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7 이럴 때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진짜 모르겠다. =========================================================================
몸치는 낫지 않는다. 다만 익숙해질 뿐이다.
완전히 밤이 되고 수많은 야간 조명이 켜지니 스키장은 대낮처럼 환해져 버렸다.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사람은 줄어들 생각을 않고 수백 명의 인원이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리는 ㄱ자로 굽히고 엉덩이는 뒤로 쭉 빼고 양팔은 겨드랑이에 딱 붙인다. 그 상태에서 양손에 폴을 쥐고 스키 플레이트의 앞부분을 모아 A자 모양으로 만든다.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초심자 코스를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려 가고 있으려니 주변으로 나보다 조금 더 나아보이는 것들이 킥킥하고 비웃으면서 지나쳐갔다.
“…아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거지.”
화연이는 두꺼운 스키복에 마스크를 올려 쓰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고글을 써서 얼굴을 전부 가리고 옆에서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날 달래고 있었다.
출렁출렁!
그런 화연이의 어깨 위에 암흑이가 올라가서 이리저리 출렁거리는데 꼭 힘내라고 응원하는 거 같다…. 슬라임 주제에 추운 곳에서 잘도 움직이네!
“자, 보는 거처럼 스키 플레이트 중앙에 체중을 싣고 몸을 기울이면 기울인 방향으로 회전이 가능하다.”
플레이트를 A자 모양으로 모으면서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니 원호를 그리면서 매끈하게 회전하고 멈춰 설 때는 스키의 사이드 컷으로….
에이, 아무튼 화연이가 이런저런 동작을 가르쳐주길래 배우긴 했지만 영 재미가 안 느껴진다. 한고은들은 어디 있나 싶어 살펴보니 리프트를 타고 상급자용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상급자 코스의 경사도는 32도가량. 거기에 비해 지금 있는 곳은 10도가 될까 말까다.
“…인생은 실전이지.”
“뭐?”
내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화연이의 허리를 끌어안고 상급자 코스의 슬로프 정상으로 공간 도약을 했다.
정상에 휴게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조금 몰려있지만 보든 말든 상관없어!
갑자기 정상에 나타난 나와 화연이를 보고 주변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면서 쉬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본다. 보든 말든 그 사람들을 뒤로하고 슬로프를 내려다보니 말이 32도지 그냥 비탈길로 보이는데….
이제 해가 완전히 넘어가 밤이 됐지만, 야간 조명이 빵빵해서 스키를 타는 데 지장은 없다.
…이, 이거 괜찮을까? 아, 물론 공간의 벽을 치고 수백 킬로미터 상공에서 날아다니고 뛰어다닌 경험이 있어서 무섭다는 건 아니고! 구른다고 물리적인 상처를 입는 것도 아니겠지만 내 체면이 다칠 거 같아서 조금….
그때 곤돌라에서 내린 한고은이 깡총 걸음으로 폴짝거리면서 뛰어오다가 날 보더니 깜짝 놀란다.
“어! 서하는 언제 올라온 거야?”
“…방금.”
그 뒤에 도착한 김창현과 강주찬과 리디아가 우르르 다가온다.
…이제 물릴 수 없다! 남자 자존심이 있지!
“우오. 나도 상급자 코스는 처음인데 넌 스키도 잘 타냐?”
“와아. 서하 경은 정말 못하는 게 없으신가 봐요!”
“아닌데? 방금 1시간 동안 화연이한테 배운 게 전부인데?”
그제서야 내 옆에서 마스크와 고글로 얼굴을 다 가린 사람이 화연이라는걸 눈치챈 녀석들이 꾸벅하고 인사한다.
“엑?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그래.”
무뚝뚝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준 화연이는 고글과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로 조금 걱정을 담아 날 보고 있었다.
“서하. 여긴 상급자용이라서 경사도 심하고 위험하다. 바로 옆에 경사로 21도 정도 되는 곳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같이….”
“흥! 남자는 실전이지!”
그런 말까지 듣고 어떻게 물러서냐!!
저 앞에 먼저 내려가는 사람의 자세를 공간 지각으로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고 외우면서 바로 슬로프로 뛰어내렸다!
촤좌자자자작
속도가 붙을수록 모걸을 지날 때마다 스키 플레이트를 통해 발바닥을 긁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온다. 속도감은 내가 전력으로 공간의 벽을 치고 달릴 때보다 훨씬 못하고 스릴감도 하늘에서 미끄럼틀을 만들고 미끄러져 내려 올 때를 생각해보면 하품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도 이렇게 긴장되는 느낌은 뭐냐고!
앞서가는 사람의 동작이나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죽죽 내려가고 있으려니 뒤에서 화연이가 빠르게 쫓아오더니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잘하는군!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못한다고 한 거지!?”
