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5 216년 새해. =========================================================================
누나는 연인들과 수다를 떨면서도 몰래몰래 날 엿보는데 그럴 때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을 보내곤 했다. 자기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나한테 서운하고 안심하면서도 불안하고 슬픈…. 느낌?
위상 세계에 혼자 들어가는 걸 설득하기 위해 누나한테 찾아갔다가 실수로 키스하게 된 날,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누나를 피해 다녔더니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거 같다.
누나가 날 동생이 아니라 남자로 보는 상황이라 좀 피해 다녔던 건데…. 역시 고작 2주 조금 넘는 시간으로 예전처럼 남매의 모습으로 돌아가긴 무리인가보다.
“진짜 집을 지어서 나갈까? 경호 문제라면 차라리 그랑블루 빌딩 근처에 땅을 매입해서 집을 올려도 되잖아.”
내 무관심(인척 하는 모습)에 삐지기라도 했는지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독립하겠다는 이야기를 홧김에 꺼낸 거 같은 누나지만, 프랑이랑 화연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점점 구체적인 계획이 짜여가는 거 같아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이사하면 40층을 써.”
“…응?”
“신촌동에 짓고 있는 대저택의 완공 일자가 내년 3월이라며. 그때 되면 우리 이사가고 40층이 비게 되니까 거길 누나가 써. 괜히 엉뚱한데 나가서 경호인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마지막은 일부러 목소리를 묵직하게 해서 말했더니 누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화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런 표정 같은데.
프랑은 나와 누나를 조금 당황한 모습으로 번갈아 보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그, 그러네요~! 저희가 나가면 집이 비게 되니까 시하 님이 쓰시면 되겠어요! 그럼 집을 구하러 나가시지 않아도 되구 일터도 바로 옆이니까 편하기도 하구. 안전하니까 안심도 되죠!”
“으응.”
그 뒤로 누나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고 프랑과 화연이, 영은이가 이야기를 나눌 때 무의식적으로 맞장구를 쳐주는 수준까지 조용해져 버렸다.
그냥 화연이한테 말해서 나중에 전해주라고 했어야 했나?
시간은 흘러서 새 해를 10초 남겨뒀을 때 TV에서 군중이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10부터 줄어드는 합창 소리에 미호와 암흑이는 저게 지금 뭐 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TV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5! 4! 3! 2!]
[[1!!]]
숫자 1을 센 순간 조금 말랐지만 후덕한 인상의 서울 시장과 어떤 승복을 입은 스님이 함께 보신각의 종을 울린다.
뎅~ 하는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여자 아나운서의 밝은 목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온다.
[신미년 한해가 끝나고 임신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새해의 밤하늘에 울려 퍼집니다. 축복 속에서 진행되는 서른 세 번의 타종. 시민들은 한해의 시작을 반기며 무엇보다 가족의 안녕을 기원….]
- 종은 왜 치는 거야?
뎅뎅거리는 소리와 아나운서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호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연인들을 돌아본다. 그러자 화연이가 담담한 모습으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대답해줬다.
“민족적인 의미로 설명하자면 한 번의 종은 1천을 뜻한다. 33번의 종소리는 33천을 의미하는데 동서남북 사방에 8계층의 하늘이 있고 33천을 지휘하는 하늘이 중심에 있지. 그것을 선견성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를 세우신 국조단군이 바로 선견성의 성주인 환인천제의 아들이다. 그래서 단군의 개국 이념인 홍익인간과 광명이세가 널리 선양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33번의 종을 울리는 거다.”
화연이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미호는 설명이 끝나자 발딱 일어서면서 - 몰라! 하더니 내 품 안으로 뛰어들어버렸다.
먼저 와서 내 가슴 위에 앉아있던 암흑이가 깔려서 뭉개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화난 암흑이가 미호의 가슴을 콱 깨물어버리렸다.
- 으아얏!
-호냥이주제에 누굴 깔아뭉개는거임?! 함 혼나야 정신 차림?!-
두 녀석이 툭탁거리는 와중에 다들 서로 새해 인사를 나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복 많이 받아~”
소피아와 수한이 끓여온 떡국을 먹고 귤이나 과일을 깍아먹으면서 일출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미호는 우리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거 같았지만 그래도 안 자고 논다는 게 좋은지 암흑이랑 놀고 게임기를 가져와 게임을 하면서 놀더니 새벽 4시가 넘어갈 때에는 눈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머리가 위아래로 춤을 추는것처럼 흔들거린다.
일출 시각이 다가와서 해돋이 구경을 하러 헬기 포트로 올오가니 꾸벅꾸벅 졸던 미호도 덩달아 잠에서 깨며 따라 나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구경했다.
하지만 어째서 해가 떠오르는걸 구경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우릴 돌아봤다.
- 왜 해 뜨는 거 구경하는 거야?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이하는 의식이라고 생각함.-
- 가는 해는 뭔데?
