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4 216년 새해. =========================================================================
주방에서 커다란 압력솥을 들고나온 소피아는 수한의 앞에 놓여있는 넓고 큰 쟁반에 20분 동안 찐 쌀을 꺼내 쏟아붓는다. 그 뒤는 수한이 비닐장갑을 끼고 손에 참기름을 바르며 쌀을 뭉개며 힘으로 치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손에 참기름을 바르면서 힘을 줘서 뭉치고 펼치고 다시 뭉치다가 찰기가 생기자 동글동글 길게 말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길이 1m짜리 가래떡이 완성되었다.
- 우와아~! 조물조물하니까 떡이 나왔어!
-호호우! 호호우!-
TV에서 나오는 걸그룹의 안무를 따라 하던 미호와 암흑이는 수한이 가래떡을 만들기 시작하니 냉큼 달려와서 쟁반 앞에 나란히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길다란 가래떡이 쌓여가자 군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하는 둘의 모습에 소피아가 다급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먹기 좋게 잘라드릴 테니 손 내미시면 안 돼요!”
당장에라도 가래떡에 손을 뻗을 거 같은 그 모습에 주방으로 들어가서 설탕과 꿀이 가득 찬 그릇을 가지고 나와 테이블에 올려둔 소피아는 가래떡을 빠르게 썰어서 예쁜 접시에 옮겨 담았다.
접시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에 미호와 암흑이가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식탐 스위치가 올라간 모습으로 두 녀석은 떡을 포크로 콕콕 찍어 꿀 그릇에 푹 담그더니 입에 집어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해한다.
- 마이써~! 달아~!
-쫀득쫀득! 바삭바삭!-
바삭거린다고? 설탕에 찍어 먹은 암흑이는 설탕의 감촉을 바삭하다고 느끼나 보다. 진짜 바삭한 게 뭔지 보여줘야겠군.
떡을 치대는 수한에게 엄지의 두 배 굵기로 가래떡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풍로를 가져와 발코니에서 불을 피우니 미호가 떡 쟁반을 손에 들고 열심히 집어먹으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본다.
“어리석은 암흑아. 진정한 쫀득바삭이 무엇인지 주인님께서 친히 가르쳐주마.”
-오오, 주인님! 오오!-
수한에게 건네받은 가래떡을 30cm 길이로 자르고 가래떡의 중심부에 나무젓가락에 끼워 풍로에서 가래떡을 구워주니 -헉!- 소리를 내면서 부들부들 떤다.
-속은 쫀득! 겉은 바삭! 이, 이것이 쫀득바삭!-
“깨달음을 얻었느냐.”
-얻었사옵니다, 주인님!-
교주를 받드는 광신도 같은 모습의 암흑이는 온몸을 배배꼬며 행복한 모습으로 구운 가래떡을 먹어치운다.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암흑이를 지켜보던 미호도 발을 동동 굴리며 졸라대기 시작한다.
- 나도나도! 주인님 나도!
“미호는 달콤한 게 좋지?”
- 당거 좋아!
이번에는 소피아가 만들어온 끈적한 설탕물을 떡꼬치에 발라가며 가래떡을 굽기 시작하니 풍로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미호의 입에서 침이 폭포수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흐르고 여우 귀와 일곱 개의 꼬리는 빳빳하게 서 있는 모습이 웃기기 그지없다.
설탕을 발라 구운 가래떡을 건네주니 - 꺄아~! 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전설의 검을 든 용사처럼 구운 가래떡을 번쩍 들어 올린다.
- 하후, 뜨허!
망설임 없이 한 입 덥석 베어 물은 미호는 뜨거워죽겠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호호거리면서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소피아는 다시 만들어진 가래떡을 집어 또다시 일정 간격으로 썰더니 주방으로 들고 가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나도 그냥 구운 가래떡이랑 이번에는 새콤달콤한 소스를 발라 구운 가래떡을 생산하면서 떡판을 벌려 나갔다.
“어머, 새콤달콤한 게 정말 맛있는걸?”
“떡꼬지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습니까…?”
영은이는 김이 피어오르는 소스 없이 구운 떡꼬치를 좋아하고 프랑과 화연이는 새콤달콤 소스를 발라 구운 떡꼬치를 선호했다. 연인들이 말없이 열심히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간다.
“히아리드도 먹어.
=감사합니다. 하늘님.=
히아리드한테는 특별히 특대사이즈 스페셜 떡꼬치를 쥐어줬다.
“서하도 좀 드시면서 하세요.”
영은이를 제외하면 다들 그냥 구운 떡꼬치보다 소스 발라 구운 떡꼬치를 더 선호하길래 프랑이 먹기 좋게 잘라서 입에 넣어주는 떡을 먹으며 쉴 새 없이 소스 떡꼬치를 만들었다.
