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3 정신, 그리고 조작. =========================================================================
치미는 답답한 마음에 손을 뻗어 노르웨이 숲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야옹.
“답답하다~”
내 손에 들려져 날 빤히 바라보며 냥냥 거리는 녀석을 내려주고 지들끼리 물고 장난치는 고양이와 개들을 보며 한숨을 쉬니 옆에서 영은이가 속삭인다.
“뭣하면 정신 조작 능력자의 실기를 한번 볼래?”
“영은. 그러다 만약 서하가 정신 조작 능력자의 기술을 훔쳐봤다는 게 들통나면 문제가 커지지 않아?”
미호의 공부가 끝나자 꼬마 친구 뽀롱이를 틀어준 프랑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울 자기의 공간 지각 범위가 6.75km잖아. 그걸 이용하면 돼. 지금 세계는 정신 조작 능력자에 대한 우려가 커져 있으니까 그 틈을 이용해 한국 능력자 연합 지부장을 뒤에서 조종해서 살펴보게끔 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어우. 말만 들어도 골치 아프다. 뒤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끔 조종하려면 몇 단계를 걸쳐야 하는 거야?
“흠…. 그렇다고 쳐도 이제 서하에게는 세계 각국의 정보망이 집중되고 있을 겁니다.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서하가 직접 움직인다면 세계 각국의 정보망에 걸리게 됩니다. 타국으로 나간다고 하면 서하가 입국할 나라가 얼마나 긴장할지 짐작이 안갑니다. 그런 상황에 정신 조작 능력자를 움직여 능력 시현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듯하군요.”
“흥.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이 어미를 우습게 여기는구나.”
영은이의 가소롭다는 말에 화연이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약간 화난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쓰시겠단 겁니까?”
“인어의 진주. 서해. 중국. 이형종 지배.”
4가지 단어를 나열하자 화연이도 눈에 이채가 스며든다.
안돼.
“안돼. 이 능력은 진짜 비밀로 해야 해. 그렇지 않아도 공간 도약에 공간의 벽 때문에 세계 강대국 수뇌부들이 날 향해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며. 이 사실이 밖으로 흘러나갔다간 경계심을 너무 자극해서 오히려 위험한 일을 저지르게 만들지도 몰라.”
지금도 정신 조작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게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끔 안티 필드 에그를 24시간 켜놓고 방청 방음을 하는 중인데….
만약의 만약의 만약을 생각하더라도, 대놓고 시비와 싸움을 거는 게 아닌 이상 일이 더 크게 번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이 이상 나서는 건 절대 안 된다.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는 영은이와 화연이를 두고 엎어져서 졸기 시작하는 비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니 엉뚱한 짓 하지 마.”
“알아썽~.”
말 그대로 기분이 들 뿐이지만…. 연인들은 날 믿는지 슬금슬금 다가오는…. 왜 다가오는 건데?
눈에 은은한 열기가 새겨지기 시작하는 걸 보니 또 스위치가 올라간 거 같다.
이번에 또 위상력이 폭증해서 1,892만이 되자 연인들은 내 옆에서 방심했다간 지금처럼 색에 물들어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성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일은 안 벌어지고 점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지금처럼 휴일에 시간이 남고 할 일이 없을 때면 오히려 색에 몸을 맡겨버리는 거 같다.
가슴을 가리는 탱크톱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말랑말랑한 푸딩 같은 영은이의 가슴을 움켜쥐고 내 중심부로 손을 뻗는 화연이의 엉덩이 사이 골짜기로 손을 집어넣어 촉촉하게 젖은 꽃잎의 균열을 만지며 침실로 들어갔다.
이런 생활이 나쁘긴커녕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만, 나랑 상관없는 여자들이 문제가 되니 발정 향이라고 이름 붙인 내 체취를 어떻게 몸 안으로 갈무리하는 방식을 찾아봐야겠다.
11월 12일 목요일.
7일 전에 일어났던 하철수의 이 능력 테러 사건 때문에 올해 수능을 며칠 미뤄야 한다 말아야 한다 갑론을박이 펼쳐지더니 단 하루를 위해 3년을 고생해온 아이들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미룰 수 없다는 쪽에 손을 들어 올렸는지 예정대로 대입 수능이 치러졌다.
물론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위상 세계에 뛰어들려 하는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 프랑이 미호를 훈육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수능 TV에서 흘러나오는 수능 시험장을 보고 있었다.
한고은 패밀리도 지금쯤 수능 치러 들어갔겠군.