-…모름.-
암흑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호는 뭐가 어쨌든 좋다는 식으로 도도도 달려와 내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둥그런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구경하던 누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하더니 영은이한테 인사하고 우리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전 이만 자러 가볼게요. 너희두 쉬어.”
섀도 점프로 사라져버린 누나가 흘린 검은 안개를 잠시 바라보던 영은이는 수한과 소피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먼저 들어가렴”
영은이의 말에 수한과 소피아는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고 미호도 히아리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연인들만 남은 헬기 포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영은이가 팔짱을 껴오며 물었다.
“서하는 언제 출발할 거니?”
“지금 바로.”
“지, 지금?”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봤지만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리는데 정말 풀이 죽은 표정이라 조금 신경이 쓰인다.
“응. 예정했던 것보다 6일이나 늦었으니까.”
“새해 아침인데 안아주지도 않고 갈 거니…?”
…음. 두 세 시간 늦게 들어가도 괜찮겠지?
이번 목표는 양아치 이무기에 대한 나와 프랑의 복수다. 녀석을 존나게 두들겨 패놓고 정신 조작으로 굴복시켜서 존나게 굴려야지.
점심을 먹고 나서 모두가 모여있는 가운데 화연이가 묘하게 생긴 가방과 번쩍번쩍 빛나는 케이스를 들고 왔다.
내 앞에 놓여진 가방은 내 몸통만 한 크기였는데 꼭 컴퓨터의 마우스처럼 생긴 가방은 검은색의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져있었다.
등에 닿는 부분이 굴곡이 져 있는 모습이 인체를 고려해 설계한 가방으로 보인다.
“특수제작 백팩이다. 서하의 체형과 움직임을 계산해서 주문 제작한 거다. 한번 매 봐라.”
화연이가 들어 올린 백팩은 특이하게 11자 형태의 끈이 아니라 X자 형태로 되어있는 데다 허리에도 허리띠처럼 묶을 수 있는 게 마치 등산용 배낭처럼 생겼다.
돌아서니 화연이가 손수 등에 매주는데, 등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평범한 책가방이나 배낭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편하고 무게 중심이 잘 맞았다.
내 몸에 맞춰 제작했다더니 정말인가보다.
프랑이 앞으로 와서 백팩의 끈을 매주는데 조금 타이트하게 조였다. 그 뒤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지만 백팩은 내 몸과 일체화가 된 것마냥 이리저리 출렁거리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뭐야 이거? 그냥 배낭이랑은 전혀 다르네. 재질도 뭔가 인공적인 느낌도 나고 천연 느낌도 나고 그런데?”
“네가 잡은 그랜드 터틀의 별갑으로 만든 거다. 별갑을 최대한 가늘고 연하게 만든 뒤 인공 섬유를 섞어 만들었지.”
그러면서 손을 들어 가방을 가볍게 손끝으로 치는데 툭, 툭이 아니라 텅~ 텅~ 소리가 난다.
“하드 케이스를 본떠 만든 일체형 백팩이다. 충격흡수 기능과 1.3배까지 부피가 확장하고 방온, 방수 및 방열 기능까지 내장된 백팩이지만 네 공간의 벽이나 마나 탄에 휩쓸리면 부서질 확률이 100%니까 조심하도록 해.”
다시 가방을 벗긴 화연이는 마우스의 좌우 버튼이 달린 부분처럼 보이는 곳을 위로 슬라이드 하니 지퍼가 드러난다. 그 지퍼를 열고 안쪽을 보여주는데 2곳으로 구획이 구분되어있는 텅 빈 내부가 보였다.
그런데 가방의 크기에 비해 공간이 작아 보인다.
화연이는 안쪽의 빈 공간의 수납 칸에서 100개들이 노란 캡슐이 들어있는 동그란 통을 꺼내더니 캡슐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며 말했다.
“제일 아래쪽에는 5ℓ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그곳에 물을 담고 이 정화 캡슐을 하나 넣으면 물이 정화되며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게 돼. 바닷물까지 정화할 수 있지만, 흙탕물같이 이물질이 끼어있는 건 안되니까 가능한 눈으로 보기에 깨끗한 물을 사용해.”
그리고 영은이가 노란색에 독일어 같은 글자가 적혀있는 커다란 박스를 가져오더니 안에서 초코바처럼 포장되어있는 노란색의 무언가를 꺼냈다.
마치 칼로리 바처럼 생긴 그것은 성인 남자 손가락 하나 굵기와 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1박스에 30개씩 10박스가 들어가 있었다.
봉지 하나를 까서 보여주니 역시나 직사각형으로 3마디로 나뉘어있어서 양을 조절하기는 좋아 보인다.
“이건 보존 기한 10년짜리 고농축 에너지 바거든? 이 하나가 하루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어서 하나를 세 번 나눠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섭취할 수 있어. 위기 시에는 한 마디 분량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으니 기억해두렴.”
뜯은 칼로리 바는 쫑긋 솟은 여우 귀를 파닥거리는 미호한테 넘겨주니 미호는 좋아라 한입 깨물었는데 표정이 요상하게 일그러졌다.
