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277화 (277/517)

00277  그리고 2달이 흐르다.  =========================================================================

화연이의 팔짱을 낀 채 보고서를 들고 37층의 혜령이 이모 집무실로 공간 도약을 하니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서류 사이에서 펜을 쉴 새 없이 놀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모. 여기 중간 결과 보고서요.”

“앗?! 회장님, 언제 오셨나요?”

어째 재단 하나 만들고 연구소 짓고 위상석 정제소를 하나 인수했더니 다들 날 회장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혜령이 이모까지 날 회장님이라고 부르네.

호칭 따윈 중요한 게 아니라서 들고 있는 서류철을 이모한테 건네주며 말했다.

“방금요. 내용을 살펴봤는데 F 클래스 이하의 채집 활동을 하는 이들과 계약해서 공략 완료 지역에 투입하는 방법이 괜찮아 보였어요.”

“그렇죠? 하위 이하의 이형종만 등장하는 걸로 파악된 지형은 많으니까 그곳에서 생산되는 채집 지도를 만드는데도 도움이 되고 채집 꾼들은 안전이 확보된 곳에서 채집활동을 벌이니 윈윈이죠!”

“정식 계약을 맺은 이들에게 한해 양산형 보호장비를 임대해서 혹시나 습격받아 크게 다칠 상황을 대비해주는 것도 나쁠 거 같지 않아요.”

“아, 그것도 좋네요! 염두에 둘게요. 그나저나 두 분은 데이트 나가시는 건가요?”

“흐흐흐. 토요일인 데다 날씨도 좋은데 놀러 나가야죠. 혜령이 이모도 남편이랑 좀 놀고 그래요.”

“후후. 그럴게요. 지금 하는 일만 다 하구요.”

혜령이 이모의 남편은 저번 달에 미국에서 귀국했는데 미국에서 능력자의 치료로 그나마 루게릭병의 악화를 어느 정도 억누른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이모의 남편이 귀국했단 소식을 듣고 내 힐링 웨이브가 질병 회복에도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혜령이 이모가 입주했다는 그랑 블루 빌딩 생활동의 12층을 찾아갔었다.

벨을 누르니 현관문이 열리면서 알록달록한 스웨터와 갈색 무릎치마를 입은 혜령이 이모가 환한 얼굴로 나와 프랑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문을 열어 마중 나온 혜령이 이모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거실에서 무진장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캔버스에 그려지고 있는 그림은 무척이나 형이상학적인 기묘한 그림이었다.

음. 내가 마약 빨고 그림을 그리면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강기훈, 혜령이 이모의 남편은 이모보다 선이 가는 미청년이었다. 하지만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병답게 파리한 얼굴과 야윈 몸으로 휠체어에 늘어진 것처럼 앉아 힘겹게 조그만 붓을 놀리고 있었다.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거 같아 잠시 주변을 둘러봤는데 우리 집이나 아빠 집보다 좀 작아 보인다.

생활동의 6층부터 34층까지는 한 층에 3가구씩 있어서 그런지 나나 아빠 집보다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커서 두 명이 살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현관문에서 걸어들어오면 거실이 보이는데, 그런 거실 한쪽 벽에는 가로로 길게 누운 혜령이 이모의 누드 그림이 걸려있었다.

극 현실주의 누드 그림이라 멀리서 보니 정말 혜령이 이모가 홀랑 벗고 액자 안에 누워있는 거 같다.

유두는 쿠션을 껴안아서 가리고 음부는 살짝 다리를 꼬아서 숨긴 비스듬히 누운 자세, 어두운 검회색 안개 같은 배경에 대비 색으로 혜령이 이모의 나신을 그려놨는데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움직일 것처럼 사실적인 그림이었다.

저건 틀림없이 혜령이 이모의 남편 눈에 쓰인 콩깍지가 다분히 들어간 그림이다. 예~~전에, 5개월쯤 전에 혜령이 이모의 몸을 스캔해봐서 알고 있는 나이기에 객관적으로 내릴 수 있는 평가지.

