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5 이무기와의 재회 =========================================================================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이대로 두면 거인 프랑이 빗물에 체온을 빼앗겨 감기가 들지도 모르겠다.
…초위 이형종이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서 감기에 걸릴까 싶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지. 프랑의 나신을 따라 흐르는 빗물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해서 거인 프랑의 몸 위에 거대한 우산 형태의 공간의 벽을 쳤다.
그러자 푸른색 공간의 벽에 막혀 비가 벽을 따라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어?”
푸른색 공간의 벽을 본 순간 얼빠진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푸른색 공간의 벽이라니? 호박색은 어디 갔어?
거기다 비가 왜 공간의 벽을 따라 흐르는 거야?
의아해져서 바로 손바닥 위에 공간의 벽을 작게 쳤더니 똑같은 색의 반투명한 공간의 벽이 생성됐다. 이거… Mk 2가 된 거야?
갑자기 왜?
좀 어이가 없는 기분이지만 나쁠 건 없지. 방금 사용한 푸른색 공간의 벽의 소비 TP를 점검해보니 호박색 공간의 벽보다 위상력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사용한다.
푸른색 공간의 벽에 슬금슬금 손가락을 가져가서 살짝 건드려보니 손가락 끝에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용기를 내서 공간의 벽을 움켜쥐었더니… 달라진 것도 없잖아?
왜 갑자기 색이 바뀐 거지? 잠시 생각해보니 두 가지가 의심이 간다. 하나는 거인 프랑이 다치는 모습에 눈이 돌아가서 천총운검에 TP를 천만까지 응축해 날리는 순간이랑 양아치 이무기 백청의 벼락 방출에 구워졌을 때다.
천만짜리 검기 탄을 날렸을 때 심장에서 무언가 쭉 빠져나가고 무색투명한 검기가 날아갔었다. 그때 무언가 변한 게 아닐까. 두 번째는 그냥 벼락에 구워져서 뭔가가 바뀐 건가 싶기도 하다.
…모르겠다. 실험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축 늘어진 거인 프랑을 보고 있으니 의욕이 나지 않는다. 멍하니 주저앉아 푸른 공간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다가 조그만 암흑이를 살펴봤다.
암흑이도 날 위해 꿈틀이처럼 변해버렸고 프랑은….
후우. 암흑이는 위상력이 100까지 떨어졌는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인 대왕 꿈틀이처럼 내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꼬불꼬불 구부러지는 모습이 연체동물처럼 지능이 없는 본능적인 꿈틀거림으로 보인다. 그 모습에서 최고위 이형종이었던 녀석의 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날 지키려다 이런 모습이 되어버려 안쓰러움을 느끼면서 손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봤다. 색은 검은색에서 거의 회색 가까이 되어있었고 원래의 모습보다 훨씬 불투명해 내 손바닥이 어렴풋이 보이는 수준이다.
이 녀석한테 TP를 흘려 넣어서 위상력을 회복시켜주면… 원래대로 돌아가려나?
한 번에 확 주입하면 어딘가 잘못될까 봐 조심조심 TP를 주입해주니 검회색 반투명한 젤리 같은 몸체에 푸른 빛이 흘러들어 간다.
암흑이는 몸 안으로 TP가 흘러들어오자 몸을 이리저리 굴려대면서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쳐진 지렁이마냥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얌전히 못 있냐.”
펄떡거리면서 허우적거리는 암흑이가 손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쥐고 TP를 계속해서 주입했다. 위상력이 늘어날수록 꿈틀이 젤리 같던 몸도 커지고 퍼지면서 슬라임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대로 쭉 TP를 넣어주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 같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으음… 그런데 위상력이 100만이 다 되도록 암흑이의 액체 몸 안에 블루 스톤이나 위상석이 생성되지 않는 걸 보면 등급은 그대로 최고위 이형종인 거 같다.
TP가 늘어날수록 부피가 차츰차츰 늘어나던 암흑이는 몸이 내 양손에 가득 찰 만큼 늘어난 순간 꾸물거리던 액체 같은 몸뚱이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쑥 빠져나왔다.
숨을 멈추고 조그마한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내 손가락을 움켜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남은 부분이 꿀렁거리다가 사람의 형태를 갖춰간다!
“암흑아!”
-아, 우 으이이이.-
이전처럼 엄지공주 같은 모습이 아니라 형태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내 손 위에 흐물흐물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몸의 형태를 잡기에는 위상력이 모자라 다는걸 깨달았다.