고글과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정말로 감탄하는 표정이다. 귓가를 거세게 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때문에 나도 목소리를 돋궈서 외쳤다.
“원래 인생은 실전이지!”
앞사람을 보고 흉내 내고 있다고는 절대 말 못하지.
한고은 들은 조심조심 숏컷을 펼치며 뒤따라오고 화연이는 내 모습을 지켜보더니 나보다 더욱 빠르게 활강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다운힐에서 점프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본보기 삼아 주시하던 사람보다 화연이가 더 매끄럽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슬로프를 내려가고 있었다.
카피 대상을 변경해야겠는데!
두어 번 상급자 코스에서 화연이의 자세를 공간 지각으로 훔쳐보고 따라 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기를 반복하니 금방 적응해버렸다.
화연이의 움직임을 따라 하니까 뭐 어려울 것도 없더만.
능력자들이 즐기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비교하면 네추럴 스포츠에 속하는 스키는 내가 공간의 벽을 뛰어다닐 때 느끼는 속도감이나 익스트림한 느낌은 결코 따라오지 못하지만, 스키는 스키의 장점과 재미가 있었다.
슬로프를 끝까지 내려온 뒤에 리프트를 타는 시간 없이 공간 도약으로 정상까지 이동하면서 2시간을 놀았더니 결국 한고은들의 입에서 "항복!" 이라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스키 장비를 챙겨 들고 우리 펜션 하우스로 돌아오니 훈훈한 공기가 차가워진 몸을 녹여준다.
추위에 새빨개진 코와 귀로 히히거리면서 돌아온 녀석들은 널따란 입구에서 옷과 스키 장비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거실로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아. 진짜 질리도록 탄 거 같아!”
“스키장에 오면 리프트 대기하고 타고 올라가는 시간이 2/3인데 그 시간에 계속 스키를 탔더니 발바닥이 얼얼해~”
“정말이에요. 이렇게 신나게 스키를 탄 적은 처음이었어요. 고마워요. 서하 경!”
“완전 쌩큐다!” “고마워!”
아이들의 인사를 손을 흔들며 받아주고 있으니 최수한이 다가와서 나와 화연이에게 장비를 받아가며 입을 열었다.
“1층 욕실에 목욕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씻고 오시지요.”
그 말을 듣고 여자애들을 돌아보니 밤이라고 마스크는 안 하고 고글만 쓰고 있더만 코랑 귀랑 뺨이 새빨갛게 얼어있었다.
김창현도 그걸 봤는지 스키 모자랑 고글을 벗더니 여자애들을 보며 말한다.
“여자애들 먼저 씻어라.”
“아냐. 우린 씻는 데 오래 걸리니까 남자들 먼저 씻어.”
서로 먼저 씻으라고 미루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술꾼처럼 빨개진 코를 자랑하는 거 아니면 먼저 씻어. 우린 위층에서 샤워하면 되니까.”
리디아는 내 말을 듣고 거울 앞으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아앗!" 하고 경악성을 터트리고는 코를 가리고 쏜살같이 욕실로 뛰어가 버렸다.
“…앗! 나, 나도 같이 가!”
“우리도 씻으러 가지.”
여자애들이 전부 욕실로 뛰어들어가고 남자 놈들도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걸 보고 있던 화연이도 내 손을 잡고 3층으로 이끌었다.
3층의 빈 객실에서 화연이와 함께 씻고 큰 객실로 들어가니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뭐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술 마시고 있었던 거야?
술기운의 힘인지 누나의 굳은 표정도 많이 풀려서 날 보고도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데 어째 화난 표정으로 날 노려본다. …왜 또 저렇게 노려보는데?
밖에서 스키를 타는 동안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진 누나는 술 냄새가 가득한 한숨을 푹 쉬더니 "…청이. …맘도 …라주고…." 라고 중얼거리다가 침대 위에 꼬꾸라져 버렸다.
청이? 맘도 라주고? 무슨 말이야.
“술을 얼마나 먹인 거야?”
세 개의 트윈 사이즈 침대 중 한곳에 꼬꾸라진 누나는 인사불성으로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를 흘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널린 양주 빈 병만 아홉 개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와 소주병이 못해도 스무 개다. 최수한이 안주를 만들어줬는지 먹다 남은 과일 안주의 잔해도 테이블에 가득하다.
“별로 안 먹였어. 도수 40짜리 위스키 세 병 정도?”
“오히려 시하 님이 폭음하려 하셔서 말리느라 혼났어요.”
세 병이 별로 마시지 않은 거야? 내 앞에서 술 마시는 모습을 안 보여주던 프랑하고 영은이였는데 알고 보니 술고래였구나….
살짝 뺨이 달아오른 영은이는 손에 들린 온더락 위스키 잔을 흔들어 보이고 반쯤 남은 술을 단번에 마셔버린다. 그리고 "흐흥." 하고 콧김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고로 술이 들어가야 속에 담긴 울화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법이거든? 우후후. 우리 서하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려나~?”
