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4 사비 종족 =========================================================================
6일 뒤면 백청이 산 정상에 도착한다는 말인데, 그게 사실인가 싶어 프랑의 어깨 위로 뛰어올라 산속에 느껴지는 위상력이 있나 물어봤다.
「한데 뭉쳐진 커다란 위상력이 산 중턱 부근에서 느껴져요.」
프랑이 가리키는 곳은 만년설이 시작되는 산 중턱의 근처였다.
“뭉쳐져 있어?”
「네. 위상력 감지를 계속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대상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위상력도 크게 느껴져요. 커다란 위상력 주변에 작은 위상력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꼭 커다란 위상력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 그게 백청을 운반 중이라는 105마리의 사비겠군.”
거짓을 말한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뒤에 프랑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려 따라오는 걸 허락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표정인 알케마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신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네? 아, 네!=
허락이 떨어지자 왔던 길로 후다닥 달려가는 알케마를 지켜보다가 힘이 없어 보이는 표정의 칼카쿰과 아훔렉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창해의 용왕의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영역…말입니까? 그분이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들은 적이 없다고?”
그럴 리가… 믿을 수가 없어서 되물으니 칼카쿰도 당혹한 표정으로 아훔렉을 돌아봤다. 시선을 받은 아훔렉도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여서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누호디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텐데… 다른 시간대라 상황이 틀린 건가?
“그럼 영역이 없다는 말이야?”
=전승석에도 그분들이 영역을 가지셨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럼 플라비우스 종족이랑 싸운 이유는 뭔데? 하늘의 주인이랑 대해의 주인이랑 영역 다툼으로 일어난 거 아니었어?”
=날개 달린 것들과 싸운 이유는 그것들이 오르빈치의 땅을 멋대로 퍼 올리려 했기에 그것을 막으려다 일어난 종족 전쟁이었습니다.=
오르빈치가 신수의 땅이랬지. 그럼 플라비우스 종족이 멋대로 오르빈치에서 땅을 하늘로 띄워 올리려 하는 걸 사비 종족이 막아서다가 종족 전쟁이 벌어진 거?
생각난 걸 물으니 칼카쿰은 네 손가락이 달린 손을 들어 머리의 우둘투둘한 비늘을 슥슥 만지며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마지막은 날개 달린 것들의 수장이 자기 희생sacrifice으로 한 움큼의 땅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고 날개 달린 것들은 그 섬에 올라타 모두 떠나버렸지요. 오르빈치에는 아직도 그 흉한 흔적이 남아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플라비우스 종족을 계속 날개달린 것들이라 부르네. 다른 종족들은 종족명으로 부르는걸 보면 이녀석들은 플라비우스를 진짜 싫어하나보다.
“음… 그럼 혹시 이렇게 생긴 놈은 알아?”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메오 아지토스, 퍼런 피부의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을 만들어 칼카쿰과 아훔렉의 앞에 세워놓으니 두 사비는 신음을 흘리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볼굴….=
=이 저주받을 것들을 무엇 때문에 여쭙는 것입니까?=
“메오 아지토스가 아니라 볼굴이라고 불러? 난 이놈들한테도 원한이 있어서 찾아다니고 있는데 어디에 사는지를 몰라. 알고 있으면 좀 알려줘.”
=…….=
내 이야기를 들은 칼카쿰과 아훔렉은 칭호 따윈 중요하지 않은지 그쪽은 신경 쓰지 않고 위치를 알려달란 말에 고민하는 눈치로 날 살펴보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뭔가… 말을 할까 말까 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나도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니 아훔렉이 눈을 뜨고 신중한 모습으로 말을 건넨다.
=지난 긴 세월, 그대 같은 생김새를 지닌 아쿠르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소. 칼카쿰은 그대의 말을 전부 진실로 받아들이는 듯하고 저주받은 것들에게 원한이 있다 하는 것도 진실인듯하지만… 우리가 알려줄 것은 없는 거 같소.=
「너희가 신수의 땅이라고 부르는 오르빈치에 그 이유가 있나?」
아훔렉이 말을 끝내고 숨을 내뱉자마자 그 틈을 치고 들어가듯 프랑이 질문을 던지자 아훔렉이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을 포착했다. 공간 지각이 아니었으면 눈치 못 챌뻔했어.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못하겠다면 오르빈치라는 곳이 어딨는지만이라도 알려… 그것도 못 알려줘?”
내 말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점점 찡그려지는 걸 보고 좀 어이없어서 물었더니 칼카쿰이 한숨을 쉬면서 아훔렉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린다.
