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83화 (383/517)

00383  사비 종족  =========================================================================

칼카쿰과의 언쟁에서 진 아훔렉은 답답하고 허탈한 얼굴로 뒤로 물러서더니 아예 이쪽을 보기 싫은 것처럼 몸을 돌려버렸다.

“내가 용왕을 만난 것은 두 번. 한번은 백청과 싸운 뒤 반쯤 기절한 상황에서였어.”

용왕이라는 명칭을 꺼내니 아훔렉은 물론이고 침착하고 판단이 냉철해 보이는 칼카쿰마저도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꿈인지 생신지 비몽사몽 중에 만나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게 꿈같은 게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니 칼카쿰의 말대로 선언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바라 마지않는 거지. 간단한 확인을 시켜주는 걸로 잠재적인 적을 대폭 줄일 수 있으니까.

“두 번째는 그 뒤로 폭우와 홍수가 일어나던 중이었어. 그때 용왕과 한가지 거래도 이뤘고 두 번의 만남에서 용왕이 내게 직접 말했지. "백청이 한을 품었다. 넌 호신에 신경 써라." 라고.”

호신에는 내 멋대로 해석해서 두 가지 대책을 마련했다. 하나는 힘을 길러 내 몸을 지키는 방법이랑 또 다른 하나는 애초에 그 불온한 싹을 제거해버리는 거지. 나는 거기서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아훔렉은 내가 용왕과 거래를 했다는 내용을 듣고 싶은지 내 쪽을 힐끔힐끔 바라봤지만 무시하고 칼카쿰을 쳐다봤다. 두 손을 깍지 끼고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칼카쿰은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무척이나 상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모두… 진실이군요.=

“저 하얀 로브를 입은 녀석은 어째서인지 날 얕보고 있는 거 같은데, 너는 내가 이렇게 앞에 서 있는 이유와 내가 이렇게 대화를 위한 장소를 마련한 이유를 이해해야 할 거야.”

못하면 벨티칼 산의 사비 종족은 멸족이지. 내 말을 허세로 여겼는지 아훔렉은 발끈하려 했지만 그 기색을 감지해낸 프랑이 무섭게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한 발을 내딛으니 앗 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후다닥 뒤로 물러나 버렸다.

…아훔렉이 촌극을 벌이는걸 지켜본 칼카쿰은 상심이 지나쳐서 속이 쓰리다는 표정을 하며 약간 날이 선 공격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광오하시군요. 우리 사비는 그대가 얕볼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종족 전체가 뭉치면 백청 님도 몸을 사려야 할 수준임을 그대는 아셔야 할거에요.=

“그 백청이 지금 어떤 꼴인지 그대도 아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이죽거리면서 한마디 했을 뿐인데 칼카쿰은 내 말에서 뭔가를 깨달았는지 멍한 표정이 됐다가 어깨에 힘이 빠진 모습으로 아훔렉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훔렉, 당신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곧 죽는다 하더라도 백청 님을 죽음으로 몰 수는 없소.=

당연하다는 듯이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놈, 바보 아냐? 생각이 없나? 저렇게 말하면 내가 "아, 그러세요? 그럼 돌아가서 정정당당한 싸움을 준비하죠. 하하." 하면서 그냥 보내줄 거라 생각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랑을 경계하는 것처럼 전신의 비늘이 한 장 한 장 곤두선 아훔렉을 비롯해 344마리를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완전히 묻어버렸다.

172마리의 도마뱀과 172마리의 도마뱀 인간들이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인해 얼음 동상처럼 변해버린 순간 프랑이 나서려 하길래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그리고 동공이 확대된 칼카쿰의 앞에 섰더니 믿기 힘든 상황을 목격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눈빛을 내게 향했다.

“앗. 그러고 보니 칼카쿰 파벌은 우리한테 맞서지 않는다고 했지?”

국어책 읽듯이 고저 차 없는 억양으로 말하면서 칼카쿰만 공간의 벽에서 풀어주면서 말했다.

