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6 아공간 획득 =========================================================================
플라비우스가 아니게 되었다. 그 말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뜻이겠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내 입술을 훔친 히아리드에게 연인들이 화를 낼 거 같아서 바로 이야기를 이었다.
“플라비우스가 아니게 되어서 하늘의 주인이란 것을 섬길 수 없게 된 거야?”
=예.=
“그럼 나한테 왜 그런 건데?”
=서하 님이 하늘의 주인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주시길 바라서였습니다.=
“…내가 그것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달라고?”
=예.=
참 간단하게도 대답한다. 그런데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이어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플라비우스는 인간과 같은 생식 활동으로 2세를 출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어나는 순간 하늘의 축복과 세례를 받으며 체질을 변화시키는데, 축복과 세례가 플라비우스 들을 잇는 역할을 합니다. 이어지지 못한 플라비우스는 플라비우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동족들과의 생식 활동으로도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해집니다.=
“…설마.”
이야기를 들은 영은이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여섯 장으로 늘어난 하얀 날개를 가진 히아리드를 지긋이 바라본다.
=서하 님께 굴복한 그 날, 제 몸은 서하 님의 세례에 물들어 하늘의 축복과 세례의 흔적이 옅어져 플라비우스와 연결되어있던 끈은 무척이나 얇고 희미해졌었습니다. =
그 말에 프랑과 화연이도 히아리드의 이야기에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적을 앞두고 경계하는 거 같은데?
히아리드는 연인들의 경계 어린 기색과 내 의문이 가득한 얼굴에 애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서하 님이 또 다른 세계의 하늘님이라 여기고 섬겼지만, 끈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으며 그와 함께 저라는 존재에도 점점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미호와 암흑과 함께 이 세계의 문물을 배우고 습득하니 제가 살아온 지난 삶은 오로지 복종과 착취뿐인 삶이었으며 플라비우스의 축복은 족쇄였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수개월 전… 암흑이를 얻은 뒤에 히아리드에게 TP를 주입했을 때 갑자기 내 품에 안겨서 훌쩍였었지. 그때 외로웠다고, 내가 쓰다듬어주지 않아서 외로웠다고 한 게 생각났다.
그땐 단지 세뇌의 부작용이라고만 여겼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서하 님의 세례로 저는 플라비우스가 아닌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되었으며 억압의 끈이 사라져 이제는 히아리드가 아닌, [히아리드]라는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아리드는 자신의 이름을을 제 입으로 밝히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짚은 뒤 손 등에 이마를 대는 자세, 내게 절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온전한 삶을 주신 서하 님께 저 [아르피스]는 제 존재를 바쳐 섬김을 맹세하겠습니다.=
나에게 맹세를 한 히아리드의 표정에는 애달픈 감정이 모두 사라지고 예전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니까, 아까 그 표정은 200년을 넘게 플라비우스로 살아오다 오늘 완전히 플라비우스라는 종족이 아닌 다른 존재로 탈태하면서 슬픔과 안타까움 등이 터져 나왔던 건가.
연인들은 히아리드를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데 가끔씩 날 보며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을 삐죽 내밀거나(프랑) 두 눈을 감고 침묵하거나(화연이) 난봉꾼을 보는 모습을(영은이) 했다.
“아르피스…? 아무튼 서하 덕분에 다른 종족과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졌다는 거지? 그래서 서하에게 그…걸 원해서 섬긴다는 거니?”
=저는 서하 님의 종입니다.=
…살며시 미소를 머금고 대답하는 히아리드.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 히아리드를 매섭게 노려보는 연인들과 히아리드의 뒤에서 멀뚱거리는 미호와 암흑이를 보니 프랑을 선두로 화연이와 영은이가 있고 맞은편에는 히아리드와 미호, 암흑이가 대치하는 조금 오싹한 환영이 잠깐 보였다.
잠깐이었지만 등에 식은땀이 흐를 거 같은 내용이어서 팔뚝에 난 소름을 쓰다듬으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말야. 아르피스는 네 진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따르게 된다고 했었는데 그걸 네 이름으로 삼은 거야?”
