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56화 (356/517)

00356  이무기와의 재회  =========================================================================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찾아왔지만 수많은 상념에 잠을 못 자고 아침을 맞이했지만 내린다는 표현은 너무 얌전한 빗줄기는 멈출 생각을 않았고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 무렵에는 숫제 뇌성벽력까지 치기 시작했다.

번쩍하고 세상이 한번 점등한 뒤에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울려 퍼진다.

장대비에 수위는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누워있는 거인 프랑의 허벅지가 아니라 아랫배가 살짝 잠길 정도까지 차올랐다.

흙탕물 사이로 어른거리는 거인 프랑의 골짜기를 보니 물속에 오래 잠겨있어서 그런지 피부가 하얗게 부르트기 시작하는 거 같다.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비가 쏟아지는 기세가 이대로 몇 시간 뒤면 배꼽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차오르고도 남을 정도로 거세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게 좀 있으면 산봉우리까지 차오를 기세야.”

한순간 하얀빛이 세상에 번뜩이더니 멀리서 희미한 우렛소리가 들려온다. 암흑이는 번개가 친 방향을 돌아보더니 질린다는 듯이 입을 뻐끔거렸다.

-황당한 날씨임다. 제가 살던 곳도 비가 종종 왔었지만 이렇게나 쏟아부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슴다.-

“현실도 마찬가지야. 거기다 이곳은 6개월마다 이런 식으로 홍수가 일어난다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데, 설마 이 비가 설마 대해의 주인이라는 그 보름달 눈깔의 청룡 때문인 건 아니겠지?

얼핏 하늘 섬에서 히아리드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신 수라고 불리는 것들 중 하늘의 주인이라는 걸 섬기는 플라우비스 종족은 대해의 주인을 섬기는 사비 일족이라는 것들이랑 치고받고 싸워서 이겼지만, 종족 수가 너무 줄어들어 하늘로 도망갔다고 했지.

대해의 주인은 청룡일 테고 청룡과 백청 사이에는 같은 뱀 종류라는 연결점이 있다. 그리고 백청은 이 근방에서 살고 있지.

혹시 여기가 사신수 중의 하나인 용왕의 영역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잠들었는지 기절했는지 모를 사이에 나타나서 나한테 몇 마디 지껄이고 사라진 거고 백청 그놈도 용의 짝퉁이잖아.

설마 백청은 청룡의 하수인이라거나 후계자라거나…

-주인님! 물! 물이 빠르게 차오름다!-

“억?!”

정신줄 놓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수위가 거인 프랑의 배꼽 안에 앉아있는 나한테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급격하게 차오르는 수위에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사슴 가죽을 두르고 암흑이를 움켜쥐었다.

…아, 동서남북 모두 다 물에 가득하고 비까지 억수로 쏟아지니 어디로 가야 할지 진짜 막막하다. 어디로 가야하,

쿠드드드드드.

“으헉?!”

-오메!?-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발밑이 서서히 무너지는 감각에 기겁하면서 황급히 뛰어내려서 거인 프랑의 새끼손가락을 끌어안은 뒤에 하늘 위로 공간 도약을 펼쳤다.

그리고 발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수백 미터는 될법한 소용돌이가 이곳저곳에 생기며 어디라고 할 곳 없이 산 주변으로 뿌연 흙탕물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그그그….

또다시 울려 퍼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동 소리에 살짝 겁을 먹었는데 갑자기 산이 움푹하고 가라앉는다.

급류에 휘말려 산 중턱부터 깎여나가다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두려움이 밀려오는 광경이라 침을 꼴깍 삼키는데 암흑이도 살짝 몸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서, 섬이 사라짐다….-

“…….”

섬이 아니라 산이지만… 정정해줄 기분이 나질 않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400m에 가까운 산이 있던 곳은 무수하게 생겨난 소용돌이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공간지각으로 확인해보니 그 높던 산이 뿌리째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제자리 공간 도약을 반복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천지사방에 있는 거라곤 물과 시커먼 먹구름뿐이라 암담해졌다. 하지만 백청과 싸운 직후처럼 정신적인 피로감에 TP 회복량이 무진장 줄어들었을 때랑은 다르게 완벽에 가까운 몸 상태라 다행이다.

아니, 겁을 조금 먹어서 그런지 회복량이 살짝 들쭉날쭉하지만, 그것도 곧 괜찮아졌다.

