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9 디버프debuff =========================================================================
진동이 사라질 무렵 압박감이 조금 줄어들어서 가슴 사이를 파헤치며 빠져나왔더니 사방이 칠흑처럼 어둡다. 공간 지각도 먹통이나 마찬가지라 잠시 가만히 있는데 머리 위쪽에서 프랑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랑? 괜찮아?”
「괜… 찮아요. 서하는 다친 곳 없나요?」
좁은 곳에 왕왕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살짝 끊김과 평소와는 다른 미약한 떨림이 느껴져서 프랑의 가슴을 타고 기어오르며 말했다.
“나야 프랑 덕분에 무사해. 그런데 프랑은 다친 거 아냐? 목소리에 고통이 느껴지는데?”
「괜찮아요. 제 육체는 초위급 이형종이잖아요? 조금 다치긴 했지만, 별거 아니에요.」
거짓말일 게 뻔하다. 보나 마나 내가 걱정할까 봐 숨기려 하는 거겠지. 일부러 멀쩡한 척 밝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프랑의 가슴 위에 서 있는 난 알 수 있다.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떨고 있다는 거.
얼마나 다친 것인지 캐물으려 했지만… 그냥 말았다. 날 보호하기 위해서 대신 부상을 감수한 그녀한테 뭐라고 할 건데? 지금은 위상력도 움직이지 않아서 스킬은 커녕 능력도 제대로 사용 못 하는데….
나 대신 프랑이 다쳤다는 생각에 후회부터 밀려온다.
싫은 예감이 들었을 때부터 짐작 조심했어야 했는데… 내 부주의에 또 프랑이 다쳤다는 생각이 들자 자괴감이 일어날 거 같다.
…제길. 백청 그 뱀 대가리는 애초에 산을 무너트릴 심산으로 우리가 오길 기다렸던 거야. 안 오면 몸을 재생해서 다시 한 번 싸우려 했겠지. 이럴 줄 알았다면 백청을 보자마자 잡아서 신의 땅으로 공간 도약을 했을텐데!!
생각이 이렇게 진행되다 보니 용왕 아민-라에게도 억하심정이 생겨난다. 그와 나의 계약은 단순히 프랑을 치료해주는 댓가로 마탄과 마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지금 이 꼬라지가 되고 보니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이거야말로 피해망상이군. 동쪽에서 뺨 맞고 서쪽에서 화풀이하는 셈인가.
머릿속에서 들끓는 상념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어 프랑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역시 프랑은 내 수호천사야.”
「과, 과장이 심해요, 서하.」
“아냐. 지금까지 프랑 덕분에 살아난 게 몇 번인데.”
「으, 음. 그나저나 몸은 어떠세요? 위상력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나요?」
부끄러워하는 목소리의 프랑에게 고마움을 말하면서도 좁쌀만큼만 움직이는 위상력을 어떻게든 굴려 힐링 웨이브를 쏴보려 하지만 몸속의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이 들면서 스킬이 발동되질 않는다.
민망한지 대화 주제 돌리기를 쓰는 프랑에게 넘어가 주며 지금 몸속에 느껴지는 상태를 그대로 대답해줬다.
“응. 교통사고 난 2차선 도로처럼 꽉 막힌 느낌이야.”
「후우. 금방 이해가 가는 비유네요.」
말 할 때마다 살짝살짝 신음을 흘리는 프랑도 걱정이었지만 약 먹은 바퀴벌레처럼 비실거리던 암흑이도 걱정되서 주머니를 살펴보니 웅크린 채 끙끙거리면서 앓고 있었다. 내가 들여다보는 걸 눈치챘는지 =으으.=거리면서 손을 뻗길래 녀석을 꺼내서 내 어깨 위에 올려주니 헤롱거리면서 축 늘어져 있을 뿐, 상태가 나빠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마나 비전도 못 쓰는 지금 상황에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것처럼 칠흑같이 어둡고 좁다.
