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268화 (268/517)

00268  나는….  =========================================================================

12시간을 비행해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햇볕이 따가울 만치 쨍쨍한 한여름의 오후였다.

이글이글이라는 의성어가 이렇게나 어울릴 수 있을까. 비교적 선선한 영국에서 지내다가 중세 판타지인 과거로 넘어갔더니 그곳은 여름이 아니라 봄이나 가을 같은 느낌이었지. 그 덕분에 더 심하게 더위를 느끼는 거 같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경호 팀원들은 자동입국심사대로 우르르 몰려가고 아빠와 나는 귀국 절차도 없이 간단히 게이트를 통과해서 나오니 엄마와 누나, 화연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엄마와 누나, 밝은 얼굴로 날 보며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화연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목이 타는듯한 갈증이 느껴진다.

“아들, 어서 오렴. 런던 여행은 재미있었니?”

“응.”

“프랑 씨랑 스톤헨지에도 놀러 갔었다며? 어땠어?”

“그냥 그랬어.”

“식사는 잘 챙겨 먹은 건가? 조금 마른 거 같은데.”

“며칠 못 먹었었어.”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엄마랑 누나랑 화연이가 내게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대답해주고 있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누나와 화연이가 내 상태를 보더니 의아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저녁은 엄마가 힘 좀 써볼 테니 같이 집에서 먹자는 이야기에 집에 짐을 내려놓고 39층으로 내려왔다. 엄마랑 누나, 프랑과 화연이는 거실에 커다란 상을 펴놓고 음식을 한가득 준비하기 시작한다.

저녁 준비를 하다가 나랑 아빠를 마중 나온 거였나. 아빠는 바로 씻으러 들어가고 나는 거실에 앉아 멍하니 웃고 떠드는 우리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에는 내숭을 떨며 영은이도 도착했는데 아무도 눈치 못 채게끔 내게 윙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겨우 웃어줄 수 있었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푸짐한 음식이 차려있는 상을 가운데 두고 집안 분위기가 어색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항에서 나온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군.

보통 때였으면 누나의 장난을 맞받아치며 까불거렸을 내가 굳은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었으니까. 다들 조심스럽게 내 모습을 힐끔거리는 와중에 엄마가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들, 무슨 일 있었니? 고민이 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해보지 않으련?”

…가슴이 쿵쾅거린다.

머리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귓가에 왱왱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삼키고 있으니 다들 수저를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냥…. 말하지 말까.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프랑도 조용히 있을 테니 아무도 모를 텐데.

내가 아빠랑 엄마의 친아들이 아닌 건 상관없다. 나는 부모님을, 누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부모님도 누나도 날 사랑해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악마의 핏줄이라는 건…. 그건….

프랑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는데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엄마의 시선은 프랑에게 향한다.

“프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니? 아들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는구나.”

“그, 그건.”

우물거리며 말을 못하는 프랑은 "죄송해요." 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 모습에, 화연이와 영은이도 심상치 않은 일이라 느꼈는지 얼굴이 잔뜩 굳어지고 누나는 날 보더니 걱정이 흘러넘치는 듯한 얼굴로 이유도 모르면서 눈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빠도 수저를 놓고 조용히 내 모습을 바라보고 엄마도 아빠처럼 조용히 날 바라본다.

말하자.

“나…. 알아버렸어.”

“뭐, 뭘? 뭘 알아버렸단 거야?”

내가 입을 열자마자 누나는 참지 못하고 살짝 몸을 일으키며 울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재촉하듯 묻는다.

“내 친어머니는, 고모지?”

확 하고 굳어버리는 엄마와 아빠의 표정.

누나는 내 이야기에 "어?" 하고 당혹한 소릴 내면서 나랑 부모님의 표정을 번갈아 보더니 흡 하고 숨을 들이키지만 화연이와 영은이는 '그랬던가.', '그랬나?' 하는 비교적 담담한 모습이다.

“이건 괜찮아. 난 아빠랑 엄마랑 누나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건 괜찮아. 나도, 나도 아빠랑 엄마랑 누나랑 정말 좋아하니까.”

웃어야지. 웃겠다고 웃는데 내 표정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빠는 복잡한 심경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엄마랑 누나는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근데…. 그런데 내 영혼의 일부가 악마래. 악마의 혼혈이래.”

