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87화 (387/517)

00387  사비 종족  =========================================================================

“단순하게 육체의 사이즈를 배율로 줄이는 소인화는 아닌 거 같아요.”

몸이 작아져서 입을 옷이 없어져 버린 프랑한테 내 옷가지를 꺼내 찢어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리게 해줬더니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입고 있던 백청의 비늘 가죽을 끌고 왔다.

“그럼?”

그리고는 내게 비늘 가죽을 내밀며 길이 2m에 폭 1m 정도 되는 직사각형으로 잘라달라기에 원하는 대로 해줬더니 하얀색 사인펜으로 옷의 패턴으로 보이는 선을 긋고 작은 동그라미와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선을 따라 자르고 구멍을 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마나 레이저 MK2을 뽑아내 선을 따라 자르고 구멍을 퐁퐁 뚫어주니 이번에는 가죽끈으로 쓸 것들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몸은 작아졌지만 육체의 밀도라고 해야 할까요? 근육과 살이 조금씩 압축되면서 밀도가 높아져 신체의 강도가 굉장히 강해졌어요.”

“어? 그럼 몸무게도….”

다가가서 프랑을 들어보려 했더니 후다닥 뒤로 물러나면서 내 접근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아아아! 안돼요! 모, 몸무게가 그렇게 많이 나가는 건 아니라구요! 40m일 때보단 훨씬 적지만 그래도… 아, 아무튼!”

“어제 들었을 땐 그렇게 무겁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어느 정도야? 방어력이 얼마나 강해졌는데?”

몸무게를 다시 언급했더니 날 매섭게 째려보기 시작하길래 얼른 주제를 돌렸다.

“방어력이 강해진 것도 있지만, 그보단… 체중과 근육의 힘이 증가하는 비율이 다르다 보니 체중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근력이 강해지게 된 거 같아요.”

“개미가 자기 몸무게의 수십 배를 들 수 있는 거처럼?”

“그런 거처럼요.”

대답해주면서 백청의 가죽 자투리 4장을 집어 들더니 겹쳐서는 양 끝을 잡더니 있는 힘껏 잡아당기자 가죽이 찌지직 소리를 내며 찢어져 간다!

“헐.”

1장도 아니고 4장을 겹치고 그걸 좌우 끝을 잡고 잡아당겨서 찢어버려? 내 공간의 벽에도 버티는 백청의 가죽을?

그러고 보니 어떤 특수한 슈트를 입고 몸이 작아진 사람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영화가 있었지. 그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나?

프랑은 재단과 구멍 내기를 완료한 직사각형 가죽을 집어 들더니 각각의 작은 구멍에 가죽끈을 끼워서 묶고 여차여차하더니 큰 구멍에 팔을 집어넣고 머리를 집어넣어 나머지를 묶자 하드 레더 아머처럼 상체를 가리는 가죽 갑옷이 완성됐다.

마찬가지로 바지도 비슷하게 만들어 입으니 군청색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비늘 가죽 갑옷 한 벌을 입은 날렵한 처녀가 눈앞에 섰다.

외형은 좀 투박하지만, 프랑이 전문 방어구제작자도 아니고 제작 도구도 없는데 저렇게 끈 하나만 가지고 갑옷을 만든 게 대단한 거지.

“비늘이 붙어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햇살에 반사되는 게 아주 멋진데? 하지만 애써 만들었는데 소인화 지속시간이 끝나면 커지면서 다 찢어져 버리는 거 아냐?”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주니 프랑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미소를 짓는다.

“소인화 지속시간은 대략 31시간 정도 될 거 같아요. 중간에 비술을 한 번 더 외워두면 시간이 갱신되니까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계속 갱신하면 괜찮아요.”

“와. 비술의 숙련도에 따라 지속시간이 차이 난다더니 엄청 길어졌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었던 가죽 갑옷을 벗자 임시로 두른 젖가리개가 흘러내리며 탐스럽게 부푼 유방과 체리 같은 유두가 햇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보기에도 탄력이 넘쳐 보이는 젖가슴을 구경하고 있으니 프랑은 구멍을 꿰어 감고 있던 가죽끈을 풀어 마감작업을 하면서 말했다.