=그랬지요. 것은 축복과 세례이자 동시에 족쇄. 이를테면 고위의 플라비우스가 보다 낮은 플라비우스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플라비우스게 아니게 되었으며 저라는 존재를 증명할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진명'이었던' 아르피스라는거군.”
과거형…인가. 화연이의 말에 뭔가 깨닫는 게 있어서 히아리드를 돌아보니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그럼, 히아리드는 진화해서 플라비우스 종족이 아니게 된 거니? 진명에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거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주인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대로 플랑드르 님이 인간 아종이 되신 것처럼 저는 플라비우스의 아종이자 변종이 된 거지요. 이제 아르피스는 진명이 아니라 저의 성姓이 된 것으로 여겨주십시오.=
히아리드의 말에 프랑은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비하하려는 뜻은 없다는걸 표정에서 확인하고 주름진 미간에 힘을 뺐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도 히아리드라고 불러줄게.”
=네, 서하 님.=
“흐응. 히아리드?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이야기를 듣던 영은이는… 뭐랄까, 굉장히 서늘하고 감정이 없는 눈을 하면서 히아리드에게 질문의 허락을 던졌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서하를 생명을 다 바쳐서 섬기겠다고 했는데, 만약 서하가 플라비우스 종족을 멸족시킨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서하 님이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최전방에서 앞장서겠습니다.=
단 1초도 기다리지 않고 꺼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영은이는 차가운 감정을 표정에서 지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그 이야기는 이것과는 다르니까.”
이것이 뭔데…? 궁금한 표정으로 영은이를 바라봤지만 영은이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가운 표정은 사라졌지만 묘하게 적대…는 아니고, 경계도… 아니고… 하여튼 어딘가 모르게 히아리드를 신경 쓰는 표정으로 영은이는 "음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화연이랑 프랑도 마찬가지였는데 히아리드는 여전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야기는 끝난 거야?
-끝난 거야?-
심각해 보이는 이야기가 끝나자 연인들이랑 히아리드를 번갈아 보던 미호와 두 녀석은 슬금슬금 히아리드의 목에 메달리고 품 안에 기어들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암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미호의 뺨을 어루만져주는 히아리드의 몸을 확인했다.
위상력은 350만. 아종이 됐다면… 최고위 아종이니 프랑과 비슷한 힘을 가졌으려나? 하지만 프랑이나 백청한테서 느껴지는 피부가 찌릿찌릿해지는 감각은 안 느껴지는데.
…….
팔뚝에 났던 소름의 흔적을 보면서 다시금 팔뚝을 쓸어내렸다. 환영은 왕비와 후궁의 파벌 싸움 같은 구도였는데… 에이, 아니겠지.
날 차지하기 위해 아름답고 능력 있기까지 하는 여인들이 싸움을 벌이는 건 많은 남자의 로망이겠지만 그 여인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건 로망이 아니라 악몽이다.
조금…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귀환 포인트 사용 쿨타임이 4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 재입장을 위한 준비를 거의 끝마칠 수 있었다. 준비라고 해봤자 지금 아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쉘터에 식량이 전부지만.
토요일이라 출근하지 않은 영은이는 히아리드와 미호, 암흑이와 함께 수련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프랑과 화연이는 누호디에게서 소인화의 비술을 익히고 있었다.
수련장이 북적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재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나가 37자루의 장검과 새카만 뭔가를 들고 찾아왔다.
공중에 공간의 벽을 펼쳐두고 주저앉아있는 내 앞에 우르르 쏟아놓은 누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날 째려보더니 쫄쫄이 타이즈처럼 생긴 검은색 한벌 옷을 내밀면서 외쳤다.
“얼른 안 내려올래?!”
히스테리를 부리기 직전인 거 같아 후다닥 뛰어내렸더니 누나는 날 째려보고는 옷을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고위 이형종인 썬더 이엘thunder eel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든 타이즈 슈트야. 절연체 성질이 뛰어난 거라 낙뢰에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어. 여기에 암흑이도 힘을 보태면 전기 내성은 터틀락보다 훨씬 나을 거야.”
