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6 귀환, 그리고 정리. =========================================================================
하던 일을 마무리하러 화연이와 영은이도 청와대로 돌아가고 1시간 뒤, 혜령이 이모는 사업 지원부의 김표충 부장과 100명의 생활 보조 능력자를 끌고 수십 대의 초대형 트럭과 함께 도착했다.
작은 빌딩만큼이나 큰 트럭 수십 대가 기차처럼 꽁무니에 꽁무니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정원에 들어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기껏 심어둔 잔디가 다 파헤쳐지는 모습에 공사 현장감독의 얼굴이 울상이 됐지만, 차량에서 내린 생활 보조 능력자은 신경도 안 쓰고 거대 냉동 탑차까지 동원해 백청의 내장 기관과 살코기를 조각내서 싣기 시작한다.
프랑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짐 보따리를 푼 사람들은 백청의 뼈와 뱀 비늘 가죽을 레이드 팀의 부산물 적재창고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운반조와 절단조 두 개로 나눈 김표충 부장은 운반조에게 척추를 로드 트레인에 옮겨 실으라고 지시를 내려준 뒤에 소란을 만들어내는 절단 조로 달려갔다.
투가가가가각!
“안됩니다! 뼈가 커팅이 되질 않아요! 톱날만 망가집니다!”
“가죽도 마찬가지예요~ 다이아몬드 커터가 떡처럼 뭉개져 버려요~.”
얼핏 전기톱처럼 생긴 공구로 백청의 갈비뼈를 자르려고 하던 덩치 큰 사원은 은빛 반투명한 체인이 끊어져 너덜너덜해진 걸 보고 어처구니없어했다.
보호장비를 전신에 차려입은 여직원도 곤란한 표정을 한 채 얼핏 봐서는 튜브 커터처럼 생긴 절삭공구를 들어 보이는데 날이라고 예상되는 부분이 떡처럼 뭉개져 있었다.
“썩을! 어떤 놈의 뼈와 가죽이길래…! 어떻게든 잘라봐!”
“말이야 쉽지~ 부장이 잘라봐요~ 비늘에 흠집도 안 나구만~.”
“그걸 자르는 게 자네들 일이잖아! 자네도 새 체인으로 바꿔서 해보고! 그거 다듬고 옮기지 못하면 다들 오늘 퇴근은 없을 줄 알아!”
퇴근을 가지고 협박하던 김표충 부장을 째려보던 여직원은 "이게 뭐라고 안 잘린담~."하고 꽁알거리자 김표충 부장도 보호구를 입고 비늘 가죽을 자르는데 뛰어들었다.
단순히 윽박지르는 데서 끝내지 않고 직접 작업에 뛰어드는 모습에 생활 보조 능력자들도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뼈와 가죽을 자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한다.
뼈와 가죽을 자르지 못하는 모습에 절단 조를 도와줄까 하고 나서려는데 혜령이 이모가 몇 장의 종이와 함께 우직하게 생긴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와 함께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누굴까 싶어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혜령이 이모가 주머니에서 익숙하게 생긴 벨벳으로 마감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내서 내게 건네줬다.
열어보니 인증기가 들어있는 상자였다.
“이걸 가지러 가셨던 거에요?”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우조민 관리관님, 저희 그랑 블루 레이드 팀의 정서하 회장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능력자 인증 담당관리부의 우조민입니다.”
…인간 맞아? 히아리드랑 맞먹을 만큼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노란색 홀로그램 창을 (능력자 연합 관리자 패널이라고 혜령이 이모가 알려줬다) 꺼내서 내 몸에서 인증기의 흔적을 살폈다.
“으음. 정말로 인증기 신호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혹시 인증기의 파편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완전히 증발했어요.”
왼팔의 소매를 걷어 팔뚝 안쪽을 보여주며 손으로 쓱 훑어 보이니 우조민 관리관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회장께서 소지하신 인증기는 최신 II형으로 어지간한 공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는 재질인데 증발해버렸다니, 믿기가 힘듭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거짓말을 하고 계시단 말씀이신가요, 우조민 관.리.관님?”
“아닙니다. 인증기의 재발급 시에는 범죄의 예방 측면에서 인증기의 파괴 원인과 함께 증빙자료를 수집하는지라….”
“그러니까 우리 회장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범죄에 악용할지도 모르겠단 의심을 하신단 말씀 아니신가요?”
“아, 그, 그런 게 아니라….”
서늘한 모습으로 웃음 지으면서 말을 딱딱 끊는 혜령이 이모가 그에게는 무진장 난감한 듯, 곰 같은 덩치로 쩔쩔매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입가에 웃음을 띠고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혜령이 이모는 날 힐끔 보고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이려 해서 손을 들어서 말렸다.
“관리관님은 지금 저 옆에 있는 작은 산만한 보따리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내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는 듯이 생활 보조 능력자들이 김표충 부장의 지시에 따라 백청의 부산물이 든 짐보따리를 해체하는 장면을 돌아봤다.
“초위 이형종인 이무기의 부산물이에요. 저 녀석이랑 싸우느라 왼팔이 날아갈 뻔했죠. 그때 인증기도 같이 증발해버린 거에요.”
