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8 이럴 때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진짜 모르겠다. =========================================================================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부터 그렇게 한고은을 좋아하게 됐냐고 물었더니 김창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후헤헤…. 잘은 모르겠지만, 박물관 사건 때부터였을 거야. 내가 좀 덩치도 있고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인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잖냐?”
…이 자식이? 날 돌려 까는 건가 지금?
“근데도 고은이는 날 보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 옳은 말만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간 만나면 고은이를 보고 있더라고. 그걸 눈치챈 건 여름방학 하는 날이었어. 그전에는 학교에 가면 계속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았는데 알바 시작하면서 못 보게 되니까 되게 기분이 우울하고 찜찜하고 그러더라고.”
한고은은 새침한 표정으로 최수한이 구워다 준 웰던 스테이크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으면서 김창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너 지금 귀가 새빨개졌거든?
“그렇구나. 그래서 아르바이트할 때 그렇게 한숨 쉬면서 휴대폰을 들여다본 거였어?”
“윽. 뭐, 그, 그렇지.”
뭐야. 여름방학 때부터 법정 지정감염병인 상사병이었어? 강주찬은 김창현하고 같은 일을 했으니까 금방 눈치챘나 보다.
“난 고으니가 고백을 받아준 게 놀랐어!”
“수, 수리야!”
“고으니가 여태껏 고백을 거절한 횟수만 50번이 넘어가거든? 싫어하는 사람은 단호박처럼 거절하는데 창현이 고백에 당황했잖아? 그런 모습은 첨봤어.”
수유리의 입도 막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던 한고은은 그냥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 김창현은 바보처럼 헤벌쭉해져서는 실실 쪼개기 시작한다.
“흐힣. 우히히힣. 으헤헿헿.”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수한이 먹기 좋게 조각내준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먹던 미호는 느닷없이 둘 사이에 폭탄을 집어 던졌다.
- 그럼 둘이 뽀뽀하는 거야?
“뭣?!”
“?!”
- 둘이 좋아하면 뽀뽀하는 거 아니야? 뽀롱이는 좋아하면 뽀뽀한다구 그랬는뎅.
“윽. 그, 그런 거 안 해!”
- 우웅? 그럼 둘이 안 좋아하는 거야?
“아, 그그건.”
미호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겠지만, 한고은에게는 둘도 없는 괴롭힘일 테지.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거리는 모습을 김창현은 가슴 벅차다는 행복에 가득 찬 얼굴로 실실 웃고 있었다….
“참…. 그렇게 좋냐?”
“흐히히.”
김창현은 밥도 먹다 말고 헤벌쭉한 얼굴로 솜사탕 같은 기운을 몽글몽글 내뿜길래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1일 기념 뽀뽀라도 하는 건 어때? 내가 특별히 인증기로 초 고화질 기념사진 남겨줄게.”
“진짜냐?!”
“뭐래는거야!”
솔직함이 가득한 김창현과 부끄러움에 속마음을 감춘 상반된 감정을 보여주는 한고은, 둘에게 씨익 웃으면서 내 손목에 붙은 인증기 씰을 보여주며 말했다.
“100억짜리 인증기의 사진은 그냥 2차원 평면 사진이 아니야. 따로 프로그램 쓰면 360도 파노라마에 가상현실로도 볼 수 있다고?”
“해줘!”
“야!!”
받네 마네 토닥거리기 시작하는 둘을 보다 보니 나도 어쩐지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뭐랄까, 풋풋한 어린애들의 사랑놀이를 보는 기분?
“알았어. 나중에 한번 찍어줄 테니까 언제든지 말해.”
“오, 땡큐!!”
“아 증말….”
좋아죽는 한 명과 부끄러워죽는 한 명을 지켜보며 웃음꽃이 피어오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을 땐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들 거실에 모여 잡담을 나누며 쉬고 있을 때 암흑 이에게 물어볼게 생겨서 히아리드와 암흑이를 데리고 1층 테라스로 나왔다.