=오르빈치는 네 분의 신수神獸의 근원이 되는 땅입니다. 그것은 저희 사비와 날개 달린 것들, 루크랑과 메리아놀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순수하고 고귀한 영혼의 고향 같은 곳. 그곳은 모든 존재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을 방랑자인 그대에게 알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마음먹으면 우리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강대한 아쿠르라 할지언정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귀찮은데 확 정신 조작을 걸어서 캐물어 버려? …라는 생각을 한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예감이 경고를 울리기 시작한다.
뭐지? 오르빈치에 대해서 캐묻는 게 위험한 거야? 아니면 정신 조작을 걸어 강제로 캐묻는 게 안 되는 거야?
서늘하다 못해 바늘로 콕콕 찔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볼굴이라는 놈들이 오르빈치 근처에 있는 거구나??”
=…!=
=?!=
거 참, 알기 쉬운 반응이네.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사비 종족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오르빈치의 위치는 말 못하겠지?”
=그…렇습니다.=
“아는 건 너희 둘 뿐일거고?”
=네.=
으음… 신수의 땅에는 넷의 신수가 사는지 아니면 살던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넷을 섬기는 각각의 종족들이 살았던 건 확실한 거 같은데, 문제는 플라비우스가 오르빈치의 일부를 떼어내려 했는데 어째서 사비종족하고만 싸웠… 아니, 사비 종족하고만 싸운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몇 가지만 더 물어보자. 플라비우스는 왜 신수의 땅을 멋대로 퍼 올리려 했어? 그걸 너희 종족만 나서서 막아섰던 거야?”
=…아마도 볼굴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전쟁은 저희가 주도하였지만 루크랑과 메리아놀 종족도 나섰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는 거지만, 날개 달린 것들은 저주받을 것들을 두려워해 애초에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위치를 알려주는 게 곤란할 뿐이지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는 제한이 없나 보네.
어쨌든 칼카쿰의 말대로 내가 본 환영에 등장한 고문을 당하는 종족에는 날개 달린 여자가 있었다. 그중에 사비 종족은 없었고… 어쩌면 그 악마 놈들은 미적 감각도 시간이 흐르며 사람과 비슷해진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후의 상황이 대충 예상이 간다. 그놈들은 플라비우스 종족을 가장 먼저 노렸고 그걸 알아챈 플라비우스는 다른 종족들과의 전쟁마저도 불사하면서 하늘에 섬을 띄운 거지. 그리고 고래들의 구름을 빼앗아 그 모습을 숨겼고.
“루크랑과 메리아놀은… 대지의 주인과 짐승의 주인을 섬기는 종족인가?”
=그렇습니다. 루크랑이 대지의 주인을 섬기며 메리아놀은 짐승의 주인을 섬기는 종족이지요.=
“볼굴이 어떤 놈들인지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
=그것들은… 태초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종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홀려 타락해 힘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지성이 없는 괴물들과의 교배도 마다치 않은 최악의 피조물이 되어버렸는데 그다음 대상이 날개 달린 것들이었을 수도 있다는 글귀를 읽었었습니다.=
“이었을 수도 있다… 아닐 가능성도 있었단 거군?”
=네. 하지만 그것들은 다른 종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닌 도주를, 그것도 오르빈치의 일부를 떼어가는 선택을 내렸고… 그 이후에는 네 분의 신수들께서 오르빈치에 저희와 다른 세 종족이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루크랑과 메리아놀이라는 종족도?”
=네.=
으음…. 어째서인지 여러 이름을 가진 푸른 피부의 악마 놈들을 찾으려면 다른 신수를 섬기는 종족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랑과 메리아놀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알아?”
=그들과의 교류는 오르빈치를 떠나는 날을 마지막으로 끊겨 그 뒤의 행적을 알 수 없습니다.=
칼카쿰에게 궁금한 것을 묻다 보니 신수들의 땅이라는 오르빈치가… 내가 가야 할 마지막 종착지라는 예감이 든다. 그곳에서 모든 게 결착이 날 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누호디가 살던 시대와 지금 이 시대는 시간의 차이가 꽤 많이 나나 보다. 하늘 섬에서 본 벽화와 누호디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사신 수의 사이가 나빠져서 영역이 갈리고 그 영역이 맞닿는 중심에 푸른 피부의 악마 놈들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내 목적은 놈들의 구제가 아니라 몰살이니까 이렇게 골치 아프게 머릴 쓸 이유는 없잖아.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일부러 평범한 척 고위 아종 1개 소대를 돌아보니 이리저리 까닥거리고 주변을 킁킁거리던 녀석들이 빠릿빠릿하게 줄과 열을 맞춰선 다.
“공간 도약으로 단숨에 올라가 버리면 이 녀석들이 문제겠네.”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프랑도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면서 입을 열었다.
「안내자가 있으니 안내자를 따라 올라오라 시키면 되겠지요. 겨울인데도 저렇게 활동적이니 만년설 지대를 지나가더라도 잘 따라올 거에요. 경사가 조금 있긴 하지만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것도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까요.」
“흠. 그럼 우리도 그냥 걸어 올라가자. 저것들이 못 따라오는 거 같으면 그냥 죽여버리고 우리끼리 올라가고.”