영은이도 취했구나. 잘 보니 빈 병 사이사이에 신체 강화 능력자용 첨가제 앰풀 여러 개가 부러져있는 게 보인다. 저게 신체 강화 능력자도 취하게 해주는 강화 알콜 원액이라던가.
비틀거리면서 걸어온 영은이는 날 꼭 껴안더니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내 귓불을 앙앙 깨물기 시작했다.
이런 주정뱅이 같으니. 그런데 취기가 갑자기 올라오는지 혀가 꼬이는 발음으로 어물거리면서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우리 서하는 참 나쁜 남자란 마랴? 으쩜 이르케 사라믈 홀리구 다니능건지이~!”
“아, 아! 어휴! 그러길래 적당히 마시랬는데 아주 그냥 혀가 삐뚤어져 버렸네! 영은! 그만하구 일루 와서 자는 거야! 화연도 도와줘요!”
…?
프랑은 당황한 표정으로 빠르게 날아오더니 영은이의 입을 막고 침대로 끌어당기는데 "우우웅~!" 하면서 버둥거리다가 화연이에게 제압당하고 침대에 집어던져 졌다.
최수한을 불러서 술자리를 치우라고 한 뒤에 침대에 집어던져 진 영은이를 살펴보니 그새 곯아떨어져 버렸다.
출렁~
내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암흑이는 정신을 잃고 자고 있는 영은이의 가슴 위로 떨어지더니 회색 스웨터 위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촉수 두 가닥을 뻗어 영은이의 가슴을 꾹꾹 눌러보기 시작한다.
빈 술병과 과일 안주 접시를 카트에 담고 있던 최수한은 그 모습을 보고 움찔했지만 금방 신경을 끄고 실내 환기 시스템을 켠 뒤 카트를 밀고 나갔다.
하지만 프랑과 화연이는 동그래진 눈으로 암흑이를 바라보다가 날 돌아보며 물어온다.
“저, 저 아이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가슴 감촉이랑 탄력 같은걸 점검해보고 있는 거야.”
“그거 위험한 건 아닌 건가?”
“아냐. 그냥 자기 몸을 가슴 감촉이랑 똑같이 만들려고 저러는 거 뿐이야.”
“…뭐?” “네?”
출렁출렁! 출렁!
조사가 끝났는지 암흑이는 촉수를 집어넣고 영은이의 가슴 위에서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가슴이 세 개가 달린 모습 같다.
자기 가슴 위에서 암흑이가 출렁이는데도 깨지 못하고 깊게 잠든 영은이를 보다가 암흑이 녀석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려보니 이제는 영은이 가슴 감촉이랑 정말 똑같아졌다.
“완전히 똑같아졌네. 근데 넌 왜 이렇게 가슴에 집착하냐.”
푸릉?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암흑이를 보고 있는 프랑에게 암흑이를 넘겨주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잠들어있는 누나에게 다가갔다.
“와?! 정말 영은의 가슴 감촉이랑 똑같아요!”
“…정말이군요.”
푸릉푸릉?
아까 누난 뭐라고 중얼거린 거였을까. 청이… 멍청이? 라주고 라는 단어는 뭐지.
…술도 잘 못 마시는 주제에 뭐가 화난다고 독한 양주를 들이마시냐, 마시길. 괜히 심통이 나서 누나의 콧잔등을 꾹 눌러주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가늘게 신음을 흘린다.
“으응….”
몰랑거리는 암흑이를 만지작거리는 프랑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술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어봐도…. 안 가르쳐줄 거지?”
“후후. 아직은 안돼요.”
쩝. 스키에 집중하지 말고 이야기 나누는걸 독순술로 훔쳐볼 걸 그랬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누날 안아 올려서 방 밖으로 나가려니 암흑이를 만지작거리는 화연이가 돌아본다.
“어디 가는 거지?”
“옆에 작은 객실에 눕혀놔야지.”
“트윈 베드인데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같이 자자.”
“…그럴까?”
열린 방문 밖으로 1층 거실에서 녀석들이 떠들썩하게 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다시 되돌아서 누날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줬다.
“그런데 신체 강화 능력자에 질병 저항 능력도 가지고 있는데 알콜 원액을 부었다고 이렇게 술에 취할 수 있는 거야?”
술에 절어 곯아떨어진 영은이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니 화연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끝이 부러져있는 자그마한 앰플을 들어 보였다.
“위상 에너지를 다시 한 번 정제해서 술의 도수를 끌어올려 주는 첨가제라 그렇다. 이걸 넣고 마시면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자라도 취하지.”
화연이가 건네주는 앰플을 받아서 킁킁하고 냄새를 맡는 순간 코가 뜯어질 거 같은 독한 냄새가 뇌에까지 다다른다!!