많이 구워서 엄마랑 아빠랑 누나한테도 가져다줘야지.
- 떡볶이~! 떡꼬치~!
-주인님의 꼬치가 더 마이쪙!-
…떡꼬치 말하는 거 맞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떡볶이와 떡꼬지를 양손에 들다 못해 바람으로 띄워서 거실을 왔다 갔다, 입가에 소스를 잔뜩 묻히고 방방 뛰면서 행복해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슬쩍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어느정도 배가 찼는지 먹는 속도가 느려져서 종류별로 10개씩만 더 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으니 화연이가 옆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 이형종 들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응?”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화연이를 빤히 바라봤더니 옆에 프랑이나 영은이도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부쩍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 않나. 말 수도 줄어들고…. 그 이형종 들은 네가 어찌하지 않았어도 얼마 가지 않아 죽거나 토벌되었을 거다. 그렇게 신경 쓰지 마라.”
“아…. 그런 거 아냐. 그냥….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그랬던 거 뿐이야. 힘들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런 이형 종들한테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니, 우리 서하는 참 마음이 여리다니까.”
내가 마음이 여려? 마음 여린 사람이 다 죽었나 싶어 당황스럽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프랑이 내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악한 자는 자신이 악한 줄을 몰라요. 하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이 한 행동을 뒤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절대 악할 수가 없어요. 서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프랑 말이 맞아. 우리 서하는 너~무 인간적인걸? 무엇보다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아있으면 보는 우리도 슬퍼져~.”
크흠. 화이트 쏜 터틀이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며칠간 기분이 가라앉아있었던 건 사실이다. 연인들을 걱정하게 하고 있었던 것도 모를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아있었다니, 조금 신경 써야겠다.
“미안. 내가 너무 센티멘탈했었지?”
손을 펼쳐서 날 걱정해주는 세 연인의 허리를 한 번에 끌어안으니 꺅꺅거리면서 내 뺨을 잡아당기고 코를 잡고 옆구리를 꼬집는다.
사과 향과 자두 향과 체리 향이 어우러지는 게 마치 과일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다들 허리 진짜 가느다랗네. 두 팔 벌려서 다 껴안고도 품이 남을 정도라니.
어지럽게 거실을 뛰어다니던 미호와 암흑이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서는 근처에 쪼그려 앉아서 떡꼬치를 베어 물며 빤히 지켜본다.
“쬐끄만 것들이 뭘 보니? 고개 안 돌려?”
영은이가 찌릿하고 째려봤더니 - 꺄아~! 하고 주방으로 도망가버렸다.
수한이 준비해둔 찐 쌀을 모두 가래떡 화 시켰을 때 소피아가 마지막으로 가래떡을 손가락 길이로 자르고 세로로 칼집을 낸 뒤에 매콤한 소스를 바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으로 돌돌 말아 김말이 떡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내 품에 안겨 조용히 있던 연인들에게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시작할 거야.”
뜬금없는 말이었짐나 프랑, 화연이와 영은이 누구라고 할 거 없이 한숨을 내쉰다.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다는 모습에서 정말 나 혼자 위상 세계에 들어가는걸 싫어한다는 게 느껴진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철렁해.”
“걱정 마. 몸조심할게.”
그녀들이 하다못해 고위 이형종을 1:1로 상대할 정도만 됐어도 나도 생각을 바꿨을 테지만 혼자서는 상위 이형종을 겨우 상대할 정도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데려가는 건 무리다.
떡을 만들던 뒷정리가 모두 끝났을 땐 시간이 밤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만들어둔 떡 요리와 떡국용으로 쓸 가래떡을 들고 모두 함께 아래층의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니 엄마랑 아빠는 외출 준비 중이었고 누나는 얇은 티에 반바지를 입고 거실에 엎드려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 우리 왔어.”
“너희들 왔니? 여사님도 어서 오세요.”
- 엄마 아빠 안녕!
-안녕!-
“실례하겠습니다.”
우르르 거실로 들어가며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하니 거실이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진다. 수한과 소피아는 가지고 온 음식을 거실 테이블 위에 차려놓고 떡국용 떡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랑 멋지게 차려입은 아빠를 보면서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랑 아빠랑 어디가?”
“너희 아빠가 제야의 종 치는 걸 보러 가자네?”
아빠의 코트를 여며주던 암마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띈 채 돌아보면서 말했다. 요 몇 달간 자주 데이트를 하러 나가더니 오늘도 엄마랑 아빠 둘이서만 나가나 보다.
“헤에~. 아빠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단 말야?”
“크흠.”