“히아리드, 암흑이가 하는 이야기를 통역해줘.”
셔츠 위에 프랑이 사다 준 노란색의 얇은 스웨터만 입고 있어서 차가운 눈의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어오지만 마나 시브를 돌려 냉기를 밀어내며 암흑이의 말랑말랑한 몸을 주무르면서 물었다.
“암흑이 넌 흡수와 방출이 특기라고 했었지? 어느 정도까지 공격을 흡수할 수 있어?”
푸릉? 찰랑찰랑.
=어느 정도까지 흡수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위 이형종의 속성 탄 정도는 간단하게 흡수할 수 있어요.=
고위 이형종의 속성탄…. 아숨프레 수몰 폐허에서 피소르 사우르스가 쏘아낸 것도 물의 속성 탄이겠지? 그 정도라면 내 공간의 벽이나 공간 보호막으로도 막아지는데…. 흐음.
문득 공간의 벽은 무시하던 그랜드 터틀이 마나 탄만은 머리로 막아내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물어볼 요량으로 손에 마나 탄을 응축시켜서 드러내 보였더니 암흑이가 출렁?! 하더니 마나 탄에서 물러나려고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러냐?”
출렁…. 흐물흐물.
=그, 그건 제 능력보다 한 단계 높은 분해에요…. 제가 거기에 닿으면 사라져요.=
“이게? 그럼 이건?”
어지간히 겁을 먹은 것인지 반쯤 액화되어서 흘러내리려 하는 암흑이 앞에 공간의 벽을 작게 쳤더니 촉수를 뽑아서 공간의 벽을 톡톡 건드린다.
흐물흐물. 출렁.
=이건 저랑 동급의 분해에요.=
…뭐지. 처음에는 마나 탄 -> 마탄 -> 공간의 벽 순으로 강해지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철수와 싸울 때는 그랜드 터틀의 행동 때문에 마나 탄과 공간의 벽이 전혀 다른 타입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지금 암흑이의 말을 들어보면 공간의 벽보다 마나 탄이 더 상위의 분해 능력이라는데….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마탄을 개발하기 전까지 마나 탄을 위주로 싸워왔지만, 이형종의 몸 표면에 흐르는 위상력을 뚫지 못하고 위력이 격감했었잖아.
특히 검증단 때 솔리드 스네이크를 잡을 땐 100 TP를 쓰면 힘의 80%는 증발한 데다 남은 20%로는 놈의 피부를 분해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기억도 있는데.
…마나 탄을 도로 흡수하고 이번엔 마탄을 만들어내서 암흑이에게 보여줬다.
“이건 어때? 이것도 분해 능력 같아?”
푸릉? 푸르르르.
=이건? 뭔가 이중으로 겹쳐진 거 같은데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요. 단순한 폭발 같은걸요?=
…헐. 마나 탄에 위상력을 덧씌워버리면 충격력만 늘어나고 분해능력은 사라지는 건가?
그 뒤로 암흑이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확인해본 결과, 내 마나 탄이 비슷한 등급의 이형 종들에게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건 힘이 넓게 퍼지고 폭발하면서 응집력 또한 줄어들어 그랬던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나 탄에 비해 공간의 벽이 강해 보였던 이유는 단순히 고체화된 상태 때문에 응집력이 향상된 데다 지속성까지 생겨난 덕분이었다.
암흑이가 무엇이든 삼켜서 분해해 버릴 수 있는 건 저렇게 몸집을 압축시키고 응집시켜 액체 상태를 넘어 고체에 가까운 형태가 되서라는것도 알 수 있었다.
즉, 마나 탄의 크기를 한껏 줄이고 TP를 쏟아 넣어 응축시키면 이 세상에 분해하지 못할게 없다는게 암흑이의 설명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더 압축할 수 있는데?”
푸릉? 푸릉….
=압축이요? 그건 저도 잘….=
흠…. 마나 탄을 압축하고 응축시키는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 마나 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단순히 TP를 무작정 밀어 넣은 능력이었으니까 암흑이의 몸처럼 응축되고 밀집된 힘이라고 보긴 힘들지.