“안됐지만, 교섭은 결렬인 거 같네?”

교섭이라기보단 일방적인 통보지만 말야. 공간의 벽에서 풀려난 칼카쿰은 뒤를 돌아보더니 부들부들 떨다가 내가 손을 드는 순간 앞으로 뛰어나와 땅에 엎드렸다.

=기, 기다려주십시오, 아쿠르 서하!=

“아까부터 아쿠르 아쿠르하는데 그건 뭐야?”

한글로 변환되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저네들 고유명사인 거 같은데 말야.

=그, 간단히 풀어 설명하자면 영역을 가지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는 여행자를 뜻합니다. 그대는 틀을 벗어난,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강자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이들의 목숨을 부지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어차피 나중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아 참. 저 하얀 놈이 싸우겠다고 달려들면 다 죽여버릴 텐데 그러면 너네 파벌도 다 함께 덤비겠네? 사제 계급도 일곱이나 되니 너희들이 여기서 죽으면 지휘 계통이 엉망이 될 거 같은데? 내가 편하려면 그냥 여기서 다 죽여버려야겠는걸.”

힘을 쓰려는지 위상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제 계급과 몇몇 전사계급들을 보며 비웃으니 칼카쿰은 흠칫하고 놀라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저희 파벌은 그대가 가진 명분에 따른 행동에 맞서지 않을 것임을 제 명예와 그분께 바친 저의 존재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역시 칼카쿰은 머리가 좋은 거 같다. 새벽녘 같은 색의 로브가 흙에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뒤에 탈것 도마뱀들처럼 사지를 뻗어 땅에 엎드린 칼카쿰을 내려다보다가 프랑을 돌아봤다.

-어쩔까?-

-용왕의 출현 조건을 예상해본다면 칼카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옳을듯해요. 서하도 그걸 노리시고 계신 거지요?-

-그치. 초위 급이라고 생각한 아훔렉이랑 칼카쿰이 최고위 급이니 전투의 부담감은 많이 사라졌으니까.-

-일단은 칼카쿰의 파벌만 풀어주는 걸로 해요.-

-오키.-

프랑과 독순술로 대화를 나눈 뒤에 납작 엎드린 칼카쿰을 돌아보며 선심 쓴다는 몸짓을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 파벌을 지목해주면 그것들은 풀어줄게.”

=감…사드립니다.=

칼카쿰은 자신의 부탁이 받아들여졌다는 다행이란 감정과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자괴감이 섞인 표정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 많은 숫자의 사제와 전사 계급이 꼼짝도 못 하도록 만드는 푸른색 공간의 벽에 공포심도 엿보이고 있었다.

눈만 끔벅이는 사비들을 지친 표정의 칼카쿰이 하나하나 지목해나가고 나는 칼카쿰이 지목한 대상을 풀어주는 사이 알케마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지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녀석을 감싸고 있는 공간의 벽을 목 아래까지 없애주니 다급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서하 님, 부탁드릴게요!! 부디 저와 제 아버지의 목숨만 받아주시고 남은 종족은 풀어주시길 간청드려요!!=

귀청이 울리는듯한 음량에 살짝 귀를 찌푸리니 칼카쿰도 지목하다 말고 알케마를 돌아보더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네 종족은 자신의 신념을 말 한두 마디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쉽게 바꾸는 종족이야?”

=…….=

=…….=

음. 그냥 물었던 거 뿐인데 알케마는 물론이고 칼카쿰도 비수가 심장에 박힌듯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 뒤로 말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알케마를 놔두고 칼카쿰이 지목한 사비 종족을 모두 풀어줬더니 그 숫자가 88마리였다. 속박에서 풀려난 놈들은 싸움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패배한 상황이 분했는지 날 노려보거나 체념한 얼굴로 풀려나지 못한 동족들을 서글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나도 말이 통하는 지성을 가진 종족을 학살하는 건 마음에 안 드니 당사자들한테도 선택권을 주지.”

