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276화 (276/517)

00276  그리고 2달이 흐르다.  =========================================================================

“생환했을 때 감별 검사를 하잖아요. 그때 알려줘야 했던걸 알려주지 않았었거든요. 그거 때문에 살짝 고생했던 생각이 떠올라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러 왔어요.”

내가 마나 시브의 효과로 인해 본의 아니게 2회차에 들어갔다가 심의회까지 열렸던 지난 일을 꺼냈더니 지부장 형의 얼굴이 떫은 감을 씹은 얼굴처럼 찡그려진다.

“생환자에게는 감별과 측정 때 생환자의 정보 관리에 및 취급에 대해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감별실에서 이루어진 조사 결과에 대한 이후 사항같은은 아무것도 못 들었었거든요?”

“크윽…! 그, 그럼 오소은 소장이나 우민구 박사님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온 건 아니라는 거지?”

“에이 참~. 형은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그분들이 자기 처우에 만족하고 있다면 제가 아무리 꼬셔도 안 올 테니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아, 혹시 불공정 노동 계약이라도 맺은 건가?”

능글거리면서 대답을 회피하니 지부장 형은 망자나 흘릴법한 신음을 흘리며 날 노려본다.

지부장 형은 무시하고 내가 검사를 받았던 감별 & 측정실로 들어가니 그날 처음 만났던 김은하 연구원이 날 발견하더니 깜짝 놀라면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머낭? 그랑 블루의 파괴신님!”

여전히 가벼운 말투의 김은하 연구원은 그때와 똑같은 의사 가운에 긴 머리 펌의 차분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파괴 신님이라니!

“머리 스타일 아니었으면 몰라볼 뻔했네요. 감별 측정실에는 어쩐 일로? 재검사받으러 온 건가요?”

방글방글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니 날 기억하고 있나 보다. 나도 씩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아뇨. 다른 용무로 찾아왔어요. 그나저나 누난 아직도….?”

처녀냐는 뜻으로 살짝 말을 얼버무렸더니 얼굴이 확 붉어지며 손에 들고 있던 기록철로 날 때리려 든다!

“어허, 어허! 형. 봤죠? 이 사람들이 절 이렇게 대했다니까요?”

“김은하 연구워어어어언…!!”

좋아 좋아. 건수가 하나씩 잡히고 있어. 김은하는 내 뒤에서 흉 신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지부장 형을 보더니 찔끔하고 놀라면서도 날 노려본다.

“안에 오소은 소장님은 있어요?”

공간 지각으로 있는 걸 확인하고 왔지만 예의 삼아 물어봤더니 빨개진 얼굴로 날 노려보며 기록철을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킥킥. 좀 이따 봐요.”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 ㄱ자로 꺾인 곳으로 돌아 감별실 입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감별기 앞에 앉아 논문을 들여다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오소은 소장이 보인다.

전에 봤을 때는 짧은 숏컷이었는데 지금은 등 어림까지 기른 긴 생머리의 오소은 소장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와 프랑, 지부장을 보고 입에 커피잔을 문 채 살짝 눈을 떴다. 오소은 소장은 한쪽 뺨이 볼록 튀어나와 있는데 설마 사탕 먹으면서 커피 마시는 거야?

오소은 소장은 날 보더니 커피와 논문을 서적을 내려놓고 눈을 반짝이면서 감별기를…. 왜 켜는 건데?

“저기요. 감별 받으러 온 거 아니거든요?”

그러자 무지 실망한 표정으로 감별기의 전원을 내린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의자에 앉은 오소은 소장은 다시 커피잔을 들어 호록거리면서 마시기 시작한다.

어째 처음 봤을 때는 할 말도 하고 그러더니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거 처럼 날 빤히 바라본다.

“…지부장으로서 저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 말 없군.”

일단 세게 나가볼까.

“오소은 소장님?”

“…?”

“제가 처음 감별 받으러 왔을 때, 기억나요?”