완벽하게 매몰된 상태겠지. 거기다 프랑도 다쳐있고 암흑이도 굳어버린 위상력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산소도 금방 바닥날 텐데 그 전에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공포와 함께 부정적인 사고가 머리를 들려 하기에 정신을 집중해서 내가 가진 능력을 하나하나 꼽으며 가능성을 살피기 시작했다.
공간 지각은 패시브였지만 위상력을 사용하는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6.75km의 범위에서 왕창 줄어 2m에서 3m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지각 범위에 한숨을 쉬었다. 공간 도약이 공간 지각 범위 안에서 이동이 가능한 거라 이 상태라면 공간 도약을 할 수 있다 쳐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다.
푸른색이 아닌 호박색 공간의 벽을 조금이라도 펼칠 수 있다면 중력에 의해 토사가 밀려오면서 공간의 벽에 모조리 분해돼버리고 동시에 산소도 공급될 거다. 또 그대로 두기만 하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봉인된 위상력은 티끌만큼의 호박색 공간의 벽을 펼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망할 뱀 년이 봉인이라는 수작질을 부려서 위상력을 굳게 만들어버렸는데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면 어쩌지? 그러고 보면 뱀 년이 뒈졌는데도 위상력이 퍼져나오 질 않는다.
몸 일부를 잃으면서 위상력도 소실됐었는지 꽤 많이 줄었었지만 그래도 7천만이었는데, 그게 전부 어딜 간 거지?
“이 뱀 년이 저주의 매개물로 위상력을 전부 처넣은 건가….”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조용히 있어 주던 프랑이 바로 대답해온다.
「그러고 보니 백청의 위상력이 퍼져나오지 않네요. 이형종의 생명의 근원은 위상력이니….」
“그렇지? 아까 피처럼 위상력이 뿜어져 나오던데 그게 전부 체내의 위상력이었나봐. 그걸 써서 우리한테 저주를 걸었나 본데.”
망할 년. 죽어서까지 우리한테 엿을 먹이는구만.
공간 도약도 안 되고 마나 탄도, 마나 포도 못쓴다.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내는 건 가능하지만 집어넣는 것도 불가능하고 다른 능력들은 탈출에 도움이 안 된다.
암흑이의 분해라면?
“암흑아. 너 지금 흙이나 바위 같은 것들을 분해할 수 있겠어?”
=우으… 조, 조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여….=
안되는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바들거리면서 하는 말을 보니 시켰다간 큰일 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방법, 방법. 여길 빠져나갈 방법…. 머리를 굴리면서 계속해서 마나 시브로 위상력을 움직이고 있으려니 아주 조금씩 운용되는 위상력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극미량에서 극소량이라 능력을 펼치려면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그 전에 산소가 바닥나서 나랑 프랑이 질식해서 죽겠지.
이 개미 눈물만큼 움직이는 위상력으로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은….
“중세 시대.”
「아, 으음. 중세 시대라니요?」
입을 열자마자 튀어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킨 프랑이 평범함을 가장하며 질문을 던졌다. 프랑이 입은 상처에 정신이 쏠릴뻔했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대답해준다.
“중세 시대로 넘어가는 거야. 현실에서 중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귀환 포인트를 찾아야 하지만 위상 세계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방식은 현실에서 위상 세계로 넘어가는 거랑 비슷할 거라 예상했었잖아.”
「아아!」
바로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며 중세 시대에서 본 론디니움과 론디니움의 전투, 뮈르딘과의 충격적인 대화와 중세시대의 도시라고 믿기 힘든 계획도시인 카멜롯을 떠올리며 중세 시대로 넘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제발 돼라!
그러자 극미량의 TP가 체외로 흘러나오며 주변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된다!”
하지만 평소처럼 순식간에 이동 준비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세계를 뛰어넘기 위한 TP가 충족될 때까지 집중을 계속해야 할 거 같은데… 산소가 바닥나는 게 먼저일까 TP가 모여서 넘어가는 게 먼저일까.