=…!!=

내 말에 고개를 번쩍 쳐든 알케마를 공간의 벽에서 풀어주고 다른 놈들은 어깨 위까지만 공간의 벽을 풀어준 뒤에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줄 테니 동족들을 설득해봐. 자기 입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 살려줄게.”

이만큼이나 배려를 해주면 용왕이 나오더라도 할 말이 없겠지. 알케마는 양손을 깍지끼더니 물레방아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하더니 아훔렉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알케마는 먼저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아훔렉을 설득하려 했는데 아훔렉을 설득하면 그 파벌에 속하는 인원들을 설득하기 수월하리라 생각했던 거 같다.

나야 어찌 되든 상관없어서 프랑의 손바닥 위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훔렉은 2시간이 넘도록 알케마의 간곡한 설득과 눈물 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그것뿐이었다면 상관하지 않겠는데 아훔렉의 파벌인 전사 계급들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아훔렉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더니… 아훔렉이 매몰차게 알케마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수록 점점 기분이 더러워졌다.

솔직히 그쯤 되니 나도 짜증이 날 대로 나서 놈들을 묶고 있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회수하고 놈들이 타고 있는 사족 보행 도마뱀의 대가리에 호박색 공간의 벽을 쳐서 일순간에 모조리 죽여버렸다.

상위 이형종 따위, 숫자가 얼마나 많든지 내 공간 지각 범위 안이라면 1초 안에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다.

죽어서 널브러지는 도마뱀들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굴러떨어지는 놈들을 보며 마나 비전을 키고 살기를 일으키며 갈무리했던 마나 오러를 크게 피워올렸다.

그에 맞춰 프랑도 위상력을 운용하면서 동시에 체외로 퍼트리며 살기를 퍼트리기 시작하자 꼼짝 않고 앉아있던 고위 아종들도 덩달아 살기를 피워올리니 풀려난 아훔렉 파벌은 프랑과 고위 아종 35마리의 살기에 뱀 앞의 개구리마냥 굳어버린 모습으로 벌벌 기어 다닌다.

숨이 막히는지 살기에 얼어버린 모습의 아훔렉을 보며 목에 위상력을 담아 차갑게 소리쳤다.

“[자기 체면과 명예를 위해 부하들의 심정도 헤아리지 않는 머저리와 그런 머저리를 우두머리라고 따르는 놈들도 그냥 여기서 죽어라!!]”

손바닥에 TP를 있는 대로 끌어 담으며 마나 탄 Mk 2를 만들어나가니 막대한 양의 TP가 몰려들며 칠흑처럼 어두운 구슬이 만들어져간다.

솔직히 이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지만 위상력의 강약을 감지가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저놈들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할 거라 예상한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우리들의 살기에 정신이 흐트러지고 마나 보이스에 혼란을 일으키고 마나 탄 Mk 2에 모인 막대한 양의 TP를 느낀 놈들은 공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때 알케마가 겁에 질린 얼굴로 몸에 두른 그물 같은 옷이 찢어져라 빠르게 달려오더니 다시 넙죽 엎드리며 긴장감에 억양 조절이 되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아쿠르 서하! 아직 해가 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부, 부디 처음의 약속을 지져, 지, 지켜주세요!!=

“[저 머저리 같은 하얀 놈은 자신이 갈 저승길의 동행으로 동족들을 전부 끌고 가려 하는데 너 따위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이 2시간 동안 한 일이라고는 질질 짠 것 밖에 더 있나!!]”

=으, 으으.=

“[칼카쿰을 따르는 놈들은 물러나라!! 남은 놈들을 시체도 남기지 않고 지워버릴 테니!!]”

거 참, 나도 안 어울린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프랑도 너무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이지 말란 말야. 나도 고어 체로 말하려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거 같다고.

=하, 지만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주신다고 야, 약속하셨습니다! 약, 약속을 지켜주세요!!=

“[쳇. 좋다. 앞으로 30분이면 해가 완전히 넘어갈 거 같으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지!]”