끄덕.

말 좀 하라고, 이 아줌마야! 고개만 까닥이는 모습에 한숨이 나올 거 같은 기분을 숨기면서 계속 말했다.

“그때 저한테 알려줬어야 했던 게 있었죠? 그리고 그걸 알려주지 않았었고요.”

그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니, 방금 멈칫했잖아! 왜 발뺌하는 건데!

“자질의 단계에 관해서만 설명해줬잖아요! 감별과 측정 이후 능력자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자동 등록되고 그 뒤에 이거저거 이야기해줘야 하는 게 있었다고 들었는데!”

도리도리!

“…아, 네. 그럼 법원에서 만나죠. 안 그래도 요즘 대 고소 시대를 열고 있는데 거기 한 명 더 추가해봐야겠네요.”

“잠시만요.”

썩은 표정으로 되돌아나가려니 그제야 오소은 소장은 어딘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커피잔에 뭔가를 뱉고 말을 꺼낸다.

“양치 중이어서 이야기 못한 건 미안해요. 그랑 블루 마스터 이야기대로 당시에는 그랑 블루 마스터의 살의에 놀란 상태라 깜빡하고 넘어가 버렸죠. 그건 기억나시나요.”

…커피 마시면서 양치라니? 저 하얗고 동그란 알사탕 같은 걸로? 오소은 소장의 정신이 안녕하신지 궁금하지만, 일단은 기억난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오소은 소장은 조용히 고개를 까닥이며 다시 입을 연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깜빡하고 있다가 그랑 블루 마스터가 2회차 이후 심의기관에서 심의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기억이 났었어요.”

“그 뒤에 물어보니까 자질에 관해 설명해줬으면서….”

궁시렁거리니까 슬쩍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연다.

“그랑 블루 마스터가 먼저 제 혼을 빼놓으셨지만, 저도 제 잘못을 인정하니 쌍방과실인 셈 치고 봐주시면 안 될까요.”

뭐, 이미 지난 일을 두고 왈가왈부해봤자 오소은 소장을 영입하는 데 방해만 될 테니 그 건에 관해서는 이만 접어두기로 했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본론을 꺼냈더니 흠칫하고 놀란 지부장이 내게 다가오려 하지만 프랑이 잽싸게 막아선다.

“잠깐, 무슨 부탁을 하려고! 프랑 씨, 잠시 비켜보시죠!”

“조용히 하세요. 우리 마스터가 이야기 중이잖아요?”

파직파직.

“…!! 아니, 잠깐…! 이봐!”

“무슨 부탁인가요?”

“간단해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돈을 더 받으면서 연구에 매진해 볼 생각 없어요?”

“아, 안돼~!”

쏘리. 나도 공격적인 헤드 헌팅이란걸 해보고 싶었어요.

절망감에 절규를 지르는 지부장 형은 무시하고 맑은 눈동자의 오소은 소장을 바라보니 그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IWO의 이형 생물학 박사이신 알티나 멜디오스 씨랑 그로키스 연구소의 위상 물리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드와이트 에델베르그 씨도 있어요. 오소은 소장님은 위상 성질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계시죠? 소장님도 우리 그랑 블루에 오시면 굉장히 기쁠 거에요.”

“…조금 고민해봐야 할 거 같네요.”

“오시면 능력자 연합에서 받는 보수의 두 배와 연구 성과보수는 온전히 박사님게 될 거에요. 고민이 끝나면 연락 주세요.”

고민에 잠긴 오소은 소장을 두고 감별 실을 걸어 나와 측정실로 걸어가려니 지부장이 발작을 일으키려 했지만 프랑이 매의 눈으로 막아서니 위궤양이 도진다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민구 박사는 외출 중이다. 그래서 인상이 희미한 조수 겸 연구원인 민나영과 불쌍한 모쏠녀 김은하에게 우민구 박사가 돌아오면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못 된 놈.”