그도 그럴게, 그림만 봐서는 내 연인들의 몸매랑 다를 게 없는걸? 근데 5개월 전쯤에 본 이모의 나신은 내 연인들이 100점 만점에 100점 98점 97점이면 혜령이 이모는 82점 정도였단 말이야.

“…….”

빤히 이모의 누드 그림을 보며 속으로 품평하고 있으려니 프랑이 내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윽. 왜?”

“뭘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시는거에요~!”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나한테 속삭이는 프랑은, 얼굴이 빨개진 혜령이 이모를 흘끔거리면서 눈짓한다.

“어? 되게 예쁜 그림이잖아? 저렇게 대놓고 걸어놓은 걸 보면 보라고 걸어, 켁! 꼬집지 마!”

“서~하~!”

“으, 음료수 가져올 테니 거기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혜령이 이모는 민망한지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주방으로 도망가버리고 프랑은 화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마구마구 꼬집어댔다.

“저건 예술이잖아, 예술! 프랑은 예술이랑 외설이랑 구분도 못 해?!”

“말만 번지르르해져서는 정말! 아버님이랑 어머님의 이름에 맹세코 이상한 생각 안 했어요?”

“안 했어!”

“…….”

칫. 진짠데.

프랑한테 눈총받으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으려니 혜령이 이모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우유와 로열젤리를 굳혀 만든 과자를 내왔다.

“미안해요. 회장님. 기훈 씨는 그림을 그릴 때면 주변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사람이라….”

“괜찮아요.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가진 사람은 멋진 법이죠.”

“후후.”

부정 안 하네. 그나저나 정말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지 우리가 들어온 지 10분이 넘어가는데도 이쪽으로는 신경도 안 쓰는 거 같다.

그렇게 다시 10분 정도 지나니 그제야 "흐우우."하는 한숨을 내쉬며 붓을 들고 있는 손을 내렸다. 그러자 혜령이 이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기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아, 회장님께서 오실 때 다됐나요?”

“벌써 와있어요. 뒤에….”

“네? 아!”

외모에 걸맞는 약간 고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동 휠체어를 돌려날 보더니 당황해한다. 저런 가는 선의 외모로 저런 굵은 선의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그리다니, 외모랑 예술성이랑은 관계가 없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한지 웃음 지으면서 휠체어를 조종해 다가온 강기훈은 힘겹게 고개를 까닥인다.

“이런 자세로 인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영이의 남편인 강기훈입니다.”

“괜찮아요. 혜령이 이모한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정서하에요. 이쪽은 프랑.”

“예? 아, 이모라면?”

“저희 엄마랑 친구 사이시더라구요. 그래서 직급으로 부르기보단 그냥 편하게 이모라고 부르고 있어요.”

“아! 그랬군요. 저희….”

“자자. 우리가 조금 더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간 혜령이 이모의 애간장이 녹아서 사라질 거 같으니 일단 제 능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지 확인해볼까요?”

실제로 때가 되자 혜령이 이모는 긴장하다 못해 쓰러질 거 같은 표정으로 나랑 강기훈 사이에 서 있었는데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본 강기훈은 희미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하하하. 세계 유일의 스페셜 클래스이신 회장님께 직접 치유를 받다니, 이 얼마나 굉장한 호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혜령이 이모를 봐서 시도해보는 거에요. 효과가 없다고 절 뭐라 하진 마시고 효과가 있어서 완쾌되면 이모를 여왕님처럼 물심양면으로 받드세요. OK?”

“오케이입니다. 하하하.”

루게릭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밝은 성격의 사람이다. 아무래도 얼굴 근육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말로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는 거 같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니 옆에 서 있던 혜령이 이모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5단계 힐링 웨이브를 발사했다.

한 번에 10단계를 쏠까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5단계라고 해도 내 공간의 벽에 뭉개져 버린 히아리드의 날개나 팔도 순식간에 재생해버릴 정도니까 이 정도로도 회복 안 되면 뭐.

힐링 웨이브가 발사되지 그야말로 대해의 바닷속 색의 푸른 안개가 아파트 내부에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프랑과 혜령이 이모, 이모의 남편인 강기훈의 몸을 휘감다가 사라진다.

