한 5일?”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잘됐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띠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럼 내일 외할아버지 보구 11일부터 나랑 위상 세계 들어가는 거지? 중세에서 넘어왔으니까 쿨타임 안 돌 거 아냐.”

“…정말 가려고? 누나가 회사에서 오래 자리 비워도 괜찮아?”

“5일 정도는 괜찮아. 채린 씨가 내 공백을 메워줄 수 있어.”

채린? 유채린 말하는 건가? 누나 말에 화중강 아저씨를 보좌하던 군인 같던 누나가 생각났다. 나와 관련된 일에 어처구니없는 폭주를 막기 위해 유채린을 붙여준 건데 이런 식이 될 줄이야….

“그럼 그렇게 해.”

“응!”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해봤자 삐져서 내 팔다리 허리를 마구마구 꼬집으면서 성질을 부릴 테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몸과 정신의 건강에 이로울 거다.

아오. 진짜… 이야기를 들어서 지금 위상 세계 주변은 온통 물바다라 볼 것도 없다는걸 알 텐데 뭘 그리 가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네. 내 손을 꼭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며 기뻐하던 누나는 아래층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며 냉큼 달려가 버렸다.

손에 남은 누나의 온기를 멍하니 느끼다가 나도 아래층으로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에어컨이 빵빵하고 먹을걸 알아서 챙겨주는 공간이라니...! 그곳은 천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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