“후우, 으음. 크으으.”
감질나는 상황에 호흡이 거칠어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프랑이 손을 들어 내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진정하세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정신을 집중하시는거에요.」
그 말을 듣고서야 심호흡을 하면서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프랑 말대로 조바심을 내봤자 실수할 확률만 커지니 정신을 집중하는 거다.
프랑의 가슴 위에 앉아 한 손은 내 옆에 놓여있는 프랑의 손에 얹고 끊임없이 위상력을 운용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쉬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들 무렵 몸 주변이 확연히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눈을 번쩍 뜨니 몸 주변으로 흘러나간 TP가 은은한 빛을 뿌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시작한다.”
곧이어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현실에서 위상 세계로 넘어갈 때의 그 느낌이 감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 시발.”
시야가 환해지며 중세 시대에 나타나기 직전, 깜빡하고 있던 한가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앗?!」
머리 위는 푸른 하늘. 발아래는 눈이 쌓여 새하얀 숲의 바다.
…깜빡했다. 저번에 귀환할 때 공중에서 되돌아갔었지…!
생매장돼서 질식사할 위기에서 벗어났더니 이번에는 추락사의 위기가 펼쳐졌다. 지상에서 수 킬로미터 높이에서 나타난 우리는 곧바로 중력의 영향을 받아 칼날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을 받으며 낙하를 시작했다.
바로 시선을 돌려 태양 아래 드러난 프랑의 나신을 보는 순간 눈꼬리가 부르르 떨린다.
“프랑!!!”
「전 괜찮아요! 서하가 살 방법을 찾아요!」
“괜찮기는 개뿔이!! 왼쪽 어깨가 박살 났잖아!! 왼쪽 다리도, 골반도 이상하게 뒤틀려있고!!!”
「우윽.」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버럭 화를 냈더니 프랑이 울상을 지었다.
크게 다친 프랑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날 걱정하며 자신한테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여긴 수 킬로미터 상공이라고! 아무리 프랑이 초위급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위상력도 운용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대로 추락하면 어떤 꼴이 될지 뻔하잖아!!
머리에 프랑이 추락사한 끔찍한 모습이 떠오르자 사고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수를? 무엇을? 어떻게?
맹렬하게 회전하는 사고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실낱같은 위상력을 집중해 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아공간 포털을 만들어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빠져나온 손은 블루 스톤을 한웅큼 쥐어고있었다.
바로 한 개를 입에 집어넣고 삼키자 꿀처럼 변해 식도로 넘어가며 TP를 회복시켜주지만 백청 새끼의 봉인 디버프에 바로 굳어버렸다. 그럼…!
“터져!!!”
=히익?=
블루 스톤을 쥐고 있는 손에 미약한 위상력을 있는 대로 집중해 있는 힘껏 움켜쥐니 푸척, 하고 썩은 과일이 뭉개지는 듯한 감촉과 함께 물컹한 위상력이 퍼져 나온다. 이걸 마나 시브로 움직여서…!
“으아압!!”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지상에 일평생 두 번 못 쓸 집중력을 발휘해 프랑이 추락하는 방향에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얇고 거대한 미끄럼틀을 만들었다.
쿵!
「꺄윽! 아으헉…!!」
그리고 푸른색 공간의 벽에 부딪힌 프랑이 비명을 지르며 미끄럼틀의 방향에 따라 주르륵 미끄러져 나간다.
쯔저적.
하지만 불길한 파열음과 함께 막대한 무게에서 오는 운동에너지를 버티지 못하고 프랑을 1/3쯤 미끄러지게 만든 공간의 벽에 금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더니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너무 얇아 무게를 못 버틴 건가. 하지만 잠깐이나마 운동 에너지의 방향을 전환하고 속도를 감소시키는 데 성공해 프랑의 거대한 몸이 대지와 빗변을 이루다가 겨울 눈이 쌓인 숲에 추락하며 대지를 가르고 지나간다.