잠시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파악해봤다. 내가 짊어진 부피에 따라 소비 TP량이 늘어나는 공간 도약은 거인 프랑을 데리고 공간 도약을 하면 1회에 31,220을 소비한다. 이것도 최대 거리가 아니고 3km가량을 이동했을 때 드는 양이다.

6.75km를 한 번에 이동한다면 3만이 아니라 10만 가까이 든다. 거기다 TP 회복을 위해 3~4초간을 기다렸다가 도약하니 그 시간 동안 추락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추락한 만큼 상승 이동을 해야 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이동 궤적은 톱날 모양이 되면서 이동 거리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한 번에 이동 가능한 거리는 2.2km 정도밖에 안 된다.

이것만 보면 부담 100배지만 TP 회복량은 원래대로 돌아와 분당 1%, 그러니까 1초에 9,740을 회복한다. 3초마다 공간 도약을 한 번씩 쓴다 치면 1번 이동에 2천 TP를 쓰는 셈이니까 29,200번, 24시간 동안 이동할 수 있다.

4초에 한 번 도약하면 오히려 TP가 조금씩 회복되니 그사이에 쉴 장소를 찾을 수 있겠지. 이렇게 계산해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쉴 장소를 찾아보자.”

-넹. 기왕이면 높고 튼튼한 산이 좋을 거 같슴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렇다면 결국 목적지는 서쪽에 있을 거대한 산이군.

샤워기에서 쏟아져나오는 물줄기도 이렇게 밀도가 높지 않을 거다.

거인 프랑의 커다란 손가락을 끌어안고 공간 도약을 펼치길 2시간. 온몸을 두드리는 아기 손가락 크기의 빗방울이 어이없긴 하지만 2시간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는 게 더 어이없다.

밤낮이 구분되지 않는 시커먼 어둠 속을 비를 맞으며 나 홀로 이동하고 있었다면 심장이 벌렁거렸겠지만 암흑이와 잡담을 나누며 공간 지각으로 방향을 확인하면서 공간 도약을 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니가 살던 곳도 홍수가 나기 전의 이 근방이랑 환경이 비슷했다. 이거지?”

-넵. 그래도 수백 미터짜리 호수가 막 모여 있는 그런 곳은 아니었습죠. 돌아다니다 보면 몸이 약간 잠길 정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넌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는 말인데, 구역 같은 건 없었어? 이형종들 보면 자기 구역을 정해서 사는 거 같던데 너도 최고위니까 니 구역이 있었을 거 아냐.”

내 목에 매달린 암흑이는 내 체온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예쁜 얼굴을 목에 문지르며 대답해주고 있었는데… 생긴 건 엄지공주처럼 귀엽고 깜찍한 얼굴인데 말투는 30대 아재 같아서 갭이 참…

-넴. 전 딱히 영역 같은 덴 관심이 없었슴다. 구냥 맘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자주 했습죠. 덕분에 자기 구역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새끼 가진 어미 곰 마냥 민감한 것들도 많이 봤슴다만 백청이라는 이무기는 정말 특이함다.-

“어떻게 특이해?”

빗물에 퉁겨지며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물었다.

-보통은 영역을 침입한 쪽이든 침범당한 쪽이든 얼굴을 마주치면 경계와 함께 탐색하기 마련이었슴다. 근데 워쩐일인지 백청이 그놈은 거인 프랑 마님을 빤히 바라보다가 바로 전투에 들어가지 않았슴까?

초위급이나 되면 한번 전투를 벌였을 때 적지 않은 피해를 볼게 뻔한데 그렇게 무식하게 접붙어 올 줄은 정말 몰랐슴다.-

“얌마. 접 붙다니, 말조심해.”

-헙! 죄, 죄송함다!-

암흑이의 단어 선정을 지적해주고 다시 사방을 둘러봤다.

징그러울 만치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한 치 앞도 안보이지만 공간 지각과 기억력을 토대로 서쪽으로 1시간 동안 이동했지만, 산은 아직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해가 안 간다. 내가 기준 삼은 1회차의 절벽에서 지금 이곳까지는 못해도 1,000km는 훨씬 넘는 거리다. 말이 1,000km지 지구가 둥글다는걸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 거리라면 나와 프랑이 봤던 그 산에 도착하고도 남을 정도다.