엄마랑 아빠랑 누나는 내가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에 무척 아쉬움을 보이긴 했지만 날 설득하려 하진 않았다.
“아들, 정말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겠니? 대학은 대학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인데….”
“어차피 저 녀석이 대학에 가봤자 갖은 사람들의 등쌀에 휩쓸릴 거요. 그럴 바에 스스로 원하는 학문을 찾아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때는 내 앞에서 감정 표현이 드물어진 누나도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었다.
“같이 학교 다니면 좋을 텐데….”
집에서는 집 나름대로 "서하가 대학에 들어오면 무척이나 기쁠 거다." 라는 화연이와 "우리 서하는 이제 와서 대학물 먹어봤자 하나도 쓸데없어요~! 그러니 가지 말고 나랑 놀장." 하는 영은이의 주장과 언제나 나랑 같이 있으니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배실배실 웃는 프랑의 삼파전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삼파전이 종료한 거고.
10분간의 훈육이 끝났는지 TV를 차지하고 뉴스를 보는 내 앞에 달려온 미호가 동그란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본다.
얼른 꼬마 친구 뽀롱이가 보고 싶다는 무언의 시선을 느끼고 채널을 돌려주니 활짝 웃으면서 내 무릎 올라타서 TV에 나타난 펭귄과 북극곰을 진지한 표정으로 시청하기 시작했다.
몸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던 TP를 꼼꼼하게 몸 안으로 갈무리하자 살랑거리는 여섯 개의 하얀 꼬리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춘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던 발정 향이라는 건 별거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체외로 방출하고 있던 미약한 양의 TP가 내 TP를 가득 받아들인 사람이 몸에 TP가 들어올 때 새겨진 쾌락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육체가 반응했던 거였다.
그걸 알게 된 뒤로 몸 밖으로 배출되던 TP를 꽁꽁 잡아뒀더니 연인들이 나와 접촉해있다고 해서 흥분해서 발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미호가 내 TP를 맡고 발정이 나버리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위험한 일이니까 이렇게 갈무리해둬야지.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최고급 여우 모피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은 부드러운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인증기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정시하([email protected])]
어? 누나가 웬일이지.
웬일로 오랜만에 전화한다 싶어서 받아보니 도수가 없는 무테안경을 쓴 누나가 홀로그램 창에 떠오른다.
내 품에 안겨있는 미호의 머리통을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누나는 검지로 안경테를 올리더니 시선을 내게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히아리드의 의사소통 방식에 관해 연구하시던 멜디오스 박사님이 알아낸 게 있으시대. 직접 와서 봐주셨으면 한다는데 지금 갈래?]
“한 달 정도밖에 안됐는데 벌써 원인을 알아낸 거야?”
[그건 몰라. 하지만 무척 흥분한 목소리였었으니까 기대해도 될 거 같아.]
“어. 바로 가보자.”
뭔가 알아냈다고? 그게 뭔지 궁금해지는데.
누나가 새로 장만한 회색의 포르쉐 쿠페를 타고 임시 연구실로 쓰고 있는 의한 대학교 부속 물리 위상 연구소로 향했다.
…평소라면 가는 와중에 그치지 않는 수다를 떨어야 할 텐데 누나는 입에 지퍼라도 달았는지 묵묵히 차만 몰고 있었다. 묘한 침묵에 어쩐지 불편해져서 누나가 왜 이러는 걸까 뒷좌석에 타고 있는 프랑을 돌아보니 프랑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누나의 약점인 옆구리를 찔러서 반응을 살펴볼까 했지만 운전 중에 그러면 곤란하지.
계속 누나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더니 누나는 신호를 받고 멈춘 틈에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날 돌아봤다.
“왜? 할 말 있어?”
“아니 별로….”
저 웃는 얼굴 안쪽 깊숙한 곳에는 미소가 아니라 뭐라고 할까, 여하튼 지금의 내 눈치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거 같다.
에잉, 신경 쓰이게. 내가 고갤 돌리고 앞을 바라보니 누나는 픽 하고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뺨을 꼬집는다.
“실없긴.”
그러면서 누나도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 다시 무표정이 된다.
…와 진짜. 누나가 뭔 생각하는지 진짜 궁금해지는데?!
날 잡고 누나랑 둘만 만나서 간지럽히고 막 괴롭히면서 물어보면 다 실토하려나…? 나한테 스킬 날리거나 하진 않을 테니 신체 강화를 돌려서 덮치고 간지럼 지옥을 보여주면 다 털어놓을 거 같기도 하고.
