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33 to rage trouble =========================================================================
사랑? 사랑의 결실물이라고?!!
잠깐 숨결이 거칠어질 뻔했지만 누호디의 억양과 말투에서 날 비하하려는 낌새는 없어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분노 스위치를 건드리는 이야기에 짜증이 솟구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계속 생각하다간 이스펙트를 부러트려 버릴 거 같아 가슴 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내리누르면서 물어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요?”
[…그대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집니다. 제가 언짢아 할 이야기를 했나요?]
“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누호디가 당혹스러움을 담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으음. 이 이야기는 이 시대에서 분노할 일이었군요. 섣부르게 이야기를 꺼낸 점을 사과드리지요. 받아 주시겠나요?]
누호디와 나는 혼혈에 대한 관점 자체가 다른듯하다.
하긴, 사람도 10살 20살 차이가 나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서 아재라거나 급식충이라고 까내리는데 나와 누호디는 아예 살던 시대가 다르니까.
고의성도 없었고 그녀가 나를 비하해서 득이 될 일도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 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니 누호디는 흥얼거리면서 노래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명을 드리자면 누르라크들의 성격은 극과 극이며 일신의 능력 또한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존재들이 많아요. 화연을 가르치며 들은 이야기와 이곳에서 그대의 모습과 행동을 보며 느낀 거지만 그대의 능력은 그 강력한 누르라크들 중에서도 극에 다다른 수준인 걸 알 수 있었지요.]
누호디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 앞에서 연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쭈욱 되감아 봤더니….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면 깨달을 법 하다 생각했다. 앞으로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물었다.
“누호디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혼혈들이 많았나 봐요?”
[혼혈…? 피가 섞이다…. 정말 정확한 표현이네요. 맞아요. 혼혈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적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그런 혼혈들은 대부분 인성과 성격이 극과 극에 다다라 초창기에는 혼혈과의 싸움이 빈번하게 빚어지기도 했었지요.]
성격이 극과 극이라고…?
“괜찮으면 누르라크라는 자들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래요?”
[안될 이유는 없지요. 누르라크는 이형종과 인간의 성적인 행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이형종이 되는 개체의 강력함이 뛰어날수록 누르라크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지요.
이 경우, 선한 이들은 주로 인간형으로써 누르라크라고 부르며 악한 존재들은 괴물형태로 라크누르라 불러요. 달부에도 누르라크가 한 부대를 이룰 만큼 많았었고 그들은 대부분 아인종亞人種이라 불리는 존재들과의 사랑의 결실물로 태어난 이들이었습니다.]
아인종이라고 하니 영국의 기밀 자료 보관실에서 영상으로 확인했던 엘프들이 생각난다. 누르라크는 그런 유사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들을 뜻하는가 보다.
누호디가 하는 이야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머릿속에 새겨넣듯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누호디도 엉뚱한 장난이나 흰소리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간다.
[그렇게 태어난 혼혈의 성격은 부체나 모체가 되는 이형종이 인간의 형상에 가까울수록 인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하고 뛰어난 존재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반대로 이형종이 괴물의 형상에 가까울수록 순수한 악, 파괴적인 충동에 쉽게 휩쓸리는 극악한 괴물이 태어날 확률이 높아지죠.
다만 누르라크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들이어서 그런지 그런 이의 대부분은 평범한 인간보다 여러모로 뛰어나긴 했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존재했어요. 그런데 그대는….]
누호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마치 강력한 괴수 이형종과 인류의 사이에서 태어난 라크누르들이 지닐 법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외관은 평범한 인간이죠. 그래서 궁금했어요.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태어난 누르라크일까.]
누르라크…. 그러니까 누호디는 날 판타지에서 종종 출현하는 하프 엘프 같은 걸로 생각했고 그래서 가볍게 이야기를 꺼낸 거였군.
“…세상에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누호디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누르라크란 말이에요? 누호디 당신도 당신의 세계에서 강한 사람이잖아요.”
[음. 그렇지 않아요. 뭐라고 해야 할지…. 그냥 누르라크는 그냥 보면 알 수 있어요. 물론 100%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90%는 맞아떨어지죠. 그래서 유심히 지켜보다 그대와 연인들의 이야기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지요.]