“칭찬 감사.”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두 번 다시 오지 말라면서 손을 휘젓는 지부장 형에게 또 보자고 웃으면서 힐링 웨이브를 쏘아줬더니 흠칫하고 놀라버린다.

힐링 웨이브가 탈모는 모르겠지만, 위궤양에는 효과가 있는 거 같다. 이게 바로 병 주고 약 주고 지.

내가 TP를 주입해서 폐급 위상석을 신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걸 알게 된 이후로 화연이와 영은이는 주기적으로 폐급 고위 위상석과 폐급 상위 위상석을 모아왔었다.

그게 11월에 든 현재 고위급은 732개. 상위급은 85,700개를 모았는데, 얼마 전 화연이와 영은이가 폐급 위상석을 모으기 힘들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왜? 버려지는 폐급을 모두 다 거둬들인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구 나하구 화연이 닥치는 대로 폐급 위상석을 긁어모으니까 쌀나라 녀석이랑 이웃 나라 불곰 같은 녀석이 뭔가 눈치챈 거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영은이가 대량으로 폐급 위상석을 매입해버리니 미국이랑 러시아가 한국에서 어떤 신기술을 개발했길래 폐급 위상석을 그렇게 모으는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폐급 위상석을 더는 매물로 내놓지 않는 건 덤이었고.

우리가 마구 긁어모으니 저것들도 "혹시?" 하고 폐급 위상석을 손에 쥔 채 다시 연구팀을 투입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애초에 우린 신기술을 개발해서 재활용하려고 모은 게 아닌걸?

아무튼, 놈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할 무렵에는 생활동 꼭대기 층의 펜트하우스에 스파이와 도청 감청에 대한 대비를 확실히 해둬서 혹시나 놈들의 시선이 나한테 몰리더라도 우리 집안을 훔쳐볼 수 없게 해둔 상태다.

거기다 히아리드는 하루종일 빌딩 밖을 거닐거나 날아다니며 수상한 침입자나 능력자가 접근하면 잡아다가 경비팀에 넘기며 접근을 원천 봉쇄했고 집 안에는 미호가 하루종일 과외 선생님한테 시달리고 있는 데다 위상석을 보관해두는 방에는 능력자연합 측정실과 감별실 내벽 재료로 쓰이는 각종 전파 차단 물질로 도배해놨다.

거기에 나도 있으니까 첩자를 심거나 몰래 우리 집에 잠입해서 뭔갈 해보는 건 절대 무리다.

아무튼, 모아둔 8만 5천 개 가량의 상위 위상 석에 TP를 3배까지 꽉꽉 눌러 담아서 전부 충전하면 이것만 해도 770억 TP, 우리나라가 1년에 평균 1.1억가량의 TP를 쓴다고 하는데 이것만 해도 700년은 쓸 수 있는 양이다.

거기다 고위급 위상석 700개가량을 충전시키면 이것도 70억 TP거든. 죄다 충전시켜놓으면 에너지 걱정은 최소 500년가량은 없게 되니 강제 소환이 막혀서 위상석 공급이 멈춘다 해도 상관없다.

이 많은 위상석을 언제 다 충전시키냐 하겠지만, 충전이야 천천히 하면 되고 그 뒤에 이걸 죄다 판다고 치면 7경 원이 넘는 돈이 된다.

“7경 원이라니, 63조 달러…. 하앙!”

이걸 계산해본 영은이는 눈이 달러와 원화로 바뀌며 황홀해 하더라….

학교에 가서는 고위급 위상석을 충전하고 집에 와서는 상위 위상석을 충전하면서 두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니 겨울이 성큼 다가온 11월 중순이 될 때쯤에는 8만 개의 위상석 대부분을 충전할 수 있었다.

“오소은 소장이 능력자 연합을 나왔다고?”

“그래. 정식으로 능력자 연합을 나와 우리 그랑 블루 위상 과학 연구소와 계약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쳐왔다.”