“터트릴락?”
“터틀락turtlerock 슈트!! 니가 날려 먹은 7,200억짜리 말야!!”
“켁?! 그게 그렇게나 비싼 거였어?!”
최고위 이형종의 부산물을 써서 만든 거라 비싸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7,200억이라니…. 내 말에 누나는 어지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짚더니 발칵 성을 낸다.
“그거뿐인 줄 아니?! 비틀 팩을 만드는 데만도 4천억이 넘었단말야! 거기다 돈으로는 환산 못 하는 천총운검까지 홀라당 날려 먹고! 으으으!”
…끄으응.
집 밖에서 돈을 버리고 온 남편을 보는 마누라처럼 씩씩거리는 누나를 화연이가 다가와서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렸다.
“최고위 이형종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연구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합쳐서 그런 거잖나. 다시 제작한다면 가격은 1/3까지 줄어들 테고 터틀락 슈트를 개발하면서 몇 가지 신기술도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손해만 본건 아니니 진정해라.”
“그야 그렇지만 쟤는 자기가 날려 먹은 게 얼마나 비싼 건지 눈치도 못 채고 있잖아. 그래놓고서 천연덕스런 얼굴이라니, 약오른단 말야!”
“그 덕분에 대량의 초위 이형종의 부산물도 가져왔으니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줘야지. 그리고 그만한 돈은 서하에게 의미가 없으니 그런 걸 가지고 혼내는 건 부당하다.”
화연이가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하는 말에 누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나한테 쫄쫄이 타이즈를 집어던졌다.
“얼른 입어!”
“…어우. 히스테리하곤.”
속삭이듯이 작게 중얼거렸는데도 그걸 들었는지 누나는 또다시 눈에 쌍심지를 켜며 바락 소리친다.
“뭐얏?!”
“아냐 아냐!”
죽을뻔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나가듯이 천총운검이랑 슈트랑 백팩이 증발했다고 이야기한 게 어제였다. 그 비싼걸 날려 먹었다고 그때부터 저렇게 갈구는데 진짜 누나라서 화도 못 내고….
뭐, 죽을뻔했다는 이야기에 걱정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는걸 보는 것보다야 낫지만.
표정이 귀신처럼 일그러지는 누나를 피해 잽싸게 장검들을 아공간 안에 집어넣고 캠핑카로 도망와서 타이즈를 입었다.
속옷 위에 바로 타이즈를 입고 전신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니 쫄쫄이 타이즈 답게 남자의 상징이 유독 부각되는 민망한 패션이다.
작게 한숨을 쉬고 그 위로 옷을 챙겨입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프랑이나 화연이나 영은이가 입어야 안구에 힐링이 되는데.”
타이즈 슈츠를 입은 그녀들의 노골적인 모습을 상상하면서 히죽거리다가 누나의 히스테리가 덩달아 생각나 한숨을 푹 쉬었다.
“누나도 진짜 남자친구를 사겨야 저런 히스테리가 덜해질 텐데.”
따끔
“…?”
…뭐지. 방금 가슴 쪽이 따끔하고 욱신거렸던 거 같은데.
에이 모르겠다. 드레스 룸에서 위상 세계에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도 챙겨 아공간에 넣고 있는데 밖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창밖을 보니 대형 트레일러 열 대가 저택 부지의 공터로 차례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뭐가 실려있는지 궁금해서 내부를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니 트레일러 여덟대에 프랑의 옷이 상의 하의 따로따로 하나씩 실려있었고 남은 트레일러 두 대에는 프랑의 속옷이 박스에 담겨 포장되어있었다. 누나가 주문했다던 옷이 이제 배달 된 건가?
캠핑카 밖으로 나오니 누나는 히아리드를 붙잡고 6장으로 늘어난 날개를 만지작거리면서 굉장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히아리드가 진화했다고 하자 웃으면서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준비는 더 안 해도 되니?”