그래서 조금 더 빠르게 TP를 주입해주니 검회색이던 몸이 TP의 색에 물들어 청회색이 되면서 틱장애에 걸린 것마냥 어깨나 팔다리를 움찍거리는데 그럴 때마다 액체 일부분이 경직됐다가 풀리길 반복한다.
쉬지 않고 TP를 주입할수록, 예전 암흑이의 위상력인 1,422만에 가까워질수록 눈, 코, 입과 몸의 형태가 온전하게 잡혀간다.
위상력을 1,422만까지 회복시켜주고 더해서 1,500만까지 늘려준 다음 tp 주입을 중단하니 여전히 틱틱거리면서 몸을 꿈찍거리지만 엄지 공주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갑자기 철퍽하고 몸의 형태가 무너지더니 물 밖에 꺼내진 해파리처럼 퍼져버렸다!
깜짝 놀라서 손에 힐링 터치를 일으켜서 쓰다듬어주니 암흑이는 꾸물거리다가 몸이 압축되더니 키 30cm의 귀여운 엄지 공주 모양으로 돌아갔다.
“놀래라.”
무릎을 모아 꿇어앉은 암흑이의 몸을 살펴보다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에 살짝 걱정이 들었다.
“…괜찮냐?”
-우헷. 죽는 줄 알았씀다.-
멋쩍은 표정으로 혓바닥을 쏙 내밀며 머리를 긁적거린 암흑이는 -영차.- 하고 일어서더니 폴짝 뛰어서 내 목에 매달렸다.
-한순간이었지만 주인님과 헤어져야 하는 줄 알고 놀랬슴다.-
“나도 니가 죽는 줄 알고 놀랬었어. 날 지켜줘서 고맙다.”
-우히히. 주인님이 저보다 먼저 죽는 건 못봄다!-
“…그래. 고마워.”
정신 조작으로 충성심을 밀어 넣어놓은 녀석이라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양심이 콕콕 찔린다.
손을 들어 헤헤 웃는 암흑이의 엉덩이를 받쳐주고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니 몸을 배배꼬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양심이 더욱 따끔거리는 기분이다.
“몸은 어때? 넌 위상력이 100까지 떨어졌었는데 어디 이상한 점은 없어? 기억이라던가 몸 상태가 안 좋다던가.”
-우움? 과식을 했을 때처럼 결합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금방 괜찮아 질검다! 오히려 주인님이 TP를 주입해줄 때 뿅 가는 줄 알았슴다!-
호들갑을 떨면서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부비부비하던 암흑이는 자리를 옮겨 내 뺨에 자기 얼굴을 비비면서 입을 열었다.
-그치만 조금 전까지의 기억은 흐릿해서 잘 모르겠슴다. 그냥 어렴풋이 주인님 곁에 있다는것만 알 수 있었슴당.-
“그래. 별 일 없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암흑이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정말로 다행이다. 입에 미소를 매달고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니 녀석도 히죽 하고 웃었다. 그러다 거인 프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프랑 마님은 괜찮으심까? 털이 다 사라졌슴다.-
“…….”
-앗… 죄송함다.-
진짜 슬라임이면서 웬만한 사람들보다 눈치가 빠르다.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고 프랑을 돌아봤더니 암흑이는 내 표정에서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괜찮아. 프랑도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타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힐링 웨이브로 회복을 시켜줬으니 곧 눈을 뜰 거야.”
눈을 뜬다고 해서 이성을 되찾을지는 미지수지만… 속으로 한숨을 쉬고 암흑이를 어깨 위에 올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인 프랑이 언제 눈을 뜰지 모르니 우선 주변 상황을 조금 살펴봐야겠다.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은 가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니 암흑이는 잽싸게 내 목을 끌어안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제에 암흑이도 여성체를 하고 있어서 목 뒤로 작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드는 게 조금 기가 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무튼, 거인 프랑의 앙가슴 사이를 걸어 배 쪽으로 내려가니 우묵히 패인 배꼽에 물이 고여 찰랑거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가 몸을 타고 따라 흘러내리다 배꼽에 고인 거 같았다. 1인용 커다란 욕조 수준으로 물이 고여있는 걸 보고 수면에 얼굴을 비춰보니 머리카락이 다 오그라들어서 엉망진창이 된 내 모습이 옅게 비쳐 보인다.
“으아….”