우리가 혼혈을 보고 금방 알 수 있는 거처럼 누호디도 순수한 인간인지 누르라크인지 알 수 있는 건가….
누르라크를 언급하던 누호디의 반응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니 서양인과 동양인의 혼혈을 보면서 하는 반응이랑 다를 바가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호디는 뭔가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언의 능력을 갖추고 있고 전투능력도 뛰어나며 최고 무녀로써 우리는 모르는 묘한 기술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들도 알고 있지 않을까….
잠시 말없이 이스펙트의 창대를 쓸어내리고 있으려니 창대가 살짝 떨리더니 고조된 목소리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온다.
[으응. 그대의 손길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군요. 마치 본격적인 삽입에 앞선 성적인 유희를 받는 기분이에요. ]
아, 진짜 섹드립은…. 아니 이건 그냥 성희롱 아냐? 민망스러운 기분에 분노가 훌러덩 사라지는 걸 느끼고 속으로 변태 아줌마라고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어흠! 뭐, 누르라크든 라크누르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저는 저일 뿐이라는 거니까요.”
[아아.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계시군요. 그래요, 악한 감정과 비틀린 마음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 한데서 오는 거에요. 그런 마음가짐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다면 악에 물들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조금 더 쓰다듬어주세요.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라 좀 더 즐기고 싶흐아아응?!]
내 감정 기복을 널뛰게 만든 주제에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 뿔이나는 기분이다.
원하는 대로 손에 TP를 조금 많이 뽑아 창대에 쓱 발라주었다. 그러자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듣기 좋은 맑고 상냥한 목소리가 흥분에 허덕인다.
마치 범해서는 안 되는 고귀한 성녀를 억지로 강간하는 기분이 있다면 이런 기분 일 거 같다. 보복심에 여러 번 TP를 뽑아내면서 창대에 바르기 시작하니 창대가 파르르 울리며 누호디도 교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아아! 아흑…. 하아아…! 이런 혼에 새겨지는 듯한 고양 감과 만족감이라니…! 제 인생의 성적 유희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짜릿하고 흥분되는 감각이군요!]
“…변태 아줌마 같으니.”
[후후. 아응.]
화제가 리셋되는 분위기에 어쩌면 누호디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푸른 피부의 악마들이 있는 검은 성에 대한 걸 물어봤다.
“누호디는 혹시 무진장 넓고 큰 검은 성에 대해서 알아요? 푸른 피부를 가지고 있고 인간 같은 모습에 관자놀이 부분에 뿔이 나 있는 괴물이 사는 곳인데.”
[…그대가 그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건가요?]
어? 진짜 뭔가 아는 건가? 흥분에 허덕이던 목소리가 금방 침착하고 조용하게 변했다. 그녀에게도 가볍지 않은 주제였나 보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무척이나 위험하고 못된 놈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찾아서 죽이던가 대비를 해야 할 거 같은데, 그놈들이 한곳에 모여 산다는 정보까지는 입수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누호디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요.”
[맞아요. 그대가 말한 종족은 라크누르들 중에서도 특히나 사악하고 악랄한 것들이에요. 마치 허무의 비틀림에서 태어나 순수한 쾌락을 쫓고 흥미와 재미로 지적 생명체를 간살하길 즐기는 악의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존재들이지요.]
그것들이 순수한 이형종이 아니라 혼혈이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누호디는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메오 아지토스라고 불러요. 쾌락을 매개로 인간 혹은 인간 형태의 이형종을 잡아와 정신을 현혹하고 지배해 자신들의 씨를 자궁에 심어 잉태시켜 세를 불려 나가는 최악의 마물들이에요.
정신에 미치는 능력이 많은 마물인데다 신체 또한 강력하기 짝이 없어 달부에서도 놈들을 최악의 위험도를 가진 마물로 설정해두고 경계를 늦추지 않던 것들이죠.]
“제가 아는 것과 흡사하네요. 인간 형태의 이종족 암컷이나 인간을 잡아와서 고문하고 괴롭히다 산 채로 잡아먹거나 사지를 뜯어먹고….”
