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4 이상한 세계의 카멜롯. =========================================================================
프랑의 공간 지각 범위 안에 카멜롯 성이 들어오게끔 이동했더니 입을 살짝 벌리다가 감탄사를 터트린다.
“카멜롯 성이 윈저 성이랑 무척이나 흡사해요!”
“그래?”
난 윈저 성은 모르는데.
카멜롯 성은 어퍼 타운의 중심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길고 네모난 술잔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퍼 타운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외에도 한 겹의 성벽을 더 치고 있었다.
대충 살펴보니 강이 보이는 곳에 예배당처럼 보이는 곳과 왕궁처럼 보이는 거대한 저택이 세워져 있었고 중심에 20m 높이의 동그란 탑이 서 있었다.
예배당과 궁전이 있는 반대편. 술잔의 바닥처럼 보이는 곳에는 대장간이랑 마구간에 병기창과 기사단 숙소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몰려 있다.
“우웅…. 그런데 기사들은 다들 똑같은 복장이네요. 특출난 능력자들도 안 보이는걸 보면 모두들 출정 나갔나 봐요….”
“원정으로 뛰어난 기사들은 전부 나간 건가? 그래도 본진을 지킬 병력은 남겨뒀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하는 프랑의 옆에서 카멜롯 성 내부를 쭉 살펴보니 가장 높은 위상력을 가진 능력자가 12,000 TP의 E 클래스다. 그 외에 대부분이 위상력 1,000을 채 못 넘기는 F 클래스 이하의 신체 강화 능력자고 가장 많은 숫자가 위상력 50에서 99 사이의 H 클래스였다.
“E 클래스가 가장 높은 능력자라니, 조금 실망이야.”
무엇보다 능력자는 죄다 신체 강화만 보이고 속성이나 회복 능력자는 존재하질 않는다. 물론 드문 타입 능력자도 마찬가지.
카멜롯이 지금 브리튼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듯한데 카멜롯 성 안에 고작 저만한 능력자밖에 없으니 다른 나라도 비슷하면 비슷했지 이보다 수준이 높을 거 같진 않다.
거기다 위상력이 깃든 아이템이라도 있을까 싶어 카멜롯 성을 찬찬히 살펴봤는데 약간 미묘한 느낌의 녹색 천 허리띠라거나 갑옷, 기묘한 느낌이 드는 물방울 모양 방패 같은 게 있는 보물창고가 보였지만 눈에 확 들어올 만큼 위상력이 가득 깃든 물건도 없었다.
당연히 엑스칼리버는 아서 왕이 가지고 갔을 것이고 원탁의 기사들이 쓰고 다녔다는 아이템들도 모두 자기가 직접 쓰고 있겠지.
카멜롯 성 주변을 걸어 다니며 좀 더 성의 내부를 살펴봤는데 거대한 저택 뒤편의 장미가 가득한 정원에 프랑보단 못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발의 여성이 푸른색의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티 타임 중이었다.
그 뒤에 성에서 단 한 명뿐인 E 클래스 신체 강화 능력자인 여기사 한 명이 호위하고 있는 걸 보면 혹시 저 여자가 기네비어 왕비가 아닐까?
예쁜가?'라고 묻는다면 확실히 예쁜 얼굴이긴 하지만…. 몸 안을 투시해봤지만 위상력도 뭣도 없고 근력도 형편없고…. 그냥 꽃병의 꽃 같은 여자라서 신경을 꺼버렸다.
왠지 모르게 백치미가 느껴지는 게 별로 호감 가는 타입은 아니다. 저런 여자 옆에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떼쓰는 거 들어주느라 고생만 할 거 같은 느낌이랄까.
“원탁의 기사의 숫자는 이야기마다 다르지만, 최소 13명일 텐데 성안에는 한 명도 없는 거 같아요….”
원탁의 기사에 여자 기사가 있단 이야기는 못 들어봤으니까 저 E 클래스 능력자는 원탁의 기사가 아니겠지.
어퍼 타운을 거닐며 카멜롯 성을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던 프랑은 원탁의 기사로 보이는 자를 찾지 못해서인지 잔뜩 실망해버렸다.
원탁의 기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원인이라는 50명은 족히 앉을법한 거대한 원형 나무 탁자가 있는 타워라던가 화려한 장식과 높은 단 위에 있는 두 개의 왕좌 같은 게 보였지만 딱히 내 흥미를 끌진 않았다.