물에 젖어있는데도 구불구불한 걸 보면 머리카락이 말랐을 땐 아프로 머리가 될 거 같다. 한숨을 푹 쉬고 일어서니 수면을 때리는 시끄러운 빗소리와 함께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몸을 쓸고 지나간다.
벼락에 소지품이 모조리 타버려서 홀랑 벗고 있는데 바람이 내 분신을 훑고 지나가니 기분도 좀 이상하지만 애써 신경을 돌리고 푸른 공간의 벽을 따라 물의 장막을 펼치고 있는 비를 바라봤다.
비가 언제 그치려나.
암흑이는 아까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프랑을 힐끔거리고 있었지만 왜 그러는지 딱히 물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공간 지각으로 근방을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산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처럼 작은 산들과 큰 산 몇 개가 모여 생긴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의 산맥들 중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리고 물속에 잠긴 산 중턱에 갑작스러운 홍수에 동물들이 도망치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려 죽어있는 게 보인다.
그렇지않아도 조금 허기가 지고 있었는데 저걸 건져와서 불에 구워 먹어야겠다.
아직 유속이 빠르고 물속의 나무들 사이사이로 와류가 생기고 있어서 수영은 무리인 거 같으니 공간 도약을 써야겠군.
목에 매달려있는 암흑이를 거인 프랑의 배꼽 옆에 내려놓으니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주인님?-
“먹을걸 가져올 테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안아 달라는 듯이 발꿈치를 들고 두 손을 쭉 뻗는 암흑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아까 결합이 느슨해졌다고 했잖아. 괜찮아질때까진 변신 금지야.”
-네엥….-
풀이 죽어서 쪼그려 앉아버린 암흑이를 두고 토끼가 걸려있는 나뭇가지 근처로 도약을 했더니 무시무시한 유속이 날 밀어내려 한다.
황급히 주위로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버티면서 쳐서 토끼가 걸려있는 나뭇가지를 끊어버리고 떠내려가려는 토끼의 뒷다리를 움켜쥐었다.
토끼 한 마리로는 모자랄 거 같아 뿔이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물흐름에 흐느적거리는 비늘 달린 사슴도 챙긴 뒤에 거인 프랑의 배꼽 옆으로 돌아오니 암흑이가 바로 달려와 내 다리를 끌어안는다.
녀석을 어깨에 올리고 거인 프랑의 옆구리를 미끄러져 내려와 토끼와 비늘 사슴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공간의 벽을 이용해서 비늘 사슴의 목에 생성하니 뎅겅 하고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절단면에서 뻘건 피가 꿀렁거리며 흘러나온다.
“피를 뽑으려면… 어디 보자.”
거인 프랑 주변을 돌아보니 꽤 두꺼운 나무 덩굴이 많이 보여서 그걸 뜯어다가 사슴 뒷다리에 묶은 뒤에 부러지지 않은 나무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아 놓으니 머리가 잘려나간 부분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우오? 뭐하시는검까?-
“피 빼는 중이야. 저렇게 멱을 따고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몸 안의 피가 쭈욱 빠져나온대.”
왜 그러는지는 모른다. 그냥 잡은 짐승의 피는 다 뽑아놓는 게 좋다는 걸 만화책에서 봐서 흉내 낼 뿐이지.
아, 사슴 털가죽을 벗겨서 하반신에 두르고 다녀야겠다. 비늘이 잔뜩 붙어있어서 좀 뻑뻑하겠지만,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거보단 나을 거다.
알몸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니까 바람이 고간 사이를 치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으로써의 무언가가 깎여나가는 기분이 자꾸 들고 있었다.
잠시 공간 지각으로 비늘 사슴을 세심하게 살펴본 뒤에 뼈밖에 없는 앞다리를 떼어내기 위해 공간의 벽을 펼쳤다.
“…어?”
그런데 푸른색 공간의 벽이 아니라 호박색이 나타났다. 뭔가 싶지만 일단 하던 일부터 마무리 지어놔야지.
잘려나간 앞다리 두 개를 옆에 집어던졌더니 암흑이가 잽싸게 다리에 달라붙어서 앞다리 두개를 분해시키며 먹어간다.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신체 강화를 돌려 힘으로 가죽이 상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잡아 뜯었다. 그러다 공간의 벽을 가죽과 고기 사이에 끼워 넣었으면 이렇게 손으로 뜯어내다시피 하지 않았어도 됐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늦은 터라 멍청한 머리를 탓하면서 내 몸을 다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가죽을 펼쳐봤다. 뭔가 비릿한 피 냄새와 생고기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지만, 그것보다….