내 이야기에 아빠는 눈을 감아버리고 엄마는 여전히 굳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식탁을, 고개를 숙이고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빠는 눈을 뜨더니 굳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런 소릴 했느냐.”

저런 굳은 표정의 아빠는 처음 본다. 아빠는 이어진 내 말에 할 말을 잊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뮈르딘. 멀린이라고 부르는 아서 왕의 대마법사이자 현자가 그랬어.”

그리고 인증기를 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뮈르딘과 나눈 대화를 재생했다.

[“찾아온 건 네놈 년들이면서 왜 나한테 묻는 거냐.”]

[“아니야. 몸은 인간이지만 네 본질은 인간이 아니다.”]

[“그럼 그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겠지.”]

[“그 병원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영적인 부분도 검사해주냐? 네 녀석의 영靈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섞였어.”]

[“허허. 저러다 카멜롯을 날려버리겠구먼. 거기 아이야. 얼른 보듬어주어라. 저러다 폭주하면 수십만 명이 죽겠다.”]

[“으허허. 그야말로 선과 악이 한데 버무려진 혼돈이 형태를 이룬 모습이로다.”]

[“원래 인지를 벗어난 존재는 자신의 근본에 자연스레 다가서는 법이란다. 저 녀석이 날 찾아오게 된 것도 그에 따른 일환인게지.”]

[“헐헐. 용케도 여태까지 살아남았구만. 대부분은 10살이 넘기 전에 뒈지기 십상이거늘. 대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에 목숨도 부지하고 겨우 저 정도의 비틀린 성격으로 자란 것인지, 저놈을 양육한 양부모의 인성은 참으로 훌륭할 듯하군.”]

[“그뿐만 아니라 저 녀석의 음습하고 어두운 감정을 받아준 여인들이 넷이나 되는구만. 그 양부모와 세 연인들, 거기에 너도. 너희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나 마찬가지다.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

쉴 새 없이 재생되는 영상에 다들 충격먹은 표정이 됐다.

“내가, 이상함을 본격적으로 느꼈던 건 C 클래스에 올라서면서 한가지 꿈을, 환영을 본데서 시작했었어.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의문점이, 궁금한 점이 생겨나기 시작했었고, 뮈르딘 할배의 말을 들으면서 그 궁금증들이 하나로 묶이면서 확신했어.”

가슴이, 심장이 울렁거린다. 이제 되돌리지 못해. 상을 내려다보며 이게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는걸.”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집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프랑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고 엄마와 누나는 멍한 표정이, 화연이와 영은이도 잔뜩 굳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아서 이 자리를 뛰쳐나가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 무렵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날 끌어안았다.

누나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엉금엉금 기어와 엄마의 반대쪽에서 날 끌어안았다. 아빠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고 있었고 화연이와 영은이는 가만히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뭐라니. 그런 게 뭐라고 우리 아들 가슴을 아프게 하니.”

“히끅. 말도 안 돼. 니가 악마면 이 세상에는 악마보다 더한 괴물이 득실거리는 거야. 훌쩍. 넌 내 동생이야. 악마 같은 게 아니라구우. 흐윽.”

엄마와 누나가 날 붙잡고 울먹이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때 영은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서하야?”

“…어.”

“그래서 우리 서하 몸에 변화라도 생겨난…거니?”

그 말에 엄마랑 누나가 영은이를 홱 돌아보며 노려보는데 얼마나 기세가 흉흉한지 영은이가 찔끔 놀라면서 손을 파닥파닥 젓는다.

“아, 아아아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서하는 제가 보기에 아무 변화도 없어서! 저 영감탱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제 눈에는 언제나처럼 귀여운 서하만 보여서! 그래서 물어본 거에요!”

“제가 봐도 서하는 변한 부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모습인데 악마라니…. 차라리 저 영상의 늙은이가 악마라는게 더 신빙성이 높을거 같습니다.”

그때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더니, 조금 두꺼운 파일 철을 하나 가져왔다.

“…아들아. 상 좀 치우자.”

“어? 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흐끅 흐윽거리던 누나가 떨어져 나가고 엄마도 옆으로 살짝 비켜줘서 화연이와 함께 상을 물려놓고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좌우에서 날 껴안은 엄마와 누나의 온기를 느끼고 프랑과 화연이도 내 옆에 다가오고 영은이도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다가올 때 아빠가 내 앞에 앉아 서류철을 펼쳤다.