“누호디의 이야기로는 지속 시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소인화 비술이 완벽에 가까워지면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이 마음대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대요. 거기다 이만큼 줄이는데 든 TP도 1만이 채 되지 않아요. 그러니 소비 TP 부담도 없지요.”

“그거 다행이네. 진짜 잘됐어.”

상반신 누드 상태로 엄마처럼 포근한 웃음을 띠고 가죽끈을 다듬는 프랑을 보니 다시 덮쳐버릴까 살짝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청이 올라올 때가 다 돼가니까 막 욕망이 가는 대로 날뛰는 건 자제해야지.

그래서 대신으로 가죽끈 여러 개를 겹쳐 더 단단하게 보강 작업을 프랑의 뒤로 돌아가 히아리드보다 더 큰 가슴을 내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어휴… 후후.”

앉은키가 내 선키와 비슷한 덕분에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니 내 엄지손가락보다 더 크고 굵은 체리 두 방울이 손가락에 잡힌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스킨십을 바랬는지 프랑은 간지럽다는 듯이 후후 웃기만 할 뿐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프랑의 유방을 원없이 만지며 프랑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사과 향기를 맡는데 벗어둔 재킷 안에 있던 암흑이한테서 이변이 발생한 걸 감지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암흑이는 원래의 슬라임 형태로 되돌아간 상태였는데 위상력에 물들었는지 파랗게 변한 모습으로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뒤따라온 프랑이 상체를 살짝 숙여 암흑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가지가 의심이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혹시… 이 장소 문제가 아닐까요?”

“장소 문제? 하지만 저 녀석들이나 우리는 멀쩡하잖아?”

푸른색 공간의 벽 아래에서 한가롭게 늘어져 있는 독악이들과 딜라이크 옆에 퍼질러 앉아 뭔가 명상을 하는 알케마를 가르켰다. 상태가 약간 취한 것처럼 흐늘거리는 것도 잠시였고 지금은 모두가 익숙해져서인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잖아요?”

“…그거?”

“네, 그거요.”

백청의 날벼락에 날 감싸고 치명적인 공격을 받아 위상력이 100까지 줄어들면서 증발해버릴 뻔한 암흑이는 내가 TP를 잔뜩 주입해줘서 원래의 위상력을 찾을 수 있었었다. 프랑이 말하는 건 그걸 지적하는 거겠지.

그땐 내 위상력으로 채워지면 최고위 아종이 되던가 뭔가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었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 최고위 이형종으로 남았었다. 초반에는 위상력에 물든 것처럼 푸른색이었긴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반투명한 검은색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암흑이가 졸기 시작한 것도 서하가 살려준 뒷날부터였고 동면하듯이 잠들어버린 것도 벨티칼 산을 오르면서였지요.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음.”

공간 지각으로 암흑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위상력이 미미하게 올라있었다. 이건 신의 땅에 들어선 뒤에 일행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니 제외하고 그 외에 예전 모습과 비교해보니 위상력이… 뭐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너울거렸다면 지금은 바람 한점 없이 잔잔한 호수의 수면을 보는 느낌? 다르게 표현하자면 위상력이 울퉁불퉁하던게 지금은 인공적인 손길이 닿은것처럼 아주 반듯하게 변해있었다.

그거 외에 프랑과 함께 공간 지각으로 암흑이를 살펴보며 이상한 점이나 수상한 점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내린 결론은 "이상 없다."였다. 그리고 결론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름답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그라지고 검은색도 빠져서 무색투명의 물 덩어리처럼 변하더니 내 손바닥 위에서 몸을 꿀렁거린다.

부피가 좀 줄어들었네?

앙증맞게 꼼질 거리던 암흑이는 몸을 한번 크게 출렁이더니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잡아나간다.

천천히 머리가 만들어지고 이어서 목과 소담하게 부푼 가슴에 팔이 만들어지면서 잘록한 허리와 말랑말랑해 보이는 다리가 차례대로 생겨났다.