“…아, 이거 어떻게 무두질하지.”
1회차에 새끼 늑대를 불에 그슬려 무두질했던 방식을 이 비늘 사슴 가죽에 하려면 하루종일 구워대야 할 거 같은데. 거기다 그땐 분석 능력으로 쉽게 했지 지금 시도했다간 그냥 가죽만 날릴 거 같다.
이대로 그냥 두르기엔 좀 찝찝한데… 노란 지방과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가죽을 보면서 공간의 벽으로 꼼꼼하게 지워버리면 어떨까 고민 중인데 앞다리 두개를 모두 먹어치운 암흑이가 내 발치에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주인님. 무두질은 어떻게 하는검까?-
“음. 가죽에서 털이랑 지방이랑 단백질이랑 염분을 싹 제거하면 돼.”
-그럼 저한테 맡겨주십숑!-
어…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암흑이는 폴짝 뛰어내리더니 슬라임의 형태로 돌아가서는 사슴 가죽에 달라붙어서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야. 몸은 괜찮아?”
걱정스러운 기분에 물었더니 암흑이는 문제 없다는듯이 촉수 한가닥을 꺼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래도 조금 걱정되서 말릴까 고민하는 중에 청회색 몸을 펴서 사슴 가죽 전체를 삼킨 암흑이는 손을 놓으라는 듯이 촉수 한 가닥을 꺼내 내 손등을 톡톡 건드린다.
그래서 쫙 펼쳐서 땅에 내려놓으니 암흑이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죽 표면에 붙어있던 털과 노르스름한 지방이랑 살점들을 모조리 분해하기 시작했다.
“대단한데?”
암흑이의 분해를 잘 사용하면 사회 전반에 유용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폐기물을 분해시킨다거나.
고작 1분도 안되는 시간에 지방과 살점, 털 등이 사라지고 검붉은 가죽만 남은 걸 보고 감탄했다. 작업을 끝내고 엄지 공주 형태로 돌아온 암흑이는 가죽 위에 서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으쓱거리고 있었다.
녀석을 어깨 위에 올리고 가죽을 들어 올려 만져보니 생가죽 특유의 냄새도 없어지고 최고급 가죽처럼 말랑말랑한 데다 기름기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게 진짜 굉장하다.
암흑이는 내 어깨 위에 서서 에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떠심까?-
“훌륭해. 감촉도 그렇고 가죽 특유의 냄새도 안 나는 게 최고급 가죽 같아.”
-우히히.-
가죽도 되게 커서 이대로 조끼랑 바지로 만들어도 될 정도지만 어차피 옷을 만들 줄도 모르니까. 가죽을 절반으로 접은 뒤에 끄트머리를 적당히 잘라 가죽끈으로 만들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적당히 접어서 일정 간격으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에 가죽끈을 끼우고 가죽을 허리에 두른 다음 끈을 묶으니 치마라고 하기에도 조잡하긴 했지만 어쨌든 하체를 가릴 수 있는 가죽 떼기 치마가 완성됐다.
“일단은 문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됐군.”
고기를 굽기 위해 비에 젖은 나무 장작을 모아서 암흑이한테 나무의 수분을 제거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당근 가능함당!-
암흑이가 수분을 없앤 나무는 말 그대로 바싹 마른 장작이 되었다. 쌓여가는 장작을 보면서 토끼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 가죽을 벗긴 다음 내장도 긁어내서 공간의 벽으로 지워버렸다.
토끼 고기에 배인 피를 씻기 위해 물가에 다가갔더니 온통 흙탕물에 나무이파리나 풀 쪼가리가 흐르고 있어서 여기에 핏물을 씻는 건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공간의 벽을 타고 흐르며 물의 장막을 만들고 있는 빗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뛰어올라 공간의 벽을 치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토끼 고기를 씻었다. 핏물을 깨끗하게 씻은 뒤에 돌아오니 암흑이는 내가 준비해둔 장작 말고도 주변에 있는 나무와 젖어있는 땅도 모두 말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잘했어.”
칭찬해달라는 얼굴이라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헤죽거리면서 안아달라는 듯이 손을 뻗어왔다.
녀석을 품에 안고 자리에 앉아 불을 피웠다. 신체 강화를 돌려 압도적인 힘으로 마찰을 일으키니 불은 그냥 피어올랐다.
토끼 고기를 구워 먹고 암흑이한테 거인 프랑의 몸에 고여있는 물기를 모두 없애달라고 부탁했다.
