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1 사비 종족 =========================================================================
하얀 놈을 제외한 다섯 마리를 묶은 공간의 벽을 풀어주니 살이 파이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 입은 팔다리를 늘어트린 채 쪼그려 앉아버렸다. 차라리 저 하얀 놈처럼 통째로 묶어버렸으면 오히려 멀쩡했을 텐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보고 있으니 아주 쬐끔 미안해져서 힐링 웨이브을 쏘아내 한 번에 회복시켜주니 자리에 주저앉아 꾸에엑 꿔우욱하면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던 녀석들이 사라진 상처를 더듬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시선을 돌려 하얀 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화할 마음이 들었다면 눈을 한번 깜빡거려.”
처음 내게 잡혔을 땐 하얀 놈이 뿌리는 살기에 공간 지각이 반응해서 뒷덜미가 찌릿 거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한풀 꺾인 모습으로 있다가 살짝 찡그려진 눈동자를 얇은 피막이 천천히 가렸다가 드러낸다.
신기하네. 눈꺼풀 대용인가? 하얀 놈은 눈 아래와 머리 위쪽에 빗살무늬로 빨간색과 하얀색 염료가 길게 발려져 있었는데 거기에 노란색도 추가되어있었다. 삼색 줄무늬라… 하얀 놈이 인상을 쓸 때마다 삼색 줄무늬가 꿈틀거리는 게 인상적이다.
하얀 놈의 입을 막고 있는 푸른색 공간의 벽을 치워준 다음에 말을 걸었다.
“자, 네 이름은?”
=…그걸 알아서 뭘 하게?=
어? 목소리가 히아리드처럼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온다? 프랑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좀 불퉁한 모습을 보이는 하얀 놈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럼 하얀 놈이라고 불러주지.”
하얀 놈이라는 명사와 의존명사로 이루어진 호칭을 붙여주려니 까만 눈동자가 일그러지면서 송곳 같은 이빨을 살짝 드러낸다.
=알케마.=
“…엉?”
=내 이름은 알케마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네 이름은 뭐지?=
“하얀 놈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뭐, 내 이름은 서하다. 그럼 질문을….”
=서하다. 넌 어째서 우리를 사로 잡은 거지? 너처럼 생긴 아쿠르는 한 번도 본적이 없어. 너 정도로 강한 아쿠르는 알려졌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혹시 방랑 중인가? 뒤의 거인 암컷과 혼돈의 덩어리는 네 종복이고?=
…이놈 말 많네.
“서하다가 아니고 서하. 서하야. 너희를 사로잡은 이유는 너네 종족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나도 너희 종족은 이번에 처음 본다. 그리고 방랑 중인 것도 맞아. 거인 암컷이 아니라 플랑드르라는 이름이 있고 종복이 아니라 내 연인이야. 혼돈의 덩어리라고 부르는 건 암흑이, 내 펫이고.”
-저는 펫이었슴까?-
=물어볼 게 있다면 직접 방문을 요청하면 될 일을 어째….=
“나도 말 좀 하자!!”
이게, 봐주니까 계속 지 할 말만 하네! 눈썹을 역팔자로 꺾으면서 알케마를 노려보니 녀석은 뻘쭘한 표정을 짓고서는 주둥이를 우물거리다가 =…말해라.= 하고 중얼거렸다.
“백청을 찾고 있어. 내가 너희를 이렇게 포박한 이유도 그놈이 너네 도시로 들어갔다는 흔적을 확인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야.”
=…백청 님을 그 몰골로 만든 게 설마….=
“나야.”
=…….=
“미리 말해두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백청, 그놈이었어. 어쨌든… 몇일 전에 복수를 하는데 성공은 했지만 거대한 홍수 때문에 그놈을 놓쳤고 그 뒤로 놈의 흔적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서릿발 같은 기세에 알케마는 새하얀 비늘로 뒤덮인 머리를 위아래로 꾸벅이더니 당황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 심각한 상처를 받으셨고 대화조차 못 할 만큼 정신을 잃고 계셔서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의문이었는데….=
이 녀석이 백청이랑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위치였나? 혹시 이 녀석… 사비 종족 중에서 꽤 높은 신분인 거 아냐?