웬일이래? 흐흐 웃으면서 아빠를 바라보니 슬쩍 내 눈길을 피한다. 그런데 자정의 보신각 앞에는 사람들 엄청 많이 몰려있을 건데?
“인파에 묻혀서 제대로 못 보는 거 아냐? 사람 무지 몰릴 텐데.”
“보신각 맞은편에 5성 호텔이 개장했잖니? 아빠가 올 새해는 거기서 맞자고 하지 뭐니. 타종 행사를 구경하고 동해로 가서 일출도 보기로 했단다. 호호호.”
“흐음. 우리는 집에 두고 엄마 아빠 둘이서만 데이트 갈 거라고? 새해는 함께 맞이할 줄 알았는데.”
“너희들도 다 컸으니 너희 알아서 놀아라.”
아빠의 매정한 이야기에 꽁한 얼굴을 하는데 누나는 우리가 가져온 떡 요리에 눈이 동그래지더니 내가 구운 소스 가래떡 구이를 하나 들면서 말했다.
“아빠도 참 주책이라니까. 엄마도 20살 차이 나는 동생 만들면 안 돼!”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동생…. 그런 거야? 엄마는 쌍심지를 켜더니 누나의 등을 철썩!! 하고 때렸는데 퍽 도 아니고 철썩! 하는 소리가 났다.
“하으아으…!”
“얘는 아이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너도 집에서 배 긁지 말고 얼른 남자 친구나 사겨, 이것아!”
“히이, 히익.”
누나는 등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실 카펫 위에 쓰러져서 벌레처럼 온몸을 뒤틀면서 꿈틀거리는데 엄마는 그런 누나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우릴 보며 물었다.
“너희들도 같이 가지 않으련?”
“우리가 가면 거기가 난리 나서 타종식을 진행 못 할걸?”
바르작거리는 누날 힐끔 보고 적당히 핑계를 대며 거절하니 엄마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은근히 같으면 하는 눈치의 엄마지만 엄마 뒤에 서 있는 아빠는 '따라오면 가만안둔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단 말야.
“호호호. 우리 아들이 잘나긴 했지?”
“그럼. 누구 아들인데? 그리고 아빠가 따라오지 말라고 엄마 뒤에서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데 어떻게 따라가.”
그렇다고 말 안 할 줄 알았지? 히죽 웃으면서 말했더니 엄마는 어이없어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아빠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지만, 곧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니 아빠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팔짱을 끼고서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 갑시다. 예약 시간에 늦겠군.”
“이이는?”
엄마는 아빠한테 반쯤 억지로 끌려나가는 모습이지만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금실 좋은 부모님을 배웅해주고 거실로 돌아오니 바닥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서 누나 모습을 흉내 내는 미호와 암흑이가 보이지만 무시하자.
종 치는 거 보고 해돋이도 같이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봐야겠네. 누나는 망자나 흘릴법한 신음을 흘리며 부시시 일어나서는 소파로 비틀거리며 걸어와서 픽 쓰러져버렸다.
엄마한테 맞은 자리가 손이 닿지 않는지 팔을 이리저리 뻗어보다가 이내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나이 먹고 주책이라니까. 엄마랑 아빠랑 닭살 행각을 지켜보면 나도 나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는 거 있지?”
“나가다니, 생활 동에 빈집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딜 나간다는 거지.”
누나 옆에 앉은 화연이는 누나의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누나는 내 모습을 힐끔 훔쳐보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지만 내 반응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옆에 오피스텔?”
“시하 님처럼 예쁜 사람이 혼자 그런 곳에 살면 위험해요.”
“프랑도 참~. 나도 능력자인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어머? 여자 능력자한테 약 먹이고 덮치는 사건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는 거 모르니? 능력자라도 여자는 몸조심해야 하는 시대란다?”
“저, 정말요?”
“너도 능력자라지만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서하처럼 공간 지각 같은 게 없는 이상 자만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에엑? 공간 지각이 있으면 그게 사기지!”
연인들이랑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누날 보다가 소파에 가서 앉으며 tv 채널을 돌렸다.
흔한 연말 프로그램밖에 안 나와서 몇 번 채널을 돌리다가 거실의 카펫 위에 드러누우니 암흑이가 도도도 달려와 내 가슴에 기어 올라온다.
이 녀석도 요즘 들어서 검은색 투명한 몸만 아니면 꼭 사람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거기다 묘하게 정신연령도 어려지는 게…. 미호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암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거실을 쓱 훑어보니 누나는 연인들이랑 수다를 떨고 거실로 나온 소피아는 인증기를 켜서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한은 히아리드와 함께 TV를 보고 있고 미호는 야금야금 떡을 집어 먹고 있었다.
어쩐지 아련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화목하고 포근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