그렇게 인간 형태가 된 암흑이는 이전보다 조금 더 작아졌는데 외형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원래는 히아리드의 몸매에 미호의 얼굴을 적당히 섞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처음 보는 귀엽기 그지없는 17살 소녀 같은 모습이다.

=후아아아암.=

겉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암흑 이를 살펴보는 와중에 내 손바닥 위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암흑이가 자그마한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자 처음 듣는 상큼하고 귀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어디서 나온 소리인가 주변을 돌아봤지만, 나처럼 놀란 표정의 프랑만 볼 수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야.”

손가락을 뻗어서 암흑이의 조그마한 배를 쿡 찔렀더니 꺄륵!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난데없는 반응에 나도 놀라서 굳었고 암흑이도 자기가 방금 무슨 감각을 맛본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맹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데, 난 찌르는 순간 손끝에 느껴진 단단한 감촉에 더 놀랐다.

=…어?=

“뭐야. 감촉이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된 거지?”

확인을 위해서 암흑에를 들어 올려 만져보니 예전에는 조금 단단하고 안 뭉개지는 푸딩을 만지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진짜 조그만 사람을 만지는 기분이다. 말랑말랑한 가슴이나 찰떡같은 복근이나 쫄깃쫄깃한 허벅지나….

“액체가 어떻게 이런 감촉을 줄 수 있는 거지?”

“어떤 감촉인가요?”

손이 닿을 때마다 두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는 암흑이를 호기심 어린 표정의 프랑에게 암흑이를 넘겨줬다.

“한번 만져봐.”

=히이이. 사, 살려줍메영! 딸꾹!=

“…감촉이 슬라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네요…. 암흑아. 넌 네가 어떤 상태인지 인식할 수 있니?”

헥헥거리면서 축 늘어진 암흑이는 질문을 받자 부르르 떨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프랑을 한차례 살펴보더니 놀란 음색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 마님이세여?=

“응. 나야.”

=작아 지셨네영?! 비술을 완벽하게 익히신 거에영?=

“완벽하진 않지만, 많이 줄일 수 있었어. 그보다 방금 질문에 대답해주겠니?”

=앗, 넴. 우움.=

앙증맞은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팔을 살피고 배와 다리도 만져보던 암흑이는 시선을 올려 우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몸이 굉장히 안정된 거 같아여. 슬라임 형태도 제 모습이지만 지금도 제 모습이라고 할 정도로 완벽한 상태인 거 같은데여!=

“몸 상태가 안정됐단 말은 슬라임의 성질이 진화했단 말이니?”

=지금 상태라면 빛 속성도 분해할 수 있을 거 같아여!=

암흑이의 대답에 깜짝 놀랬다. 그럼 다크매터 슬라임의 약점이 사라졌단 말이잖아?

=그리구 시푸르딩딩한 뱀 새끼가 마지막에 쏜 벼락도 이제 막을 수 있을 거 같은데여!=

신난다는 표정으로 프랑의 손바닥 위에 발딱 일어선 녀석은 기괴하게 몸을 비틀면서 히히덕거린다. 그리고 그 뜻을 이해한 프랑도 조금 전율이 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빛 속성의 공격을 받으면 그 상반되는 에너지를 온전히 분해할 수 없어 그 여파로 파열되듯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고 했었다. 그 와중에 약간의 피해가 누적된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렇게 되면 분해 능력을 가진 나만 암흑이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럼 이것도 분해할 수 있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손에 마나 탄 Mk 2를 만들어 암흑이 앞에 들이밀었더니 =히꺅!= 하는 이상한 비명과 함께 프랑의 팔을 타고 목덜미로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움직임도 굉장히 자연스러워지고 훨씬 더 빨라졌군.

암흑이는 내 손에 맺힌 마나 탄 Mk 2를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진저리치며 프랑의 목덜미에 매달려 소리쳤다.

=그, 그그그건 무리, 무림다! 무리! 들이밀면 싫어여!=

본능적인 거부감이 아니라 진짜 무리인가? 그럼 진화한 건 아니고… 마나 탄을 하늘로 날려버리고 손을 털고서 암흑이를 부르니 녀석은 머뭇거리다가 내 손으로 넘어와서는 내 엄지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빈다.

