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5 to rage trouble =========================================================================
그때 정신을 차린 화연이가 화들짝 놀라면서 우리 손에서 이스펙트를 황급히 빼앗아 들었다.
“화연아….”
“화연….”
프랑과 함께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으려니 화연이는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며 허둥거리다 변명을 꺼냈다.
“아, 앗! 그게 아니다! 누호디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무엇인가 듣다 보니 그만!”
“우리 이야기도 듣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는다 했더니 누호디한테 이런 거 배우고 있었어? 그거, 방중술 맞지?”
“읏. 그…. 미안하다.”
화연이는 붉어진 얼굴로 손을 들어 뭐라 변명을 시도하려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린다. 방중술 이야기에 저렇게나 정신을 뺏기다니, 카마수트라나 소녀경 같은 책이라도 사줄까?
“우리가 근처에 다가온 줄도 모를 정도였으면 방금까지 나눈 이야기도 못 들었겠네.”
“…미안….”
빨개진 얼굴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게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킥킥 웃으면서 찹쌀떡 같은 뺨을 잡아 늘리니 화연이는 "후으?!" 하고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렸다.
일단 화연이 손에서 이스펙트를 빼앗아 들고 [정서하,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화연이 흥미를 보이기에 제가 아는 지식을….] 거치대에 올려놨다. 이 색녀 아줌마를 어찌 해야 할꼬.
일단은 화연이를 홀린 댓가로 손가락 끝에 힘을 줘서 이스펙트의 창대를 힘껏 튕겨주니 아프다고 하는 거 같은 희미한 웅웅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방중술에 홀려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화연이한테 인증기를 켜서 화이트 쏜 터틀이 라스베이거스를 박살 내는 영상을 보여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는 고위 혹은 최고위 이형종 두 마리가 미국 땅에서 파괴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보여주니 살짝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나는 방중술에 한눈팔고 있었다니, 한심할 지경이군….”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 저 최고 색녀 누호디의 잘못이니까.”
최고 색녀라는 말에 항의라도 하듯이 이스펙트의 창대가 은은하게 떨리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방금 영은이가 문자를 보내줬는데, 지금이 내 입장을 발표할 타이밍이라고 해서 그랑 블루 빌딩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한테 가서 적당히 한 두 마디 던져주고 올 거야. 그러니까 같이 가자.”
“알았다.”
늦게서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온 화연이는 별다른 질문 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덜 이쁘게 차려입고 나와. 미국 일 같은 건 신경 안 쓴다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니까.”
“덜 이쁘게요?”
“그래. 안 그래도 이쁜데 더 이쁘게 차려입으면 기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내 말을 못 들을 테니까.”
“푸훗. 뭐에요, 그게!”
프랑과 화연이는 내 말에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기분 좋은 얼굴로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기분좋으라고 한 립서비스지만 저만큼 좋아할 줄 몰랐다. 진담이 가득한 말도 립서비스에 포함되는지 모르겠지만!
두 연인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리니 미호가 쪼르르 달려와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 어디 나가?
“저 아래 기자들이 모여있는데 거기 갔다 올 거야.”
- 우웅.
내 이야기를 듣고 입술을 우물거리는 게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 같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지. 미호의 보들보들한 여우 귀를 만지면서 물어봤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 우웅. 광화문에 무지무지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대. 주인님이랑 그거 보러 가고 싶어.
일곱 개의 꼬리가 두서없이 살랑거리고 미호의 두 손에 잡힌 암흑이의 몸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게 정말 보고 싶은 눈치다.
광화문이라…. 프랑이랑 화연이도 차려입으러 들어갔으니 기왕 나가는 김에 거기도 들렀다 오지 뭐.
“좋아. 미호도 들어가서 예쁜 옷 입고 와. 다 같이 구경하러 가자.”
- 진짜?! 와아!!”
“히아리드도 같이 들어가서 좀 두껍게 입고 나와.”
=알겠습니다, 하늘님.=
크리스마스니까 집 안에 있는 거 보다 조금 돌아다니는 게 좋겠지. 문득 누나는 뭐 하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자기 집무실에서 과자를 먹으며 잡지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집무실에 있지만 뭐 일은 안 하니까 다행인가.
그 모습을 보고 든 생각에 잽싸게 지하 대형마트로 공간 도약을 해서 공간 지각을 풀로 발휘해 아빠와 엄마, 누나 취향의 크리스마스 카드 세 장을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빠르게 merry Christmas라고 쓴 다음 밑에 엄마, 아빠, 누나 사랑해 라고 적었다.
