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82화 (382/517)

00382  사비 종족  =========================================================================

“잘 됐으면 좋겠네.”

걸어갈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목도리도마뱀처럼 헐레벌떡 뛰어가는 알케마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더니 프랑이 살짝 숨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24시간 안에 결과가 나오겠군요.」

“알케마의 발언력이 얼마나 높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겠지.”

「그럼 우리도 준비할까요?」

무슨 준비냐고 물었더니 정신 조작으로 이형종의 부대를 만들어서 자기 명령을 듣게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내가 공중에서 싸우고 프랑이 지상에서 이형종 부대를 운용하겠다나?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수십 마리의 아종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으면 적지 않은 압박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다.

그 전에 전투를 대비해 프랑이 옷 대용으로 입던 백청의 비늘 가죽을 꺼내주니 서코트처럼 옷 위에 걸쳐 입고 끈으로 허리를 꽁꽁 동여맨다.

지금 내가 정신 조작한 대상은 최고위 이형종 한 마리와 고위 이형종 8마리와 상위 이형종 24마리다. 최고위는 당연히 암흑이고 고위는 아구름과 게쿡을 비롯한 나머지들. 그것들이 지금 정신 조작 용량의 1/3을 차지하고 있는데 최고위 이형종 두 마리와 고위 이형종 열 마리 정도는 더 정신 조작이 가능할 거 같다.

생각해보면 심장에 위상석이 생긴 뒤로 정신 조작 용량도 꽤 많이 증가한 거 같다. 처음에는 나랑 동급인 암흑이를 지배하는데 절반을 써버렸었는데 이제는 암흑이랑 고위 8마리 상위 24마리까지 해서 1/3 정도라니.

대충 용량이 최고위급 1마리는 고위급 25마리 수준이고 상위급은 625마리 정도인가?

그럼 내가 지금 정신 조작을 걸어놓은 것들까지 합쳐서 최고위 3마리, 고위 24마리, 상위는 72마리를 조작하면 용량의 한계가 될 테니 그거에 맞춰서 정신 조작을 하려는데 프랑이 반대했다.

「용량의 한계까지 조작하는 건 뇌에 부담을 많이 줄 테니 반대에요. 최고위 이형종 한 마리와 고위 이형종 40마리 정도만 지배해주세요.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그것들과 제가 사비 종족의 주의를 끌 테니 그 틈에 사제와 계급들을 서하가 처리해주시면 되요.」

“알았어.”

그렇게 다섯 시간 동안 내 공간 지각 범위에 들어오는 이형종을 모조리 잡아보니 블랙 톡신 엘리게이터 세 마리와 가시 도마뱀 두 마리, 루뱅 다섯 마리가 포함된 40마리의 다양한 파충류와 양서류 이형종을 잡을 수 있었다.

내 정신 조작에 걸린 녀석들을 종류별로 대열을 세워놓으니 꽤 볼만한 풍경이다. 내 명령에 맞춰서 착착 움직이는 게 신기한 기분이라 군 체험 캠프에서 겪어본 걸 바탕으로 명령을 내리면서 놀다가 상위 이형종들부터 먼저 진화시키기로 했다.

블랙 톡신 엘리게이터 세 마리 중 두 마리와 가시 도마뱀은 고위 이형종이고 나머지는 죄다 상위라서 36마리를 고위 아종으로 진화….

“어?”

잠깐잠깐. 상위 이형종을 사로잡아서 정신 조작을 건 뒤에 고위 아종으로 진화시키면, 능력은 최고위 이형종 수준이고 소비 용량은 고위 이형종 인 건가?

-…사기적임다.-

「…사기네요.」

“아직 실험 안 해봤거든?”

일부러 부정적인 대답을 해줬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생각대로 된다면 그야말로 개사기 이형종 부대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면서 가로로 쫙 찢어진 홍채를 가진 노란 눈알의 루뱅을 고위 아종으로 진화시켰더니….

“진짜 정신 조작 용량이 변하지 않는데?”

-완전 사기적임다.-

「정말 사기네요.」

그럼 최하위 이형종을 잡아서 정신 조작을 걸고 진화시키면 정신 조작 용량은 거의 들지 않고 최고위 아종까지 진화시킬 수 있는 거야?!

신나는 기분에 고위 아종이 되면서 더욱 원색적으로 색채가 변한 루뱅을 돌아보니 놈은 살짝 팔다리를 꿈질거리다가 부들부들 떨더니 주둥이를 벌리며 크게 울기 시작했다.

