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342화 (342/517)

00342  정리.  =========================================================================

나와 프랑, 로민 대위가 블랙 브라이드라는 여객기에 올라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주로를 타고 이륙했다.

내부의 최고급 소파에 앉아 옆에 나 있는 창으로 끝없이 펼쳐진 녹색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로민 대위가 머리카락을 배배꼬면서 날 힐끔힐끔 바라보기 시작한다.

“…….”

왜 쳐다보는 건가 싶어 돌아보면.

“…!”

지금처럼 잽싸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걸 아까부터 반복하는데 상당히 거슬린다.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될 텐데 신경쓰이게스리 뭐 저리 힐끔힐끔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냥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힐끔거리는 게 반복되니 짜증 나서 관자놀이에 혈관이 튀어나올 거 같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신경 거슬리게 훔쳐보지 말고.”

차갑게 노려보면서 말을 꺼냈더니 로민 대위는 위축되면서 내 눈치만 살핀다.

“서하.”

프랑은 내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로민 대위를 힐끔 보고 내 손을 잡아줬다.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쓰다듬어주는 덕분에 짜증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로도 날 훔쳐보는 로민 대위의 모습에서 한숨이 나올 거 같지만, 그냥 삼켰다.

그 왜, 난 그런 성격인 거 같다.

화가 나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히 화가 풀려서 원래대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처럼 감정 상한 상태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오히려 화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미워하게 되는 성격 있잖아.

내가 후자의 타입 같다.

시작부터 단추가 엇갈려 끼워진 채로 내 연인을 납치하려 하고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서 보복을 하기 위해 이형종 두 마리의 삶을 멋대로 비틀어버리고.

그 이후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오로지 거래로만 이루어지는 의미 없는 사과를 받고 여기까지 와서 내 손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녀석들을 내 맘대로 죽이고.

그랬더니 나빠진 감정이 묵혀지고 삭혀져서 지금처럼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면서 곱지 않은 말이 틱틱 나오는 거겠지.

“후우.”

창밖을 바라보며 참지 못한 한숨을 내뱉으니 앞에 앉아있는 로민 대위가 흠칫하고 떠는 게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차라리 안 보는 게 그나마 낫지.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으니 프랑은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가끔 손가락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검색한다. 그나저나 감찰은 잘 되고 있나? 영은이나 화연이한테서 문자나 전화가 한 통쯤은 올 법도 한데 조용하네.

화연이하고 영은이한테 문자라도 날려볼까 싶어 인증기를 켰더니 인증기 커뮤니티의 메인 화면에 커다란 스트림 영상이 뜬다. 영상은 [◎실시간] 마크를 달고 있는 걸 보면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거 같았다.

무슨 영상인가 싶어 화면을 주시하고 있으려니 화면 속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얼굴을 긴 앞머리로 절반으로 가린 이상한 놈이 인증기를 보는….

이거 나잖아?!

전투 장면만 아니라 24시간 실시간 생중계였어?!

크으…. 까닭없는 창피함이 급속도로 몰려온다…!

이렇게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으니까 화연이나 영은이가 전화를 안 걸었던 거구나…. 이왕 인증기를 켠 거 커뮤니티 화면을 슬슬 돌아다니니 엄청난 수의 게시물이 빠르게 생성되고 뒤 페이지로 넘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충 제목만 훑어보니 "더 세졌닼ㅋㅋ" "다른 능력자를 듣보잡으로 만들어버리는 클라쓰." "지금 인증기 켠 거야? 게시글 보는 거?" 같은 게시글 위주로 보이는데 가끔가다 "임신공격 받고 싶다." 라던가 "내 처녀막을 바치고 싶어!" 라는 글에 "나도 청년막을 바치고 싶어!" 라는 댓글이 보인다.

…청년막은 뭐야?

암만 생각해도 인증기 커뮤니티의 정신 연령은 한 14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다. 능력자라면 좀 진중하고 점잖고 조용하고 품격있게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되나?