“으억!”
힐링 터치를 일으켜 얼굴을 황급히 문대고 있으니 화연이와 프랑이 쿡쿡거리고 웃는 게 느껴졌다. 으으, 이럴 거라는 거 예상하고 있었구나!
“됐어. 두 술꾼은 내버려두고 우리도 내려가서 저녁 먹자.”
독한 냄새에 눈물이 찔끔 흐른 걸 소매로 닦고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천장에서 환기와 공기 청정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으니 냄새는 금방 빠지겠지.
“그러니까 나, 너랑 사귀고 싶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3층에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김창현의 버럭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뭔가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려는 거 같다!
프랑과 화연이랑 눈을 한번 마주쳤다가 후다닥 1층으로 뛰어 내려왔더니 거실의 카펫 위에 애들이 모여 앉아있었는데 그중에 얼굴이 붉어진 김창현이 거실의 카펫 위에 앉아있는 한고은을 내려보고 있었다.
약간 거칠어진 숨결과 붉어진 얼굴의 김창현, 커다랗게 뜬 눈으로 굳어버린 한고은.
씻고 나와서 그런지 더벅머리를 하고 있던 김창현은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한고은도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내리다가 김창현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굳어있었다.
기타 등 등들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김창현이 창피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다가 한고은 앞에 쪼그려 앉더니 다시 입을 연다.
“널 좋아한 지 오래됐다고. 아직은 숨기고 싶었는데 니가 억지로 듣길 원해서 말했으니까, 너도 대답해줘야지.”
오오? 김창현 저 자식, 한고은을 좋아하고 있었던 건가? 한고은은 난데없는 고백에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버렸다.
재밌다는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애들의 모습에 한고은도 얼굴을 확 붉히더니 들고 있던 빗을 붕붕 휘저으며 소리친다.
“가, 가가가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김 변태야!”
“너 좋아한다고!”
“누으우으으!”
“내 이상형은 너처럼 자기표현이 확실하고 꼼꼼한 여자애라고!”
“아으….”
김창현은 한고은이 붉어진 얼굴로 제대로 대답을 못 하니 홧김에 폭주하는 사람마냥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나! 김창현은! 한고은을! 좋아한다고오오오오!!”
킥킥킥. 저 녀석, 부끄러움과 창피함 때문에 반쯤 폭주하고 있구만.
계단 옆에 숨어서 폭주하고 있는 김창현을 구경하고 있으니 프랑도 재밌다는 얼굴로 내 머리 위에서 얼굴만 내밀고 구경하고 화연이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본다.
한고은은 김창현의 얼토당토않은 기백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려 하지만 김창현은 도망가는 꼴은 못 보겠다는 듯이 두 손을 뻗어 한고은의 어깨를 잡았다.
어깨를 잡힌 한고은은 흠칫하고 놀라더니 당황하고 조금 겁먹고 놀란 눈으로 김창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김창현은 그 모습에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입을 뗐다.
“후욱, 후욱. 이제 네 차례야.”
“으으. 뭐, 뭐가아?”
“대답!”
“윽.”
“말 못하겠으면 고갯짓만 해. 예스면 끄덕이고 노면 저어!”
언제나 당당하던 얼굴에 울상을 한가득 지어버린 한고은은 옆을 돌아보며 수유리와 리디아, 강소라를 바라보면서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지만, 누가 그랬었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저 재밌다는 표정의 강소라에, 흥미로워 눈을 반짝이는 리디아. 거기다 절친이라는 수유리마저 "고.백.해! 고.백.해!" 하면서 부추기고 있었다.
미호에게 붙들린 강주찬도 레몬헌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실실 웃으면서 고백 현장을 지켜보고 있고 조민호도 배실 배실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최수한마저도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미호와 히아리드 뿐인 거 같다.
도망갈 장소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고은은 자기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의 김창현을 바라본다. 그런 한고은을 바라만 보는 김창현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지 심박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김창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싫냐…?”
도리도리.
“그, 그럼! 그럼 내가 좋은 거지?!”
…끄덕.
“우, 아아앗! 끼얏호오오오!!!”
한고은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걸 확인한 녀석은 그야말로 날아오를 거 같다는 표정을 짓더니 펄쩍펄쩍 뛰면서 발광을 해댄다.
“으악, 내 손이 왜 이래! 내 손이 오그라들고 있어!!”
난데없는 고백 장면을 봤더니 온몸에 닭살이 솟고 오글거려 손발이 오그라드는 거 같다!
내 말에 프랑과 화연이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리면서 웃는다. 낄낄 웃으면서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니 펄쩍펄쩍 뛰던 김창현도 내가 있는 쪽을 보더니 그제서야 헛기침을 하면서 진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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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고백 장면은 재미있지요. 고백했다 차이면 그 재미는 두배가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