꽈아악! 꾸악! 꽈아아악!

“엇!?”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루뱅이 있는 곳을 푸른색 공간의 벽으로 케이스를 만들어버렸더니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깨어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루뱅이 꾸악! 꽤액!! 하면서 공간의 벽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뭐죠? 어떻게 된 거에요?」

“에이, 좋다 말았네. 고위 아종이 되니까 정신 조작이 저절로 깨진 거 같아.”

「흐응. 등급에 맞는 정신 조작을 걸어야 한다는 거네요.」

“응.”

메오 아지토스들이랑 싸울 비장의 패를 얻었나 했는데 아쉽네. 발광하는 루뱅을 꼼짝 못 하게 묶은 뒤에 다시 정신 조작을 걸었더니 역시나 고위급의 정신 조작 용량을 차지한다.

「그래도 최고위급의 용량을 차지하지 않는 게 어디에요?」

“그건 그래.”

얌전해진 루뱅을 풀어주고 암흑이한테 아까 루뱅이 뭐라고 울었냐고 물었더니,

-이런 씨발 척추를 접어버릴 꼴통 씹새끼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묻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욕설의 향연.

“그만.”

「……」

암흑이의 입을 다물게 하고 눈을 감은 채 잠시 가만히 있었더니 암흑이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어쩐지 욕에 감정이 가득 실린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 착각이지?”

-차, 착각입니당!-

“그렇겠지?”

-넹!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뎁쇼!-

“응. 맞아. 그런데 난 왜 "이때다!" 하고 욕을 쏟아부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까?”

-히이이.-

암흑이를 움켜쥐고 짤짤짤 흔들면서 남은 상위 이형종을 전부 고위 아종으로 만들고 다시 정신 조작을 거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남은 두 마리의 블랙 톡신 엘리게이터와 가시 도마뱀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을 진화시키면 최고위 아종이 될 거 같은데… 진화시키려니 좀 불안하네.”

고위 이형종인 녀석을 진화시키면 최고위 아종이 되면서 이론적으로는 프랑과 맞먹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정신 조작으로 조종하는 놈을 초위급의 능력을 가지게 만드는 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함이 느껴진다.

「그럼 이 정도만 해요. 36마리의 고위 아종이라니, 최고위 이형종이 35마리가 모인 거나 다름없잖아요. 초위 이형종으로 짐작 가는 아훔렉과 칼카쿰은 저와 서하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36마리의 고위 아종으로 만족한 우리는 평범한 고위 이형종인 녀석을 죽이려는데… 전신이 뾰족한 가시로 가득 찬 가시 도마뱀은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모른 채 순해 보이는 눈동자를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 제길, 눈을 봐버렸네. 갑작스레 들기 시작하는 껄끄러움에 인상을 쓰고 손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고 있으려니 프랑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역시 서하는 정이 많으시네요.」

내가… 정이 많다고? 내가 착하다는 말 다음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프랑에게 정정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난 정이 많은 게 아니라 약삭빠른 거야. 용왕이 개입해오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한테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으니 애초에 용왕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진짜로 정이 많았다면 알케마가 백청을 봐달라고 했을 때 봐주거나 그랬겠지.

「괜찮아요. 서하는 필요할 때 해야 할 일을 하는 아이니까요.」

내 이야기를 들은 프랑은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간단히 흘려넘기더니 위상력을 활성화하고 손에 위상력을 모아 단번에 가시 도마뱀의 머리를 박살 내버렸다.

뭔가가 눈앞을 휙 하고 지나갔을 뿐인데 머리가 박살 나버린 가시 도마뱀은 사지와 꼬리를 바르르 떨다가 움직임을 멈춘다. 뒤이어 남은 녀석들도 모조리 쳐 죽인 프랑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녀석들의 사체를 아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으음. 공간이 그다지 남지 않았네. 백청의 남은 부위가 다 들어가려나? 안되면 상위 이형종 사체는 빼다 버려야지.

고위 아종 부대를 정렬시켜놓고 프랑의 지시를 받들라고 놈들에게 명령을 내렸더니 꾸엑! 꽈아악! 슈르륵. 키치치칙! 하는 각양각색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이 정도 전력이면 충분하겠지.

이제는 몸을 숨길 이유도 없어 점심시간이 됐을 때 조리기구를 꺼내 프랑의 조언을 받으면서 김치 볶음밥을 해먹었다.

