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2 귀환, 그리고 정리. =========================================================================
다음날 점심에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회사로 나오라고 자기 말만 하고 끊어버리길래 누나의 집무실로 갔더니 특색이 없지만 순박하게 생긴, 그러면서도 묘하게 강렬한 눈빛의 2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여자와 함께 누나가 날 맞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순박하게 생긴 여성도 자리에서 일어나 날 돌아봤다.
“인사하시죠, 그랑 블루의 마스터이신 정서하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 이쪽은 산진순도의 최윤창 사장님입니다.”
으엉?! 사장이 여자였어?
여성용 양복을 입고 곧은 자세로 선 그녀는 어쩐지 핏이 작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는 거 같아 슬쩍 몸을 살펴보니 팔과 어깨, 복근에 실용 근육이 가득 차있었다. 옷이 작은 게 아니라 저 단단한 근육 때문이었구만.
어지간한 남자 쌈 싸먹을 만큼 울퉁불퉁한 근육이 주로 오른팔에 집중되어있는 걸 보고 이 사람은 진짜 장인이구나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진순도의 최윤창입니다.”
굉장히 긴장한 모습으로 뻣뻣하게 굳어서 먼저 내민 손을 보니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한 장인의 손이었다. 잠시 그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손이 뒤로 물러나길래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놀라고 당황한 모습으로 자기 손을 쥐고 있었다.
아, 보통은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먼저 악수를 청하는 법이니까 자기가 먼저 손을 내민 게 실례였다는걸 깨달은 건지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이 하얗게 표백되어가는 모습이 좀 재미있다.
“손을 보니 진짜 장인이신 거 같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정서하에요.”
웃으면서 손을 뻗으니 조심스럽게 내 손을 살짝 잡은 최윤창은 웃음을 띠고 있는 내 얼굴을 힐끔 살피더니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이름이 정말 남자답다. 목소리도 여자치곤 저음에 허스키한 데다 머리카락도 남자처럼 짧게 친 머리라 정말 선이 조금 가느다란 남자로 오해할 것도 같다.
거기다 순박한 외모가 그냥 밖에서 평상복으로 만나면 전혀 장인으로 못 볼 거 같다. 보통 장인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강직하거나 단단한 성격이 외모에서 드러나던데 말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상석으로 가서 앉으니 누나와 최윤창도 자리에 앉았는데 앉자마자 최윤창이 날 보며 눈을 강하게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크래프터즈 마에스트로가 아니라 저희 산진순도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량 생산과 광범위한 제작 볼륨을 봤을 때 크래프터즈 마에스트로가 저희보다 뛰어나겠지만, 제작한 무구의 질과 성능은 크래프터즈 마에스트로에 뒤지지 않는 품질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순박한 얼굴과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렬한 눈빛이 이뤄내는 묘한 하모니에 아까 보여주던 순박한 시골 처녀 같은 모습이 사라지고 장인이자 사장의 풍모가 자연스레 풍겨 나온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누나가 건네주는 서류를 펼쳐봤다.
“독일의 국가 지정 레이드팀에 정식으로 납품되는 2종 무기인 그룬드 스페아, 그룬드 스틸레트의 크리에이터. 독일의 186회 국가 무기개발 경진대회의 우승자에… 이것저것 다 합쳐서 각종 무기 방어구 디자인과 실용성을 따지는 대회의 수상이 22회. 경력이 화려하시네요.”
“그때의 저는 어리고 스폰서가 없는 무명에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이었습니다. 제 능력을 증명할 간단하고 효율적인 수단은 대회에서 입상하는 그것뿐이었죠.”
아무리 능력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회사라 하더라도 외국인이, 그것도 어리고 여자아이였던 그녀는 꽤 많은 텃세를 겪었다고 했다. 능력이 입증되고 누구도 무시 못 할 커리어가 쌓였을 때도 여자라는 이유로 발뭉 엔터프라이즈 부사장의 중매로 현지인과의 맞선을 보기까지 했단다.