그때부터였다. 칼카쿰도 아훔렉의 설득에 나섰고 아훔렉이 칼카쿰과 알케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건.

그리고 노을이 티끌만큼도 남지 않았을 때 아훔렉은 알케마와 칼카쿰의 동시 설득에 결국 마음을 돌렸고 그 뒤를 따라 남은 82마리의 사비도 마음을 돌려 칼카쿰의 파벌에 들어가 버리는 걸로 설득은 끝이 났다.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 어둠이 빠르게 밀려올 때 내 눈앞에는 172마리의 각양각색의 도마뱀 인간이 죽은 도마뱀 탈것의 옆에서 패잔병 분위기를 만들며 서 있었다.

“산에 있는 남은 아훔렉의 파벌은 어찌할 거야? 공격을 안 해오면 나도 가만히 있겠지만 덤벼오는 것들을 죽이다 보면 칼카쿰 너희 파벌도 같이 공격해올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에게 적대하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바, 반드시 설득하겠습니다.=

내 목소리가 사늘하다 느꼈는지 칼카쿰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이 다시 입을 열었고 바로 뒤돌아 사제 계급 둘을 골라 도시로 먼저 보내 이 소식을 알리도록 전하라 했다.

“프랑은 좀 아쉽지?”

「네?」

“344마리나 되는 이형종을 잡을 기회였는데 그게 사라졌잖아.”

「아니에요. 딱히 아쉽…기는 하지만 용왕이 나타날 가능성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요 며칠간 머리카락이 꽤 많이 자라 더벅머리 같아진 프랑은 청초한 얼굴에 더벅머리의 보이시한 느낌이 더해져 굉장히 신비한 인상이 되어있었다. 프랑의 머리 위에 앉아 기분 좋은 향기를 맡으며 프랑의 머리에 힐링 터치를 걸면서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사비 종족들을 바라봤다.

마지막의 위협과 협박이 크리티컬로 터져 사비 종족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백청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생각이 든다

그냥 이형종은 모조리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나중에 싸우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여지를 남겨두는 건 불안하기도 하고 지금은 나한테 겁먹고 순순히 따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한테 증오를 활활 불태울지도 모르는데….

역시 난 정이 많은 편인가? 그렇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십수 분을 달려 벨티칼 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며 산의 형태가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하나의 산임이 분명한데 어째서 여러 산이 모인 산맥처럼 산골짜기와 비탈길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그런 골짜기와 비탈길에는 돌로 쌓은 성벽과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돌로 쌓은 수십 미터 높이의 아치형 게이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엄청난 수의 도마뱀 인간이 모여 군중을 이루고 있었다.

프랑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려 아치형 게이트로 걸음을 옮기니 그곳에 모인 사비 종족들은 나는 신기한 짐승을 본다는 시선을 하는 것에 비해 프랑을 향해서는 두려움 어린 시선을 던지는 게 눈에 보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프랑을 많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사비 종족이 거인한테 크게 덴 적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아훔렉과 칼카쿰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가더니 모여있는 군중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뭐라고 외치나 싶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나와 백청의 사이에 있는 은원에 사비 종족은 끼어들지 않겠다는 외침과 함께 우리를 헤뷜트의 손님으로 초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럼 여기가 헤뷜트의 입구인가? 아훔렉의 외침이 멈추자마자 수천 마리에 달하는 사비 종족이 양손을 치켜들며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인간과는 다른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고음의 울음소리라 살짝 눈쌀을 찌푸렸더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언제 함성을 질렀냐는 듯 주변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런 반응을 본 아훔렉이 몰래 한숨을 쉬는걸 공간 지각으로 보면서 헤뷜트로 걸음을 옮기니 모여있는 사비 종족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쫙 갈라지면서 게이트를 통과하는 길을 만들어준다.