그 사이 프랑은 소인화의 비술을 외워 몸을 작게 축소했는데 이번에는 29m까지 몸이 줄어들었다. 갈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지속시간도 길어지는 게 얼마 안 가서 나랑 비슷하게 키가 줄어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의 쇄골 홈에 누워 고위급 블루 스톤에 TP를 최대한 주입하는 작업을 하며 쉬고 있으려니 프랑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 벨티칼 산자락에서 먼지 구름이 일고 있어요.」

“응?”

벨티칼 산을 바라보며 눈살을 찡그리고 눈에 힘을 줘봐도 뭐 보이는 게 없다. 아니, 100km가 넘는 거리에서 일어나는 먼지 구름이 보이는 게 이상한 거지.

“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먼지 말고 뭐 보이는 거 있어?”

「먼지 구름 사이로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여요.」

“…끄응. 나가면 망원경을 사든가 해야지.”

「후후. 제가 서하의 눈이 되어드리면 되잖아요.」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이야기에 킥킥 웃으니 프랑도 미소를 지으면서 상황을 설명해줬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이나 퍼지는 형태로 봐서는 200에 가까운 숫자가 빠르게 달리고 있는 걸로 판단된다는데 고작 먼지 구름을 보고 그런 걸 알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3시. 알케마가 돌아간 지 8시간째다.

난 못해도 자정은 넘겨야 반응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다. 그만큼 알케마가 이야기를 잘 한 거라고 봐도 되겠지?

이제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하는 먼지 구름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사비 종족은 죄다 파충류잖아. 겨울인데도 잘도 활동하네. 겨울밤은 더 추운데말야.”

「이형종이니까요.」

음… 하긴, 나도 위상력을 돌려서 한기를 밀어내고 있으니 저것들도 그러지 못하란 법은 없겠지. 겨울잠을 잔다면 그 틈에 다른 이형종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고.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많아진 암흑이를 깨워서 갑옷으로 장착한 뒤에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먼지 구름 앞에 나섰다.

“조심해. 저기에 아훔렉과 칼카쿰이 섞여 있다면 초위급이 두 마리나 되니까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긴장할게요.」

조금이라도 공격해올 낌새가 보이면 먼저 공격하라고 언질을 내려놓고 프랑이 정신 조작에 걸린 고위 아종들을 배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중심에 나와 프랑이 있고 좌우로 체력이 뛰어난 녀석을 배치한 뒤에 기동력이 빠른 녀석들을 끝에 놓으니 학이 날개를 펼친 것 같은 진형이 잡혔다. 이걸 학익진이라고 하지?

전투 준비를 끝마쳐놓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프랑이 344마리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알려줬다. 아깐 200마리 분량의 먼지 구름이랬잖아?

내 표정을 본 프랑은 살짝 미소 지으면서 172마리의 짜리몽땅한 도마뱀 위에 타고 있는 사비 종족이 172마리로 선두에 두 마리가 서 있고 날개를 펼쳐 화살 같은 형태로 달려오고 있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럼… 200에 가까운 숫자가 맞네.

녀석들은 거리가 반의반으로 줄어들 때까지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 백청을 내놓는 대신 싸움을 선택한 건가 싶어 신체를 강화하고 마나 오러를 일으켰다. 그러자 프랑도 위상력을 운용하면서 주먹을 움켜쥐고 먼지 구름을 일으키는 사비 종족들을 노려본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내 공간 지각 범위 안으로 들어왔을 땐 평범한 성인 남성의 달리기 수준으로 속도가 늦춰졌다.

내 공간 조작 범위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서다니, 초위급은 없는 건가?

172마리의 사비 종족을 공간 지각으로 스캔해보니 최고위는 7마리뿐이고 나머지 165마리는 전부 고위 이형종이다.

가장 선두에는 알케마가 두 마리의 최고위 이형종과 함께하고 있었는데 한 놈은 알케마와 똑같은 하얀색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키가 1.5배는 더 컸고 다른 한 놈도 비슷한 크기에 새벽하늘 같은 비늘 색의 약간 마른 놈이었다.

그 뒤를 5마리의 최고위 이형종이 따르고 있었는데 일곱 마리의 최고위 이형종들은 전부 자기 비늘 색과 똑같은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1m짜리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최고위는 7마리뿐이야. 나머진 전부 고위급. 위상력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걸 보면 싸우자는 건 아닌 거 같아.”