“그때는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어서 어쩔 수 없이 보긴 했습니다. 독일에서 살 것이 아니었기에 전부 거절했습니다만….”
“음… 그대로 독일의 발뭉 엔터프라이즈에 남으셨다면 몇 년 후에는 더 높은 직책으로 올라가셨을 텐데, 그렇게 되면 최윤창 씨가 원하는 만큼, 만들고 싶은 만큼 무구를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제작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어째서 일부러 한국으로 돌아와 무구 제작 회사를 직접 차리셨죠?”
“저희 가문은 조선 시대 중기 때 대장간을 열어 농기구를 제작하던 것을 계기로 조선 후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병장기를 제작하며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2010년 말 세계화와 기업화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간판을 내려야 했지요.”
엄청 오래됐네! 거의 700년 가까이 되는 유서 깊은 집안이잖아? 놀라서 최윤창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는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누나도 그녀가 하는 말을 듣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는 21세기에 장인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다시피 했으니 소규모 공방 형식의 대장간을 운영하기에는 힘든 시기였겠지요.”
“맞습니다. 어른들은 어떻게든 냉병기를 제작하며 가문의 역사를 이어가려 하셨지만, 그 상태로는 가문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판단에 몇 가지 사업을 벌였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손해만 남긴 채 문을 닫았어야 했지요…. 그때의 일로 차츰 가세가 기울어 더는 대장장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위상 세계가 나타나고 이런 장인 개념이 되살아난 것이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 되었겠군요.”
누나의 부드러운 미소가 곁든 이야기에 최윤창 사장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여자한테도 통하는 미소라니.
“예. 그 후 제가 태어날 때까지 가문은 이어져 내려왔지만 대장장이의 명성은 완전히 쇠락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았었는데, 우연히 본가의 창고에서 저희 가문의 역사를 확인한 날 제가 해야 할 역할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부흥과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대장장이의 기술을 배우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거였습니다.”
그랬었군. 더듬거나 말을 흐리는 버릇도 없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모습과 몸에 가득한 근육, 그리고 흉터와 굳은살로 얼룩진 손이 내게 믿음을 준다.
한 가지 의문점이라면… 어제도 그랬지만 서류를 보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독일로 건너가 발뭉 엔터프라이즈에 입사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어린 시절에 독일에서 제일 가는 무구 제작회사에는 입사한 거지?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쪽 동네도 외국인이나 성차별도 심한 거 같은데.
꽤 궁금했지만 이건 사업이라기보단 그녀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부분 일 거 같아 물어보진 못하겠다. 내가 갑의 위치니까 물어보면 가르쳐야 주겠지만 왠지 직권남용 같아서 좀 꺼려진다.
계속 머릿속에 두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질 거 같아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최윤창 사장님은 어떤 재료를 받아 뭘 제작해야 하시는지 알고 계시는가요?”
“이무기의 뼈와 가죽으로 회장님의 무구를 제작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재료 이야기가 나오니 최윤창의 눈에서 다시 빛줄기가 솟구치는 것 같다.
“자신이 있으세요?”
“자신이라면 언제나 저와 함께합니다.”
“좋네요. 어떤 방어구를 만들어줄지 기대되는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마음에 꼭 드시는 무구를 제작해 보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째… 사업 파트너를 구한다기보단 그냥 단순 면담을 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을 때 최윤창을 돌려보낸 누나가 돌아와서 내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본 느낌이 어때?”
“기밀 자료 누출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순박한 얼굴이지만 자존감도 강해 보이고 책임감도 뛰어나 보이고. 옷 위로 드러나는 근육이나 손의 흉터와 굳은살을 보면 제작 실력도 괜찮겠지? 누나도 검증했을 테니 좋아 보여.”
“응. 그녀의 능력이 제작에만 치우쳐져 있는지, 아니면 기업가로써의 재능도 있는지 궁금해서 시험해볼 겸 그녀에게 투자를 받고 싶다면 사업기획서를 제출해보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상상 이상의 물건을 가져오더라?”