“저 자가 아서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뮈르딘이라니, 네가 지난 5일간 무슨 일을 겪은건지 궁금하다만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한 일인거 같다.”

그리고 펼친 서류철을 내 앞으로 밀어준다.

“네 어미인 수린의 건강검진표와 네가 수린이의 배에서 태어나고 그 뒤 매년 건강검진을 모은 서류철이다. 수린이와 같은 혈액형에 모자지간임을 알려주는 DNA 구조에 하나같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되어있다.”

그 서류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아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알려줘야 할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다만, 저런 노망난 영감쟁이때문에 이런 식으로 알려주게 될 줄 몰랐다. 네 말대로 네 친어머니는 여태까지 고모라고 생각했던 수린이다.”

역시….

“네가 그 영감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겠다. 하지만 이 아비가 보기에는 너는 여전히 우리 아들일 뿐인데 네 생각은 어떠냐.”

“나도 사람이야. 악마 같은 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내 혼이….”

“이 아비는 양의사라 영혼 같은 거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여전히 우리 아들이라는 거다. 그러니 믿어라. 네가 너 자신을 못 믿겠다면 널 믿는 가족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믿어라. 저 노망난 영감이 하는 이야기 따윈 신경 쓰지 말아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가면 되는 거다.”

“엄마도 이렇게 착한 우리 아들이 악마라는 건 믿을 수 없어. 지금까지 얼마나 착하고 귀여웠는데 악마의 핏줄이라니. 우리 아들은 18년간 쭉 착한 아들이었단다.”

“응….”

내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엄마가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내 등을 토닥여주고 누나는 아무 말 없이 날 꼭 껴안아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마. 비록 네 엄마가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너는 우리가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다. 이전처럼 앞으로도 우리를 아빠, 엄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응.”

프랑은 잘됐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며 활짝 웃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 누나는 내가 악마의 핏줄이라는데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화연이와 영은이도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식어버린 저녁을 먹은 뒤 아빠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날 데리고 서재로 들어왔다. 누나도 따라 들어오려 했지만 아빠의 제지와 엄마한테 붙잡혀서 거실로 끌려가 버리고 서재에는 아빠랑 나랑 단둘만 남게 되었다.

내 꿈을 통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아빠는 침중한 표정으로 창밖의 야경을 바라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고모가 죽은 시기랑 내가 태어난 시기가 안 맞는 거?”

“그래. 네 어미인 수린은…. 위상 세계에서 생환한 뒤로 날마다 멍하니 있었지만, 외부의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어 가만히 있으면 정신 이상에 걸렸다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조용한 모습이었다.”

Topological Space Mental Disorder, 위상 공간 정신 장애.

천천히 과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아빠의 입에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린은 온몸에 심각한 상처와 오른팔과 오른발만, 그나마도 수 센티미터의 구멍이 난 팔다리로 생환했다. 사람들은 경악했지. 대체 위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고문을 받은 것 같은 상처를 가지고 생환하게 된 거냐고. 그러는 와중에 수린이 한쪽 팔과 한 다리만으로 달려들어 남자 의사 하나를 과도로 찔러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아빠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지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이 없던 수린이 일으킨 난데없는 살인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나와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위상 세계에서 그렇게나 험한 꼴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의사라는 작자가….”

알고 보니 외부의 자극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머니를 음심을 품은 의사한 놈이 어머니를 덮쳤던 거다.

어머니 손에 죽은 그자는 어머니를 강간한 놈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죽은 그 작자가 내 아버지라니, 보통 때였다면 넋을 잃었겠지만, 그보다 내 혼에 악마의 그것이 섞였다는 더 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 지금은 괜찮다.

그럼 어머니가 그 의사라는 작자의 씨를 받아서 날 임신할 때 체내에 남아있던 악마의 정에 내가 영향을 받았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지만 일단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능력자로서 일반인 살인을 저질렀지만 큰 처벌은 받지 않았다.

죽은 의사의 유가족들이 날뛰었지만 드러난 정황이 뚜렷한 데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상황, 거기에 어머니는 정신 장애 판정을 받은 심신 미약 상태였으며 담당 의사면서도 환자에게 강간을 저지른 그 인간의 죄목까지 참작되어 감옥에 가지 않고 능력자용 특수 병원에 이송되었다.