뭣보다 1,000km나 떨어진 산이라면 그게 얼마나 높든지 간에 보일 리가 없잖아. 3일하고 반나절 간 1,000km를 이동하는 동안 산의 모습은 어땠더라.

…쭉 같은 모습이었…네?

어라?!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에 암흑이를 불러서 물어보았다.

“암흑아. 넌 절벽에서 산이 보였냐?”

-어떤 산 말씀임까?-

“어떤 산이냐니…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무진장 큰 산이 하나 있었잖아.”

-…?-

고개를 갸우뚱하는 암흑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역시 뭔가 이상해!

서쪽으로만 가다 보면 그 산이 나오겠지 싶어서 비구름 위로 올라가서 확인하지 않았었는데, 구름 위에서 다시 확인해봐야겠어!

방향을 직각으로 꺾어 공간 도약을 10번, 20km를 수직으로 상승했…는 데 여전히 비구름 아래다.

“어? 뭐지?”

15번을 도약해서 30km를 더 올라왔는데도 비구름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먹구름이 갑자기 괴물처럼 느껴서 오한이 돋는다. 저 먹구름이 벌어지며 괴물의 입이 나타나 날 집어삼키는 건 아닐까?

…불현듯 든 생각에 피부가 닭 껍질 마냥 오돌토돌해지고 긴장감과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린다.

-먹구름이 되게 높이 있는 거 같슴다. 원래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검까?-

“그럴 리가 있냐. 보통 구름은 현실에서도 13km 정도까지밖에 못 올라와. 그 이상 높아지면 기온과 기류 때문에 구름이 만들어지지도 못할 텐데….”

시기 좋게 암흑이의 말이 내 상념을 끊고 들어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나 오러를 일으켜서 몸을 보호하며 계속해서 상승 도약을 하지만 지상에서 150km까지 올라왔어도 여전히 비구름을 뚫고 올라가질 못한다.

웃기게도 이쯤 올라오니 주변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물방울이 아니라 조그만 얼음 덩어리들이 쏟아진다. 얼음이라 긴 좀 어설프고 얼음과 물의 중간 단계라고 할까?

그것들이 몸에 닿으면 체온에 의해 녹아서 물방울이 되어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그것들이 계속해서 떨어지니 어깨와 머리 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시선을 내려 거인 프랑의 몸을 보니 눈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들이 피부에 쌓이다가 얼음 결정으로 맺히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더 올라가는 건 무리야.

잽싸게 사방을 둘러보고 지상 2km까지 내려왔다.

사방이라고 하지만 서쪽을 주로 살펴봤는데 역시나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이랄지 눈방울이랄지, 그거 때문에 시야가 가로막혀 안 보인다.

환장할 거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가던 길이 있어 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암흑아. 그럼 절벽에서 산 같은 건 안보였다는 거지?”

-넵. 보이는 건 하늘 끝까지 펼쳐진 나무의 바다 뿐이었슴다.-

“…그럼 내가 본 산은 대체 뭐였지? 거기다 우리가 2시간 동안 공간 도약으로 이동한 거리만 해도 3,000km는 가뿐하게 넘을 텐데 이렇게 넓은 곳에 이만한 홍수가 나고 이렇게 비가 쏟아진다는 건… 이상하잖아.”

그러나 암흑이도 생각나는 게 없는지 곤란한 표정으로 내 목만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암흑이는 보지 못했던 산, 하지만 나와 프랑은 본 산.

나와 프랑이 본 게 환영 같은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프랑이 이형종이 됐을 때 산 아래까지 다가가 봤었다는 이야기까지 해줬으니 산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현상은 뭘 뜻하는 걸까.

지금까지 위상 세계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머리를 굴려보니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오르지만 가장 의심이 가는 건 백청 그 새끼랑 용왕의 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가설은 창해의 용왕이 뭔가 수작을 부려서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그 이유는 초거대 거북이 랑그 드란을 만났을 때의 경험이다. 랑그 드란을 만나기 전에는 사방에 물안개가 꼈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간 뒤에 물안개가 사라졌을 땐 수 시간이 훌떡 지나가 버렸지.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생각해보면 창해의 용왕도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 이 홍수와 폭우가 랑그 드란의 물안개와 비슷한 그거라면?