아구름과의 대화에는 큰 상처를 입었고 치료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알케마의 말에서 지금 백청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신의 땅에 올라간다면 바로 회복하기 시작하겠지.
고개를 돌려 프랑을 보니 프랑도 그 부분을 눈치챘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알케마에게 시선을 돌린다.
“넌 너네 종족들 중에서 위치가 어느 정도야?”
=…그걸 알아서 뭐하게?=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 거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꺾으며 뚜둑 소리를 냈더니 녀석도 내 행동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긴장한 모습으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예비 사제로 교육을 받는 중인 전사 계급이야!=
예비 사제라. 예상대로 굉장히 높은 신분이잖아? 9만 마리중 단 열둘 뿐인 사제 계급에 편입 예정인 전사라니. 역시 그물 같은 옷에 장신구를 입고 있는 건 평범한 게 아니었다.
“백청 그놈이랑은 얼마나 가까운 사이지?”
=…네 목적은 백청 님을 죽이는 거야?=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는 모습에 조금 심통이 날 거 같지만, 정신 조작 없이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상대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죄다 정신 조작을 걸어대다간 정작 중요할 때 정신 조작을 못 쓸 수도 있으니까.
분노를 속으로 조금 누르면서 대답해줬다.
“그래. 백청을 끌고 간 게 너희들이란 걸 안 뒤에는 너희도 모두 한패라고 생각해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백청을 처리하려고 했어.”
=그런….=
내 이야기를 허투루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알케마는 긴장한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리면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거 같았다.
=난 알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백청 님의 곁에서 자랐어… 백청 님은 우리 종족의 영웅이시니까.=
사비 종족은 난생인가? 뭐 파충류니까 그렇겠군. 이 녀석도 아훔렉이라는 백청은 영웅이다 파벌인 거 같고.
알케마가 거짓을 말하진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백청은 어디에 있지?”
=…신의 땅으로 모시고 있어.=
“신의 땅이 어디에 있는데?”
=……벨티칼 산의 정상.=
점점 대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눈이 좋아. 이곳에서도 너희가 사는 산을 살펴볼 수 있고 너희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지.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백청 그놈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고? 지금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난 거짓말하지 않아! 백청 님의 상세가 위독해서 벨티칼 산의 내부 통로를 이용해 모시고 있는 거란 말이야!=
의심하는 내 이야기에 녀석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치고 씩씩거리다가 자기 몸을 묶고 있는 푸른 공간의 벽을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내 심장에 위상석이 있어서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녀석들의 종특이 그런 건지 모르겠다.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하는 히아리드나 인어 자매들을 생각해보면 대화를 나눌 지성을 갖춘 존재들의 특징이라고 봐야 하려나?
=…이거 풀어주면 안 돼? 도망 안 갈 테니까.=
공간의 벽에 갇혀있는 게 꽤 불안하고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대화의 환경을 개선할 필요도 있어 알케마를 묶고 있는 푸른 공간의 벽을 풀어주니 휘청이다가 자세를 잡더니 빈손을 들어 자기 머리의 비늘을 쓱쓱 쓰다듬는다.
=풀어줘서 고마워. 그보다 앉아서 얘기해. 우리는 조금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는 거 같아.=
…이 녀석은 생각이 없는 것인지 겁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딱히 공격해올 의사는 없어 보여 순순히 양반다리로 녀석의 앞에 퍼질러 앉았는데 양아치처럼 쪼그려 앉은 녀석은 자기 꼬리를 끌어안고 비늘을 손으로 쓸면서 날 힐끔거리기만 한다.
시간을 보내려는 수작인가 싶어 얼른 말하라는 식으로 눈을 부릅떴더니 움찔하면서 주둥이를 열었다.