그냥 냅둔다에서 간지럼 공격으로 누나가 무슨 생각하는지 뱉어내게 만든다는 쪽에 점점 유혹이 강해지는 가운데 일반 대학보다 부지가 3배가량 넓은 의한 대학교에 도착했다.
의한 대학교는 금암산 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11.7 이능력 테러 사건 때도 멀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의한 대학 부속 연구소는 대학 부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공간 지각으로 확인해보니 경사가 좀 있는 산자락을 파고들어 간 지하에 연구소가 세워져 있었다.
저러면 입구만 철통같이 지키면 되니까 보안에도 좋아 보이네.
주차장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차 안에서 공간 지각을 살펴보니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갔던 화연이가 주차장에 서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차를 세우니 근처에 서 있던 화연이가 또각거리며 걸어온다. 아침에 수업 들으러 학교에 간다고 했는데 이 시간이면 수업을 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갈색 가죽 구두에 상아색 스키니핏 팬츠와 와인색 니트를 입은 화연이는 언제나처럼 포니테일을 한 모습으로 내게 미소를 보냈다.
“화연이가 왜 여기 있어?”
“음? 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아니, 수업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시하의 연락을 받고 수업 도중에 나왔다. 너도 연구소의 볼일 때문에 온 거지?”
화연이도 연락을 받았구나. 프랑도 뒤따라 내리고 작은 손가방을 챙긴 누나도 차에서 내리며 화연이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갑자기 초절정 미녀 셋이 주차장 한 곳에 모이니 주변에 지나다니던 대학생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저 사람 혹시…. 그랑 블루 회장 아냐?” “혹시가 아니라 진짜야!” “무슨 일로 우리 학교에 온 거지?” “그랑 블루 회장도 고3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대입 수능인데 시험 안 보는 건가….”
…세 미녀를 보는 게 아니고 날 보는 거였다. 이쯤 되니 남자의 본능이라는 예쁜 여자 레이더마저 무효화시키는 내 유명세가 실감이 든다.
귓가에 들려오는 대학생들의 수군거림은 흘려넘기고 공간 지각으로 대학교 부지를 살펴보니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라는 말답게 늦가을 풍경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한국 땅 같지 않은 분위기와 유럽 색채가 짙은 건물, 건물 외벽을 더듬어 올라가고 있는 붉은 덩굴이 더욱 고풍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건물보다 나무가 더 많아 보이는 의한 대학교 캠퍼스는 따스한 햇볕이 수많은 나무와 무척이나 어우러져 부드러운 느낌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사립 대학이라고 영은이가 조경에 많은 돈을 쏟아부은 거 같다. 하긴, 의한 고등학교도 조경에 꽤 많이 신경 썼지.
직선으로 뻗어있는 평평한 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걸으며 좌우에 구성된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회양목과 이 길의 끝까지 늘어선 단풍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은 빨갛게 물든 단풍이파리가 한 장씩 머리 위로 떨어진다.
우리 뒤를 따라오기 시작하는 대학생들은 무시하고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프랑과 함께 누나와 화연이 뒤를 따라가고 있으려니 화연이가 뒤돌아보더니 걸음을 늦춰 내 곁에 선다.
“학교 풍경이 마음에 드나? 단풍 연길은 의한 대학교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곳이지.”
뺨에 홍조가 어려있어서 왜 이러나 싶었는데 앞에 있는 누나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길 연인들이 걸어가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어. 화연이가 여길 너랑 같이 얼마나 걷고 싶어 한 줄 아니?”
날 돌아보며 살짝 웃어주는 누나를 보고 있으니 화연이는 홍조가 어린 얼굴로 내 팔에 팔짱을 낀다.
으음. 화연이가 그랬단 말이지? 실실 웃으면서 달아오른 뺨을 식히는 화연이를 보며 웃으니 그 순간 누나의 표정이 살짝 불편해졌다.
“…?”
의아해져서 누날 보지만 누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다기보단 무표정한 얼굴로 약간 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먼저 연구소에 가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와.”
어…. 목소리도 좀 서늘해졌는데. 주변에 대학생들이 우릴 보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불편한 건가?
“아, 저도 같이 가요.”
“그럴래요?”
프랑은 나와 화연이를 돌아보며 개구쟁이 같은 눈짓을 보내고 누나와 함께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크윽. 회장의 연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 얼음 여신이 저런 모습을….” “흑흑. 내 첫 번째 실연이 이제야 찾아오는구나!” “멘붕 올 거 같아….”