쿠구구구그그극.
그대로 길다란 흔적을 남기며 처박힌 프랑이지만 죽지 않았으니 됐다. 육체도 신체 강화 타입의 그것이라 위상력으로 강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구력이 있으니까.
문제는 난데….
“TP를 다 써버렸네.”
=쥔님?!=
넘어오기 직전에 남은 TP는 방금 아공간 포털을 여는데 다 써버렸고 블루 스톤을 터트려 흘러나온 위상력은 프랑이 대지에 안착하는 데 필요한 미끄럼틀을 만드는데 모두 써버려서 아공간 포털을 다시 열 수 있는 TP가 없다.
“이렇게 죽는 건가….”
빠르게 추락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다리를 하늘로 향하며 움푹 패인 땅에 고꾸라져있는 프랑을 바라봤다. 부상당한 곳에서 고통이 올라오는지 얼굴을 찡그리긴 했지만 다리를 꿈틀거리는 걸 보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 지키느라 입은 상처가 덧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재생력으로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삶의 마지막에서 보는 프랑의 얼굴이 흙과 눈에 범벅이 된 찡그린 표정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곳과 살짝 접힌 뱃살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분에 넘치는 여자들과 연인이 되어서 버킷리스트를 해결해왔으니 여한은….
=…인님!! 주인님 시발아!! 정신줄 놓지마!!=
그 순간 파리채 같은 손바닥이 내 안면을 마구마구 후려친다!
“어, 엉?!”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에 눈물을 찔끔 흘리는데 칼같은 암흑이의 포효가 내 머리를 들쑤신다.
=날 낙하 지점에 집어 던져! 얼른!!=
“왜….”
=닥쳐!! 빨른!!!=
아, 에잇. 암흑이가 나한테 성내는 일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200m도 남지 않은 지상의 내 추락지점에 암흑이를 잡고 힘껏 집어던졌더니 폭풍처럼 확장되며 비상탈출용 에어 매트리스처럼 변해버렸다!?
“우아아아?!!”
어지간한 건물 3층 높이에 대형 수영장 크기로 변한 암흑이 메트리스를 보자마자 몸을 틀어서 등부터 착지했더니 트램플린처럼 쭈우욱 한계까지 늘어나다가 반발력으로 날 튕겨내 버린다.
“흐히이이익?!”
=프랑 마님!! 잡아!!=
「알아!!」
어, 어억?! 사지를 허우적거리면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보니 프랑이 오른팔로 몸을 뒤집더니 오른발로 땅을 박차며 내게 날아온다. 점점 가까워지며 커다랗게 확대되는 프랑의 손바닥을 보고 눈을 질끈 감으니 몸에 폭신한 충격이 몸을 감싸는 것과 함께 프랑의 외침이 귓가에 들려왔다.
「받았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다칠세라 날 조심스럽게 잡는다. 그리고 하늘이 빙글 도는 느낌과 함께 약한 부유감이 느껴지더니 곧 미약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쿠웅!!
쿵 하는 소리가 들린 뒤에 다시 한 번 하늘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는 생각이 들자 날 덮고 있던 손이 열리며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동안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사, 살았…구나. 우리 모두 살았어.”
「네에. 살았어요.」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오자 그제서야 식은땀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으, 으흐흐. 후히히히. 아,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저도요오오. 하으으.」
“…나한테 살 방법을 찾으라며. 프랑은 내가 미끄럼틀을 안 만들어줬으면 어쩔뻔 했어?”
「…그러는 서하도 저한테 미끄럼틀을 만들어 준 뒤에 어쩌려고 했어요?」
“…….”