「음….」

프랑은 얕은 신음을 흘리더니 활성화시킨 위상력을 다시 진정시켜 몸에 모았다. 그것과 동시에 녀석들이 약간 속도를 올려서 우리에게 접근하는데 한 마리가 위상력을 일으키더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을 바람으로 모두 흩어버린다.

고위 도마뱀 인간들, 전사 계급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죄다 나무 작대기를 허리춤에 끈으로 매달아 놓았는데 무기를 든 녀석들이 하나도 없다.

설마 전사 계급은 전부 속성 타입인가?

거리가 훨씬 줄어들어 1km 안쪽까지 들어온 녀석들은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100m 앞까지 다가왔다.

다가오는 와중에 알케마와 알케마의 성인 버전이라고 생각되는 두 녀석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는데 아쉽게도 뭘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곧 10m 앞까지 다가온 녀석들 중 알케마는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형종들을 살펴봤는데 눈동자에서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늘어난 전력에 당황한 건가.

344마리가 뿜어내는 미묘한 열기를 느끼고 있는데 알케마의 옆에 서 있던 두 마리의 사비 종족이 도마뱀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기 비늘 색과 같은 하얀색과 짙은 하늘색의 로브를 걸친 두 마리는 지상에 6m 높이에 공간의 벽을 치고 앉아있는 날 올려다보며 양손에 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소, 다른 종족의 영웅이여. 나는 헤뷜트를 이끄는 두 갈기 중 하나인 아훔렉이라 하오.=

=다른 하나인 칼카쿰입니다.=

하얀색의 아훔렉, 하늘색의 칼카쿰. 이 둘도 직접 머릿속에 이야기를 걸어온다. 그나저나 이 둘이 두 파벌의 수장이란 말인데… 생각보다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거 같다. 역시 정면 돌파로 백청을 쳐 죽이는 루트를 고르면 역시 사비 종족 전체와 싸우게 되는 루트를 탈 거 같다.

두 수장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하는 건… 묘하게 높은 사람이 된 기분이라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를 차려 두 녀석과 똑같은 눈높이로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와도 시선이 날 따라오는 게 아니라 계속 위쪽을 향하고 있다. 두 녀석…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사비 종족들도 전부 내 뒤의 프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그 부분이….

백청의 비늘 가죽 때문인가?

“성은 정, 이름은 서하. 사비 종족의 지도자들을 만나서 반갑지만,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 거 같네요.”

내 이야기에 두 사비는 프랑과 고위 아종들을 한번 쭉 둘러보더니 하얀색의 아훔렉이 나서며 아까보다 좀 더 굳은 목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그 의견에는 동감이오. 그전에 하나 묻겠소만, 그대의 뒤에 서 있는 거인이 몸에 두른 비늘 옷은….=

“백청의 가죽이에요.”

웅성웅성

칼카쿰은 아무 표정 없이 눈을 한번 감았다 뜬데 반해 아훔렉은 얼굴 쪽의 비늘이 약간 붉은 기가 올라오는 거 같다. 도마뱀도 안면에 피가 몰려서 얼굴이 붉어지나? 신기하네.

=백청 님은 우리 종족의 영웅… 아니, 우리와 같은 그분을 섬기는 존재로써 그녀를 공격한 것은 우리 종족에게 싸움을 거는 것과 동일하다는걸 알고는 있으시오?=

종족의 영웅이라고 하려 했다가 옆에 서 있던 칼카쿰이 고개를 홱 돌리면서 째려보니 황급히 말을 돌린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공처가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그리고 아훔렉의 반응에서 꽤나 적의가 묻어나와 나도 심기가 사나워졌다. 피해자는 이쪽이라고, 이 도마뱀 대가리야.

저런 반응을 보이니 나도 말을 높여줄 필요성을 못 느껴서 반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몰라. 중요한 건 백청이 먼저 우릴 공격해서 죽이려고 했고 우리는 해야 할 복수를 한 거 뿐이야. 너희 종족이 백청을 내놓지 않겠다면 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청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장해물을 모두 치워버릴 거야.”