연인들이나 애완 동물들한테는 비싼 선물 했으면서 부모님이랑 누나한테는 카드 한 장으로 때우려는 게 어쩐지 미안해졌지만…. 새해에는 아빠랑 엄마랑 누나하고 보내는 걸로 충당해야지.
공간 도약으로 누나 집무실로 이동하자마자 책상 위로 카드를 떨어트린 다음 곧장 집으로 공간 도약을 했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0.5초.
그런데 카드가 펄럭이더니 책상 위에 안 떨어지고 누나 머리 위에 톡 하고 떨어졌다. 누나는 갑자기 자기 머리 위에 뭔가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가, 떨어진 게 크리스마스 카드인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펴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카드를 빤히 바라본다.
오, 요즘 누나가 굳은 얼굴을 자주 하던데 간만에 보는 누나다운 미소다. 보던 잡지도 덮고 카드를 빤히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는 게 다행히 카드 디자인이 누나 마음에 든 거 같다.
엄마랑 아빠는 또 어디론가 놀러 갔는지 집에 없어서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는 엄마랑 아빠 방의 침대 위에 카드를 올려놓고 나왔다.
으음. 핵심 간부들한테도 카드 돌려줄까? 하지만 박지웅 보스나 김표충 부장이나 하유철 부장은 출근 안 했고 혜령이 이모는 뭐하는….
…남편이랑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군. 조금 민망한 기분에 얼른 공간 지각을 치워버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에 바람을 부치고 있으려니 화연이는 검은색 무통 판초에 하얀색 체크무늬 스커트와 검은색 스타킹을 차려입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걸어 나왔다.
프랑은 흰 코트에 하얀 스웨터와 하얀색과 노란색의 타탄체크 스커트를 입고 맨발로 걸어 나온다.
“어우. 덜 이쁘게 입으랬더니 더 예쁘게 하고 나오네.”
“후후. 그럼 얼굴을 가릴까요?”
장난스레 웃으면서 두 손으로 이마와 눈 아래를 가리면서 키득거린 프랑은 이리저리 예쁜 포즈를 취해주는데 화연이는 스커트가 부끄러운지 스커트 끝자락을 살살 잡아당기며 쭈뼛거리면서 서 있었다.
둘 다 몸매 볼륨이 장난이 아니라서 두터운 겨울 코디인데도 절로 눈이 갈 만큼 예쁜 모습이다.
“뭐? 음.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들을 나만 볼 수 있게 가리는 것도 좋은 생각이군.”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리니 프랑은 다시 까르르 웃어버리고 화연이도 피식 웃어버린다. 그렇게 연인들의 옷차림을 뇌리에 새기고 있는데 미호와 히아리드도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나?”
미호는 온통 하얀색으로, 하얀색 오리털 파카에 하얀색 폴라티와 밴드 타입의 하얀색 통바지를 입었는데 꼬리가 빠져나오게끔 개조되어있는 게 소피아가 만들어준 건가 보다.
하얀 머리카락에 하얀 여우 귀까지 온통 하얀색이라 눈 위에 서 있으면 발견하기도 힘들 거 같다.
히아리드는 여전히 등이 패인 하얀색 원피스에 하얀색 오버니삭스와 내가 사준 스카프를 목에 걸친 모습이다.
“오, 미호도 귀여운데. 히아리드는 그렇게 입고 안 춥냐?”
- 히히.
=제 날개에 냉기에 대한 저항이 있어서 이 정도만 입어도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수한은 먼저 나가서 차를 끌고 1층 정문으로 나와. 우리도 곧 나갈게.”
“네, 주인님.”
집사 복을 입은 수한과 수제 메이드복을 입은 소피아가 먼저 출발하고 나도 적당히 네이비 색 정장 재킷과 검은색 바지, 아이보리색 셔츠의 캐주얼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거울 앞에 서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머리를 뒤로 넘겨봤지만 여전히 못난 얼굴이라 그냥 다시 머리를 내려버렸다.
“아휴! 왜 머리를 또 내리세요. 넘긴 모습도 좋은데.”
“아…. 난 그냥 스테레오 타입 머리 스타일이 좋아.”
“음? 스테레오타입이 그런 뜻이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린 화연이와 프랑이 다가와 내 머리를 다시 넘기려 들자 황급히 공간 도약으로 빠져나가면서 소리쳤다.
“얼굴 절반을 가린 스타일은 이미 내 정체성이 됐다고! 안돼!”
“아이참….”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그녀들과 신난 미호와 무표정한 히아리드 넷과 함께 1층 로비로 내려오니 크리스마스인데도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로비를 나와 쇼핑몰과 연결된 홀로 나오니 연인들끼리 쇼핑을 나온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우리한테 꽂히기 시작했다.