=일단은 공격해오지 않아서 고마워. 나는 아직 사제님들처럼 정확하게 상대방의 강함을 인식하진 못하지만… 플랑드르라고 했지? 저 거인은 사제님들보다 강해 보여. 너는 거인보다 약한데도 거인을 사역하고 거인도 널 진심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면 사제님들과… 아냐. 지금 겉으로 보이는 네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
이 녀석, 자꾸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해서 뭘 말하려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횡설수설하는 느낌이다.
=너와 혼돈의 덩어리와 거인 셋이라면 우리도….=
“이야기를 질질 끌려는 수작이라면 가만 안 놔둔다. 간단하게 본론만 말해.”
협박을 받자 녀석은 놀랍고 두렵고 조금 화도 난 거 같고… 도마뱀의 얼굴로 꽤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다가 나무 막대기 끝으로 땅을 죽죽 긁더니 날 힐끔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빠한테 말하면 사죄의 의미로 무언가 배상을 해줄 거라 생각해. 백청 님을 그냥 놔주시면 안 돼?=
“안돼. 백청이 나한테 한을 품었으니까 몸조심하라고 용왕이 말할 정도라면 살려줬을 때 틀림없이 날 공격해올 거야. 난 우환을 뒤에 남겨두고 싶지 않아.”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던 알케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알케마 뿐만 아니고 우리 이야기를 듣던 다른 도마뱀 인간들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다 알케마의 하얀 비늘이 눈에 띌 만큼 달달 떨리는 게 보여서 녀석의 얼굴을 보니 눈동자가 흔들리는 얼굴로 더듬거리면서 입을 연다.
=그, 그분을… 대대, 대해의 주인님을… 뵀다고? 진짜? 정말? 그분께서 너한테 직언까지 해주셨어??=
“어.”
알케마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세모꼴의 주둥이를 뻐끔거리더니 벌떡 일어나서 종종걸음으로 내 앞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한다.
=말, 말도 안 돼. 그분께서 현신하셨던 건 하늘의 주인님, 플라비우스 종족과 종족 전쟁을 일으킬 때가 마지막이셨다고 했는데. 어째서 우리가 아닌 아쿠르 앞에서 나타나셨지? 어째서? 왜?=
용왕이 내 앞에 나타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마지막의 왜? 는 날 보고 말하는데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감정이 한가득이었다. 뭐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지만 내가 순순히 대답해줘야 할 이유도 없어서 대충 대답했다.
“몰라. 아무튼, 니 말대로라면 용왕은 너희들 앞에 나타난 지….”
=그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
용왕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알케마가 세모꼴이 된 눈으로 빽!! 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귀가 왱왱 울린다.
콰앙!!
그게 프랑의 심기를 자극했는지 프랑이 알케마의 옆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굉음이 터지면서 알케마가 나동그라진다.
「도마뱀 인간. 그렇게 계속해서 서하에게 건방지게 굴면 너는 물론이고 네 종족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거다. 지금 너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주둥이를 놀려라.」
=윽….=
처음 보는 살벌한 표정과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날 향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다 무섭다. 프랑의 주먹질에 터져 오른 흙덩어리가 떨어져내리면서 자빠진 알케마를 두드리는데 프랑의 기백에 하얀 비늘이 창백하게 보일 만큼 굳어버린 알케마는 벌벌 떨기만 할 뿐 흙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흙으로 엉망이 된 알케마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용왕은 너희들이 섬기는 존재지 내가 섬기는 존재가 아니야. 내가 그를 칭하는 단어는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니 말대로라면 용왕이 너희들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최소 수백 년 전이란 말이지?”
=으… 마, 맞아….=
자기 비늘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조금씩 떨고 있는 알케마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너희가 용왕한테 뭐 실수라던가 해서 안 나타나는 건 아니고?”
=그, 그럴 리가 없어. 우리는 그분을 성심으로 섬기고 매년 공물도 바친다구….=
“너희는 두 파벌로 갈라져서 싸움한다던데? 그게 용왕의 심기를 어지럽힌 거 아냐?”
=그걸 어떻게?!=
내 말에 비늘을 곤두세우면서 놀란 표정을 지은 알케마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 아까 한 말이, 백청을 자기 아빠에게 말하면 뭔가 배상을 준다고 했었지? 거기다 예비 사제로 교육 중이라고도 했고 백청을 영웅이라고 하는 걸 보면….