“다크매터 슬라임의 약점 특성도 사라진 데다 형태마저 바뀐 거라면 아종이 아니라 변종이 됐나 본데?”

“다크매터 슬라임 변종인가요… 확실히 물방울처럼 투명했던 모습은 다크매터 슬라임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저는 변종이 된거에여?=

니가 그걸 물으면 어떡하냐.

“일단…갑옷 형태로 변할 수 있어?”

=옙!=

힘차게 대답한 암흑이는 내 손에 납작 엎드리더니 순식간에 액체화되어서 몸을 덮어갔다.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썬더 이엘 타이즈 슈트 위를 뒤덮은 암흑이는 어떠냐는 듯이 으쓱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히. 더 빨라졌어여!=

“부피가 줄어들어서 그런지 되게 얇아진 거 같은데 괜찮아?”

=이제 두께 따윈 분해에 영향을 못미치는거에여!=

“좋은데?”

약점도 사라지고 초위급의 속성 공격에도 버틸 수 있다면 방어구로는 거의 최강이네. 웃으면서 암흑이를 인간 형태로 되돌린 뒤에 녀석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보면서 감촉을 확인하는데 미소를 머금고 우릴 지켜보던 프랑이 갑자기 정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려 발아래를 무섭게 노려본다.

“왜 그래?”

“…백청이라고 짐작되는 위상력 근처의 작은 위상력들이 한 번에 서너 개씩 사라지고 있어요.”

“뭐?”

벌떡 일어난 프랑은 빠르게 가죽 갑옷을 걸치면서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암흑이가 이상한 현상을 일으킬 때부터 한 곳에 멈춰 있었는데 조금 전부터 주변의 위상력 개수가 사라지고 있어요.”

“설마 백청이 죽이고 있다는 거야? 왜? 자기보다 약한 놈들을 죽여봤자 위상력이 증가하는 것도 아닌데?”

“모르겠어요. 함께 있던 위상력들이 벌써 절반 가까이 줄었어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 같다는 싫은 예감이 들면서 팔에 소름이 돋는다. 나도 벌떡 일어서서 저 멀리 호숫가를 돌아다니는 알케마를 향해 소리쳤다.

“[알케마! 알케마!! 당장 이리 와라!!]”

=네, 넷?! 부르셨나요!=

“지금 백청이라고 보고 있는 위상력 주변의 작은 위상력이 계속 사라지고 있어. 백청이 먹구름을 부르고 벼락을 부리는 것 외에 다른 능력이 있나?”

=…네?=

어벙한 되물음에 눈에 마나 시브를 집중해 노려보니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붕붕 젓는다.

=어, 없, 없습니다! 없어요! 백청 님의 능력은 비바람을 부르고 뇌우를 소환하시는 능력뿐이라고 알고 있어요!!=

“[진짜야? 확실해?!]”

=화, 확실해요!!=

목에 마나 시브를 집중해 다그치듯이 윽박지르니 사시나무 떨듯이 발발 떨면서도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독악이와 고위 아종들도 슬그머니 다가와 알케마를 노려보고 있어 사방에서 압박감을 받는 상황에 거짓말을 할 거 같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지?

인상을 쓰면서 내 공간지각 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데 알케마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진다.

=저, 저기. 무슨 일인…가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백청이 네 종족을 죽이고 있는 거 같다.”

=…네에에?!=

가죽 갑옷을 다 걸치고 내 옆으로 뛰어내린 프랑은 혼란스러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허둥거리는 알케마를 뒤로 밀어놓고 터널을 보며 말했다.

“백청이라 의심이 가는 위상력 하나만 남았어요. ”

“작은 위상력들이 도망치는 움직임 같은 건 안보였어?”

“네. 전부 가만히 있다가 그 상태로 사라졌어요.”

“최고위 이형종인 다섯 마리의 사제 계급이 저항했다면 적어도 희미한 진동 같은 게 전해졌을 텐데 그런 것도 없이 죽었다. 100마리의 전사 계급도 자기 차례가 다가오길 순순히 기다리면서? 이상해. 진짜 이상해.”