소매를 걷은 왼팔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내 팔을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헛, 초위… 으음. 알겠습니다. 인증기 소멸의 본인 확인차 회장님의 음성과 저 부산물을 영상 자료로 첨부해야 합니다. 협조해주시겠습니까?”
초위 이형종의 부산물이라는 말에 놀랄 뿐, 의심도 하지 않은 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면서 만약 인증기를 이용한 범죄 사실이 드러날 경우 IWO 능력자 재판소에 이것이 증거로 제출되며 큰 불이익을 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알려줬다.
우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순순히 이형종과 싸우느라 인증기가 증발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백청의 무시무시한 크기의 뼈를 영상으로 담았다.
관리관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인증기를 꺼내서 여전히 왼쪽 팔뚝에 장착한 뒤 본인확인 절차를 걸쳤다.
인증기가 한번 박살 나고 났더니 화연이나 영은이처럼 몸통에 인증기를 붙이는 건 어떨까 했지만, 몸에 붙이는 거나 팔에 붙이는 거나 각자 장단점이 있어서 그냥 팔뚝에 붙였다.
혜령이 이모는 그걸로 인증기 재발급에 관한 이야기는 끝인 듯, 깔끔하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회장님께서 이번에도 친구를 데려왔다고 능력자 연합 한국 총괄 지부장에게 연락했어요.”
친구라, 프랑을 이야기하는거곘지만 표현이 뭔가 함축적인데. 지부장이라면 현우 형의 뒤를 이어서 누가 지부장이 된 거지?
“등급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기에 어떨 거 같으냐 물었더니 쓴웃음을 지으시더군요. 허가증의 발급을 위해 조만간 찾아오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직접요?”
“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다크매터 슬라임을 길들였던 건 능력자 연합에 정식으로 연락을 안 했으니까요. 겸사겸사 함께 처리하기 위해 찾아오겠다는 뜻을 밝히더라구요.”
“강현우 전 지부장의 후임으로 누가 지부장에 취임했는데요?”
“부산 지부의 지사장 자리에 있던 윤해화라는 B 클래스의 감지 능력자에요.”
어? 그 아주머니가 한국 지부장이 된 건가? 저번에 현우 형을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본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오면 차 한잔 대접해줘야겠네요. 그리고 저 백청의 살코기는 식용으로 쓸 거니까 따로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바람 속성 능력자의 윈드 커터에 수십 킬로그램 단위로 잘리고 물 속성 능력자의 세척 뒤에 진공으로 포장되어 냉동 탑차에 들어가고 있는 백청의 살코기를 보고 따로 명령을 내려주니 혜령이 이모는 고양이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들한테 선물해줘야지. 남으면 영국 여왕이랑 푸친 대통령한테도 선물로 줄까?
혜령이 이모는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은 없다면서 특수상황이 생기면 보고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김표충 부장한테 걸어간다.
로드 트레인에 앞에서 차곡차곡 접힌 백청의 가죽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할 때 누나가 산 스포츠카를 뒤따라 대형 트레일러 세 대가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 트레일러가 설 자리를 지정해준 누나는 옷을 가져왔다며 프랑을 집 안에서 끌고 나왔다.
40m의 프랑이 천막에 뒤덮인 커다란 집 안에서 걸어 나오니 부산물을 자르고 옮기고 싣고 있던 직원들이 흠칫하더니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프랑을 훔쳐본다.
“뭣들 하나!! 손이 멈췄어, 손이! 오늘 퇴근하기 싫은가?!!”
김표충 부장은 거대한 집에서 걸어 나온 거인이 누구인지 금방 눈치채고 직원들이 이쪽으로 신경을 쓰지 못하게끔 움직임이 멈춘 직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갈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금방 하던 일을 계속해나갔다.
“아유~ 못된 무당벌레 같으니.”
“김채린, 다 들린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킥킥 웃는 직원들을 호통치며 작업을 이어갈 때 대형 트레일러의 측면이 열리면서 차곡차곡 접힌 검은색의 옷가지가 드러났다.
측면 개폐장치가 달린 대형 트레일러에서 누나가 가져온 옷을 집어 든 프랑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서니 누나가 빛의 구슬을 여러 개 만들어내며 어두운 집 안을 밝혔다.
“오,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네.”
“감탄이 겨우 그 정도 밖에 안돼? 저만큼 큰 빛의 구체를 여러 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구.”
“우와~~!! 누나 진짜 굉장해! 최고야! 개오짐! 솔까 인정 각?!”
“…….”
과장된 호들갑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 흘겨본 누나는 환히 밝아진 거실에서 프랑에게 옷을 입어보라고 재촉했다.
프랑의 손에 들린 옷은 박스티 같은 거대한 셔츠였는데… 저건 어디서 많이 본 재질 같다?
커다란 옷을 보면서 신기해하던 프랑은 누날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건 캔버스 원단이네요. 이렇게 큰 원단이 있었나요?」
아! 생각났다. 누나가 가끔 그림 그릴 때 쓰던 캔버스랑 같은 질감이었어.