혜령이 이모는 몸을 훑고 지나가는 힐링 웨이브에 살짝 짜릿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강기훈은 눈을 부릅뜨더니 힘겹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이, 이건…. 이건…!”

으음. 공간 지각으로 강기훈의 몸을 살펴보고 있긴 한데 딱히 변한 점은 안 보이는데…. 하지만 강기훈은 자기 몸에 확연한 변화를 느꼈는지 떨리는 눈으로 손을 벌벌 떨면서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린다. 아깐 휠체어를 움직이면서 팔은 약간의 움직임만 주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자기 머리 위까지 올라온 손을 올려다보며 격정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모, 몸이…. 몸이 움직여. 몸에 힘이…!”

“기훈 씨! 아아….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라 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제 힐링 웨이브가 ALS에도 효과가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원래 혜령이 이모의 남편을 치료해주기 전에 아빠 병원이나 유명한 병원에서 미리 실험하는 시간을 가져볼랬었는데 영은이가 제지하며 날 설득했다.

“울 자기가 최하급 단계인 힐링 웨이브 1단계만 해도 전체 TP의 10%, 한 번에 70만 TP를 쓰게 되는데 돈으로 따지면 7,000억 원이란 가치가 되잖니? 물론 그것도 1단계로 회복될 때의 이야긴데 2단계 3단계로 넘어가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한번 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수많은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이 몰려들 텐데 그들을 모두 치료해줄 수 있냐.

그런 계획 없이 무작정 치료하기 시작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지 못한 채 불특정 다수에게만 혜택을 주다 보면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심하게 느낄 거고 그 결과는 나에 대한 비방과 비난으로 끝날 거라는 이야기로 날 제지해서 시험해보지 못했다.

확실히 제도적인 장치 없이 호의를 계속 베풀면 그걸 권리로 아는 인간들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재단을 통해 주기적으로 추첨해서 돈 없고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시달리는 애들을 한데 모아 힐링 웨이브를 쏴주던가 해볼까.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움직이려는 강기훈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혜령이 이모는 내 앞으로 달려오더니 내게 넙죽 절을 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흐흑.”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강기훈도 눈이 벌게진 채 힘겹게 움직이려 하는데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혜령이 이모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다가가서 갑작스레 움직이느라 상한 걸로 보이는 근육에 힐링 터치를 걸어주면서 말했다.

“됐어요 됐어요. 지금 억지로 움직이려다간 근육파열이 일어날 거 같으니 얌전히 있으세요. 그리고 혜령이 이모는 고마우면 그랑 블루를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주면 돼요.”

“마스터는 저희의 은인이세요. 당연히…. 흑.”

혜령이 이모는 힘겹게 몸을 꿈틀거리는 강기훈에게 달려가더니 그의 손을 잡고 연신 굵은 눈물방울을 흘렸다.

“그런데요, 저 벽에 걸어둔 이모의 누드 그림은 일부러 걸어둔 거죠?”

“하하하. 영이는 정말 아름답죠! 제게 과분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의 말씀대로 영이의 아름다움을 저희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봐주길 원해서 저렇게 입구 거실에 걸어놓은 겁니다.”

강기훈은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뺨을 부들부들 떨며 웃어 보였다.

“거봐!”

“아이참, 감동적인 순간인데…. 조용히 해요!”

프랑은 감동적인 순간에 산통을 다 깬다며 내 옆구리를 또 꼬집었다!

그 이후에 혜령이 이모는 거금을 들여 그랑 블루 종합 병원으로 이름을 바꾼 아빠의 병원 위층에 재활훈련센터를 만들어버렸고 그곳에서 강기훈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재활훈련에 힘을 썼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주변을 걸어 다닐 정도까지 몸이 회복됐지.

덕분에 매일 아침 일찍 주상복합빌딩 5층 옥상에 조성된 공원에서 산책길을 따라 산책하는 게 일과가 됐다고 들었다.

나와 화연이를 보고 방긋 웃어준 헤령이 이모는 다시 서류 더미에 집중하기 시작해서 화연이의 부드러운 허리를 끌어안고 집으로 공간 도약을 했다.

- 쥔님~!

“앗! 미호 너!”