「…….」
…프랑의 마음이 이상하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민망한 기분에 히죽 하고 웃으니 프랑도 붉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시푸르딩딩하고 팅팅 붓고 있는 프랑의 왼편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움직이려 드는 프랑한테 제발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으라고 사정사정한 뒤에 암흑이를 데리러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 형태로 돌아와 나뭇가지가 앙상한, 새하얀 눈이 쌓인 숲 속을 아장아장 걸어오던 암흑이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녀석을 발견하자 암흑이도 날 발견하고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달려오다가 철푸덕하고 넘어져 버렸다. 황급히 달려가 녀석을 안아 올리니 몸의 감촉이 좀 이상해진 거 같다. 뭔가 흐물흐물한 게 꼭 물이 되기 직전의….
=주인님. 다치신 곳은 없으세염?=
“…….”
=…주인님?=
말없이 녀석의 몸을 만져서 상태를 확인해보다가 살짝 한숨을 쉬고 품에 안은 뒤에 프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쥔님~.=
=주인님, 까꿍?=
=쥔님아~!=
돌아오는 동안 이리저리 말을 걸던 암흑이를 말없이 쓰다듬으며 걸었더니 프랑에게 도착할 때쯤에는 조금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랑 곁에 도착한 뒤에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녀석을 들어 얼굴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손가락 사이로 내 얼굴을 훔쳐보는 암흑이의 귀여운 모습에 속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 우리 암흑이가 나한테 뭐랬더라. "주인님 시발아!!"라고 했던가?”
=에, 에헷.=
“닥쳐…라고도 했었지?”
=으아으. 그, 그건! 주인님이 세상만사 다 끝났다는 얼굴로 포기하려고 해서 충격요법으로 사용한거거등요!?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푸훗.」
기겁한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면서 주먹을 뺨에 대고는 귀엽게 '뿌잉뿌잉.'을 하는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암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누가 뭐랬냐? 잘했어. 이번에는 암흑이 니가 날 살렸다.”
=에헤헤.=
암흑이 말대로 마지막에는 정말 삶을 포기했었는데 거기서 암흑이가 도움을 줄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녀석도 위상력이 봉인되서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 자체가 존재를 무너트릴 수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머뭇거림 없이 날 위해 몸을 던진 게 너무 고마웠다.
그건 프랑도 마찬가지였는데, 매몰되는 산에서 좁은 백청의 주둥이 속에 숨었던 프랑은 추락의 충격에 왼쪽 어깨가 박살 나고 왼쪽 갈비뼈도 대부분 부러진 상태에 왼쪽 골반도 복합 골절을 당한 데다 왼쪽 다리도 비틀리고 뒤틀려있었다. 더해서 2km 줄 없는 번지점프에 날 받아내기 위해 점프까지 하는 바람에 부상이 더욱 악화되버렸다.
척추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하반신을 움직이질 못하는 프랑을 치료해주기 위해 어떻게든 TP를 박박 긁어모아 힐링 터치를 겨우 일으켰지만, 통증을 약간 줄여주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백청이 건 봉인… 저주가 마나 시브에 의해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읏.」
몸의 절반의 뼈가 부러진 몸을 스스로 움직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날려 날 받아냈으니… 40m의 프랑을 어떻게 부축해줄 방법이 없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겹게 몸을 바로 누이는 프랑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하아….」
겨우 바르게 누운 프랑은 지쳤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프랑이 흘린 진땀에 주변이 사과 향으로 가득 차니 파블로프의 개 마냥 거시기에 피가 몰리는 내가 경멸스러울 지경이다.
혐오감에 속이 울렁거릴 것만 같은데 프랑이 날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풀 죽어 계시면 제 마음도 슬퍼져요. 그러니 평소처럼 웃어주세요.」
“응….”
「저는 서하의 탱커죠? 이 부상은 제가 해야 할 일을 증명해주는 상처이며 저의 기쁨이에요. 정말로 괜찮아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서하가 깨끗하게 고쳐줄 거잖아요?」
새하얀 눈밭에 몸을 누인 하얀 나신의 미녀 거인.
비록 심각한 상처를 입었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남자의 보호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는 모습이라 갖은 생각이 머릿속을 들쑤시고 있었지만 파리해진 안색으로 땀에 젖은 프랑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A 클래스가 될 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