그 기획서를 떠올려보는지 팔짱을 끼면서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누나 같은 천재가 놀랄 정도의 기획서라니, 어느 정도 수준인지 나도 궁금해진다.
“어느 정도였는데?”
“어느 회사든 사장이란 존재가 실무에 능할수록 그 회사의 미래가 안정되는 법이야. 사장이 평사원 같은 업무에 익숙할 필요는 없지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조적으로 알아둘 필요는 있는 법이거든?”
지금 내가 회사 신경 안 쓴다고 돌려서 까는 거 아니지? 다시 소파에 앉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누날 빤히 보니 손사래를 치면서 웃는다.
“우리 회사는 네가 있어서 성립하는 수준이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돼. 아무튼, 미리 만들어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화 한 그 날 이메일을 받아 확인했는데, 단지 몇 년 뒤를 내다보는 게 아니라 위상 세계와 능력자, 그로 인해 형성된 위상 시장을 다각적인 검토 방식으로 장기적인 면을 부각해서 산진순도가 가야 할 50년의 길을 내다본 기획서였어. 최윤창 씨가 산진순도의 사장으로 있는 한 투자를 계속하면서 우리 레이드 팀의 무구 납품 회사로 선정해도 될 정도에 일부분은 우리 회사에도 적용해볼까 생각이 들 정도의 계획서더라.”
“대장장이뿐만 아니라 사업가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니, 그 사람도 인재네.”
아예 산진순도를 흡수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흠… 지금 당장 결정 안 해도 되겠지. 그래도 어느 대기업에서 산진순도를 건들지 않도록 손 정도는 써두는 게 좋겠다.
“그만큼 뛰어나면 대기업에서 산진순도를 합병시키려 할지도 모르니까 보호 조치도 해둬야겠네?”
“그렇지.”
“회사 일이라면 누나가 더 잘 알 테니까 맡길게.”
그랬더니 누나가 날 곱게 흘겨보면서 살짝 코웃음을 친다.
“흥~ 언제는 안 맡긴 적 있어? 머리 쓰는 일이랑 손이 필요한 일이 생면 맨날 나랑 혜령이 이모한테 다 떠넘기는 주제에.”
그러면서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은 짧은 원피스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바지랑 스커트가 일체화된듯한 퀼로트 스커트를 입은 누나는 하의실종 패션이었는데 하얀 허벅지가 절반 정도 노출되고 스트랩 힐을 신어 각선미를 완전히 노출한 차림이었다.
최윤창 씨랑 같이 있을 땐 각 잡고 앉아있더니 집무실에 나랑 단둘이 남으니 마음이 풀어지는지 꽉 닫혀있던 다리도 살짝 벌어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누나의 다리 사이로 눈이 가는데 새카만 퀼로트 스커트 틈으로 새하얀 뭔가가 얼핏 보였다.
아 진짜… 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여서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크흠. 그럼 난 돌아갈….”
“잠깐 기다려봐. 누나랑 얘기 좀 해.”
소파에서 일어나려니 누나가 빠르게 손을 뻗어 내 소매를 잡아버린다. 누나가 접근하자 나도 모르게 흠칫…할 뻔했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고 누날 내려다보니 누나는 뺨을 살짝 붉히면서 얼른 앉으라는 듯이 손을 까닥거린다.
“…뭔 할 얘기?”
“저택이 완공될 때까지 거기서 살 거야?”
“어. 프랑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
이런 대답을 예상했는지 누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내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은 언제쯤 위상 세계에 들어갈 생각이야?”
“…어?”
“너 하늘 섬에서 돌아왔을 때 나더러 내 위상 세계에 들어가지 말고 너랑 같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랬잖아~! 까먹고 있었지?!”
“아, 참 그랬었지.”
“요게….”