거실에 나타나자마자 미호는 흰 여우 귀를 쫑긋하더니 번개같이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겨왔다. 녀석의 궁둥이를 토닥이면서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미호를 째려보는 프랑에게 말을 걸었다.

“공부는 잘돼?”

“어휴. 머리는 좋아서 배운 건 안 까먹는데 공부에 집중을 하지 않고 틈만 나면 도망칠 궁리만 해서 진도가 잘 안 나가요.”

- 공부 싫어~.

눈처럼 하얀 여우 귀를 파닥거리면서 울상을 짓는 미호는 프랑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내 가슴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미호는 내가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에 인성이라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과외 선생님을 불렀지만, 당최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이야기를 들어먹으려 하질 않았다.

상위 아종이 된 직후에는 이야기를 조금 듣나 싶더니 일주일 정도 지난 뒤부터는 시키면 책상 앞에 앉긴 하지만 공부를 하려고 하질 않았다.

결국, 27번째 과외선생님이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하고 도망쳐버려서 저번 주부터 프랑이 미호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지만….

“프랑도 무리입니까.”

“과외 선생님으로 초빙하신 분들보다는 말을 잘 듣지만…. 책상 앞에 앉아도 딴생각만 하네요. 거기에 조금만 신경을 돌려도 금세 도망 가려 하니 교육을 할 여건이 되질 않아요.”

“제가 한번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화연은 업무 때문에 바쁘잖아요? 저보다 화연의 말을 좀 더 잘 듣는걸 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프랑과 화연이 나누는 대화를 귀로 들으면서 거실에 놓인 앉은뱅이책상에 다가갔다.

책상에 다가가니 미호가 싫다는 듯이 여섯 꼬리를 붕붕 휘두른다. 손을 내려 흥분한 녀석의 꼬릴 쓸어주며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살펴보니 2달째 배우고 있는 사회생활과 윤리, 도덕책은 진도가 거의 안 나간 상태였다.

이러면 미호를 고위 아종으로 진화시키는 게 계속 늦어져서 곤란한데.

“…미호야.”

- 으응.

“미호는 2달 동안 놀고 싶어서 공부를 안 한 거야?”

- 으잉. 그게에….

“우리 미호는 주인님이 싫어?”

짐짓 슬프다는 표정으로 품에 안은 미호를 데리고 소파에 가서 앉으니 미호는 조그만 얼굴을 붕붕 젓더니 빽 하고 외친다

- 쥔님 무지무지 좋아! 진짜 좋아!!

“그래? 그런데 주인님은 미호가 공부를 안 해서 슬퍼질 거 같아. 미호는 공부하는 게 싫어?”

- 이잉….

여우 귀를 뒤로 젖히며 울상을 짓는 미호는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보더니 조그만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리며 무진장 고민하기 시작한다.

으음. 아무래도 진짜 공부하기 싫은 거 같은데 다른 수단을 내봐야 하나.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다가 삐뚤어지면 감당이 어려울 텐데.

“서하가 직접 가르치면….”

“…서하는 좋은 본보기라고 보기에는….”

“책에 대한 것만 가르치면 안 될….”

“그러다 나쁜 버릇이….”

…찌릿하고 두 연인을 노려보니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웃음을 참기 시작한다. 밤만 되면 힘들다고, 죽겠다고 찡찡거리면서 낮에는 날 놀려먹지 못해서 안달이네 그냥.

그러다 TV로 시선이 갔는데 얼마 전 학교에서 우연히 엿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TV로 EBS 다큐멘터리 하나 보고 싶은 게 있는데 동생이 TV를 차지해서 안 비켜줘. 진짜 짜증 나.-

-니 여동생 이제 7살 아니냐?-

-어, 근데 엄마가 이상한 물안경 쓴 펭귄이 나와서 착한 아이 교육하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줬더니 애가 비킬 생각을 안 해.-

-아, 꼬마 친구 뽀롱인지 뾰롱인지 그거?-

착한 아이 교육이라…. 내 가슴을 껴안고 교과서를 보면서 귀를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미호를 봤다.

“미호야. 미호는 만화 좋아해?”

- 응? 만화 좋아!