창해의 용왕이잖아. 물이나 비 같은 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냐?

하지만 확인은 불가능하다. 내가 창해의 용왕을 만난 것도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불분명한 마당에 어떤 수로 이 비와 홍수가 용왕의 짓이라는 걸 알아낸단 말인가.

…다른 가설은 그 용왕이라는 존재가 해준 말처럼 양아치 이무기, 백청 그 새끼가 나한테 한을 품고 먹구름을 불러서 비바람을 쏟아붓고 홍수를 일으켜 날 죽이려고 이 지랄을 하고 있을 거라는 가설이다.

그러니까 용왕도 나한테 호신護身 하라는거 였겠지!

아무리 이동해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 한없이 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끝나지 않는 홍수. 용왕이 한 이야기까지.

“니미….”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온다. 안되면 어제 생각했던 것처럼 수백 킬로미터짜리 지하 대공동을 수백 개, 수천 개를 만들어버릴 테다!! 그럼 물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들어 갈 테니 땅이 드러나겠지!!

아예 지름 수천 킬로미터에 깊이 수백 킬로미터짜리 호수를 만들어주겠어! 아니면 물을 죄다 지워버리거나!!

누구 짓인지 모르겠지만 어디 해보자고!!

대규모 파괴 행각은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두기로 하고 일단은 가능한 최대한 이동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2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목표로 삼은 거대한 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이동을 한 건 맞는가,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게 맞나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위상 세계에 들어온 지 21일. 아니, 산꼭대기에서 기절하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니 정확하진 않지만, 일단은 기억 안 나는 시간을 제외하면 21일째다.

팔다리가 새카맣게 타버리면서 인증기도 덩달아 사라져버려서 시간을 확인할 수 없다. 거기다 그동안 모아둔 내 연인들의 부끄러워하거나 귀여운 사진, 영상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게 정말 미치도록 아쉽다.

또 내가 늦으면 늦을수록 화연이랑 영은 이도 걱정이 태산 같아질 것도 염려되고… 그렇다고 거인 프랑을 데리고 이대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거인 프랑이 자극받아서 날뛰면 하철수가 데려온 그랜드 터틀이 서울에서 날뛴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일이 벌어질 테니까.

바다나 다름없는 장소에 지랄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으니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다.

“…개새끼.”

백청과 용왕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속에서 짜증과 분노가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상황이라 욕설이 절로 흘러나온다.

-주인님…?-

2시간 동안 묵묵히 이동하다가 느닷없이 욕을 내뱉으니 암흑이가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간 괜히 척추반사로 암흑이한테 짜증을 낼 거 같아 숨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아… 지금 상황이 좀 짜증 나고 열 받아서 그래. 암흑이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넴….-

혹시 같은 장소를 빙빙 도는 게 아닐까 공간 지각으로 물속 지형을 세세하게 뇌리에 새겨두며 이동 중이지만 똑같은 지형은 나타나지 않는 게, 미로나 환영 같은 건 아닌 게 확실하다.

“후우.”

답답한 한숨을 내쉬니 내 목을 끌어안고 등에 매달려 있던 암흑이가 흠칫하고 놀라는 게 느껴진다.

다시 1시간이 흘러 이동을 시작한 지 5시간이 지났다. 1시간에 평균 2,000km를 이동했으니 이로써 5시간 동안 총 1만km를 이동한 셈이 되는데, 이 거리면 미국 중심부에서 한국까지 태평양을 가로지를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폭우는 그치지 않고 땅을 뒤덮은 홍수의 수위는 줄어들긴커녕 점점 높아져 간다.

“크, 크크크. 크크크크크.”

-주, 주인님?-

속에서 터질 것 같은 짜증과 분노가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지경이다. 이러다가 울화병으로 쓰러질 거 같아서 불을 토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야. 우리가 지금 5시간 동안 1만 km를 이동했거든? 근데 그거 아냐? 2만 km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지구 반대편까지의 거리라는 거? 우리는 고작 5시간 만에 지구의 반의 반 바퀴를 돈 거야.

그런데 1만km를 이동했는데 여기도 비가 쏟아지고 땅에는 수백 미터짜리 홍수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 말은 비가 지구 전체를 감싸고 퍼부어 대고 지상은 모조리 물에 잠겼다는 말이 되잖아!!!”