천연덕스런 내 모습에 누나는 약오른다는 표정으로 앙증맞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조금만 더 약올랐다간 주먹이 날아올 기세라 잽싸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누난 회사 업무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서 그쪽을 생각 못 하고 있었어. 거기다 이쁘고 유능하기까지 하니까, 누나가 회사에 있어 줘서 나도 맘 편하게 위상 세계로 다닐 수 있었단 말야. 그래서 깜빡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살살 아부를 해주니 누나의 약오른 표정이 사라지고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3일 뒤에 귀환 포인트 사용 쿨타임이 끝나면 양아치 이무기를 수색하러 다시 들어갈 거야. 그 일이 끝난 뒤에 같이 들어가자.”
“약속한 거다?”
“응.”
“그럼 저택이 완공되면 나도 신촌동에서 살래.”
…뭣이?!
샐쭉 웃으면서 소파에서 일어나는 누날 경악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아니, 거기서 왜 그 이야기가 나와?
“아니, 왜?!”
“왜긴? 너한테 짐이 안 되려면 나도 훈련해야지. 아주머니도 같이 살면서 훈련할 거라며? 나도 거기 낄래.”
이, 이걸 노렸구나!! 이런…!
거절하면 영은이는 훈련에 참여시켜주면서 난 왜 안되냐고 이야기가 나올 테지. 그리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오만 이야기를 꺼내면서 날 몰아세울 거다. 그 뒤에 좌절하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내 모습이 예상된다!
날 등지고 고양이 웃음을 지으면서 기지개를 쭉 켜는 누날 보며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누나랑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고 40층의 펜트하우스에 들르니 그랑 블루 시설관리부의 직원들이 구멍 난 천장을 메우고 있었다.
회사 사장을 본 사원 같은 모습으로 쭈뼛거리면서 작업에 신경을 못 쓰길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라고 하고 위상석 창고 방에 들렀다.
방 전체에 장식된 상위급과 고위급 위상석과 함께 방 중앙에 모셔져 있는 은색의 소라고둥과 인어의 진주가 눈에 들어온다.
소라고둥은 부르면 알붐 케투스가 한번은 도와주겠다고 건네준 간이 호출기… 며칠 뒤에 위상 세계에 들어갈 때 저걸 챙겨갈까?
알붐 케투스, 흰 고래가 날 도와줄 수 있는 건 당연히 저걸 얻은 내 위상 세계겠지. 그 전제를 생각해보면 다른 데서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백청을 수색할 때 쓰는 게 나을지도….
일단은 생각만 해두고 1,000만 넘게 충전되어있는 고위급 위상석을 챙겼다.
신촌동으로 돌아오니 프랑과 대련하는 미호가 보인다. 고작 2일째지만 능력을 쓸 때 불안 불안하던 위상력의 흔들림도 많이 줄어들었고 더 빠르고 더 날카롭게 손톱을 휘둘러간다.
중간중간 불이나 바람, 물 같은 속성탄도 프랑의 얼굴로 쏘아내 시야를 가리고 몰래 뒤로 돌아가지만, 프랑은 간단하게 경화시킨 손바닥으로 속성 탄을 막아냈다.
그 틈에 이건 들어간다 생각하고 공격에 전념하려던 미호는 대번에 프랑의 손바닥에 얻어맞아 내 뒤로 튕겨 날아갔다가 다시 프랑한테 접근하며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 아우~! 프랑은 눈이 뒤에도 달린 거야?
「후후. 공격을 할 때는 언제나 두 세수 앞을 예상하면서 공격해야지. 방금처럼 즉흥적으로 떠올린 페인트 같은 건 비슷한 실력의 상대라면 통할지도 모르겠네.」
- 씨잉! 프랑이 너무 빠르단 말이야! 쫓아가기도 바쁜데 그런 생각할 여유가 어딨어!
「잔뜩 맞다 보면 여유가 생길 거야.」
상냥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는 프랑을 보며 오싹하다는 표정을 지은 미호는 다시 입을 앙다물고 프랑에게 몸을 날렸다.
솔직히 500m 공간 지각을 쓸 줄 아는 프랑은… 근접 전투에서 누군가에게 밀릴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방금도 속성 탄을 막아낼 때 뒤돌아가는 미호의 모습에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오른 걸 봤거든.