아훔렉과 칼카쿰, 알케마의 뒤를 따라 석재를 쌓아 만든 도시로 들어가니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의 사비 종족들이 나무 위, 지붕 위, 절벽 위 할거 없이 자리만 있다면 떼 지어 몰려 눈이란 눈은 죄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믹스된 눈빛을 나와 프랑한테 보내고 있었다.

골짜기 사이로 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걸어가니 옆에서 알케마가 벨티칼 산에 대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벨티칼 산은 온전히 사비 종족의 영역이며 추정 너비 약 480km, 추정 높이 약 47km로 매우 가파른 형태의 산이라고 했다. 산자락에는 이곳처럼 골짜기나 절벽이 생성되어있는 곳이 많아 동족 중 노동 계층은 이런 장소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거대한 골짜기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도마뱀 인간들의 석조 건물 풍경을 인증기에 담으면서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도로라고 불리는 곳은 폭은 넓어 프랑이 다니기에 불편함은 없었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로 포장한 도로가 프랑의 발 모양으로 깊이 2~3m에 폭이 5m가량 푹푹 패여나가는걸 보니 뒤처리가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골짜기를 벗어나 산등성이라고 볼만한 곳에 올라서니 위로 크게 자라고 옆으로 넓게 퍼진 침엽수림이 빼곡히 서 있었는데 그 아래에 숨겨진 모양으로 땅 위에 세워진 집이 있는가 하면 산자락에 구멍을 파고 그 안쪽으로 집을 만든 곳도 있었고 지대가 높다면 땅속으로 파고든 곳도 있었다.

이곳은 직인과 생산 계층이 사는 곳으로 돌로 지어진 점은 노동 계층의 집과 같았지만, 외벽에 무언가 기묘한 그림 같은 게 새겨져 조금 더 고풍스러워 보여 이런 걸로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 같았다.

설명을 들으면서 석재의 서늘한 분위기와 침엽수림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조화가 감도는, 지성을 가진 종족이 사는 도시 특유의 활발함이 어우러진 도시를 구경했다.

사비 종족이 사는 대부분의 집은 높이 5m가량의 단층집이었고 내부는 사람들이 사는 집처럼 구획이 나뉘어 침실과 거실, 주방, 화장실, 창고 등이 있는 단출한 모습이었지만 계층이 높아질수록 높은 곳에 살며 외벽에 온갖 화려한 조각을 새기는 것으로 거주민의 계급을 알려줬다.

정말 고대 문명의 도시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게 위상 학자들에게 알려진다면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귀찮아질 거 같으니 패스.”

「네?」

“아냐.”

혼잣말에 반응을 보이는 프랑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다시 도시를 구경했다.

집집마다 집의 크기와 비슷한 사이즈의 짐승 우리가 있어서 뭔가 했는데 사비 종족이 탈것으로 애용하는 사족 보행 도마뱀 딜라이크를 키우는 장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에게는 말이 있다면 사비 종족에는 딜라이크가 있었다. 딜라이크는 말 그대로 날개 없는 용 같은 형태였는데 네 다리로 달리며 꼬리로 균형을 유지하는 게 달리는 속도가 어지간한 스포츠카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100km 정도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돌파하는 거겠지.

우리 뒤를 따르는 고위 아종 35마리에게 압도당한 것인지 프랑의 모습에 겁이 질린 것인지, 아니면 노동 계층은 상위 계층이 사는 곳으로 못 올라오는 것인지, 게이트 초입에는 우르르 쫓아오더니 우리가 골짜기를 벗어나 산등성이로 올라갈 땐 그 숫자가 확 줄더니 이제는 우리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에는 사비 종족이 한 마리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이나 나무에 숨어서 이쪽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는걸 공간 지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헤뷜트를 구경하고 있으니 칼카쿰들은 지름이 100m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렇게 도로를 걷는 동안 뒤따르던 사제와 전사 계급들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구멍 앞에 도착했을 땐 칼카쿰과 아훔렉, 알케마만 남아있었다.