“그럼 첫 번째로 돌아와서, 네 약점은 빛 속성이라고 했잖아.”
푸릉? 찰랑찰랑!
=네? 제 약점은 빛 속성이 아니에요! 제 약점은 오직 주인님의 마나 탄 같은 저보다 상위의 분해 능력뿐이에요!=
“뭐? 빛에 적중당하면 너 터져나가잖아.”
푸릉푸릉!
=저는 하나로 이루어지든 여럿으로 나누어지든 모두가 저이고 제가 모두에요! 빛은 그저 저를 나눌 뿐, 저에게 타격을 입히지는 못해요!=
모두가 하나고 하나가 모두라니, 이 녀석이 법성게를 알리는 없을 텐데.
“빛 속성 스킬이 널 터트린다면 그 힘을 흡수 못하는 걸로 봐야 하는 거 아냐?”
푸릉…. 푸르릉.
=그건 그렇지만, 제 속성이 어둠 쪽에 약간 속해있어서 상반되는 속성인 빛은 흡수를 못 하는걸요….=
“그 말은 흡수를 못 할 뿐, 피해를 받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럼 번개 속성도 흡수할 수 있단 거야?”
출렁! 푸릉푸릉.
=네! 번개는 흡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개도 약간 빛 속성에 속해있어서 다른 속성처럼 마구마구 부풀리지는 못해요.=
결정 났군. 양아치 이무기 자식을 조지러 갈 땐 역시 암흑이를 데려가야겠다.
“그래. 다음에 이형종 한 마리 조지러 갈 건데 그때 네가 도와줘야겠다.”
추르릉!
=넵!=
기쁘다는 듯이 몸을 출렁찰랑이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녀석을 어깨 위로 올리고 다들 모여있는 거실로 돌아갔다.
“으히힉?”
…잠결에 들려온 이상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누나가 이불을 들어서 몸을 가린 채 주춤거리면서 물러나고 있었다.
“…….”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다. 그렇지않아도 술 냄새 때문에 잘 못잤구만….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얼굴을 베개에 묻으면서 중얼거리니 누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니, 니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왜냐니…. 어제 술 마시고 곯아떨어진 거 생각 안 나? 여기 우리 방이라고.”
세 개의 침대 중에 왼쪽은 술에 떡이 된 영은이가 혼자 쓰고 있고 오른쪽은 술 냄새는 싫다는 화연이랑 프랑이 서로 끌어안고 잠들어있었다. 원래 나도 저 사이에 끼어서 잘랬는데 비좁다고 프랑한테 쫓겨나 버렸다.
어? 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누나는 잠들어있는 프랑이랑 화연이랑 영은이를 보고 나서야 상황파악이 된 거 같다.
누나는 이불을 들쳐서 자기 옷차림을 확인하더니 손에서 이불을 놓고 한숨을 푹 내쉬는데…. 숙취에 찌든 입 냄새가 쏟아진다!
“아오, 술 냄새!”
“윽.”
연인들이 깨지 않게끔 짜증을 냈더니 누난 창피하다는 얼굴로 입을 가려버린다. 그리고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제야 숙취 때문에 두통이 올라오는지 어질어질한 표정으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머리 아파…. 우웁.”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간 누나는 비틀거리면서 몇 걸음 걸어가더니 풀썩 주저앉아버린다.
“우에에….”
“가지가지 하네.”
토하려는지 헛구역질을 하는 누날 못마땅하게 지켜보다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서 누나한테 다가가 부축해줬다. 옆에서 누나가 할딱거릴 때마다 독한 술 냄새가 풀풀 풍긴다.
“술도 못하는 주제에 뭘 그리 떡이 될 때까지 마시냐.”
“우으으….”
으음. 3층에 작은 방 한 곳은 미호랑 히아리드가 자고 있고 다른 방에는 수한 혼자 자고 있으니 샤워실도 못 쓰겠네.