여분의 옷이 없어서 그런지 오늘도 속옷 차림으로 수련을 도와주는 프랑의 몸매를 감상하다가 거실의 구석에서 이스펙트를 쥐고 앉아 입술을 달싹거리는 화연이와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히아리드에게 다가갔다.
“귀천연물, 독일무반려, 멱타불가견, 출입무문호, 가귀천연물, 독일무반려, 삼라만상, 두두물물….”
소인화 비술의 개념이 담긴 법문을 웅얼거리는 화연이의 몸을 공간 지각으로 쓱 살펴보니 위상력이 A 클래스 직전까지 다다라있었다.
예전에 영국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줄 때 아론 템페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제 나눈 이야기도 그렇고 소인화의 비술에서 A 클래스로 넘어가는 단서를 얻으려 하는 거 같다.
화연이의 근처에서 앉아 출렁거리는 프랑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거기다 공간 지각까지 동원하면서 몸매를 감상하고 있으니 프랑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날 힐끔거린다.
- 우냐아아앙!
한눈 파는 게 미호한테도 보였는지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쉬지 않고 손톱으로 그어가지만 전혀라고 할 만큼 프랑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쳤는지 거리를 벌리고 두 팔을 늘어트린 채 헥헥거리는 미호가 불쌍해서 한가지 조언을 할까 싶어 불렀다.
“미호야.”
- 냥?
“프랑이 입고 있는 속옷은 천이지?”
- 웅.
“천은 불에 잘 타고.”
- …웅?
「아.」
“속옷을 홀랑 태워버리면 프랑이 몸을 가리느라 허점이 잘 드러나지 않을까? 프랑이라면 그런 수단도 잘 막아낼지 모르지만… 밑져봐야 본전이지?”
「서하아아아….」
- 오호?
곤란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프랑의 모습에 미호도 '이것봐라?' 하는 표정으로 악동 같은 웃음을 짓는다.
「잠깐, 미호야? 이건 대련이야. 그런 수단은….」
“효율적이지. 현실에서 인간 여성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몸을 굼뜨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니까.”
- 오케이!
그리고 미호는 신체 강화를 담당하는 꼬리와 바람을 다스리는 꼬리, 거기에 빨간 불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꼬리까지 세 가지 능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아앗, 진짜!」
자그마한 불덩어리보단 광역기가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미호는 접근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깔짝거리며 프랑의 속옷을 불태우려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도 방어할 수단이 있었는지 손을 부채모양으로 만들어 위상력을 담아 휘두르니 광풍이 일어나며 불이 역류해 미호의 옷을 불태운다.
- 악! 뜨것! 뜨거어~!
옷에 불이 붙자 팔딱거리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불을 끄려는 미호를 보고 황당해서 입을 열었다.
“넌 푸른 불까지 다루면서 불이 뜨겁냐?”
- …안 뜨겁네?
아방한 얼굴로 자기 몸을 내려다본 미호는 이내 발딱 일어서서 다시 불길을 피워올리며 프랑의 옷을 불태우려 시도했다.
미호가 불에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건 옷은 불에 타버렸지만 머리카락이나 꼬리 털이 멀쩡한 것이 그걸 증명한다. 무엇보다 예전, 일본에 마포를 던지겠다고 지상 100km까지 올라갈 때도 온몸에 불을 붙인 채 체온을 유지한 적도 있으니까.
방금은 인간들 틈에서 인간처럼 살았더니 인간 같은 사고방식으로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반응을 보여준 거라 생각된다.
“훗. 계획대로.”
속옷만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와 가슴 발육이 슬픈 칠미호 소녀가 나신으로 뒤엉키는 모습은 천만금을 줘도 구경하기 힘든 장관이다.
인증기로 그 모습을 촬영하면서 썩은 미소를 지으니 언제 명상이 끝났는지 내 중얼거림을 들은 화연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키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