“문제가 없다면 계약하기로 하자. 나중에 계약서 쓸 때 마나 비전이랑 마나 보이스로 찜해두기로 하고,”

“그래.”

한 달 전에 만든 위상 정보전략팀이 가져온 위상 세계 위치 정보 자료를 훑어보는데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내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는 화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더 할 말 있어?”

“…정말 대학은 안갈셈인가?”

“응. 이제 딱히 대학을 갈 필요는 없잖아? 그 시간에 내 할 일을 하는 게 더 나아.”

두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대부분 나는 구두로 명령을 내리면 누나나 누나의 보좌관으로 들어온 유채린과 혜령이 이모, 화연이가 일을 다 처리해주니 난 보고서만 받고 확인하면 되는 한가로운 생활을 보냈었다.

뭐 왼손에는 늘 폐급 위상석을 들고 충전하고 있었지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자료는 옆으로 치우고 나한테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고 결재를 시작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하철수 개자식이 위상 세계에 넘어간 지 이제 3달째야. 이제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니까 계속 자릴 지켜야지.”

“네가 의한 대학교에 들어온다면 기쁠 텐데.”

음. 수능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던가.

수능이 50일 정도 남았을 때부터 누나랑 화연이가 은근슬쩍 내게 의한 대학교에 원서를 넣는 게 어떻냐고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일부러 대학물 먹으러 갈 이유가 없어서 난 대학 안 간다고 선언해버렸더니 의한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누나랑 화연이는 무척이나 실망해버렸었다.

특히 화연이는 CC라도 노리고 있었던 건지 보기 드물게 잔뜩 실망한 표정이어서 사진을 찍어서 보관했지.

누나는….. 으음.

뭐랄까, 내가 친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날 대하는 태도가 조금 미지근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처럼 날 못살게 달달 볶던 게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날 싫어하게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전에는 누나가 엄마 버금가게 날 챙겨주고 잔소리하고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거든?

그래서 직접 물어봤었다.

“누나. 이제 나 챙겨주기 귀찮아진 거야?”

“…무슨 소리야?”

자기 집무실에서 유채린과 함께 나한테 올릴 보고서를 작성 중이던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면서 반문했다.

“내가 누나 친동생이 아니라는 걸 안 뒤로 챙겨주는 것도 줄고 잔소리도 없어졌잖아.”

“아냐. 절대아냐. 너도 자꾸 내가 귀찮다구 했었잖아. 이제 화연이도 있구 프랑 씨도 있으니까 그냥….”

“그럼 전 내려가서 마저 보고서를 정리하겠습니다.”

나와 누나의 대화에 자기가 있을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유채린은 짧은 단발을 찰랑거리며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그냥?”

“너도 다 컸으니까 그냥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한 누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등 뒤에 붉은 저녁노을이 지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할 뻔 했지만…. 얼굴은 왜 붉어지는 건데?

이 일 뒤로도 누나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동작으로 날 자꾸 피하고 스킨십도 확 줄어든 게 좀 불만이었지만 뭐…. 저렇게 대답하는데 나도 어린애처럼 달라붙어서 장난치기도 뭣해서 그냥 두고 보는 중이다.

다시 눈앞의 화연이한테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대학은 갈 생각 없어. 지난 6개월 동안 공부도 완전히 손 떼버렸는데 수능은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왔잖아. 괜히 시험을 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화연이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 책상에 손을 짚으며 이야기한다.

“상당히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도 기여 입학제도가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의한 대학교 역시 기여 입학 제도를 도입했어. 서하의 재단 운영영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부분과 그랑 블루 레이드 팀의 이득 및 소득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전부 서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서하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여 입학 대상자가 될 수 있어.”

“아니…. 공부는 둘째치고.”

과제도 무진장 나올 텐데 내 머리로 의한 대학교의 수준에 따라가긴 힘들다고! 이걸 내 입으로 내 연인한테 어떻게 이야기해!