한숨을 쉬고 인증기를 종료했더니 코트 주머니에서 암흑이가 꾸물거리면서 기어 나와 고개를 빼꼼 내민다. 그 모습으로 주변을 살펴본 녀석은 내 코트 자락을 잡고 기어오르더니 어깨까지 올라와서 날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주인님. 배 안고프심까? 점심 끼니를 거르신 지 오래됐슴다.-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날 힐끔힐끔 보던 로민 대위도 암흑이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쳐들면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프랑은 그런 로민 대위의 반응에 조금 놀라면서 그녀를 보다가 암흑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민 대위.”

“네엣?!”

“간단히 요기할 게 있으면 가져오세요.”

“아, 넵!”

로민 대위는 부엌떼기처럼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는데, 카메라는 여전히 날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이동 중에는 끄라고! 전투 때만 촬영하란말야!

끄응…. 이렇게 촬영 당하는 것도 껄끄러운데 연예인들은 어떻게 일상생활 같은걸 찍는 버라이어티 쇼를 진행하는 거야?

프랑은 내가 먹을 걸 요청하니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서하, 배고프세요?”

“난 별로. 암흑이가 배고픈 거 같아서.”

프랑이 '배고프니?' 하는 표정으로 암흑이를 돌아보니 암흑이는 아니라는 것처럼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앗! 배 안고픔다! 그냥 주인님이 끼니를 거르셔서 걱정되서 그런 검다!-

“그럼 먹을 거 필요 없어?”

-…조금 고픈 거 같슴다.-

어깨에서 주르륵 내려온 암흑이는 코트를 옆으로 치우고 빨빨거리면서 내 허벅지를 타고 걸어나가더니, 내 무릎에서 점프해 테이블로 뛰어넘어갔다.

그때 프랑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더니 암흑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듀랄? 듀랄이 뭘까요.”

“응?”

“실시간 게시판에 암흑이가 투명 듀랄 같다는 글이 보였어요.”

그거…. 고전 격투 게임에 등장하는 라스트 보스 아냐? 프랑은 그러고 보니 그렇게도 보인다. 검은색 반투명한 액체 같은 몸에 길고 하늘거리는 머리카락…. 듀랄은 대머리던가?

“옛날 격투 게임에 나오던 캐릭터일걸?”

할 일이 없어 적당히 곱고 부드러운 천이 보여서 천총운검을 꺼내 검날을 천천히 닦으면서 말했더니 프랑도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던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천총운검을 닦는 모습을 지켜본다.

암흑이는 자신이 뭘 닮았다는 이야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크리스탈 테이블 위를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다가 몇 가지 사탕이 담겨있는 나무 바구니에 손을 뻗더니 로민 대위가 가져오는 쟁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로민 대위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스튜어디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더니, 토르티야라고 불리는 밀가루로 빚은 얇은 빵에 다진 소고기와 베이컨, 채소와 노란색 소스를 뿌려 감싼 음식과 감자튀김과 샐러드, 콜라를 잔에 담아 가져왔다.

바람으로 쟁반 두 개를 띄워서 가져온 로민 대위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암흑이를 보더니 흠칫 놀랐다가 나와 프랑 앞에 쟁반을 하나씩 놔준다.

-오! 이건 샤와르마!-

샤와르마 맞나? 미국이니까 비프 랩일 거 같은데. 암흑이는 종종거리면서 달려와 쟁반을 구경하지만 나와 프랑 앞에만 하나씩 놓여있는 걸 보더니 로민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난 왜 안 줌? 차별함? 님 맞을래여? 맞아볼래여?-

“어, 어?”

암흑이가 좋지 못한 표정으로 로민 대위를 보며 주먹을 휘두르고 입을 뻐끔거리자 로민 대위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당혹스러워한다. 독순술을 할 줄 모르면 암흑이는 그냥 입을 뻐끔거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이니 뭘 말하는지 몰라서 그러겠지.

하지만 그다지 좋은 반응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던 로민 대위는 나랑 암흑이를 번갈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먹을 생각 없으니 니가 먹어라.”