-주인님, 지, 진정하세요!-

암흑이한테 하는 말도 아니지만 소리치다 보니 뻗쳐오르는 혈압에 뒷목을 붙잡았는데 암흑이의 자그만 머리가 잡혔다. 깜짝 놀라는 암흑이의 머리를 놓고 이빨을 갈면서 외쳤다.

“씨발!!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1만 킬로미터 범위가 전부 수심 수백 미터짜리 홍수라니, 지구 전체가 물에 잠겼단 이야기가 되잖아!! 그런데 수위는 고작 500m?! 씨발, 장난해 지금?!!”

열 받고 짜증 나서 더는 못 버티겠다!!

“으아아악!! 에라이 썅!!”

-주, 주인니이이임~!!!-

날 말리려 드는 암흑이의 손짓을 무시하고 거인 프랑의 손가락을 한쪽 팔로만 끌어안은 뒤에 남은 한 손을 펼쳐 사방으로 마포를 날렸다.

“씨발, 다 터져라!! 사라져!!! 난 파괘왕이다 우하하하하!!! 죽어! 죽어!! 죽어어어!!!!”

쿠과광 쿠구궁 쿠그그구구구….

사방팔방에서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 범위로 터져나가는 폭발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연속 공간 도약으로 순식간에 100km 상공까지 올라간 뒤에 거인 프랑의 손가락을 놓고 양손으로 사방팔방 마포를 날리니 폭발도 순식간에 2배로 늘어나 천지사방을 뒤집었다.

“므와아아앙~~!!!”

-주인님이 이상해졌어어으어엉!-

폭우를 뚫고 날아가 대기를 찢어발기는 폭발을 연달아 일으키는 마포는 먹구름이 낀 하늘과 비의 바다를 난폭하게 휘젓는다.

내 쏟아지는 성질머리에 몸살 나겠다는 것처럼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우르르르릉, 꽈르릉!! 꽈과과광!!!! 우르르르르….

그 폭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뇌성벽력이 가까이 찾아오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폭풍으로 진화할 조짐이 보인다.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높아지는데다 소용돌이까지 생기기 시작하는 모습에 반쯤 가출했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어느새 비의 바다가 지척까지 다가와 거인 프랑의 가슴으로 도약해 젖꼭지를 잡고 다시 하늘 높이 공간 도약을 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비의 바다와 쏟아져내리는 폭우도 몰아치는 바람에 수직에서 대각선으로 이동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씨발?!”

온 몸을 세게 두드리는 비바람과 귓가를 울리는 바람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니 거대한 허리케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으흐흐흐. 간지폭풍인데?”

내 평생 허리케인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해준 허리케인 체이서 프로그램에서 본것 뿐이지만, 비의 바다를 나선으로 끌어올리며 마치 먹구름과 바다를 잇는 기둥같은 모습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못해도 수십km가 떨어져있을텐데도 두 눈 가득 들어오는 거대한 비와 바람의 허리케인은 벼락마저 뿌리기 시작하는데 맛탱이 간 웃음을 짓게 만들기 충분한 광경이다.

두 손에 마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폭풍? 씨발, 엿이나 쳐드시라 그래!!

“크크크. 전설 무기랑은 나랑 연관이 없었지만 우레폭풍은 꼭 한번 갖고 싶었다고?”

-주인니이임… 제발 정신 차리세요오오.-

눈물이 흘러내릴 듯이 글썽거리는 암흑이를 무시하고 거인 프랑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하면서 양손에 TP를 있는 힘껏 응축한다. 그러면서 대기에 떠돌아다니는 위상력도 끌어들여 표면을 뒤덮으며 마포를 크게, 더욱 크게 만들어나간다.

“더! 좀 더!! 더욱더 크고 아름다운 마포가 필요해!!! 으힣히헤헤힉!!”

으히히히 웃으면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저항하며 양손에 TP를 압축해가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현묘한 소성이 퍼져 나온다.

『거대한 힘은 아니건만 질서와 세계의 축을 무너트리기엔 부족함이 없도다. 이것 또한 흥미가 돋는구나.』

귓가를 두드리는 빗방울과 바람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머리를 파고들어 오는 말소리에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호옹이?!-

시커먼 먹구름 너머로 꿈에서 본 보름달 하나가 희미하게 비친다.

============================ 작품 후기 ============================

히히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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