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92화 (392/517)

00392  디버프debuff  =========================================================================

[그놈을 데려오시게.]

뮈르딘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자 꿈틀하고 눈썹을 찡그린 랜슬롯은 이걸 풀라는 듯이 자유로운 왼손으로 푸른색 공간의 벽을 툭툭 두드린다.

“…….”

뭔가 진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공간의 벽을 회수하니 차림을 정돈한 랜슬롯은 날 한번 강하게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에서 절도와 기품이 느껴지는 게 진짜….

시발, 만인의 기사이자 연인이라더니 과장은커녕 과소평가됐잖아.

철그럭거리는 소리 내며 묵묵히 걸어가는 랜슬롯의 뒤를 따라가면서 내심 이 세계의 능력자들을 우습게 보는 건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프랑도 어지간해서는 부수지 못하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겨우 기합과 함께 힘으로 부수다니, 대체 무슨 힘이야?

그나저나 저 허리춤에 걸린 장검이 미래에 아론다이트라고 불리게 되는 검인가? 랜슬롯의 뒤통수를 힐끔 보고 슬그머니 아론다이트를 공간 지각으로 살펴봤더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

뭐지? 나, 저걸 어디서 봤었나?

어디서 저걸 봤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어느새 문 앞에 도착한 랜슬롯은 날 고요하게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겨 옆으로 물러났다.

나 먼저 들어가란 건가? 무심한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랜슬롯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문을 열었…는 데 저번에 왔을 때와 전혀 바뀐 게 없는 실내에는 두 명이 벽난로 앞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멀린이고… 다른 한 명은… 누구지? 랜슬럿이 귀빈이라고 한걸 보면 신분이 높은 사람일텐데?

풍성한 프릴이 달린 달빛 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흐르는 꿀 같은 금발을 틀어 올려 묶은 굉장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였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려 했지만 뮈르딘도 있고 랜슬롯도 내 공간 지각을 감지했던 걸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오랜만이에요. 뮈르딘 할배.”

“왜 또 왔냐.”

“왜 또 오면 안 돼요?”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나와 뮈르딘을 그 미녀와 랜슬롯이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저러지?

“두 번 다시 안 올 것처럼 휙허니 가버린 건 네놈이지 않으냐. 그런 주제에 볼일이 생겼다고 쭐래쭐래 찾아오다니, 넉살도 좋구나.”

“가라고 해서 갔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그래서 첫 번째 복수를 하니 기분이 날아갈 거 같으냐?”

또 자기 할 말만 하는 뮈르딘. 그건 그렇고 또 어떻게 안 거야? 대답해주는 대신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뮈르딘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뮈르딘 할배도 복수라는걸 해본 적 있나 봐요?”

“이 나이쯤 되면 안 해본 것보다 해본 게 더 많은 법이지.”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고요?

“크흐흐. 복수는 대부분 그런게다.”

“전 안 그렇던데요.”

이죽거리면서 웃는 뮈르딘을 보며 정색하며 대답했더니 볼품없는 수염을 푸들푸들 떨면서 킬킬 웃어댄다.

뒤따라 들어온 랜슬롯은 뮈르딘이랑 농담 따먹기를 하는 날 보고 우묵한 눈빛을 보내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는 호기심이 깃든 표정으로 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길래 뭘 보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봐주니 얼굴을 살포시 붉히면서 고풍스럽게 시선을 돌린다.

근데 랜슬롯이 호위를 할 여자라면…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장미가 피어있던 왕궁 정원에서 책을 보던 그 여자네? 그럼 이 여자가 기네비어 왕비?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뮈르딘은 "케흠."하고 내 주의를 끌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그래, 뭐가 그리 급해서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날뛰면서 찾아온게냐.”

망아지라니! 말하지 않아도 알 거 아니냐고 톡 쏘아 줄랬다가 아쉬운 건 나라는 생각에 비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헤헤. 그놈을 잡긴 했는데 그 녀석이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서 저한테 저주를 내리더라고요. 저야 괜찮은데 프랑도 저주에 걸려서 그걸 풀 방법을 물어보러 왔어요.”

“허. 그 처자가? 네놈이 망아지처럼 날뛸 법도 하구나.”

“그렇죠?”

“목숨을 바치고 주술로 바꿔 내린 저주라….”