그리고 정신 장애 2급이었던 어머니는 재조정을 받아 1급 판정을 받고 격리 구금되었다.

그날 이후 아빠와 할머니는 국가와 능력자 연합과 능력자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으셨다. 당신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였다. 어머니를 시골의 집에서 요양시키겠다며 격리 조치를 풀어달라는 상소였다.

“생환 직후 치료와 보호를 받으며 능력자 연합에서 측정과 감별을 받은 수린은 H 클래스의 감지 능력자였다. 그저 일반인보다 몸이 약간 튼튼하게 변하는 것과 감지 능력이 생긴 것 이외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는 능력자였기에 상급 법원은 수린이 요양 겸 시골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우리에게 손을 들어주었지.”

능력자 연합도 특수 인증기를 어머니에게 부착해 위치 파악을 하는 것으로 아빠와 할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만신창이로 생환한 여성 능력자에게 일반인 의사가 강간을 저질렀고, 그 피해자의 집안에서는 이미 2명의 위상 세계 피해자가 나왔다는 점이 매스컴을 타며 여론의 집중을 받으니 국가나 능력자 연합으로서는 강하게 나갈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상을 느낀 건 집에 데려온 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를 보살피던 할머니는 문득 어머니의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진료장비를 가지고 집에 도착해 수린을 진찰한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뱃속에 내가 자라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빠와 할머니는 반쯤 패닉에 빠졌다. 임신이라니, 어디서 임신을 한 거란 말인가. 6개월 전의 그 일? 하지만 그건 24주 전의 일이다.

임신 24주라면 눈에 띌 만큼 배가 불러와야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얼핏 보면 임신 한지 안 한 지도 모를 만큼의 배가 불러온 상황.

…아빠는 나와 어머니를 위해 밤잠까지 줄여가며 산부인과를 따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한밤중에 아는 사람의 개인병원에 몰래 어머니를 데려온 아빠는 어머니를 진찰대에 올리고 어머니를 다시 한 번 진찰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배 속에 있던 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두 팔에 두 다리. 생김새는 여느 평범한 아기와 다를 바 없었지만 성장 속도는 일반 태아의 반의반도 안되는 점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24주차였던 너의 몸집은 7주차 태아 수준이었지. 하지만 몸의 형태는 6개월 차 아기 수준이었다.”

아빠는 명백히 이상한 모습에 걱정하고 어떻게든 그 이유를 파악해보려 했지만 결국 밝혀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알리지도 못한 상태로 4개월이 지났을 때.

내가 태어났다.

아빠는 이 일이 밖으로 알려져서 좋아질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다.

10개월이라고 해도 다른 아기들에 비해 몸집이 반도 되지 않은 나는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할머니와 아빠는 어른의 손바닥 두 개를 마주한 것과 비슷한 크기의 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미숙아였냐고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고 극히 조심스레 검사해본 결과 난 그저 작을 뿐 다른 아기들과 다를 게 없었단다.

“큰 고통 없이 널 출산한 수린은 남은 팔로 조심스레 널 안고 젖을 먹이며 잠깐 이성이 돌아온 모습을 보였다. 그때, 그때 너와 수린의 곁을 내가 지켜줬어야 했는데….”

등을 보이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서 괴로움이 가슴 아프게 전해져온다.

“며칠간 네게 젖을 먹이는 수린은 정신이 점점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서 안심했었다. 이대로라면 곧 정신을 되찾을 거 같았지. 그 틈에 나는 급한 볼일을 처리하고 당분간 너와 수린의 곁에 머물 요량으로 준비를 위해 서울로 돌아왔었다.”

그렇게 학교로 돌아갔던 아빠는 다음날 할머니의 오열이 섞인 전화를 받고 급히 시골의 집에 내려왔을 땐…. 창틀에 끈을 걸어 목을 매단 채 자살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린이 시골의 어머니 집에 있는 동안 그 녀석의 수발을 들며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 갖은 수를 써봤지만, 녀석은 끝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그렇게 녀석은 어머니와 나와 너만 두고 육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하늘나라로 가버린 거다.”

“…….”

허탈한 모습을 보이는 아빠를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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