-오, 예 썰!-

암흑이는 내 말에 희희낙락하면서 비프 랩에 달려들더니 귀퉁이부터 야금야금 베어먹기 시작한다.

자기 머리만 한 사이즈의 감자튀김도 베어먹고 빨대로 콜라도 마시면서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전부 먹어치워 버리더니 아직 부족한 듯 손도 대지 않은 프랑의 비프 랩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슬라임이면서 식탐이 심하네.

프랑이 빙긋 웃으면서 암흑이 앞으로 쟁반을 밀어주니. 반색한 암흑이는 또다시 비프 랩을 열심히 공략하기 시작했다.

암흑이의 입안으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분해되는 음식의 모습은 묘하게 신기한 구경거리여서 그 모습을 찬찬히 구경하면서 천총운검을 마저 닦은 뒤에 갈무리했다.

얼추 1시간은 날아와서 어디까지 이동했나 창밖을 돌아봤다.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녹색에서 황갈색으로 변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갈라지고 울퉁불퉁한 협곡과 산이 눈에 많이 보여 사막이라기보다는 황야로 보였다.

곧이어 적갈색의 굉장히 험하고 깊은 계곡과 협곡이 눈에 한가득 펼쳐졌다. 평지에서 솟아오른 언덕이 급작스럽게 떨어져내리며 절벽을 이루고 아래쪽에는 거대한 강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은 먼지처럼 보일 만큼 웅장한 자연의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이형종을 찾기 위해 빠르게 지나쳐버려서 못 봤지만…. 여기가 그랜드 캐니언 같다.

깍여나가고 침식되며 황토색의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그랜드 캐니언은 이형종이든 사람이든 공평하게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지닌 거 같다.

…랑그 드란은 제외.

창밖을 살펴보는 사이 프랑의 몫까지 해치운 암흑이는 만족한 표정으로 코트의 주머니로 돌아왔고 시야에서 암흑이가 사라지자 로민 대위는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고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으니 프랑이 로민 대위를 보면서 물었다.

“라스베이거스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죠?”

프랑의 질문에 로민 대위는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창밖으로 그랜드 캐니언 협곡을 확인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잠시 후면 라스베이거스의 권내에 접어들게 돼요~. 화이트 쏜 터틀은 패러다이스에 있다고 하니~ 라스베이거스의 남쪽 40km 지점에 있는진 공항에 착륙한 뒤에….”

로민 대위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인증기를 켜서 지도를 펼쳐보니 라스베이거스까지 대충 100km 정도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쪽의 공항으로 가서 착륙하고 거기서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화이트 쏜 터틀을 잡고 되돌아가는 것보다 라스베이거스 근처를 지날 때 바로 날아가서 처리하고 오는 쪽이 낫겠다.

몇 분을 더 기다리니 비행기가 방향을 트는지 창밖 저 멀리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파괴된 도시가 어렴풋이 보인다. 수많은 검은 연기가 한데 뭉쳐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는 도시는…. 이미 도시의 기능을 잃어버린 거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총운검을 허리춤에 걸고 프랑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로민 대위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프랑의 허리를 끌어안고 로민 대위의 팔을 잡은 뒤에 바로 공간 도약으로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왔더니 '역시!'하는 표정을 짓는 로민 대위의 팔을 놨다.

“웃흥~!”

이번에는 내가 팔을 놓자마자 바람을 불러 몸을 띄운 로민 대위는 볼 것도 없는 가슴을 내밀며 으쓱했다.

있는 듯 없는듯한 가슴에 시선을 빤히 주다가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니 로민대위는 금방 울상이 되면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발아래에는 깎아지른듯한 산이 거대한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시선을 조금 들었더니 곳곳에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도시 귀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을 잠깐 돌아보고 프랑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쪽으로 공간의 벽을 박차고 몸을 날렸더니 금세 도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도시 중심부의 고층 빌딩이 모여있는 곳에서 하얀 빛줄기가 번쩍거리고 가끔 먼지 구름도 폭발적으로 솟아오는 것이, 화이트 쏜 터틀이 한창 도시를 파괴 중인 거 같다.