[…놈들은 아이를 가지고 낳을 수 있는 몸뚱아리만 있으면 상관없어하는 괴물들이라 잡히면 수십 일간 그 괴물들의 새끼를 품을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범하며 사지를 하나씩 먹는 걸 즐기지요. 여인들은 그렇게 팔다리를 모두 잃고 괴물들의 출산 도구가 되어 이용만 당하다가 더는 새끼를 품을 수 없게 되면 괴물들에게 산채로 잡아먹혀버려요.]
…이야기만 들어도 최악이다. 어머니가 그런 꼴을 당할 뻔했다고? 1회차가 아니라 2회차, 3회차였다면 정말 누호디의 말대로 됐을 거다. 어금니를 한번 깨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놈들이 어디에서 사는지 알아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사신수의 영토가 서로 맞닿아 있는 곳에 성을 세우고 모여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사실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도 소수로 떠돌던 하위 메오 아지토스들을 사로잡아 들은 이야기에요.]
“사신수요? 혹시 수십 킬로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거북이라던가 온몸이 불에 둘러싸인 새라던가 하는 것들요?”
[맞아요. 직접 보신 적이 있나 보군요?]
“태산같이 거대한 거북이는 두 눈으로 직접 봤죠.”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니 아쉽지만 최소한의 단서는 찾았다. 사신수라고 부르는 것들의 영토가 한 곳에 전부 맞닿아있는 곳이라면, 사신수 중 한 마리의 영토만 확인해도 그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한테는 한때 사신수를 섬기던 히아리드가 있지.
[랑그 드란…. 그 태산 같은 거대함은 숭배받아 마땅한 신수지요.]
랑그 드란이 초거대 거북이의 이름인가보다. 마침 주제가 나왔으니 다른 사신수의 이름도 물어봐야겠다.
“다른 사신수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누호디는 그들을 본 적이 있어요?”
[후후. 인간형 생명체에게 우호적인 건 랑그 드란 뿐이에요. 특히 창공의 지배자, 하늘의 주인은 인류를 귀찮고 잡스러운 벌레, 그 정도로밖에 보지 않아요. 짐승의 왕은 거대무비한 이형종의 수해에서 나오질 않아 그 존재만 유추하고 있을 뿐이며 창해의 청왕은….]
청왕? 혹시 청룡 말인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춘 누호디는 으음~ 하고 신음성을 흘리더니 살짝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기묘막측? 예측불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바라는지도 모를 존재에요. 랑그 드란을 제외하면 사신수를 보려 하다간 목숨을 잃을 따름이지요. 랑그 드란도 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걸어야 할 존재에요.]
옛 일이 기억나는지 누호디의 아련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거 같다.
네 마리의 사신수의 영토가 마주한 곳에 그놈들이 있다고? 내가 꿈으로 본 것과 누호디의 말대로라면 무척이나 사악한 놈들인데 사신수가 영역을 마주하는 곳에 멀쩡히 살고 있다니….
하지만 하늘 섬에서 본 벽화대로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신수四神獸라지만 서로를 경계하거나 싸우는 내용의 벽화를 보면 신적인 존재까진 아닌 걸로 보였다.
거기다 인간형 생명체를 열등한 것들로 본다면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을 테니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되겠군.
그나저나 푸른 악마 놈들은 순수한 이형종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덩달아 아빠와 엄마는 어머니가 현실로 돌아와 입원해있던 병원의 의사에게 강제적으로 당해서 생긴 아기가 나였다고 이야기해줬지만 그게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난다.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깊게 파고들려 하는 거 같아 머리를 털어 생각을 비웠다. 그런 건 상관없이 나는 나고 그 개자식들은 결국에는 모두 쳐 죽여야 하는 것들이니까.
시간을 확인해보니 좀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거실을 한번 둘러본 뒤에 창대를 쓰다듬어 주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중요한 걸 알려줘서 고마워요.”
[염두에 두지 말아요. 제 지식이 도움이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럼 다음에 궁금한 게 생겼을 때 또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화연의 부군이자 저를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그대이니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심이 가득한 이야기에 슬쩍 웃으면서 창대를 다시 쓸어내리니 누호디의 입에서 기겁할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하앙, 아이참. 제가 몸만 있었어도….]
모, 몸만 있었어도 뭐?