눈을 감고 엉망진창으로 엉키고 듬성듬성 난 수염을 쓰다듬는 뮈르딘를 살펴보다가 다시 날 바라보는 귀부인에게 "왜 자꾸 쳐다봐요?" 하고 말을 던졌더니 귀엽게 놀라면서 붉어진 얼굴을 손에 쥐고 있던 부채로 가렸다.

“크흠.”

품위라곤 개 코도 없는 데다 귀부인한테 막말을 던지는 내 모습이 또 마음에 안 드는지 랜슬롯은 그림 같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헛기침한다.

날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그런데 그게 또 기품이 철철 흘러넘치는 게 진짜… 잘생긴 놈은 무슨 짓과 꼬라지를 해도 화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만 진짜였어!

…그러고 보니 기네비어랑 랜슬롯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냐?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뮈르딘을 찾아온 거지? 아니, 기네 비어 왕비가 맞긴 하나?

“혹시, 기네비어 왕비님?”

“저를 아시나요?”

헐, 찍었더니 맞았다. 고개 숙인 한 떨기 꽃처럼 가녀리고 상냥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 기네비어 왕비는 부드러운 눈매에 미소를 띄우면서 맑은 목소리로 대답해주길래 나도모르게, '랜슬롯이랑 결혼시켜달라고 아서 왕한테 조르세요.'라고 말할뻔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지만 간신히 웃는 표정으로 만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뮈르딘 할배가 기네비어 왕비님을 훔ㅊ…컥!!”

뻑!

“놈! 무슨 개소릴 지껄이려는 게냐!!”

눈을 감고 있던 뮈르딘은 눈을 번쩍 뜨면서 벼락같은 호통을 치며 무언가로 내 머리통을 내려쳤다!

“아오! 왜 때려요! 할배가 그랬었잖케헥!”

“닥쳐라! 이런 천둥벌거지같은 놈이 어디 왕비님 앞에서 품위 없게 그런 소릴! 하려거든 썩 꺼져!”

어디서 꺼냈는지 자기 키보다 큰 떡갈나무 지팡이를 붕붕 돌리며 내 머리를 부술 듯이 휘둘러댄다! 자기가 찔릴 발언을 해놓고서는 날 두드려 패다니, 너무하잖아!

두 팔을 교차해서 뮈르딘의 공격을 막다가 팔의 틈새를 노려 계속해서 찌르고 때리는 뮈르딘에게 발칵 소리를 지르면서 지팡이를 움켜잡았다.

“안 할게요! 죄송합니다!!”

“…푸훗.”

이제는 부채로 얼굴을 다 가린 채 키득거리는 기네비어 왕비 때문인지 뮈르딘은 지팡이 질을 멈추고 헐떡거리면서 그녀를 힐금 보더니 자기 의자에 앉으며 앓는 소리와 함께 날 노려봤다.

“끄응. 고얀 놈.”

“반사.”

“호호호호.”

나도 질세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돌아보니 부채를 접고 허리를 굽힌 채 눈가에 눈물을 한 방울 달고 웃고 있는 기네비어 왕비가 보였다.

“왕비께서 그렇게 웃음 지으시는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소.”

“죄송해요, 뮈르딘 경. 두 분이 장난이 심한 조손 같아 저도 모르게 그만….”

눈가에 매달린 눈물 한 방울을 우아하게 손가락으로 훔쳐낸 기네비어 왕비는 포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허허허. 폐하의 신변에 일어난 일은 궁중 마법사의 명예를 걸고 해결해볼 터이니 심려치 마시고 돌아가 쉬시길 바라오.”

부드럽지만 명백한 축객령이다. 기네비어 왕비는 뮈르딘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내게는 동백꽃같이 하얀 웃음을 보여준 뒤에 랜슬럿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뮈르딘의 타워를 떠났다.

꽃이 수 놓인 가늘고 촘촘한 베일을 쓴 기네비어 왕비가 랜슬롯과 함께 티 없이 깨끗한 백마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창밖에서 지켜보다가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서 몸을 누이고 있는 뮈르딘을 돌아봤다.

뮈르딘은 랜슬롯이랑 기네비어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있으려나? 물어볼까 싶었지만 남의 집안 사정을 캐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세계가 우리 시대에 남겨진 책이나 전승처럼 흘러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엉뚱한 곳을 찔렀다간 왕실 모독죄로 잡혀갈지도 모른다.