“응. 캔버스 천이긴 한데 초대형 천막으로 사용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걸 사서 재단한 거야. 감촉은 어때?”
「좋아요. 제가 커져서 그런지 비단을 만지는 거 같은 감촉이에요.」
천막용으로 쓰이는 천으로 옷을 만들었다길래 좀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런 걸 옷으로 만들어서 프랑이 입고 다니게 한다고?
귀신같은 눈치를 자랑하는 누나는 내 표정이 나빠진 걸 확인하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누군들 프랑한테 저런 재질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싶은 줄 알아? 일반 합성 섬유로 만들어주고 싶어도 기본적인 사이즈의 패턴이 있는데 프랑이 입을만한 사이즈는 흔한 게 아니란 말야.”
「서하. 캔버스 원단도 폴리 에스터로 만든 거에요. 폴리 에스터도 보통 옷에 많이 쓰이는 원단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음, 그런가.
“됐고. 평범한 디자인의 옷은 많이 주문해놨으니까 우선은 그거 입고 다녀. 좀 투박하긴 해도 프랑의 몸매랑 얼굴이 워낙 우월하니까 그냥 입어도 괜찮을 거야.”
누나의 칭찬에 프랑은 수줍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옷가지를 가지고 침실로 들어갔다.
속옷은 무척이나 밋밋하고 작은 천에 끈이 연결된 형태였다. 고무줄 같은걸 못쓰니까 저런 속옷밖에 못 입겠구나.
유두와 음부만 겨우 가리는 속옷이라 프랑도 속옷을 입어보고 무척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했는데 공간 지각으로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으니 어딘가가 피가 몰려 불끈불끈해진다.
목 부분이 V 형태로 패인 박스티와 조금 통이 넓은 평범한 바지를 입은 프랑은 비니처럼 생긴 모자도 썼는데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났더니 이형종이 아니라 그냥 몸이 거대해진 발기찬… 아니, 활기찬 아가씨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갖다 주지 말고 들고 있어. 5일 뒤에 다시 들어갈 때 그걸 위에 걸쳐 입고 들어가자.”
「아, 확실히 5일 만에 갑옷으로 제작하기 힘들 테니 그쪽이 낫겠네요.」
프랑은 옷으로 쓰던 비늘 가죽을 챙겨 나가려다 내 말을 듣고 예쁘게 개서 침실 한쪽에 올려놨다. 프랑 전용 비늘갑옷이 완성될 때까지 저걸 임시로 입고 다니게 해야지.
누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오겠다며 트레일러를 이끌고 돌아가 버리고 김표충 부장은 백청의 뼈다귀를 절단하는 건 결국 포기한 채 통째로 싣고 가버렸다.
순식간에 적막해진 거대한 집 안에 프랑과 단둘이… 암흑이도 있으니까 셋인가. 셋이서 조용히 있으려니 이번에 위상 세계에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주마등이라니까 뭔가 찜찜하군. 아무튼, 이번 위상 세계에서 겪은 일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자만하고 있었어.”
「자만…인가요?」
“응. 맘속으로는 랑그 드란 같은 사신수가 아니면 내 적수가 될 것들이 없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나 봐.”
브래지어로 모이고 조여진 프랑의 가슴골 사이에 누워서 중얼거리니 프랑은 그럴 법도 하다며 미소 지었다.
「무려 15km 밖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짓쳐 든 일이었잖아요? 그 일을 제외하면 서하의 판단은 나무랄 데 없는 것들이었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날 배려해주는 프랑의 모습에 슬쩍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복수를 생각하면서도 헐렁한 모습을 보이는 건 위상 세계에서 죽어나자빠져도 투덜거릴 수 없는 행위였으니까. 거기다 내가 짊어진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선 안 됐다.
“고마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프랑. 잠깐만.”
그보다 예전에 생각했던 게 떠올라 프랑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서하?」
“잠깐만 기다려봐.”
손에 힐링 터치 Mk 2를 끌어올리니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빛가루가 쏟아져 내린다. 그 상태로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하는 프랑의 두피를 문질렀다. 하지만 눈에 확 띄는 효과는 없군. 아니, 효과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혹시 몰라 힐링 웨이브 5단계도 쏘아내 봤는데 머리카락이 극적으로 자라났다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아쉬움을 머금고 프랑의 가슴으로 뛰어내리니 프랑은 손을 들어서 머리를 더듬었다.
「왠지 머리 피부가 간질거리네요. 힐링 웨이브가 모발에도 효과를 주는 건가요?」
간질거리면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나도 확신은 못 한다고 이야기해줬더니 프랑은 빙긋 웃으면서 팔을 모아 가슴골을 만들어줬다. 그사이에 뛰어들면서 말했다.
“틈 날 때마다 마사지해줄게.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닌 거 같으니까.”
「고마워요.」
“별말씀을.”
프랑의 가슴골은 최고급 물침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암흑이랑 같이 뒹굴뒹굴하는데 집이 있는 방향에서 미호와 히아리드가 이쪽을 향해서 빠르게 날아오는 게 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