내 좌우로 미친 외모의 화연이와 프랑이 서 있고 뒤에는 새하얀 날개 네 장이 하늘거리는 히아리드와 일곱 개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미호가 졸졸 따라오고 있으니 시선 집중은 당연한 거겠지.
슬금슬금 좌우로 길을 터주는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쇼핑몰 정문 근처에서 30명이 넘는 기자들이 한데 모여 따뜻한 음료수를 마시며 추위를 견디는 게 보인다.
동양인 서양인 할 거 없이 한데 모여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프랑이나 화연이, 영은이가 좋아하는 저녁 뉴스 보면 부정 저지르고 비리 저지른 인간들한테는 우르르 달려가서 마이크를 먹일 기세로 들이밀길래 나도 비슷한 상황을 예상했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기자들의 시선과 다가오길 주저하는 몸짓에 공포, 혹은 두려움이 보이니 내 악명이 드디어 하늘을 돌파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쁘지 않군. 그런데 내가 뭘했다고 날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한 짓 중에 욕먹고 악명이 높아질 만한 건 일본을 조진 거 뿐이었는데? 매스컴도 안 타고 조용히 살았구만….
내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겁먹을 행동을 했던가 기억을 되감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정문을 빠져나왔다.
일단은 기자들이랑 몇 마디라도 나눠야지.
시민들의 통행에 불편하지 않게끔 충분히 길을 비킨 뒤에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용기를 냈는지 BBC라는 이니셜이 박힌 마이크를 쥔 트렌디 코트의 여기자가 금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아, 아, 안녕하세요. BBC의 아만다 시드입니다! 사적인 시간을 방해해 죄송합니다만 이번 미국의 행동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하세요.”
내 허락에 아만다 시드는 더욱 긴장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내게 마이크를 내밀었고 그 모습에 다른 수십 명의 기자들도 조심스레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히 몇몇 방송국에서는 거대한 방송용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고정하고 날 찍기 시작한다.
“아, 네! 정서하 그랑 블루 회장님께서는 얼마 전 미국 정부가 유화연 그랑 블루 제 1보스의 납치를 시도하려 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셨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뭐 이런 걸 물어보냐? 당연한 거 아냐!
“당연히 기분 더럽죠. 난 도와주러 온 건데 그런 식으로 뒤통수 치려고 했다는 거잖아요?”
내 꾸밈없는 솔직한 대답과 찡그린 표정에 여기자는 당황해하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공개된 영상에서는 회장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들통난 모습이었는데, 시도할 계획조차 없었다는 로버트 필립 태평양 7함대의 사령관의 말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거 보세요. 들통난 범죄 계획은 그것만으로도 죄라는 거 몰라요? 로버트 필립 중장이 시도하지 않으려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던 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눈을 찌푸리면서 멍청한 소리를 하는 아만다 시드 여기자를 향해 쏘아주니 "하지만…." 이라는 말을 꺼내려 한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주 그냥….
“만약 당신 옆집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온 떠돌이 고양이를 잡아 쫓아내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생각해봐요. 그래서 고양이를 쫓아내 주러 갔는데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당신의 소중한 보물을 이웃이 훔쳐가려고 했다는 계획을 알게 되고 그 증거까지 확보하게 됐어요. 그럼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건데요?”
“…….”
내 비유에 할 말을 잃어버린 금발 여기자는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CNNN 루이스 캐리라는 명찰을 단 여기자…. 이 여기자, 검증단이 끝났을 때 본 그 여기자다. 여자가 신중한 모습으로 질문을 던졌다.
“연인을 납치하려 한 미 정부의 행태에 그랑 블루 회장께서 분노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에 대해 회장께서는 어떤 대응을 하실 것인지요?”
“앞으로 미국이랑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거죠.”
또다시 흘러나온 가식 없는 대답에 루이스 캐리 여기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 말씀은 현재 미국에 나타난 두 종류의 최고위 이형종의 퇴치에 도움을 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신지?”
“네. 미국도 자국력으로 최고위 이형종을 처리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시비를 걸었을 거 아니에요? 저도 날치 잡는데 괜히 도와줬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니 이번에는 그냥 구경만 할래요.”
루이스 캐리 여기자는 이 추운 날에 진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자기 나라라고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 그러나 현재 두 마리의 이형종이 얼마만큼 파괴 행동을 벌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 상황에….”
“제가 지금 이렇게 참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 안 해요? 그냥 그 두 마리 사이에 저도 날뛰어볼까요?”