그 순간 고위 아종들이 살짝 떨었던 거 같은데 내 착각이었을까?
얼마 뒤에 안장과 봇짐을 올린 딜라이크를 타고 달려온 알케마는 동굴이 아니라 산을 타고 오른다는 이야기에 얼이 빠진 모습으로 허둥거렸지만 금방 침착해져서는 자기가 길을 안내하겠다고 외쳤다.
=이걸 입고 가거라.=
=어, 엄마?=
흙이 묻은 새벽 하늘색의 로브를 벗은 칼카쿰은 흙먼지를 털어낸 뒤에 알케마에게 뒤집어씌웠다. 저 로브에 뭔가 의미가 있는지 당황한 모습으로 칼카쿰이 입혀준 로브를 꼼지락거리던 알케마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누가 보면 평생 헤어지는 건 줄 알겠네. 눈물을 글썽이며 칼카쿰과 아훔렉의 품에 안긴 알케마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산을 오르려 하니 알케마가 황급히 따라와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산을 타고 오르는 길은 따로 있어요. 이쪽이에요!=
말을 마치고 두다다 달려가는 알케마의 뒤를 쫓아가려하니 프랑이 손을 뻗어 날 자기 어깨에 올려주고 큰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을 돌아가니 건물의 숫자가 줄어들고 한적한 게, 도시의 외곽으로 나왔다는 느낌이 들 때쯤 잘 다져진 흙으로 이루어진 길이 나타나며 거대한 산골짜기 사이로 이어졌다.
벨티칼 산도 여느 고산들처럼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은 나무니 초지가 융단처럼 깔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고산지대의 고속도로처럼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35마리의 고위 아종을 이끌고 걸어 올라가다 보니 서서히 기온이 더 낮아지며 잡초들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한다.
나무도 숫자가 줄어들고 말라 비틀어진 고목처럼 변해가면서 눈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바람이 강하게 불며 때때로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눈이 오는 건가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다.
또다시 바람이 강하게 불어올 때 공간지각으로 주변을 살피니 만년설 지대에 쌓여있던 눈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는 거였다.
“괴물들은 언제 나타나려나?”
「위상력이 저 위쪽에서 느껴지는걸 보면 적어도 만년설 지역은 넘어가야 나타날 거 같아요.」
“숫자가 많아?”
「제 위상력 감지로 파악하기에는… 겹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제외하면 2만 마리가 넘어갈 듯해요.」
100km 범위 안에 꽤 많군. 괴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알케마에게 어떤 놈들이냐고 물었더니 지긋지긋하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주기적으로 경작물과 목장의 동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뭐. 그것들은 다가오면 처리하기로 하고, 아까부터 상태가 이상한 암흑이한테 신경을 돌렸다.
녀석은 흉갑 형태로 내 몸에 걸쳐져 있었는데 칼카쿰을 만나기 전부터 꾸벅꾸벅 졸더니 헤뷜트에 들어서고 난 뒤부터는 아예 잠이 들어버렸는지 쿡쿡 찔러도 반응도 없고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잠이 든 것인지 뭔지… 다크매터 슬라임의 습성을 모르니까 이 녀석이 이렇게 잠이 많아진 게 뭐 잘못된 건 아닌가 해서 걱정이네.”
「위상력도 잔잔하고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조금 걱정되기도 해서 손에 TP를 뽑아내서 녀석의 몸을 쓱 훑으니 꾸물거리다가 잔뜩 졸린 얼굴을 내밀었다.
-…우웅…?-
“괜찮냐? 너, 잠이 너무 많아진 거 아냐?”
-그냥… 졸려서….-
“어디 아프거나 한 건 아니고?”
-잠이… 너무… 우우.-
이거 참… 이제는 흉갑 형태로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려 하길래 TP를 잔뜩 뽑아서 녀석을 조물조물 거리니 흠칫 꿈틀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잘 거면 그냥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가서 자라. 응?”
-네엥….-
스물스물 한데 뭉쳐 엄지 공주처럼 작아진 암흑이는 옷자락을 타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굴러떨어지길래 녀석을 잡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으음… 이 산에 암흑이에게 영향을 주는 뭔가가 있는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신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 때문일려나. 프랑은 뭐 느껴지는거 없어?”
「음~ 홍수가 났을때 오래 자서 그런지 잠은 안오는데요?」
장난스런 기색으로 웃는 프랑을 보며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고개를 들어 찬바람이 얼굴과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즐기다가 위상력을 돌려 몸으로 파고들려는 냉기를 밀어내며 주변을 돌아봤다.