“네 아빠, 아훔렉 맞지?”
=?!?!=
이제는 의문을 넘어 두려움과 공포가 맺히기 시작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 한숨이 나왔다. 어째 어린애를 두고 놀리는 기분이 든다.
=여, 역시 너도 영웅이구나. 백청 님을 패퇴시키시고 그분께서 직접 말씀을 내릴 정도에 거인의 충성까지 받다니. 지,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두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꾸벅이는 알케마를 따라 다섯 마리의 도마뱀 인간도 같은 자세로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로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대부분은 아구름이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었고 특별히 얻은 정보라고는 알케마는 아훔렉이라는 우두머리의 자식이고 내가 백청을 놔주면 아훔렉이 뭔가 보상을 해줄 거란 이야기 정도다.
이제는 프랑과 이야기를 나눠서 대충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을 거 같아 알케마들을 한데 모아두고 프랑과 이야기를 나눴다.
“몇 가지 선택문이 나온 거 같은데 한번 정리해보자.”
1. 백청은 빈사 상태로 벨티칼 산의 내부 통로를 통해 산의 정상, 신의 땅이라고 불리는 힐링 스팟으로 이동 중이다.
2. 사비 종족은 백청은 우리 영웅이다 파벌과 우리 영웅이 아니다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3. 내가 백청을 죽이려 들면 영웅이다 파벌에서 날 막으려 들게 틀림없다.
4. 그 파벌의 사비 종족을 죽이면 영웅이 아니다 파벌에서도 덤벼온다. 이렇게 진행될 경우 용왕이 나타날 거라 짐작한다.
5. 알케마의 아빠는 사비 종족의 최고계층 중에서도 최고라고 볼 수 있는 하나의 파벌의 수장이다.
6. 백청 놈이 나한테 한을 품었다는 걸 용왕이 인증해줬다. -> 나중에 가면 백청이 우릴 뒤치기하려 들게 틀림없다.
7. 알케마의 아빠인 아훔렉은 백청은 우리 영웅이다 파벌의 수장, 백청을 놔주면 배상을 해줄 거라지만 6번의 이유로 놔줄 수 없다.
이러고 보니 루트가 2개로 나뉘네.
백청을 죽인다 -> 사비 종족 전체와 싸우게 된다 -> 용왕이 나타난다. -> 배드엔딩.
백청을 놔준다 -> 멀쩡히 회복한 백청이 우릴 뒤치기해온다 -> 배드… 엔딩?
두 번째 루트를 노리고 백청이 기습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지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어쩐지 꺼림칙하다. 가능하다면 후환이 남지 않도록 여기서 백청을 죽이고 싶은데…
그랬다간 루트 1이 된단말야.
「그렇다고 잠입해서 백청만 암살하고 나오면 사비 종족의 아훔렉 파벌이 우리를 뒤쫓을 거 같네요. 뒤쫓는 그들을 학살하면 또 용왕이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이 들구요.」
“흐음….”
-쥔님쥔님.-
간만에 잠에서 깬 암흑이는 엄지공주 모습으로 내 허벅지에 앉아있다가 내 옷을 잡아당기면서 날 불렀다.
“응? 왜?”
-차라리 저 흰 도마뱀을 통해서 사제 계급한테 전언을 보내는 게 어떻슴까?-
“전언?”
-주인님은 백청에게 먼저 공격당했지 않슴까? 그러니까 정당한…. 정당한… 그러니까 그게 뭐였지. 으으.-
“명분?”
-넵! 그검다! 명분! 명분은 주인님한테 있는검다! 흰 도마뱀한테 정당한 명분이 나에게 있으니 백청을 내놓으라고 하는검다. 그걸 거절하면 주인님은 사비 종족과 싸울 합법적인 명분이 생기는 셈이잖슴까. 그렇게 나가면 용왕님도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함다!-
명분인가… 단순한 내용이지만 해볼 만 한걸?