울긋불긋한 단풍길 사이를 걸으며 뒤따라오는 수많은 남자 대학생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공간지각으로 살펴보며 승리자의 심정을 만끽하다가 내 옆에 서 있는 화연이에게 온전히 신경을 쏟기로 했다.
뭐 누나랑 프랑도 먼저 가버렸으니까, 팔짱을 끼고 있는 화연이의 팔을 풀고 그녀의 가녀린 허리에 손을 둘러 당기니 화연이도 살짝 놀랐다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으음. 의한 대학교에 다니면 이런 분위기를 종종 느낄 수 있는 건가?
살랑살랑 떨어져 내리는 단풍 연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늦가을의 포근함과 쌀쌀함이 공존하는 단풍나무길, 단풍 연길은 한국이 아닌 거 같은 분위기와 경치를 자랑하고 있어서 무척이나 색다른 감각이다.
화연이와 팔짱을 끼고 주변을 살펴보며 걷고 있으니 화연이는 으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유혹하듯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겨울 눈이 내린 캠퍼스는 또 다른 낭만을 풍긴다. 마치 설국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 봄에는 새싹이 피어오르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리며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듣다 보면 봄이 바로 곁에 다가온 걸 알 수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부지 안에 조성된 호숫가의 그늘에 앉아 새가 지저귀고 매미가 우는 소릴 들으면 여름의 한복판이라는 느낌이 피어오르지.”
…화연이의 속셈이 노골적으로 보여서 슬쩍 고개를 돌리고 소리 나지 않게 큭큭 웃고 있으니 화연이의 귓불이 점점 빨개진다.
“…….”
곧이어 얼굴까지 빨개져서는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화연이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다만 내 허리에 올린 손에 힘을 조금 줄 뿐이었다.
이럴 땐 화제를 돌려주는 게 신사다운 행동이겠지?
“화연아.”
“음.”
“누나가 요즘 이상한 거 같은데 뭐 아는 거 없어?”
내 질문에 의아한 표정이 된 화연이는 저 멀리 작아진 누나의 등을 보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지?”
“음. 예전처럼 나한테 장난도 잘 안 치고 말수도 적어지고 조용해지고 전화도 안 걸고 가끔 서늘한 목소리를 꺼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이렇게 말로 나열하니 진짜 이상하네.”
내 말이 계속될수록 화연이는 조금씩 눈썹을 찌푸리면서 저 멀리 중세 시대 2층 성당처럼 생긴 건물 옆으로 사라져 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언제부터 그랬지?”
“음. 내가 영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조금씩 변했던 거 같은데,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아니, 없어.”
잠시간의 침묵 뒤에 나온 화연이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니 슬슬 내 눈길을 피한다. 그런 모습으로 짐작 가는 게 없다고 주장하는 거야?
“진짜 없어?”
“없다.”
“진짜?”
“…없다.”
모습이나 행동에서는 "있다."라고 대답하는데 말은 없다고 하네. 화연이의 말랑말랑한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 밤부터 잠자리에서 화연이는 빠지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윽.”
뒤쪽에서 나와 화연이의 모습에 소란이 일어나는 거 같지만 신경끄고 화연이의 움직임에 정신을 집중한다.
귓가에 닿은 내 숨결 때문인지 어깨를 살짝 움츠린 화연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지만 지금은 말 못해. 그게 납득이 되지 않아 날 안아주지 않는다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지.”
살짝 침울한 표정이 된 화연이를 보니 이야기를 듣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로 괴롭히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지.
“…어쩔 수 없네. 누나한테 뭐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음. 아니다. 그냥 생각할 거리가 머릿속에 가득 차버려서 다른 행동에 여유를 쏟을 일이 없어진 거라 짐작된다. 서하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내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화연이는 다행이라는 듯이 살짝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았어.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말해줘.”
“그러지. 아마도 그때가 되면…. 아니, 아니다.”
에이 신경 쓰이게.
“말하다 마는 것 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화연이의 허리를 잡은 손을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토도독 건드리니 움찔흠칫거리며 내게 몸을 더욱 붙여온다.
“그, 그러지 마라….”
보통 때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럴 때만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더 괴롭히고 싶어지잖아.
어느새 누나와 프랑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산 중턱에 있는 부속 연구소의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른 뒤 쫓아 가야지.
부끄러운지 슬슬 몸을 빼려 하는 화연이의 손을 잡아끌고 누나가 먼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옆구리가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