“할배?”

“어렵고 빠른 것과 간단하고 오래 걸리는 것이 있다. 어느 쪽이 좋으냐.”

부르자마자 뜬금없이 선택하라는 뮈르딘을 보며 이제 익숙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일단 둘 다 들어보고요.”

“클. 어렵고 효과가 빠른 것은 네 첫 번째 원수가 대가를 바친 대상을 죽이는 거다. 주술의 근원은 빌려온 대상의 힘에 의거하는 법이니까.”

…용왕을 죽이라고?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으니 뮈르딘은 바로 다른 방안을 내놓는다.

“간단하고 오래 걸리는 것은 네가 그 처자를 치료해주는 것이지.”

“제가요? 전 해주解呪같은 건 모르는데요.”

그런 걸 알았으면 찾아오지도 않았지. 뮈르딘은 벽난로 옆에 쌓여있는 장작을 가리키더니 다시 벽난로를 가리킨다. 그냥 벽난로에 장작 좀 집어넣으라고 하면 될 거를.

불씨가 죽어가는 벽난로 속에 장작 몇 개를 집어넣고 있으니 뒤에서 뮈르딘의 설명이 들려온다.

“네녀석이 가진 페르소나는 율律의 매듭을 묶고 풀 수 있는 천능千能의 힘이다. 저주에 걸린 네녀석이 스스로 저주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그 힘을 처자에게 걸린 저주를 해소하는 것에 쓰는 것이지.”

율律이 법칙 율인가? 마나 시브가 천 가지에 능한 힘이라서 그런 저주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뜻이구나.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요?”

“네가 너의 능력에 얼마나 능숙한가에 따라 다르겠지.”

생각보다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는 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뮈르딘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방향은 무리니까 제 힘으로 풀어봐야겠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줄 거나 주고 얼른 가버려라.”

…진짜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있는건가? 아공간을 열어서 주섬주섬 늙은 할배도 잘 먹을 수 있을 만한 초코파이와 카스테라 같은 부드러운 빵에 보들보들한 초코바와 초콜렛같은걸 잔뜩 꺼내면서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뮈르딘은 위상 세계의 사신수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뭐라고 대답해주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온 뮈르딘은 초코파이 하나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까서 입에 집어넣었다.

…어라? 비닐 저걸 어떻게 깐 거야? 까는 방법은 안 가르쳐줬는데?

“너와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존재인 나에게 해답을 구하지 말거라. 너에겐 너의 인연이 있지 않으냐.”

멍한 표정으로 초코파이를 우물거리는 뮈르딘을 바라보고 있으니 지팡이를 들어 끝으로 암흑이가 들어있는 안주머니 쪽을 쿡 찌른다.

=꺄욱.=

“네 미래는 너의 힘과 너의 인연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니라.”

내 인연이라고 하면서 암흑이는 왜 찌른 거야? 안주머니 속에서 부들거리면서 울먹이는 암흑이를 옷 너머로 토닥여주며 불퉁스레 대답했다.

“힌트라도 줘요. 정보를 찾을 곳이 모조리 날아가 버려서 처음부터 찾아야 할 판이라고요.”

“나도 정신없다 이놈아. 그보다 내놓을 게 더 있지 않느냐. 그거나 내놓고 돌아가라. 그리고 기다리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니라.”

저번처럼 동문서답은 하지 않는 게 좋긴 한데 알쏭달쏭한 건 여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선물로 줄 만한 과자류를 모두 꺼내놨는데 뭘 더 내놓으란 거야? 백청의 사체 일부분이라도 줘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으니 뮈르딘은 말랑말랑한 초코바를 하나 꺼내서 손에 쥐고 먹으며 서랍장을 열어보고 캐비닛을 열더니 침대 밑에서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일을 위해 술력術力을 다듬고 모아야 한다. 너는 그것에 도움이 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응? 혹시 블루 스톤을 말하는 건가?

“이거요?”

“쪼잔하게 하나만 줄 생각이냐?”

…왠지 삥뜯기는 기분인데. 아공간에서 블루스톤 30개를 꺼내놓으니 뮈르딘은 잽싸게 로브 소매에 블루 스톤을 싹 쓸어담더니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두어 개면 족했는데 이만큼이나 주다니, 잘 쓰마. 클클.”