「그건 암흑이 네 생각이잖아? 명분이 있다고 해도 사비 종족이 대량으로 죽어 나가면 용왕이 기분 나빠하거나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님다. 제가 본 용왕님은 정당한 이유와 명분이 있는 일에 벌을 주거나 하는 분으로는 안보였슴다. 주인님과 거래로 프랑 마님을 고쳐드린 것만 봐도 그렇지 않씀까? 명분에 죽고 사는 분일검다.-
「그건… 그런데.」
“음… 암흑이가 말한 것도 일리가 있어. 나도 용왕은 꽤 합리적인 성격으로 봤으니까.”
암흑이에 이어서 나도 같은 의견을 내니 프랑도 '그러면 저도 믿을게요.'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알케마를 통해서 사비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전언을 보내고 기다려야겠군요. 어쩌면 건방지다며 바로 전투를 걸어올지도 모르니 싸울 준비도 하면서요.」
“사비 일족도 인어 자매들처럼 이야기가 안 통하는 건 아니니까 몰살시키는 방향은 좀 지향하지 말자. 명분이랑 정당한 이유가 우리한테 있다고 해도 자길 섬기는 것들을 마구 죽여버리면 용왕도 기분이 나빠질지 모르니까.”
프랑과 함께 대강 나아갈 방향이 정한 뒤에 알케마에게 돌아가니 녀석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날 죽이려 들었던 백청을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는 너희 종족도 잠정적인 적으로 보기로 했어.”
일단 블러핑부터.
=자, 잠깐만…!=
“내 이야기부터 들어.”
=…….=
“잠정적인 적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처럼 지성이 있는 존재들을 마구 죽이고 싶진 않아.”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지만 큰 귀찮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작은 귀찮음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러니 너는 너희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 백청을 내놓고 나와의 마찰을 피하던가, 백청과 함께 모두 죽던가.”
=…아.=
멍한 표정이 된 알케마의 어깨를 잡고 하늘로 적당히 공간 도약을 펼쳐 발아래에 푸른색 공간의 벽을 쳐두고 그 위에 내려섰다.
“잘 봐.”
알케마의 시선을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고여 바다처럼 보이는 곳으로 돌린 뒤에 마나 포 Mk 1을 5만 TP로 맞춰 수평선 쪽으로 10발 정도를 쉬지 않고 날려 보냈다.
콰과과과과….
블랙홀 같은 시커먼 구멍이 수평선을 뒤덮는 모습에 알케마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침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번에는 하늘에 호박색 공간의 벽을 가로세로 높이 1m로 수만 개를 만들었더니,
=…아아.=
힘없는 신음을 흘리며 풀썩 주저앉은 알케마의 눈에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차올랐다. 가시 도마뱀의 머리를 지워버린 호박색 공간의 벽이 하늘을 가득 메운(걸로 보이게끔 착각하게 만든) 모습이 녀석의 공포심을 관통한 거지.
“난 원거리 전투에 특화되어있어. 그리고 프랑은 근거리에 특화되어있지. 근거리와 원거리가 적절히 조화된 파티가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잘 알겠지?”
=…….=
「대답해라, 도마뱀 인간.」
=예, 옛!=
조금씩 밝아져 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곧 아침이 될 거 같다. 사비 일족이 야행성이라지만 자기네 종족이 멸족하느냐 마냐의 판국에 늑장을 부리진 않겠지.
하얀 비늘이 파랗게 질린 알케마를 보면서 판사가 선고를 내리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은 하루를 주지. 내일 이 시간까지 대답이 없으면 거절이라고 생각하고 공격에 들어갈 거야. 너도 봐서 알겠지만… 너희들이 산속으로 숨어들면 나는 산을 지워버릴 거야. 너한테 너의 종족의 운명이 걸려있어. 그러니 잘 이야기해야 할 거야.”
=예….=
============================ 작품 후기 ============================
너무.. 한편씩 올라오다보니 흐름이 다 끊겨서 지루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은거 같네요...ㅠㅠ
이제와서 분위기를 바꾸지도 못하고... ;ㅁ;
계속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 밖에 드릴게 없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