2층은 녀석들이 점거하고 있고…. 눈 밑이 새카매진 누나는 계속 할딱거리는데 이대로 두면 바닥에 위 속에 든걸 게워낼 거 같다.
“공간 도약할 거니까 숨 들이켜.”
“후읍.”
시키는 대로 숨을 들이쉬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누날 안아 들고 1층 대욕실로 공간 도약을 했다. 물을 따로 받아야 하나 했는데 24시간 온도 조절 장치가 따로 있는지 뜨거운 물이 가득 받아진 욕탕이 따뜻한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옷이랑 갖다 줄 테니까 씻고 있어.”
“으응.”
탈의실에 누날 내려주니 누나는 낑낑거리면서 스웨터와 셔츠를 벗고 잔뜩 구겨진 면바지도 벗기 시작한다.
녹차나 꿀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문을 열고 나와 주방으로 들어가니 자동으로 불이 켜지면서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이 눈에 들어온다.
공간지각으로 슥 훑어보니 꿀은 없고…. 찬장에 동그란 통 같은 게 있어서 찬장 문을 열어보니 우전차 라고 쓰여진 종이 재질의 고급스런 통이 보인다.
우전차는 뭐지?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아보니 녹차 잎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찻주전자도 같이 있어서 꺼내 어렴풋이 기억나는 녹차 끓이는 방법에 따라 물을 끓이고 찻잔도 뜨거운 물로 데운 다음 적당히 뜨거운 물에 찻잎을 우려냈다.
끓이는 김에 나도 한잔 마셔야겠다.
사기로 된 잔에 녹차를 세 번에 걸쳐 따르고 작은 쟁반에 올려 대욕실로 들어가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신욕을 하던 누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무, 뭐야!”
“녹차 끓여왔어. 마시면서 해.”
어렸을 때 몇 번 가본 목욕탕만큼 큰 대욕실인데다 김이 잔뜩 서려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왜 저렇게 경계하나 모르겠다. 보려면 공간 지각으로 봤지.
바로 옆에 쟁반을 내려놓고 욕실을 나와 탈의실에 서 있으니 누나는 수건을 몸에 감고 슬금슬금 기어 나와 녹차가 든 찻잔을 가지고 다시 욕조로 들어가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였다.
욕실 입구에 등을 기대고 뜨거운 녹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이야기해줄 생각 없어?”
[아뜨!]
뜨겁나? 그렇게 뜨겁진 않게 했는데.
[어, 없어! 바보야!]
욕실 문 너머 누나의 당황하고 날 선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더이상 물어볼 마음이 안 든다. 궁시렁거리면서 녹차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공간 도약으로 누나의 옷 가방을 가지고 왔다.
“누나 옷 가방, 탈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놨어. 난 간다.”
[…으응.]
조금 퉁명스레 말했더니 당장 풀죽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나가 아니라 웬수라니까. 뭐라고 해줄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화연이랑 프랑이 서로 끌어안고 자고 있는 침대는 좁아서 안 되겠고…. 영은이 품에 들어가서 마저 잘까 생각해봤는데 누나가 들어오면 곤란 할 거 같다.
“에이.”
혼자 자고 싶진 않은데…. 하는 수 없이 이기심을 발휘해 곤히 잠들어있는 프랑과 화연이 사이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니 두 연인이 잠에서 깨면서 날 보더니 한숨을 쉰다.
“혼자 자기 싫어!”
“…네에네에.”
“시하는…. 어디 갔지?”
“숙취에 토하려고 해서 욕실에 집어던져 놓고 왔어.”
뭐야. 그렇게 좁지도 않구만. 그녀들이 체온으로 따뜻해진 침대에 누워 양팔로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들의 체취를 맡으며 꿈나라로 향했다.
“어? 서한 스키 타러 안가?”
뽀송뽀송하게 마른 스키복을 다시 입은 수유리는 스키 플레이트와 폴을 들고 나가려다 날 돌아보며 물었다.