측면이 날개처럼 열리는 트레일러로 걸어가고 있으니 영은이가 다가오면서 물었다. 저 멀리서 누나의 관심이 히아리드의 날개에 집중되고 있는 걸 확인한 뒤에 영은이의 손을 잡고 조물락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응. 절연체 슈트에 무기까지 왔으니까 다 끝났어.”
아공간 덕분에 짐을 정리하고 짊어지거나 챙겨갈 수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확 줄었지.
옷깃을 열어서 속에 입은 썬더 이엘의 타이즈 슈트를 보여주니 내 목덜미랑 쇄골을 슬쩍 건드려본 영은이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후후하고 웃었다.
“들어가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우리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구.”
윽. '니가 말은 안 해줬지만 저번 위상 세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라 양심이 콕콕 찔린다. 영은이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나랑 프랑이랑 암흑이가 죽을 뻔했다는걸 확신하고 있다는 이야기지.
“응. 조심할게.”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져오기도 하고 그 마음이 기쁘기도 해서 따뜻하고 예쁜 손을 힘줘서 꼭 잡아주니 프랑이 육중한 발소리를 울리면서 걸어왔다. 그 밑에서 같이 걸어온 화연이는 내가 영은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백청의 부산물을 챙겨왔지만 죽이지 못한 데다 인증기까지 부서졌단 이야기를 듣고는 확신을 했지. 너라면… 우리가 걱정할까 봐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숨겼다는 걸 확신했다는 말에 움찔해버렸지만 화연이는 그 일을 끄집어내서 나한테 따질 생각은 없는지 누나와 함께 있는 히아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시하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이번엔 히아리드도 데려가라고 하고 싶지만 이번에 6팀이 발견한 지역에 대규모의 이형종 부락을 발견해서 그쪽에 토벌을 보내야 할 거 같다.”
“히아리드가 가야 할 정도라면 고위 이형종이 많나 보네?”
“그래. 기괴할 정도로 마물 타입 이형종이 많은 곳이다. 그중 절반 이상이 처음 보는 형태인 데다 고위급이라 판명 난 이형종도 많아 그곳을 정상적으로 정리하려면 그랑 블루의 레이드팀 전원을 투입해 올해를 전부 보내도 불가능할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바쁜 네가 오가기보단 차라리 히아리드를 데려가는 게 더 효율적이지.”
“히아리드가 가려면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할 텐데, 누가 함께 가는 거야?”
“내가 간다. 시하는 회사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
어… 고위 이형종이 많은 곳에 화연이가 간다고? 으음, 암흑이를 붙여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랑 있는 것보단 화연이한테 가는 게 낫겠다 싶어 막 입을 열려는데 화연이가 예상했다는 듯이 내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누호디도 있고 히아리드도 함께 가는데 암흑이까지 붙여줄 필요는 없어. 암흑이의 특성은 백청과 또 싸울지 모르는 네 쪽이 더 필요할 거다.”
손에 쥔 이스펙트를 보여주며 하는 이야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중에서 고른 하나는 그녀들이 날 믿어주는 거처럼 나도 그녀들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챙기려고 하면 그건 챙겨주는 게 아니고 구속일 테니까.
“알았어. 히아리드한테 이야기해두면 되지?”
고개를 끄덕이는 화연이를 보고 측면이 완전히 열린 트레일러에 뛰어올라 커다란 검은색 비닐 팩에 밀봉된 프랑의 옷가지를 아공간에 모조리 집어넣고 누나와 히아리드에게 걸어갔다.
누나는 다가오는 날 보고 "깜빡했다!" 하고 소리치더니 자기 차로 달려가 버리는데… 뭘 깜빡한 거야? 멀뚱히 누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히아리드한테 물었다.
“누나랑 무슨 이야기 한 거야?”
=날개가 한 쌍 늘어난 것을 보시고 진화했냐고 물어보시기에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날개의 감촉이 예전보다 더 부드럽고 포근해졌고 더 하얗게 변했다며 예쁘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냥 잡담이었군. 내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빤히 내려다보는 히아리드한테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토벌전이 있대. 거기에 마물형 고위 이형종이 많다고 하니까 화연이랑 같이 가서 토벌하는 거 좀 도와줄래?”