밤이었다면 불그스름한 화광이 피어올랐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속해서 하얀빛이 터져 나오는걸 보다가 암흑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프랑의 가슴골 사이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저 녀석은 주 공격이 원거리고 프랑은 방어 수단이 없으니까 암흑이랑 같이 있어. 암흑이는 프랑을 지켜주고.”

-써, 옛 썰!-

“네.”

금방 뒤따라온 로민 대위와 그 옆의 카메라를 의식해서인지 프랑도 별말 없이 암흑이를 감싸 안았고 곧이어 가슴 사이에서 퍼져나온 검은색 반투명한 액체가 프랑의 몸을 빈틈 없이 감싸버린다.

음. 역시 암흑이는 슬라임이면서 어떤 만화처럼 정신연령이 낮은 게 아니라 머리도 좋고 지능도 뛰어난 데다 센스까지 뛰어난 거 같다.

지금만 봐도 마치 판타지의 여기사가 입을 법한 예식 갑옷처럼 모습을 바꾼 암흑이 덕분에 프랑도 판타지 속에서 뛰쳐나온 여기사 같은 차림새가 됐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뒤를 돌아서서 입을 벌린 채 프랑을 쳐다보는 로민 대위의 눈앞에 손가락을 퉁겼다.

“힉?!”

“저놈은 위험하니 죽기 싫으면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세요.”

“아, 넹!”

침을 꼴깍 삼키면서 긴장하기 시작하는 로민 대위를 두고 프랑과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몸을 날렸다.

라스베이거스에 가까워질수록 쿵쿵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매캐하고 쓰린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화이트 쏜 터틀의 위치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저렇게 쿵쾅거리면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녀석을 찾기 힘든 게 이상한 거지.

화이트 쏜 터틀로부터 18km 넘게 떨어진 곳에서 녀석을 주시하고 있으려니 놈은 넓은 활주로 인근의 고층 빌딩을 몸통박치기로 들이박아 무너트리고 발로 자근자근 짧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녀석이 지나쳐온 자리는 알기 쉽게도 으스러진 빌딩과 건물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포효도 없이 묵묵히 건물을 가루로 만드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게 어지간히 인간의 손때가 탄 건물이 싫은가 보다.

“…나 때문에 인간이 싫어진 건가? 그냥 단순한 보복행위 같기도 한데.”

멀리서 날아오는 로민 대위를 힐끔 보면서 중얼거리니 프랑은 빌딩을 가루로 만드는 데 집착하는 놈을 살짝 눈썹을 찡그린 채 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강해져서 사람이 살던 흔적을 저렇게 부수는 걸로 표현하는 거 같아요.”

참 생산적이지 못한 녀석이다. 원한 같은 건 잊고 그냥 조용히 살았으면…. 아니다. 양아치 이무기 놈이나 메오 아지토스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내가, 저놈을 저렇게 만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적어도 나는 저 녀석에게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

30층이 넘는 빌딩 하나를 가루로 만들어버린 화이트 쏜 터틀은 자리를 옮기더니 그 옆의 스핑크스 조형물을 단번에 밟아 으깨버리고 그 뒤에 있는 검은색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을 천천히 뭉개기 시작한다.

콰창. 우지직…. 쿠구구궁.

그냥 온몸으로 건물에 몸을 비빌 뿐인데 건물은 철근과 콘크리트가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무너져간다. 먼지 구름을 피워올리면서 사라져 가는 피라미드를 보니 건물주인은 피눈물 흘릴 거 같다.

18km나 떨어져 있는데도 들려오는 붕괴음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로민 대위는 겁도 없는지 우리를 뒤쫓아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우리 뒤쪽에서 화이트 쏜 터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잠시 20층 높이의 검은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을 묵묵히 박살 내고 있는 화이트 쏜 터틀을 보다가 두 손에 마나 포 Mk 2를 집중했다.

“그럼 다녀올게.”

“몸조심 하세요.”