“어제 질리게 타서 별로 생각이 없어.”
어제 야간 스키를 장장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탔는데도 또 탈려는건지 한고은과 김창현은 커플 과시용 팔짱을 끼고 뛰쳐나가고 그 뒤를 따라 다른 녀석들도 끼리끼리 모여서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버렸다.
저것들은 지치지도 않나….
벽난로 앞에서 미호와 함께 레몬헌을 하는 강주찬을 힐끔 보고 3층으로 올라오니 누나가 침대에서 뒹굴며 두통에 할딱거리고 있었다.
“끄으응…. 으그그.”
숙취에 시달리면서 침대에 누워 해롱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기껏 스키장에 와서 스키는 안타고 술 마시고 뻗어버리다니, 개구리처럼 엎어진 누나 옆에 서서 혀를 찼더니 누난 찌릿하고 날 노려보다가 내 옆구리를 발로 퍽퍽 차기 시작한다!
“아, 뭐야.”
아프진 않지만, 기분이 나빠져서 누날 째려보니 누나도 덩달아 날 노려보면서 입을 연다.
“너한테 혀 차는 소리 들으니까 무~지무지 짜증 나!”
“내가 뭘했다고?!”
“하여튼! 넌 내 고민의 근원이야, 근원! 아구구.”
빽 하고 소리 지른 누나는 골이 울리는지 두 손으로 머릴 잡고 다시 쓰러져버린다. 칫솔을 입에 물고 나오던 영은이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하고 웃더니 누나의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던져주고 욕실로 들어가 버린다.
“우물우물. 서하가 힐링 터치를 걸어주면 숙취도 없어지는 거 아니니?”
“…걸어줘.”
영은이의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영은이의 뒷모습을 힐끗 보더니 꾸물거리면서 일어나서 머리를 들이민다.
“발로 걷어차 놓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 해?.”
“얼릉!”
아, 진짜. 누날 누가 데려갈진 모르겠지만 이런 애 같은 성격을 돌볼 사람이 불쌍하다!
눈을 부라리면서 노려보는 누날 나도 노려봐주면서 머리에 힐링 터치를 걸어주니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드러누워 버린다.
“숙취 사라졌으면 스키나 타고 와.”
“…….”
이제는 아주 대답도 안 해주네. 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눈건지 모르겠는데 반응이 이전까지는 외면 - 회피였으면 이제는 짜증 - 무시인가?
좀 화도 나고 짜증도 나버려서 누나의 등을 소리 나게 찰싹 때려버리니 당장 고개를 들어 날 째려본다.
…어째 성격이 더러워진 누날 무시하면서 1층으로 내려오니 스키 장비 진열장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최수한이 보였다.
“수한. 더 할 거 없으면 너도 나가서 놀다 와.”
“괜찮습니다. 스키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 하긴, 나도 별로 재미는 없더라. 차라리 하늘을 달리거나 하는 게 더 빠르고 짜릿했지.”
“말씀대로입니다. 신체 강화 능력자가 네추럴 스포츠를 즐기는 경우는 그다지 없습니다. 있다면 번지 점프나 패러글라이딩같이 신체 능력과 무관한 스포츠를 즐기지요.”
“그런 거야?”
3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화연이를 보면서 물으니 화연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위상 세계에서 쓰일지 몰라 배워놓은 거지만 스키가 재미있다고 생각 한적은 없다.”
흠…. 그럼 영은이도 비슷하려나. 신체 강화 능력자는 이름 그대로 몸이 강하니까 일반 스포츠로는 자극을 느끼기 힘들겠지.
다음에 놀러 가는 곳은 그걸 염두에 둬야겠다.
어깨에 위에 올라가 있는 암흑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다 점심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하니 녀석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한고은과 김창현은 아주 그냥 핑크색 분위기를 마구마구 뿜어내는 게 깨가 쏟아진다. 소꿉친구인 수유리도 눈꼴 시다는 듯이 투덜거릴 정도니까 할 말 다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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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