=네, 서하님.=
히아리드는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금으로 뽑은 것 같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걸 손으로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음… 뭔가 기쁘다는 듯이 눈에서 애정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눈빛으로 변한 게 신경 쓰인다. 어째… 날 덮치기 직전의 영은이 같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 모습을 프랑도 그렇고 화연이나 영은이도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으으. 진짜로 내가 봤던 환영처럼 날 두고 3:3으로 매치가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분위기가 거북해져서 어떻게 풀고 싶은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프랑이 입었던 비늘 가죽 포대기도 챙겨야지.”
거북한 분위기를 피할 핑계가 생각나자마자 후다닥 공간의 벽으로 만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프랑이 벗어서 차곡차곡 개어놓은 백청의 비늘 가죽을 아공간 안에 넣고 나오니 어느새 다가온 누나가 흰색 상자를 내 가슴팍에 떠밀었다.
흰색 상자 윗부분에 빨간색 십자 마크가 붙은 게… 약상자?
“약은 안 챙겼지? 감기약이랑 진통제랑 소독제랑 위장약 하구 보건 약이랑 습포제랑 연고제 하구 열상 치료 약에 창상 보호제야. 내복약하고 외용약으로 분류해서 보관해놨어.”
구급상자를 들고 슬쩍 영은이를 보니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 저번에 챙겨준 건 쓰지도 못했는데 이번엔 누날 찔러서 구급약을 챙겨준 거구만.
“…고마워.”
힐링 터치랑 힐링 웨이브가 있는데 이런 걸 쓸 일이 어딨다고… 어차피 아공간도 생겼고 남은 자리도 많은데 짐이 늘어난다고 가져가네 마네 할 건 없지. 그때 귀환 포인트 쿨타임이 종료되면 울리도록 설정해둔 알람이 울렸다.
“프랑은 준비 끝났어?”
「끝났어요. 준비할 것도 없지만요.」
아 참. 소라고둥도 가져가야겠군. 어느새 다가온 미호의 품에서 암흑 이를 받아 어깨에 올리면서 말했다.
“잠깐 집에 들러서 소라고둥을 가져올게.”
“그거 쓰게?”
“응. 알붐 케투스가 준건데 아무래도 내 위상 세계에서만 쓸 수 있을 거 같아서. 혹시 모르니 이번에 챙겨가 보려고.”
“그렇지 않아도 사용할 상황이 애매한 호출기였는데, 네게 도움이 될 일에 쓰면 그것도 괜찮겠네.”
입술에 엄지를 대고 잠시 생각하던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화연이와 영은이도 어차피 내가 얻은 거, 내 물건이라면서 내 마음대로 쓰라고 했지만 누나는 "그 고래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는데…." 하고 조금 아쉬워했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보군.
펜트하우스에 들러 공간 도약으로 내 손 크기만 한 은빛 소라고둥을 아공간 안에 던져넣고 돌아와서 프랑이 내민 집게손가락의 끝을 잡고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뒤를 부탁해.”
“맡겨두렴.”
남은 이들을 대표해서 영은이가 대답해준다. 손을 흔드는 인간과 이형종의 혼합 그룹. 내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이들에게 나도 손을 흔들어주면서 정신을 집중해 위상 세계로 넘어가길 강하게 바랐다.
주변 풍경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빛처럼 한 점으로 집중되는 모습을 지켜보다 백청을 떠올리며 이번에야말로 숨통을 끊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기다려라.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아공간은 면적이 아닌 부피로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500세제곱미터가 아닌 가로세로 높이 500m의, 125,000,000㎥이자 0.125㎦의 공간인 셈이지요!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사실 저는 산수 울렁증이히히 >_<
많은 분들께 오해를 드린 점 죄송합니다! 이전 편도 죄다 수정했어요!
그리고 이실직고하자면 히아리드의 종족은 플라비우스인데 자꾸 플라우비스랑 플라비우스랑 왔다 갔다 하네요;; 이것도 플라비우스로 다 고쳐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