암흑이가 슬라임으로 변해 프랑의 몸을 훑으며 빗물을 분해하는 동안 나는 거꾸로 매달아둔 사슴 고기에 피가 다 빠졌나 확인하고 남은 핏물을 흐르는 빗물에 씻은 뒤에 다시 매달아두고 돌아왔다.
허기를 채우고 고기를 정리하는 동안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거인 프랑은 잠에서 깰 생각을 안 했다.
“왜 안 깨는 거지.”
-찰싹찰싹 때려서 깨우시는 게 어떠심까?-
“그럴까….”
예쁘게 생긴 일자 배꼽 안에 누워 사슴 가죽을 덮으니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거인 프랑의 체온 덕분에 따뜻하고 포근하고… 마약 의자에 누워있는 것보다 더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제 해가 지고 있는지 안 그래도 비를 쏟아붓고 있는 먹구름 때문에 어두컴컴한 주변이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면 빛 한점 들지 않는 새카만 어둠이 밀려오겠지.
암흑이 말대로 뺨을 찰싹찰싹 때려서 깨워봐야 하나?
“…그냥 좀 더 기다려보자.”
머리를 거인 프랑의 아랫배 쪽으로 향하고 누워있은 덕분에 시선을 조금 올리니 거대한 쌍봉 사이로 프랑의 얼굴이 보인다.
-저기, 주인님.-
“응?”
내 얼굴 옆에 달라붙어 있던 암흑이는 조심스러워하면서 내 광대뼈가 있는 곳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거인 프랑 마님은 정령 프랑 마님의 육체였지않슴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렇다고 해주니 암흑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면 영혼과 육체가 합쳐진 상태가 아님까? 처음 만났을 때 육의 상태가 좀 썩었었는데 정령 프랑 마님과 합쳐지면서 멀쩡해졌으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게 아닐깝숑?-
“…….”
-영육이원론에서는 육신보다 영혼이 더 신성하고 고등한 것으로 보는데 영으로 존재하시던 프랑 마님이 육으로 존재하던 거인 프랑 마님과 합쳐졌으니 거인 프랑 마님은 온전한 프랑 마님이 되신 거 아님까?-
노….
놀랬다. 암흑이가 이런 고차원적인 논리를 알고 있다니, 설마 이 녀석이 나보다 더 똑똑한 거 아냐?
암흑이의 짧지만 강한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거인 프랑의 심장에 존재하던 회백색 기운이 사라진 이유가 혹시 프랑의 정신이 표면으로 나와서 그런 건 아닐까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벼락의 자극으로 영혼과 육체가 일체화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나와 함께 지내던 프랑의 존재가 백청의 무시무시한 벼락에 씻겨나간 건 아닐까 하는 상상도 들어서 정신을 차린 프랑을 보는 게 겁이 나고 있기도 했다.
정말로 암흑이의 말처럼 영육이원론으로 영혼과 육체가 합쳐져서 적응기를 지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죽은 시체였던 몸뚱이가 어떻게 살아난 건가 싶….
…아. 혹시 천만 TP가 넘게 충전되어있던 영혼석과 프랑의 반인반령의 육체에 가득 차 있던 TP가 죽은 육체와 충돌하고 최고위 이형종이었던 죽은 육체가 초위 이형종으로 진화하면서 되살아난가?
왠지 그렇게 믿어도 무방 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더니 배꼽 구멍이 출렁 흔들거리고 그 충격에 배꼽 구멍 주변에 앉아있던 암흑이가 배꼽 안으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아니야. 맞아. 그래.”
물기가 가득한 찬 바람이 몸을 휘감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고 사슴 가죽으로 몸을 감싼 뒤에 다시 앉았다.
-넴? 뭐가 맞는검까?-
머리를 도리도리 저은 암흑이는 내 허벅지 안으로 들어오…려했지만 녀석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벗고 있는데 어디로 들어오려는 거냐, 넌.
“암흑이 니 말이 맞다고 믿고 싶어. 지금 거인 프랑이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죽을뻔한 충격보다는 프랑의 정신과 육체가 합쳐지면서 적응기를 거치고 있다고 믿을래.”
-오! 그럼…!-
“그러니까 기다리자. 적응기를 거치고 있는데 억지로 깨우기보단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뉌!!-
제발… 이 예상이, 예감이 맞아떨어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눈을 감고 있는 거인 프랑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 작품 후기 ============================
다음 이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