=이곳이 신의 땅으로 향하는 신로神路입니다. 백청 님은 거동을 하지 못하셔서 105명의 동족이 백청 님을 짊어진 채 신의 땅으로 향하고 있어 신로를 따라가시다 보면 백청 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내 심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선지 칼카쿰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도 강자의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간청하옵니다.=

“알았어. 너희 동족은 "가급적" 죽이지 않을게. 다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약속은 해줄 수 없어.”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칼카쿰은 두 손을 깍지낀 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고 아훔렉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모습이었지만 역시나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인지 칼카쿰과 동일한 자세를 취했다.

105마리… 아마도 5마리는 사제계급. 나머지 100마리는 전사 계급이겠지. 그럼 우릴 마중 나왔던 일곱의 사제는 남은 전력의 전부였나?

다른 이형종과의 전투를 일상으로 살아왔을 이형종답지 않게 순순히 고개를 숙인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보군. 속으로 하나의 의문이 해결된 느낌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데 뒤에 서 있던 알케마가 긴장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면서 간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쿠르 서하 님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길을 안내해도 될까요?=

=알케마! =

그냥 길 안내를 하겠다는 말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아훔렉이 너무 날이 서 있다. 설마 함정으로 밀어 넣는 건가 싶었는데 반항기가 철철 넘치는 알케마의 대답을 듣고 그건 아니구나 했다.

=왜요! 아버지도 짐작하시잖아요! 메지록의 폭급한 성정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아쿠르께 공격을 가할 거에요! 그러면 종족의 소중한 사제와 전사들이…!=

…말하다 말고 왜 날 보는 건데.

=아버지가 가신다면 어머님의 파벌에 속한 메지록은 틀림없이 반발할 거에요. 어머니는 해야 할 일이 많아 가실 수 없어요. 그리고 메지록은 절 귀여워하니 제가 간다면 그를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훔렉한테서 공처가 기질이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부부였… 부부였어?! 무슨 부부가 파벌을 나누고 있냐? 다시 말다툼을 시작하려는 두 부녀를 "닥쳐."라는 말로 간단히 말리고 침울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칼카쿰을 보며 물었다.

“신의 땅은 벨티칼 산의 정상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째서 동굴로 우릴 안내한 건데?”

=벨티칼 산의 표고 37km 지점에는 무수한 숫자의 마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평소라면 백청 님을 보는 순간 도망가버리는 것들이지만 지금은… 그 괴물들을 피하고자 벨티칼 산에 만들어둔 신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런데말야. 내가 백청과 싸웠던 건 8일 전쯤이었어. 판단하기에 백청이 벨티칼 산에 도착한 뒤로 아직까지 신의 땅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건 내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데?”

눈에 마나 비전을 키고 함정이 아니냐는 뜻을 담아 칼카쿰을 노려보니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격하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갈기들이 백청 님을 모시고 헤뷜트에 도착한 것은 불과 4일 전으로! 3일 전에 도시를 출발해 신로에 들어섰습니다! 신로는 벨티칼 산의 지반이 단단한 곳을 피해 뚫었기에 총 길이가 730km에 달합니다! 백청 님을 모시고 간다면 최소 10일은 걸립니다!=

내가 벨티칼 산에 도착하기 2일 전에 먼저 도착한 거군. 백청의 몸뚱아리는 프랑과 비교도 못할 만큼 무겁고 거대하니 아무리 이형종이라지만 3m 조금 못 되는 것들이 손수 짊어지고 이 산을 타고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

거기다 길이도 730km라니, 무진장 길잖아?

하지만 저 굴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째 꺼림칙하다. 그냥 프랑과 함께 공간 도약으로 올라가서 기다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작품 후기 ============================

낮에 너무 더워서 세수하려고 찬물을 틀었는데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서 깜짝 놀랐어요.

막 혼란스러워서 레버를 잘못 돌렸나 확인하다 보니 미지근한 물이 나오더라구요 ㅋㅋ

얼마나 더웠으면 파이프가 열을 받아서 물을 다 데워주나 기겁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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