……아, 진짜. 서른개나 챙겼으니 좀 더 명확하게 알려달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뮈르딘이 선수 치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이상은 못 도와준다.”

“아 왜요! 서른개면 우리 쪽에서는 성도 살 수 있는 돈인데!”

역시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선수치는 뮈르딘한테 짜증을 부리니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기네비어 왕비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생각을 더듬었다. 이형의 종족들이 오르빈치라고 부르는 곳이나 다른 사신수 중 짐승이랑 대지의 주인을 섬긴다는 종족의 위치 등이 궁금하긴 했지만 뮈르딘이 더이상은 못 도와준다는 걸 보면 무언가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하는 거다.

랑그 드란이나 아민-라의 경우만 생각해봐도 능력을 갖춘 자에게는 그 능력에 걸맞은 제약 같은 게 있는 거 같았으니까.

…잠깐, 랑그 드란이 내게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을 했었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백청을 혼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었고.

설마 그것도 계약에 들어가는 거야? 에이 설마. 정식으로 계약 운운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한창 미워하고 있는데, 아니겠지.

그런 거보다 일단 내 마나 시브 능력으로 프랑이랑 암흑이의 봉인 디버프를 해소해주고 그다음은… 그냥 기다리라고? 돌아가서 기다리다 보면 그쪽과 자연스레 연결된단 이야긴가?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으음… 일단은 두 가지의 목표 중에 하나인 백청을 쓰러트리는 건 달성했으니 프랑하고 암흑이의 봉인을 해소하면서 상황을 살펴봐야겠다.

안되면 위상 세계에 들어가서 소라고둥을 써서 알붐 케투스를 불러보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뮈르딘은 침대 밑에서 꺼낸 게임 속 보물상자처럼 생긴 상자 뚜껑을 열어 군청색 바탕에 금색 별과 달과 해가 수 놓인 유치찬란한 로브를 꺼내 입었고 마른 볏짚 침대 옆의 탁상 아래에서 마법사 모자라고 부를 수 있는 끝이 휘어진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겨 들었다.

“푸흡.”

짜리몽땅한 뮈르딘이 저 로브와 마법사 모자를 걸친 모습을 보니 무진장 웃긴다. 광대같… 이크. 뮈르딘이 "고얀 놈."하고 툴툴거리는 걸 보고 멋쩍게 웃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물어봤다.

“이 시간에 기네비어 왕비님이 랜슬롯이랑 같이 찾아온 걸 보면 꽤 중요한 일이었나 봐요? 술력을 모으는 것도 그거 때문이죠?”

“중요하지. 큰일이기도 하고.”

“아서 왕한테 문제라도 생겼어요?”

아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각해본 바를 꺼내니 마법사 모자에 묻은 먼지를 콜록거리면서 털어낸 뮈르딘은 모자의 앞뒤를 확인하고 뒤집어쓰면서 말했다.

“너희들에게 걸린 저주만큼 재수 없는 건 아니지만, 남자로서 꽤 당혹스러운 저주임이 분명하지. 그래서 궁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서 왕이 저주에 걸렸다고요? 엑스칼리버의 검집은 주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었던가… 육체의 상처만 막아줬나?”

“흐음. 꽤 많은 걸 알고 있구나.”

“여러 가지 의미로 인기 있는 이야기니까요.”

유명한 야겜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니까… 남자에게 당혹스러운 저주라니, 혹시 저주를 받아서 여자가 됐나? 아니면 발기불능 저주에 걸렸다거나.

실없는 생각에 피식피식 웃고 있으니 유치 찬란한 로브를 입은 뮈르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얼른 꺼지라는 듯이 손사래를 친다.

아, 혹시 모건이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를 숨겨서 아서 왕이 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 일의 연장선인가?

모건을 떠올리니 해야할 일이 하나 생각나서 확인차 뮈르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참, 궁금한 게 있는데 뮈르딘은 모건 르 페이랑 무슨 관계에요? 스승과 제자? 아니면 부적절한 관계?”

빡!!

“끄악!”

“개소리도 그 정도면 아주 수준급이구나. 지나가던 개새끼가 들으면 형님하고 따라다니겠다. 이놈아.”

대체 공격이 어디서 날라오는 거야?! 뮈르딘이랑 5m도 넘게 떨어져 있는데?! 정수리가 쪼개질 거 같은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힐링 터치를 일으켜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끄으으.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뻑!!

