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91화 (391/517)

00391  디버프debuff  =========================================================================

한 점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리고 어느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그러면서도 눈앞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 당황하지 않고 아공간에서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내 코와 입을 막고 눈에 위상력을 끌어올려 마나 비전을 발동했다.

선홍색 육벽이 가득한 백청의 입속을 구경하다가 암흑이한테 물었다.

“암흑이 넌 안 괴롭냐?”

=전 슬라임이니까 숨 안 쉬어도 되영.=

“그럼 우주에 나가도 살 수 있겠네?”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데서 살고 싶진 않아여!=

“그만큼 가혹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거지, 거기서 살라고 한 거 아냐.”

손사래를 치는 암흑이한테 말하며 푸른색 공간의 벽을 상자 형태로 만들고 형태를 살짝 바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백청의 몸뚱이가 아공간에 들어가 버리면 흙이 쏟아져 내릴 테니까 미리 몸을 보호해야지.

“그런데 넌 자꾸 말투가 바뀐다? 아직도 캐릭터 성이 확립이 안 됐냐?”

=암흑이가 아니라 투명이가 돼서 그런지 좀… 에헤헤.=

능청스럽게 혓바닥을 쏙 하고 내미는 암흑이의 이마를 콕 찔러주고 공간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에 그 구멍으로 손을 뻗어 백청의 혀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아공간을 불러 백청의 사체를 집어넣으니 TP가 단숨에 바닥나버리면서 아공간의 저장 용량이 100%를 넘어가 버렸다.

아공간에 집어넣으려는 물체의 부피가 남은 용량을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데, 남은 부분은 그대로 남고 들어갈 수 있는 부분만 쏙 들어가 버리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재생되다 만 폐급 부위가 떨어져 나가서 다시 뺐다 넣었다 할 필요는 없겠군

쿠드드드…….

백청의 사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텅 빈 공동이 생겨났는데 잠시나마 유지되던 형태는 곧 급속하게 무너지며 흙더미가 쏟아져 메꿔져 버렸다.

내가 펼쳐둔 푸른색 공간의 벽 주위로 빼곡하게 메워진 흙더미들을 바라보며 잠시 쉬면서 TP를 회복한 뒤에 600m까지 회복된 공간 지각 범위 끝에 2m x 2m x 2m짜리 호박색 공간의 벽을 쳐서 공간을 만들고 그곳으로 공간 도약을 펼친 뒤 푸른색 공간의 벽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스물댓 번을 반복하니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지고있는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원래 상태였으면 두 번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우오. 그 큰 산이 완전히 사라졌네여?!=

“완전히는 아니지. 그래도 50km에 가깝던 산이 10km까지 낮아진 건 좀 충격이네.”

나와 암흑이가 빠져나온 곳은 무너진 산의 산등성이쯤이었는데, 이곳에 서 있으니 폭삭 무너진 벨티칼 산의 흔적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무너진 산의 흔적이라기보단 폭우에 산사태가 일어난 지역이라고 봐야 할 거 같은 풍경이다. 꽤 가파르던 산이 무척이나 완만하게 변한 데다 흑갈색의 토양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척 봐도 정상으로는 안 보인다.

하늘 위로 공간 도약을 펼쳐 지상을 돌아보니 흑갈색의 풀 한 포기 없는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뒤편에는 벨티칼 산 정상에 뚫려있던 싱크홀과 연결된 부분으로 보이는 엄청나게 거대한 구멍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저리 가라 할 만큼의 물이 펑펑 쏟아져 올라와 흙을 밀어내며 강과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사방팔방으로 물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저 물들이 전부 동쪽으로 밀려간다고 생각해보면 동쪽의 절벽 너머는 물이 마르지 않아 영원히 물에 잠겨버릴 거 같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새카맣게 변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별이 융단처럼 펼쳐져있었다. 그 가운데 밝고 환한 달을 보니 용왕의 눈깔이 생각나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혹시 용왕이 나타나진 않으려나? 잠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혹시나 싶은 용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신은 신을 믿어주는 신도가 없어지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용왕은 사비 종족의 신이 아닌 걸까? 아니면 용왕을 믿는 다른 종족이 있어서 완전히 잊혀지지 않아 소멸하진 않는 걸까.

중세 시대의 9만이라는 숫자는 적은 숫자가 아닐 텐데 용왕은 백청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건 뭘 뜻하는 걸까.

…수 킬로미터는 족히 넘을듯한 강 주변과 무너진 산을 살펴보며 혹시 살아있는 존재가 있을까 찾아봤다. 솔직히 말하면 독악이가 살아있을까 싶어서 찾아본 거다.