프랑의 넓은 보폭과 빠른 걸음에 어느새 주변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산으로 변해있었다. 다른 색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흰색뿐인 지역은 저 아래 펼쳐진 대지와 비교된다.
알케마는 우리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딜라이크를 연신 채찍질하고 있었지만 1m에 달하는 눈밭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우리 뒤에는 서른 다섯마리의 고위 아종 부대가 필사적으로 눈을 헤치며 오고 있었다.
그나마 프랑이 발로 땅을 쓸듯이 이동하면서 눈을 치워 길을 만들어주는 덕분에 뒤에 따라오는 고위 아종들이 잘 따라오는 편이지만 알케마가 탄 딜라이크는 우리 앞에서 거의 점프하다시피 겅중거리며 이동중이라 속도가 너무 느려졌다.
1m가까이 쌓인 눈은 확실히 이형종이라도 걸음을 옮기긴 힘든 환경인가보다. 이대로 가면 눈밭에서 자야 할 거 같… 아니, 푸른 공간의 벽을 치고 그 위에서 자면 되니까 상관없겠군.
나는 프랑의 어깨 위에서 우리한테 따라잡히면 안된다는 듯이 사력을 다해 딜라이크를 독촉하는 알케마를 구경하고 프랑은 가끔 뒤를 돌아보며 뒤처지는 고위 아종들에게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면서 벨티칼 산의 정상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눈이 쌓인 지역을 들어올 때부터 길이 조금씩 좁아지더니 만년설이 쌓여있는 구간의 절반가량을 통과했을 때 도무지 프랑의 덩치로는 이동할 수 없을 만큼 길이 좁아졌다.
=아, 어. 여기부터는 후우우. 길이 너무 좁아져서… 거인이 이동하다간 길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어요.=
알케마가 곤란한 얼굴로 하얀 입김을 브레스처럼 뿜이면서 입을 열었다. 알케마는 눈이 잔뜩 쌓인 곳에서도 용케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흙보다 돌이 더 많이 쌓인 지형에 다다른 뒤에는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공간 지각으로 앞을 살펴보니 지반도 프랑의 몸무게를 버틸 만큼 단단하지도 않고 폭도 3m까지 좁아져 있는 상황이라 프랑이 발을 내디뎠다간 바로 무너지겠다.
어떻게 할 거냐며 프랑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날 올려다보는 알케마에게 별거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만년설이 끝나는 부분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넌 저것들을 끌고 길 따라 올라와.”
=네? 네에….=
어떻게 먼저 가 있겠다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던 알케마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바로 딜라이크를 돌려 눈밭을 헤치고 나아간다.
딜라이크는 체력도 그렇고 5시간가량을 겅중거리면서 이동했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는 엄청난 스태미너를 보여줬다.
이 정도로 이동하면 능력자들이라도 지쳐서 헥헥거릴텐데… 실제로 고위 아종들도 절반 이상이 죽겠다는 듯이 입김을 푹푹 뿜어내며 힘들어하고 있었고.
눈밭을 헤치고 나아가는데도 투정 불만 한번 없이 묵묵히 이동하는 게 성격도 좋은 거 같아 저런 걸 탈것으로 만들면 우리 레이드 팀에도 꽤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말야.
나중에 돌아가기 전에 알이나 뭐 그런 거 얻을 수 있나 알아볼까.
고위 아종들은 프랑의 명령에 따라 알케마의 뒤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36쌍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가득한 게 내가 집어넣은 충성심에 프랑의 공포심이 믹스되서 필사적으로 변한 게 보였다.
말해두자면 지금 표고가 9km다. 일반인이었다면 고산병 + 추위 + 설산의 험한 환경의 삼중고로 죽어도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고위 이형종이니까 버티는 거지.
뒤를 힐끔거리며 나아가는 알케마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 프랑과 함께 녀석의 머리 위 5km 지점으로 공간 도약을 펼쳤다.
“우리는 여기서 쉴까?”
「그렇게 해요.」
알케마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프랑이 편히 쉴 만큼 넉넉하게 푸른색 공간의 벽을 펼쳤다.
음. 프랑도 앉아서 쉴 곳을 만들어줘야겠네. 적당히 비치 체어같이 생긴 걸 만들어주자 프랑은 살짝 웃으면서 고마워했다.
그럼 나는…. 프랑의 목덜미의 비늘 가죽 틈 사이로 기어들어가 프랑의 가슴골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따스하고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게 그야말로 극락이구나….”
「어휴.」
가슴 사이에서 꿈지럭거리고 있으려니 프랑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알케마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쉘터를 사놓고 한 번도 안 썼네. 프랑 홀로 밖에 두고 편하게 쉬고 싶단 생각은 안 드니 프랑이 나만큼이나 줄어들면 그때 써야겠다.
============================ 작품 후기 ============================
다음 이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