“자, 잘자요!”
엄한 이야기가 나올 거 같아 재빨리 거치대에 이스펙트를 올려놓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최고 무녀가 아니라 최고 색녀 같아.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씻고 연인들과 함께 거실로 나오는데 화연이가 침실을 나오는 거에 맞춰 이스펙트가 웅웅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화연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스펙트로 걸어가는데, 뭔가 엄한 이야기 같은 건 하지 않겠지?
- 어, 눈 온다.
거실에서 눈처럼 새하얀 잠옷을 입고 게임기를 가지고 놀던 미호는 귀를 쫑긋하더니 후다닥 달려서 거실 창에 달라붙었다.
창가로 걸어가니 미호 말대로 함박눈이 천천히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이게 얼마 만이지?
프랑과 영은이와 함께 나란히 서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니 어째서인지 가슴이 간질거는리 거 같다.
…그런데 꾸무룩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는 프랑의 표정이 묘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프랑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영은이도 프랑의 얼굴을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프랑은 눈 싫어하니? 표정이 안 좋네.”
“아앗? 아하하. 그게, 기사단에 있을 때 제설 작업하던 기억이 나서….”
프랑은 예쁜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어…. 1시간 동안 열심히 눈을 치워 길을 내고 뒤돌아서면 처음 치운 자리에서부터 눈이 차곡차곡 쌓여가. 그래서 길을 되돌아가면서 눈을 치우면 또 쌓여있지….
몇 시간 기사단 업무를 보면 또 눈이 발목까지 쌓여서 그걸 나가면서 치우고 되돌아오면서 또 치우고, 숙소 지붕에 쌓이는 눈 때문에 지붕이 무너질까 지붕 위에 올라가서 눈을 쓸어내리고 쓸어내린 눈이 2층 높이까지 쌓여있어서 또 그걸 치우고 자다가 눈에 파묻힐까 일어나서 치우고 또 아침이 되면 그걸 치우고….”
뭔가 공허해진 눈빛으로 쏟아져 내리는 눈발에 고정한 채 중얼중얼 거리는 프랑은 뭔가 귀신이 들린 거 같은 모습이라 조금 무서웠다. 영은이도 괜히 물었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프랑은 날 돌아보더니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사단에서는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눈을 증오와 경의를 담아 연방의 하얀 악마라고 불렀어요.”
“하하. 연방의 하얀 악마라니, 너무 과장이 심한 거 아냐?”
“후후. 그러게요. 이제 눈이 쌓여도 제가 치울 일은 없으니까 경의를 담을 필요는 없겠죠?”
텅 빈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말이 내 귀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설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소파로 돌아와 앉아서 TV를 켜니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여전히 미국에 내가 만들어놓은 고위 아종에 관한 이야기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긴, 내가 만들어놓은 이형종이 날뛰기 시작했다면 우선 영은이한테 먼저 연락이 오겠지.
삐리링. 삐리리리링.
어? 내 인증기 벨 소리는 아닌데. 어디선가 인증기 벨 소리가 들려서 화연이랑 영은이를 돌아보니 화연이는 아직 거치대에서 이스펙트에 손을 올려 누호디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고, 영은이가 앙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보부에서 연락이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영은이는 거실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서 통화를 연결했다.
나도 시선은 TV에서 나오는 연예인 스캔들에 고정하고 슬그머니 공간 지각으로 영은이의 입술을 몰래 읽었다.
-무슨 일인가.-
-뭐? 최고위 이형종이 발견됐다고? 어디에서?-
-모하비 사막에…. 라스 베가스로? …어떤 타입인지 알려진 건 있나.-
-거북 형태라고…. 그래. 음. …알았다. 지금 가도록 하지.-
영은이한테는 아직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지 심각한 얼굴에 심각한 말투라 반응이 리얼하다. 영은이는 인증기를 종료하며 거실로 들어와서는 바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방금 받은 전화에서 이형종이 나타난 이유가 나한테 있다는 걸 빠르게 눈치챈 거 같다.
“울 자기, 나한테 해줄 이야기 없어?”
“당연히 있지.”
내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영은이는 자리를 옮겨 내 옆에 앉더니 얼른 말하라는 듯이 지긋이 바라본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