TP를 5만가량 집중한 마나 포 Mk2는 대략 300m 범위에서 부정형으로 공간의 구멍을 만들어버린다. 그러니 놈에게서 400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사고 가속을 일으키고 신체를 강화시킨 다음 마나 시브를 온몸에 집중해 오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공간 도약으로 건물을 뭉개는 데 여념이 없는 놈의 뒤에 나타났…는 데….

놈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녀석도 움찔하면서 몸을 경직시켰지만, 그것도 3초 남짓한 시간뿐이었고 녀석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피라미드를 부수기 시작했다.

먼지 구름 속에 내 모습이 가려지긴 했지만 위상력 감지가 가능한 화이트 쏜 터틀이 날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마치 날 무시하고 건물만 부수는 모습…. 그 모습이 날 향해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을 드러내고 비명을 지르던 머슬 베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날 비난하는 듯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안.”

어쩐지 모르게 해야 할 거 같은 사과를 화이트 쏜 터틀에게 하고 두 손에 응축시켜놓은 마나 포를 던졌지만…. 녀석은 마나 포가 도착해 터질 때까지 건물을 부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렁이며 터져 나온 두 개의 구멍이 서로 합쳐져 조금 더 크게 변하며 화이트 쏜 터틀을 삼켜버리고, 그 구멍이 사라졌을 땐 화이트 쏜 터틀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옅은 먼지 구름 속에서 멍하니 화이트 쏜 터틀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다가온 프랑이 조심스럽게 날 끌어안았다.

“서하….”

“…….”

마음이 무겁다. 사막거북이 녀석의 소리 없는 비난은 내 가슴에 묵직한 파문을 남기고 가버렸다. 나는 인간인데, 이형종은 단순히 죽이고 죽는 관계일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한참 동안 사막거북이가 부수다 만 건물의 잔해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TP가 섞인 바람이 불어와 먼지 구름을 모두 날려버렸다. 뒤이어 로민 대위가 다가온 걸 보니 그녀가 바람을 일으켜 먼지 구름을 날린 거 같다.

내 옆에 내려선 로민 대위는 주변 수백 미터가 흔적도 없이 지워진 모습에 머리카락이 펄럭일 만큼 놀랐다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굉장하세요~! 화이트 쏜 터틀을 일격에 분쇄하다니~! 정말 회장님은 천하무적이시군요~!”

“……별로.”

로민 대위의 갈색 머리카락 옆에서 작동 중인 카메라를 보면서 저 너머에 미국 정부의 수반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두 마리의 이형종을 처리해드렸어요. 남은 건 약속의 성실한 수행뿐이죠.”

그리고 내 눈빛이 얼음장같이 차가워 보이길 바라면서 이번에는 검집에서 뽑지도 않은 천총운검을 들어 카메라를 향해 들어 보였다.

“그러니 부디 이 검의 끝이 미국을 향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 작품 후기 ============================

시뮬레이션 no. 3

전(삐---) : 아 근데 불쌍한 곰돌이 저렇게 벼락으로 지지고, 검기로 베이고, 마포로 구멍 내고 해야 됐나요? 그냥 벽(?)인가 능력으로 깔끔하게 보내주시지… (2016.06.25 14:08)

그래서 공간의 벽으로 보내보았다!

유형화될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호숫가에 100m 곰탱이와 1.8m 인간이 마주 서 있다.

서하 : 난.... 너한테 원한 없음.

흑곰 : 근데 꼭 이래야 함?

서하 : 어떤 분이 공간의 벽으로 너 죽여 달랬음. 이제 돌이킬 수 없음.

흑곰 : (울먹울먹) 난 이미 퇴장했는데 왜 또!

서하 : 원망하려거든 전(삐---) 님 꿈에 나타나서 하셈.

흑곰 : 앙대 ㅠㅠ

서하 : 공간의 벽!

호박색 공간의 벽이 흑곰의 전신을 감싸자 검고 울퉁불퉁한 흑곰의 몸이 전후좌우상하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흑곰 : @#%^&*~!!!

10분 뒤.

그 옆을 지나가던 그랜드 터틀이 모자이크처리된 흑곰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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