“커헉!”

묵직한 고통이 배꼽 아래에서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그 아이는… 아니다.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왜 관계가 없어요? 뮈르딘이랑 관련이 없는 여자라면 저도 되갚아줄게 있다고요! 이상한 안개를 만들어서 우릴 쫓아오고 위협에 가까운 협박도 한데다 기분 나쁜 수작도 부렸는데!”

힐링 터치를 일으킨 손으로 아랫배를 미친 듯이 문대면서 버럭 소리치니 뮈르딘도 '이런 꼴통 자식을 봤나!' 하는 표정으로 지팡이를 위아래로 붕붕 휘두르면서 마주 소리쳤다.

“시작은 망둥이 같은 네놈이었잖느냐!! 마녀의 침소를 엿보이는 건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행위이거늘 네녀석은 아주 제집마냥 뒤집어보더구나! 거기다 나체까지 직시하고서는 무엇이 그리 억울하더냐!”

망아지에서 망둥이로 격하됐다?!

“그, 그거 때문에 명분이 저쪽에 있다고요?”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마법사 모자도 툭툭 쳐서 먼지를 털어내고 머리에 푹 쓴 뮈르딘은 지팡이로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문을 향해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야기해줄 거면 좀 확실하게 해달라고요!

“일없으니 그만 돌아가라 이놈아!”

“생각은 그만 읽고 좀 알려줘요! 안그럼 그 검은 머리 노출 아줌말 납치해버릴 거야!”

“거 좋구나! 그 아이를 납치해서 경계가 무너지면 참 좋… 이런!!”

이죽거리며 말하다 말고 '아차!'하는 표정을 지은 뮈르딘은 이내 성질나서 못 참겠다는 듯이 버럭거리며 지팡이로 매타작하기 시작한다!!

“이런 호랑말코 같은 녀석! 네녀석 때문에 아주 못 살겠구나!!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 그냥 여기서 살아라 그냥!!”

퍽퍽퍼퍼퍽퍼퍼퍼퍽!!

“아오. 진짜!”

맞을 때마다 맞은 곳에서 짜릿한 아픔이 올라온다.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는 뮈르딘의 공격을 기겁하면서 막다 보니 어느새 문 앞까지 밀려나 버렸다.

“아니, 잠깐…!”

“돌아가라!”

“으억!”

분명 아무도 없는데 방문이 벌컥 하고 열리더니 무언가에 확 밀쳐지는 느낌이 들면서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 진짜 너무하네! …어? 흙바닥?”

고개를 들어 황급히 돌아보니 눈에 익은 돌무더기들과 오두막집이 보인다. …여긴 스톤헨지의 오두막집 아냐? 갑자기 바뀐 장소에 황당해서 가만히 서 있는데 귓가에 뮈르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이곳의 정의는 너에게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와 싸우려 든다면 이 세계는 네녀석에게 불리하게 변화할게다. 그러니 그 한은 잊어버리고 네녀석이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해라. 너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많지 않느냐.]

“할배?”

후다닥 달려가 오두막집 문을 벌컥 열어젖혔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뮈르딘의 방이 아니라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단출한 풍경의 오두막집 내부였다.

이건 또 뭔… 공간 이동으로 날 날려버린 건가? 모건 르 페이랑 드잡이질 안 하게?

“할배!!”

목청껏 뮈르딘을 부르고서 잠시 기다렸지만, 그 뒤로 뮈르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몽둥이찜질을 당한 곳이 욱신욱신 아프고 머리도 복잡해서 오두막집 앞 나무계단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뱉었다.

그 이상은 도움을 못 준다더니 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네. 모건이랑 싸우면 내가 불리해질 거란 거도 가르쳐주고.

그런 거보다 어쩐지 앞으로 뮈르딘을 만나지 못 할거란 조금 허전하고 슬픈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왜 이런 예감이 드는 거야?

……어휴. 뭐가 뭔지 모르겠네.

============================ 작품 후기 ============================

어휴. 후원해주시는 분들 모두 싸랑합뉘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더위를 잘 견디는 거랑 더위 속에서 머리를 굴리는 거랑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더라구요;

덕분에 하루에 1편도 겨우 쓰고 있는 판이라 하루 2편 연재는 아직 먼 일이 될 거 같아요ㅠㅠ

죄송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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