너희 나라가 난리 났지 우리나라가 난리 났냐? 어째 선후관계도 생각하지 않고 큰 피해를 받는 쪽이 피해자인줄로 착각하는거 아냐?
“이번에 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는데 멍텅구리도 아니고 왜 도와줘요? 또 가서 뒤통수 맞고 싶지 않아요.”
내 입에서 미국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확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미국 출신 기자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술을 깨무는 게 보인다. 다른 나라 기자들도 우려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루이스 캐리가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현재 미국 서부의 네바다 주에 출몰한 코드명 화이트 쏜 터틀은 라스베이거스를 초토화시켰으며 미국 동부 켄터키 주에 출몰한 머슬 베어는 주변 마을고 도시를 가리지 않고 습격하며 피해를 늘리고 있습니다. 이미 이재민만 수백만 명에 달하며 추정 피해액은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제게 동정심을 호소하기 전에 그딴 수작을 부리려 한 누군가를 먼저 지탄해야하는게 순서가 아닐까요? 듣기로는 우리나라 대통령께서 항의문을 발표한 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정식 답변조차 안 하고 있다면서요? 그래놓고 도우러 와달라고요?”
아만다 시드에 이어서 루이스 캐리도 내 분노가 섞인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화가 나서 홧김에 "그 인간을 뽑은 게 미국 시민이니 그 인간이 불러일으킨 피해도 미국 시민이 책임져라."라는 식의 말을 꺼내려 했다가 그냥 말을 아꼈다.
괜한 말을 꺼내서 공격받을 빌미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으니까.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있으니 다른 기자들은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 말을 못 꺼내고 있다. 더는 이야기가 나올 거 같지 않아 발걸음을 옮기려 하니 TТВ Центр 라고 적혀진 마이크를 쥔 서양 남자 기자가 긴장된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그랑 블루 회장님께서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사과 발표를 하면 도와드릴 의향이 있으십니까?”
“우리나라 항의문도 씹고 있던 미국인데 이형종이 출몰한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해도 진정성을 못 느낄 거 같아요. 뒤에서 부릴 수작질을 신경 쓰면서 가고 싶진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미국은 과거 한국 전쟁에서 많은 피를 대신 흘려준 우방국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위기를 외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한국 전쟁? 뭐 그건 그렇긴 한데 나도 그전에 도와준 거 있잖아? 내가 도와준 사실은 쏙 빼놓고 말하는 남자 기자를 째려보니 흠칫하고 놀란다.
“저기요. 그전에 잡아준 블레이드 플라이어는 생각 안 해요? 미국이 사고 쳐서 날뛰기 시작하는 거, 제가 나서서 수습해줬잖아요. 블레이드 플라이어를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이 안 가요? 거기다 저와 미국의 일인데 마치 한국과 미국의 일인 양 끌고 가지 마시죠?”
그러자 남자 기자가 또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 하길래 고개를 저으니 히아리드와 미호가 앞으로 나서면서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N극 자석끼리 밀려나는 것처럼 남자 기자를 포함해 다른 기자들이 사색이 되면서 우르르 뒤로 물러난다.
이 이상 다른 기자들이 말을 하게 내버려두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으니 인륜적으로 강한 니가 봐줘라 같은 이야기가 쏟아질 거 같은 분위기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저는 제 신경을 온전히 저와 우호적인 사람들에게 쓰고 싶어요. 절 적대하고 공격하는 자들에게 신경을 써 주고 싶진 않아요. 미국이 화연이를 납치하려 한 이유를 육하원칙에 따라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랬는지 절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제가 미국을 위해 무언가를 할 일은 없을거에요.”
때마침 수한이 롤스로이스 팬텀 리무진을 끌고 나와 멈춰 섰다. 기자들은 내 마지막 말에 멍하니 있다가 내가 차 쪽으로 걸어가니 그제서야 황급히 태블릿을 들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말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할 말 못하게 막고 내 할 말만 하기.
그리고 제가 고오오급 시계를 하느라 글 안 쓴다고 하시는데 오해입니다.
저는 FPS는 젬병이라 레인보우 식스를 시작해서 델타포스, 퀘이크는 물론이고 서든어택이나 카운터 스트라이크 같은 건 손도 못 댔어요.
고오오오급 시계도 그거 때문에 안 사고 유튜브에서 남들 플레이를 구경만 합니다. ㅠㅠ
지난 1월부터 제가 하는 유일한 게임은 정신을 환기하기 위한 몬스터 스트라이크라는 모바일 게임 하나뿐이에요!
그리고 선추코 감사감사.
연재 속도가 느려졌는데도 후원해주시는 분이 계시니 눈물이...ㅠㅠ 크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