풀썩.

포대자루가 쓰러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알케마가 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아있었다. 다시 터널로 시선을 돌려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원인을 분석하려는데 암흑이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한 억양으로 의사를 전해왔다.

=제가 방랑할 때 심한 상처를 입은 이구아나를 본 적이 있었는데여… 그넘은 무언가에 베이고 뜯겨 몸의 1/3이 사라져있었는데 그 상태로 사냥을 하면서 다른 이형종을 잡아먹으면서 재생하고 있었져. 그 퍼런 뱀시키도 재생하려고 잡아먹은 게 아닐까여?=

“백청이 우리가 신의 땅에서 자길 기다린다는 걸 눈치채고 사비 종족을 잡아먹고 몸뚱어리를 재생시키려 한다는 이야기야?”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영? 그 뱀 대가리는 이러나저러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거라 생각함당.=

나만 해도 죽음을 앞두고 진퇴양난인 상황이라면 온갖 수단을 다 쓸 거다. 프랑도 암흑이의 이야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뱀으로 분류되는 이무기가 자절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가능성은 열어놓는게 좋겠지요. 더군다나 상식을 벗어나는 이형종인 만큼 백청도 비슷한 능력이 있다 해도 이상하진 않아요.”

도마뱀 꼬리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은 알케마의 로브 자락 밖에 삐져나온 꼬리에 시선이 간다.

“…그놈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조지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찾아가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막아야지. 그나저나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 같다는 예감을 받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독악. 부하들과 함께 이곳을 지켜라. 뭔가 튀어나오거나 하면 생존에 중점을 두면서 최대한 살아남아.”

퀘에엑!!

알겠다는 듯이 힘차게 외치는 독악에게서 시선을 돌려 출발하려다가 넋을 잃은 모습으로 주저앉아있는 알케마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 녀석은 애초에 지네 종족이 나랑 말썽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서 쫓아온 거다.

백청을 운반하던 사비가 죄다 죽은 거 같은데 일부러 데려갈 필요는 없겠지.

벨티칼 산등성이를 탈 때 확인한 거지만, 산 내부의 터널과 외부까지 두께는 최소 6.75km를 넘어가기 때문에 터널 안에서 공간 도약 한 번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물론 도약할 때 이동할 장소에 뭔가가 있다면 다 소멸시키면서 나타나긴 하지만 정확하게 테스트 한 건 아니니 그걸 믿을 수는 없지. 그러니 가능한 백청이 있는 곳에서 산 정상까지의 터널 형태를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문제가 생기면 연속 공간 도약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터널의 형태와 위치를 기억하면서 프랑과 나란히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따라 달리고 있으니 엘리펀트로스 산의 지하 동굴을 함께 걸어 내려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용암 동굴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던 고위 이형종은 뭐였을까. 혹시 화산에서 태어난다는 불사조는 아니었을까?

“화산폭발과 함께 태어난 이형종이라면 범상치 않은 괴물이겠지요. 가능하다면 만나고 싶지 않은 이형종이네요.”

으…음. 피닉스라면 거의 영수靈獸, 혹은 신수급이잖아. 피닉스에게 이런 반응이라면 프랑한테 이형종이란 그냥 적대, 아니면 무관심에 가까운 적대적인 존재인 거 같다.

내가 지배하게 된 미호나 히아리드, 암흑이한테는 그나마 살갑게 구는 거 같은데 본능이 드러났던 때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날 위해 그냥 참고 있는 게 아닐까?

잠깐 잡생각이 떠올랐지만 금방 떨쳐내 버리고 행여나 공간 지각 범위 안에 이상한 게 걸려들진 않을까 신경을 쏟으며 달리다 보니 터널이 벨티칼 산 정상에서 지하로 쭉 관통하고 있는 싱크홀을 중심으로 스프링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니 총 길이가 700km를 넘는 거였군.

그리고 10분간 전력으로 달린 끝에 공간 지각의 끝에 크고 길쭉한 무엇인가가 감지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탁한 노란빛을 뿜어내는 두 개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백청이었다.

============================ 작품 후기 ============================

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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