오늘은 정말 작정하고 올라온 것인지 이번에는 책상을 돌아서 내게 다가오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아 맑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프랑이 있었으면 이쯤에 화연이를 말려줬을 텐데 프랑은 미호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있어서 화연이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그렇게 해 - 라고 한마디만 하면 바로 실행에 옮길 것처럼 뜨거운 눈으로 날 바라봐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뻔했다.

“…화연이는 나랑 캠퍼스 커플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런 이유도 있다.”

이번엔 화연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슬쩍 피하려 하길래 다시 물었다.

“그런 이유도 있다면, 다른 이유는?”

“…서하는 인간관계에 매우 서투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나는 서하가 대학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인관계를 배우길 권하고 싶다.”

어…. 음….

확실히 학교에 나가면 내게 접근하는 사람은 7명뿐이다. 거기에 트윈테일 학생회장을 더하면 +1명 정도 추가할 수 있긴 하지만….

한고은 수유리 강소라 김창현 조민호 강주찬의 패밀리 6명과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찾아온 영국의 공주인 리디아, 11월이 넘어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까지 날 학생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접근하는 학생회장인 이유미.

그 외에는 멀리서 날 훔쳐보는 애들뿐이다.

“레이드 팀에서도 대화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나. 시하와 나와 이혜령 부장, 가끔 만나는 박지웅 보스, 그보다 만나는 빈도가 줄은 차소영까지. 서하의 인간관계는 능력과 지위에 비해 극단적으로 좁다. 오죽하면 시사 칼럼에서는 너를 그랑 블루의 유령이라고 하겠나.”

“날 유령이라고 하다니, 무슨 뜻이야?”

“유령은 자신을 화나게 하는 존재에게만 해를 입힐 뿐, 그 자체는 무엇도 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듯 실체를 드러내지 않지.”

음. 이번 2달간은 정말 학교랑 집 겸 회사를 오가기만 하면서 위상석을 충전하느라 한 일이 없긴 하지.

“그럼 그렇게 생각하라고 해. 누가 뭐라든 나는 그랑 블루의 마스터고 레이드 팀은 내 능력으로 이루어진 장소잖아. 대인관계를 배울 필요가 있다면 그건 대학교가 아니라 국가 간의 외교나 우호의 장에서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요즘 학교에 가면 한고은 패밀리와 리디아를 제외하면 날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질 못해. 그 이유는 내 능력에 지위 덕분이겠지. 친구는 나와 비슷한 무력이나 비등한 사회적 위치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라면 상하 수직 관계가 될 뿐이잖아. 그런 거라면 굳이 대학교에 나가 때가 탄 계산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화연이는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한다. 놀란 토끼같은 모습이 된 화연이의 얼굴을 보며 슬쩍 웃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화연이가 바라던 CC를 이뤄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아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내 걱정은 괜한 기우에 불과했군.”

보고서 확인을 끝내고 결제한 다음 부드럽게 웃음 짓는 화연이의 뒷머리에 손을 대고 입을 맞춰주니 예쁘게 웃어준다.

서류를 정리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내미니 팔짱을 껴온다. 키가 화연이보다 조금 더 커져서 이제야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는 거 같아 흐뭇해졌다.

화연이와 팔짱을 끼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지난 2달 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지만, 화연이와 영은이가 모아둔 폐급 위상석을 모두 충전하고 하철수를 조지고 나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당분간 내 위상 세계를 떠돌아다닐 생각이다.

이건 프랑은 물론이고 화연이와 영은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나 혼자 하고 있는 생각이다.

문제는 그러러면 하철수, 그 개자식을 처리해야 마음 편하게 위상 세계로 떠날 수 있을 텐데 그 녀석이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이제는 가끔이지만 어느 정도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느낄 수 있게 된 예감이 알려준다.

조만간 하철수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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