- …맛이 이상해….
대체 무슨 맛이 나길래 저렇게 나라 잃은 표정을 지은 것인지 모르겠다.
무지 신 매실 절임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린 미호는 남은걸 암흑이한테 넘겨준다. 영양을 위해 맛을 포기한 건가?
차곡차곡 가방 안에 칼로리 바…가 아니고 에너지 바를 채워 넣는 화연이를 보면서 물었다.
“거의 1년 치 식량이고 아껴 먹으면 3년 치 식량인 셈인데 그렇게 많이 가져갈 필요가 있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에 대한 대비는 해 두는 게 좋아.”
“맞아. 서하는 공격과 방어적인 면에서는 우주 최강인데 그 외의 면은…. 그치?”
“좀 그렇죠….”
그 외의 면이 뭐?!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여주던 프랑과 영은이는 몇 가지 갈아입을 속옷이랑 혹시 모를 구급약 등을 챙겨주길래 필요없는 구급약은 모두 빼버리려 했지만 영은이의 강력한 요청에 별수 없이 챙겨 넣었다.
내 힐링 터치와 힐링 웨이브 능력이 있는데 이런 구급약이 어디에 쓰일라고.... 그냥 짐만 될거같은데.
“가장 중요한 식수는 이 정화 캡슐을 이용하면 되니 식량을 위주로 챙겼다. 쉴 장소는 공간의 벽을 펼치면 언제 어디서라도 캠핑이 가능할 테고…. 만약 식사가 떨어지더라도 프랑이 그동안 서바이벌에 관한 수많은 지식을 습득했으니 어지간해서는 식료 조달 부분에서는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거다.”
화연이는 설명에 이어 가방과 함께 가져온 은색 케이스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입는 슈트를 좀 더 각 잡고 보호대를 추가해서 멋지게 만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한 벌의 슈트를 꺼냈다.
“이것도 그랜드 터틀의 별갑으로 만든 거다. 한번 입어봐.”
갑옷은 그냥 포스피드 레더 아머를 입고 가려고 했는데…. 이무기를 잡으러 갈 때 특별한 방어구를 챙길까 했지만 암흑이도 있고 해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화연이는 이런 거라도 챙겨줘야 마음이 편한가 보다.
어쨌든 이렇게 장비를 챙겨주는 걸로 그녀들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다 챙겨야지.
화연이의 도움을 받아서 슈트를 입으니 생각보다 쾌적하고 움직임에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포스피드 레더 아머보다 더 움직임이 편하고 가볍다. 이거 대단한데?
시험 삼아 주먹에 힘을 줘서 가슴을 두드려보니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가?”
“포스피드 레더아머보다 더 편한데? 움직이는데 걸리는 것도 없고.”
“그렇지? 서하의 몸 치수와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크래프터즈 마에스트로 코리아에서 재료를 주고 특별 주문해서 만든 오더 메이드 타입이다. 그거라면 고위 이형종의 공격에도 상당수 버틸 거다.”
으쓱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화연이의 말을 듣고 놀랬다. 내 몸 치수? 언제 치수를 쟀지?
“치수 잰 적 없잖아?”
“우리가 너와 같이 산 시간이 얼마인데 그걸 모를 수 있나.”
그…렇긴하다. 나만 해도 연인들의 몸은 내 몸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슈트를 입은 왼쪽 허리에는 천총운검의 검집과 연결해서 탈부착할 수 있는 특수 자력 클립이 붙어있었는데 그곳에 천총운검을 끼우고 특수제작 백팩을 등에 메니 그제야 연인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가신다.
“이제 좀 불안감이 사라져?”
“후후.”
“흥~ 생각 같아서는 미스릴 아다만티움 합금 풀 플레이트 아머를 맞춰주고 싶지만 봐준거라구? 그러니 위상 세계 가면 프랑 말 잘 듣구 몸조심해. 약속이야?”
화연이는 그냥 애매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지만 영은이는 내 말에 다시 불안감이 솟아오르는지 내 손을 꼭 잡더니 신신당부를 한다.
“알았어 알았어. 암흑, 이리와.”
-옛썰!-
도도도 달려온 암흑이를 집어서 어깨에 올리니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목과 가방 사이의 틈에 자리를 잡는다. 프랑의 손을 꼭 잡고 다시금 걱정이 차오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화연이와 여전히 불안감이 서린 모습으로 날 바라보는 프랑과 영은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 뒤를 잘 부탁해.”
“주인님, 부디 몸조심하시길.”
“주인님 화이팅이에요~!”
=무사 강녕하시길 빌겠습니다, 하늘님.=
- 주인님 잘 다녀와~!
그렇게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216년 1월 1일, 양아치 이무기에게서 도망친 지 8개월 만에 프랑과 함께 복수의 길을 떠났다.
목 씻고 기다려라. 이무기 자식아!
============================ 작품 후기 ============================
To be continued...!!
밤낮으로 기온차가 심하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