내 말이 짧아지니 아훔렉도 표정이 점점 불편해져 간다. 하지만 무력을 쓸 생각을 못 하는 모습에서 내 뒤에 서 있는 프랑을 견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고작해야 사제 계급과 비슷한 수준일 뿐, 그대가 뒤의 거인과 괴수들을 믿고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라면 우리의 뒤에는 우리가 섬기는 그분이 계시다는걸 알아야 할 것이오.=

이게 무슨 개… 도마뱀 우는 소리야? 아훔렉이 새까만 눈동자에 힘을 주고 날 노려보며 하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져 당황해서 4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을 허우적거리는 알케마를 노려봤다.

어떻게 설명했길래 내가 보여준 무력시위를 프랑의 무력으로 받아들인 거야? 날 프랑의 대리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어이가 없어졌는데 프랑도 마찬가지인지 사나운 얼굴로 아훔렉을 노려본다. 이대로라면 끝은 싸움 일 거 같아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며 비죽 웃었다.

“아, 그러세요~? 그 눈깔은 장식에 귓구멍은 옹이구멍이냐? 그리 생각하면 한번 덤벼보시던가. 너희들의 목이 누구한테 떨어져 나가는지 머리통이 분리된 몇 초 사이에 잘 살펴보라고.”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아쿠르 서하.=

내 도발에 아훔렉이 양미간을 찡그리자 칼카쿰이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막 뭐라고 하려 했는지 입을 열려던 아훔렉은 자기 앞에 나선 칼카쿰을 못마땅한 듯 쳐다봤지만, 곧 사람처럼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딸, 알카마가 전한 이야기에는 그대가 그분을 직접 뵈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그대의 명예와 존재의 의미에 맹세코 진실임을 선언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오는 칼카쿰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주면 뭐가 바뀌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와 제가 이끄는 파벌은 백청 님에 대한 보호를 거두겠습니다.=

호오?

=마구스 칼카쿰!! 그게 무슨 망언이오!?=

=그는 지금까지 강한 의지와 진실로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뒤에 위치한 거인을 제외한 모두가 스펙스의 축복을 받아 하나하나가 우리 사제와 비슷한 기세를 풍기고 있습니다. 거인은 백청 님보다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지요. 그가 헤뷜트로 진군한다면 알케마의 증언에 따라 사비 종족은 멸족의 길을 걷게 됨이 두 눈에 선히 비칩니다.=

=그래서 지금 전투가 무서워 그분을 섬기는 사도를 저자가 죽이게 내버려두겠다 이 말이오?!=

시비적인 단어를 골라 날카롭게 외치는 아훔렉을 보며 칼카쿰은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 대답했다.

=시작은 백청 님이었다 하지않습니까. 또한 그분께서 확언까지 해주셨다면 대의명분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우리가 그와 맞붙어 종족이 몰락한다면 그분께서도 나서주시지 않으실 겁니다.=

=저것들이 강하다 한들 우리 10만 사비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자존심과 명예욕으로 그분을 모시는 사비 종족을 멸족의 길로 이끌겠다는겁니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분의 명예에도 흠집이 난다는 걸 이해 못 하시는 겁니까.=

…슬쩍 아훔렉과 칼카쿰의 신체를 살펴보니 아훔렉의 가랑이 사이에는 색이 좀 더 진한 커다란 비늘이 두 장 붙어있는 민둥산이 있었는데 그 안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얇고 길쭉한 살덩어리가 숨겨져 있었다. 반대로 칼카쿰은 두 개의 구멍이 비늘 뒤에 숨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칼카쿰이 암컷이고 아훔렉이 수컷인 거 같다.

뒤에 있는 알케마도 암컷인 걸 봐서는 혹시 언어 능력이 뛰어난 쪽은 암컷들인가? 칼카쿰과 언쟁을 벌이던 아훔렉은 연달아 이어지는 논리 정연한 칼카쿰의 반박에 할 말을 잃고 어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아훔렉을 보고 있으니 누나랑 말싸움하다가 밀려서 할 말을 잃은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거 같다.

그 뒤로 아훔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백청은 사비 종족의 영웅임을 주장하면서 백청을 죽음으로 내모는 짓은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논리는 없고 감정만을 앞세운 이야기라 칼카쿰의 논리적인 반박에 모조리 격퇴당하고 있었다.

=오오. 창해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사비들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옵니까.=

백청 그 새끼가 일으킨 재앙이지 용왕이 내리는 시련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마지막 주장까지 논파 당한 아훔렉은 크게 장탄식을 터트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지금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버렸다.

============================ 작품 후기 ============================

말싸움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이기기 힘든게 보편적이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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