하지만 벨티칼 산 정상에서 쭉 내려온 곳과 그 주변 일대를 찾아봐도 살아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내 공간 지각이 멀쩡했다면 이 흙 아래 파묻혀 아직 살아있는 녀석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만일일 뿐이다.

내가 매몰됐던 곳의 깊이가 12km가 넘었던 걸 생각해보면 벨티칼 산자락은 비슷하거나 더 깊이 파묻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살아있는 게 있을 리가 없지.

혹시나 싶어 암흑이한테 물었다.

“야. 위상력 감지 범위 안에 위상력이 느껴지는 거 없냐?”

=우웅. 봉인 때문에 감지가 안돼여. 주인님만 겨우 느껴지는걸여.=

“그런가….”

뱀 새끼 한 마리 때문에 9만 마리의 종족 하나의 무덤이 된 장소를 보며 고개를 숙여 잠시나마 묵념을 올렸다.

중세 시대로 넘어가기 전에 아까 주변을 살피다가 발견한 적당히 지대가 높고 물에 잠기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번 2km 상공에서 목숨을 건 자유낙하를 경험했더니 두 번 다시 하늘 높은 곳에서 현실로 넘어가고 싶지 않아졌거든.

불알이 쪼그라드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해.

=사비 종족도 불쌍하네여.=

“어?”

주머니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암흑이는 황량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망가진 주변을 바라보더니 코 밑을 쓱 훔치면서 말했다.

=백청이라는 이무기와 함께 살지 않았다면 종족 자체가 멸망하지 않았을테니까여. 그 하얀 도마뱀 인간이랑 시푸른 도마뱀 인간도 어떻게든 자기 종족을 살리기 위해 주인님한테 협력한 건데… 어, 음.=

“나한테 협력하지 않았다면,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도 죽지 않았겠지.”

=어버버. 그, 그런 뜻이 아님다! 까놓고 말하면 백청 그시키가 주인님한테 시비턴게 원인이었지않슴까!=

“됐어. 위로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한 짓을 외면하지는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내 잘못이야~!! 하면서 자책하지도 않을 거니까.”

=에헤헤. 주인님 멋지심다.=

“그러니까 프랑이랑 화연이랑 영은이가 나한테 매달리는 거지. 킥킥.”

괜스레 우쭐해져서 자화자찬했더니 암흑이의 표정이 살짝 썩어들면서 주둥이를 삐죽 내밀며 작게 소곤거렸다.

=…재섭숑.=

“응? 재섭숑이 뭔데?”

=오? 아, 아녀요! 그게, 주인님이 제일 멋지고 서, 음 섹시하다는 줄임말이었어여!=

…그런 뜻이 아닌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욕을 먹은 기분이라 눈을 가늘게 뜨고 암흑이의 자그만 머리통을 째려보니 내 시선을 피하면서 슬금슬금 바지 주머니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능글맞아진 암흑이의 보들보들한 몸통을 움켜잡고 주머니에서 꺼냈더니 울상을 지으면서 싹싹 빌기 시작한다.

=자, 잘못했어요~! 장난이에여, 장난! 꽥! 이익. 그렇게 움켜잡으면 이상해졋, 꿰엑?!=

뽁뽁이를 터트리는 것보다 더 중독될 거 같은 감촉과 귀여운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중세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세상이 하얀 눈에 뒤덮인 중세 시대로 넘어온 나는 프랑이 본의 아니게 만들어놓은 흙 언덕에 올라 주변을 살펴봤다.

카멜롯을 나와 남쪽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모건 르 페이의 수작질에 기분이 잡쳐서 되돌아갔었으니까 이대로 북쪽으로 가면 금방 카멜롯이 나올 거다.

공간 도약을 반복하는 것보다 달려가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 몸을 날리려는데 암흑이가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추버?! 주, 인니이임. 몸이 얼어붙을 거 같아여어어!=

“괜찮아. 사람 몸은 이 정도로 안 얼어.”

=제 몸은 따지고 보면 액첸데염?! 얼어요! 얼어붙어요! 꾸득꾸득하고 얼어붙는다아아!=

“나 참.”

암흑이에서 투명이로 변하면서 성격도 좀 바뀐 거 아냐? 내 손에 잡혀 겨울바람에 노출된 암흑이는 죽는다고 버둥거리며 엄살을 부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주니 대번에 표정이 흐물흐물해지면서 꼼질 거리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날이 완전히 저물어서 기온도 떨어지고 있는 데다 쌓인 눈에서 냉기가 올라오고 살을 얼리려는 듯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중이다.