좋아. 재미없는 공부를 시키기보다 만화를 보여주면서 자연스레 공부를 유도하는 교육 만화를 보여주는 거야. 미호의 귀를 손으로 덮고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막으면서 프랑에게 말했다.

“프랑. 꼬마 친구 뽀롱인가 뾰롱인가 하는 애니메이션 찾아봐.”

“그건 뭔가요?”

“교육 만화라는데, 글밖에 없는 책으로 가르치는 거보다 TV로 유아용 만화를 보여주면서 하나씩 가르치는 게 좋을 거 같아.”

“아! 하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데 글밖에 없는 책으로 공부하는 건 재미없어하는 게 당연하겠네요.”

프랑은 바로 휴대폰을 들어서 검색을 시작하고 그 옆에서 화연이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뒤돌아서 소파에 앉으니 미호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우리 미호는 순 글자밖에 없는 책은 싫지?”

- 시러!

“그러니까 주인님이 만화를 보여줄 테니 그거 보여줄테니까 그거 다 보면 조금이라도 책을 보는거야. 알았지?”

- 응!

내가 만화를 보여준다는 이야기에 미호는 신나서 바동바동거리다가 내 허벅지를 밟고 일어서더니 내 뺨을 잡고 이마와 코에 마구마구 뽀뽀를 하기 시작한다.

미호의 따뜻하고 폭신폭신 보드라운 여우 귀와 꼬리를 간지럽히고 장난치고 있으려니 프랑은 휴대폰을 접고 TV를 켜서 VOD 목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오늘 뽀롱이와 친구들은 수영을 하러 바닷가로….]

곧이어 TV에는 설산을 배경으로 괴상한 노란 모자에 주황색 물안경을 낀 펭귄이 멜빵바지를 입은 북극곰과 분홍색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생물과 함께 헤헤 히히거리면서 웃고 노는 장면이 나온다.

- …!

그런데 화면이 전환되면서 다 함께 수영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악어가…. 악어는 파충류잖아? 어떻게 설원 지역에 있을 수 있지? 저거 이형종인가?

그리고 화면이 바뀌며 암컷 펭귄과 평범한 여우같이 생긴 게 나오더니…. 아니, 저거 악어 주제에 얼음물 속에서 멀쩡하게 어떻게 헤엄치는 거야?

- …….

미호는 그야말로 정신줄 놓고 입을 헤~ 벌리면서 TV 속으로 들어가 버릴 정도로 몰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거, 악어가 아니라…. 공룡?

여우는 곧 바닷속으로 뛰어드는데 그 모습을 본 미호도 여우 귀를 쫑긋하면서 발딱 일어선다. 물속에 뛰어든 여우는 바닷속 모래밭에 박혀버린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여우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 미호는…. 그래, 너도 여우 계통이니까 여우한테 감정이입이 되는가 보구나.

…어쨌든 미호를 편하게 돌려 앉혀주고 나도 같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니까 어린이 윤리와 도덕 교육이 적당히 섞여 있어 보인다.

TV를 집중해서 보는 미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온 프랑과 화연이를 보며 말했다.

“저 프로그램이라면 유아 윤리 의식 확보에 도움이 되는 거 같지?”

“그래. 저렇게 아이들이 몰입해서 볼 요소에 교육적 내용까지 혼합해놓다니, 대단하군.”

“와아. 미호가 이렇게 집중하는 건 처음 봤어요. 꼬마 친구 뽀롱이 나머지 편도 모두 구매할까요? 126편이나 있네요.”

한 편에 20분인가. 저걸 보여주고 도덕이랑 윤리 책을 잘게 쪼개서 그 뒤에 교육 시키면….

“다음 편에 나올 에피소드를 확인해서 도덕과 윤리 책으로 먼저 보여주고 이어서 뽀롱이를 보여주면 교육 효과가 더 나올 거 같은데.”

“아, 그거 좋겠네요.”

“뽀롱이를 미끼 삼아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 전에 짧게 교육하는 방식으로 해보자.”

“네!”

============================ 작품 후기 ============================

이렇게 미끼 상품을 내걸고 호갱.... 고객님을 모으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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