나야 썬더 이엘의 타이즈 슈트도 입고 있고 위상력을 돌려서 냉기에서 몸을 보호하는 중이지만 위상력이 봉인된 암흑이는 보호 수단이 없어 꽤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밤이라서 기온이 더 낮은 것도 있고….

벌을 줄 셈으로 손에 들고 있었던 게 조금 미안해져서 마나 오러를 약하게 일으켜 암흑이를 덮어주니 안주머니에서 꼬물거리는 게 간지럽다.

TP의 사용량을 조절하면서 마나 오러를 일으켜 내 몸을 지키며 오랜만에 공간의 벽을 연달아 펼치면서 북쪽으로 달려갔다.

마나 오러에 막혀 약간 쌀쌀하게 느껴지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니 모건 르 페이와의 마지막이 신경 쓰인다. 현실로 넘어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모건 르 페이가 발작을 일으키려던 모습은 말 그대로 광년이었으니까.

특히 현실에서 마녀라고 불리는 모건, 그 여자한테 경계심이 크게 상승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게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속담일거다.

마녀니까 무슨 이상한 술수를 부릴지 모르잖아? 경계하는게 당연해. 거기다 난 지금 상태도 정상이 아니니까.

카멜롯에 도착하면 바로 뮈르딘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더듬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빠르게 북상하고 있으니 캄캄한 지평선 부근에서 희미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빛이 카멜롯이겠지. 그러니까… 6개월만인가? 아공간에 과자들도 좀 챙겼으니까 미래의 군것질거리를 선물로 줘야겠다.

눈에 뒤덮힌 야트막한 언덕을 뛰어넘으니 수확이 끝난 눈에 뒤덮인 밀밭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고 그 너머로 현대의 도시 만큼이나 번화한 카멜롯을 감싸는 성벽이 보였다. 성벽 위에는 일정 간격으로 횃불이 설치되어있었는데 그 사이 사이를 작은 횃불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경비가 순찰을 도는 거 같아 보였기에 좀 더 하늘 높이 올라가서 성벽을 뛰어넘었다.

치칫.

“…뭐였지?”

뛰어넘는 순간 뭔가 얇은 막을 찢는 느낌에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간 지각으로 주변을 살펴봐도 순찰을 도는 경계병들과 성벽 근처의 민가에서 열심히 2세 생산 작업 중인 부부들만 감지에 들어온다.

3인 1조로 횃불을 들고 순찰을 도는 경계병들을 지켜보다가 마나 비전을 켜서 다시 주변을 살펴보니 은은한 보랏빛을 내뿜는 희끄무레한 막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헐, 보호막? 설마 이거 뮈르딘이나 모건이 펼쳐둔 건 아니겠지? 보랏빛인 게 유독 신경 쓰이는데.

보랏빛 막에는 내가 뛰어든 부분에 조금 커다란 구멍이 생겨있었다. 그리고 카멜롯 성을 중심으로 도시를 전부 덮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카멜롯 성으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면서 지켜보는 사이에 구멍은 순식간에 메꿔져서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다시 한 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뮈르딘의 타워가 있는 도시 외곽의 언덕마루로 향했다.

뮈르딘의 집 앞에 도착해 5층짜리 동그란 벽돌 건물을 살펴보니 3층에 달린 창문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쳐 보인다.

뮈르딘은 내가 공간 지각으로 주변 상황을 살펴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 공간 지각으로 타워 내부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입구에 다가갔다.

타워의 문은 철판으로 보강한 적갈색의 나무문이었는데, 한가운데 달린 사자 머리 모양의 구조물에 달린 동그란 걸쇠를 잡고 문을 두드렸다.

=으….=

나무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암흑이가 괴로운 듯 억눌린 목소리로 신음을 흘린다.

“왜 그래?”

=그게 좀… 백청이랑은 다른 껄쩍지근한 감각이 느껴져서….=

지금 만날 상대가 범상치 않은 존재인 건 확실하지.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녀석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면서 조금만 참으라고 달래줬다.

…근데 문을 두드려도 왜 아무도 안나와? 또 벽난로 앞에서 졸고 있나?

다시 한 번 걸쇠를 잡아 문을 두드리니 문 너머로 뭔가 철커덕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이건 무슨 소리지? 쇠와 돌이 마찰되는 기묘한 소리는 곧 문 앞까지 다가와서 멈췄고,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두 걸음 물러서서 기다리니 문이 천천히 열렸다.

“…….”

“…….”

열린 문 뒤에 서 있는 건… 날렵하고 세련된 풀 플레이트를 입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의 기사…였는데, 질투도 나지 않을 만큼 무진장 잘생긴 남자였다!

매일매일 손질하는 것인지 매끄럽게 다듬어진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남자는… 말로 표현하자면 이 시대 최고의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은 세계 최고의 미남 조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생겼는데 아쉬운 점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지 있지 않는 거였다.

감정이 없는 고요한 눈빛으로 날 살펴보는 남자를 나도 마주 보며 살펴봤는데 키는 160이 겨우 될 정도로 작았지만, 인체 비례가 정확한 8등신으로 조명빨도 없는데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내심 프랑을 안 데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 아니, 프랑이 외모에 홀릴 가벼운 여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저 얼굴은 너무 사기잖아. 내 능력이 씹사기면 저 얼굴이나 몸의 비율은 개씹사기다.

나도 말없이 가만히 흑발의 기사를 마주 보고 있으니 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요?”

큭! 목소리도 듣기 좋아! 세상 진짜 불공평하다…!

질투가 안 난다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거짓말이고 살짝 짜증 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키는 내가 더 크다는 점에 위안을 얻으면서 입을 열었다.

“뮈르딘을 만나러 왔는데, 안에 계신가요?”

“…뮈르딘 경은 귀빈을 맞이하고 계시오. 찾아온 객을 되물리는건 옳지 못한 행동이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내일 다시 와주었으면 좋겠소.”

뭐랄까, 저만한 마스크의 남자라면 콧대가 겁나 높거나 자존심이 무진장 셀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옹졸한 생각을 비웃듯이 살짝 울리는 저음으로 부드럽게 들일 수 없다는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근데 평소였다면 나도 양보해줬겠지만, 지금 상황이 평소는 아니거든.

“저도 좀 급해서요. 비켜주세요.”

“미안하오.”

부드럽지만 칼같이 단호한 목소리. 비켜줄 수 없다는 말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 공간 도약을 쓸까 흑발의 기사를 쓰러트릴까 고민하다가 제3의 행동을 취했다.

“[뮈르딘, 안에 있죠? 농담 아니고 진짜 급해서 그러는데 좀 들여보내 주시죠?]”

내 목소리에 표정이 바뀐 흑발의 기사는 저 잘생긴 마스크를 살짝 일그러트리면서… 시발, 진짜 잘생겼잖아!

“무슨 짓을 하는 거요!”

“[나 지금 무진장 예의 차리고 있는 거거든요? 안 들여보내 주면 깽판 칠지도 몰라요!]”

“그만두지 못하겠소?!”

흑발의 기사는 자신을 무시하는 내 행동에 분노한 표정으로 건틀릿을 낀 오른손을 슬쩍 늘어트리고 왼손을 뻗어 날 막으려 들었다.

“에잇.”

밖으로 나오려고 입구를 지나치려는 남자를 그대로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문을 막아버리면서 남자도 같이 묶어버렸다.

“이게 무슨?!”

…십알. 잘생긴 얼굴이 당황하니 당황하는 대로 화보 같다. 벽에 묻힌 조형물처럼 굳어버린 남자는 당황을 추스르고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어어?

쿠드드득.

“흐으으읍!”

우지직. 콰드드득!

힘으로 푸른색 공간의 벽을 으스러트리기 시작한다! 뭐야?! 인간 주제에 초위 이형종의 근력이라도 가진 거야?!

뜬금없는 무식한 상황에 입을 벌리고 공간 지각으로 남자를 살펴보니, 고작 C 클래스의 신체 강화 능력자였다.

“또 무슨 사이 한 사술을!! 그대는 흑마법사인가?!”

“흑마법사라니! 동정 졸업한 지 8개월도 넘었는데 무슨 인신공격이야?!”

이 남자도 공간 지각을 느끼는 건가?

흑마법사라는 개드립에 반사적으로 딴지를 걸었지만 생각해보니 저 흑발의 기사가 말한 건 내가 아는 그 흑마법사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의 이해 못할 괴력에 반쯤 부서져 내린 공간의 벽을 다시 보강하려는데 뮈르딘의 골치 아프다는 목소리가 들려오며 우리의 움직임을 막아왔다.

[그만두시게, 나이트 랜슬롯. 네놈도 그만 깽판부려라.]

……랜슬롯?! 이 남자가 그 랜슬롯 듀락이라고?!

============================ 작품 후기 ============================

봐주시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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