아, 왕좌의 뒤편에는 나무 창대에 기다란 칼날 같은 게 달린 베기에 적합해 보이는 창이 한 자루 걸려있었는데 거기서도 기이한 느낌이 느껴진다. 위상력은 확실히 아닌데 대체 뭘까?
…그런데 저 할배는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뮈르딘은 성벽 안에 기묘한 문양의 태피스트리가 잔뜩 걸려있는 데다 알 수 없는 식물과 기이한 도구들이 잔뜩 늘어져 있는 방 안에 한 여성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여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 어림까지 기른 창백한 피부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하얀색의 반투명한 로브에 푸른색 숄을 걸치고 있었다.
반투명한 로브는 신체의 굴곡을 여과 없이 비추는 데다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유두가 도드라져 보이고 반투명한 로브 너머로 앙증맞게 자라있는 새카만 음모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어 무척이나 선정적이고 색스러운 모습이었다.
특히 오른쪽 눈에 별 모양의 눈물점이 찍혀있어서 더욱 색기가 넘쳐 보인다. 거기다 심장을 보니 617의 위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F 클래스의 신체 강화 능력자다.
육체가 오밀조밀한 근육으로 가득 찬 탄력이 넘치는 몸이라 무척이나 건강해 보인다. 근데 복장이 기사 같아 보이진 않는데…. 외모나 복장을 보면 마녀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순간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을 홱 돌아봐서 살짝 놀랬다. 만약 벽이 없었다면 눈이 마주치지 않았을까.
뮈르딘은 그런 여자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데 혀 차는 소릴 들은 여자는 다시 시선을 뮈르딘에게 향했다.
“돌아가자.”
순간적이지만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의 눈은 기묘한 빛을 번뜩였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프랑의 손을 잡고 뮈르딘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튼, 프랑이 도시 구경을 하길 원해서 돌아다녔지만, 프랑과 함께 중세 시대 도시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건 생각외로 즐거웠다.
화폐가 없어서 아쉽게도 군것질 같은 건 못했지만,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프랑은 무척이나 즐거워했고 나도 어두침침한 마음이 다소 풀릴 만큼 즐거웠기 때문에 마지막에 본 검은 머리의 여자는 금방 머릿속에서 털어낼 수 있었다.
“허허허. 여자는 항구, 남자는 배지. 암.”
밤늦게 돌아온 뮈르딘은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나와 프랑을 번갈아 보더니 헐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프랑은 빨개진 얼굴로 내 뒤에 숨어 버렸다.
“시끄러워요. 그런 중후한 목소리로 변태 같은 헛소리나 하고, 목소리가 아깝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프랑을 보다가 불퉁한 기분에 톡 쏘듯이 말을 내뱉었지만 뮈르딘은 헝클어진 백발과 다듬지 않아 흉하게 난 수염에 잔뜩 주름진 얼굴로 허허하고 웃으면서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 와서 앉는다.
“카멜롯 성을 제집처럼 돌아다닌 기분이 어떠하신가, 레전드 양반?”
“아는 척 잔뜩 하더니 그것도 몰라요?”
“아는 척이 아니라 진실이거늘, 건방진 꼬맹이로다. 네 녀석의 세상에는 노인 공경도 없냐.”
“…!”
삐걱거리는 흔들의자에 등을 기댄 뮈르딘 할배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에 내 품에 안긴 프랑은 놀라서 뮈르딘 할배를 돌아보더니 날 올려다본다.
우리 세상이라니, 꼭 우리 현실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놀란 강아지처럼 눈이 동그래진 프랑은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눈으로 뮈르딘을 바라본다.
그런 눈을 보여주면 다 눈치채잖아. 손을 들어 프랑의 뒷머리를 쓸어내려 주며 할배한테 물었다.
“절 왜 자꾸 레전드라고 하는 거에요? 전 그냥 평범….”
…이젠 평범하진 않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렸더니 할배는 끌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크흘흘. 인간의 몸에 인마 혼혈의 영을 가진 주제에 인성을 잃지 않은 네 녀석이 레전드리하지 않다면 무엇이 레전드리할꼬.”
밉살맞은 말투의 할배를 살짝 노려보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이야기보단 그냥 어제 물어보려다 말았던 거나 물어봐야지.
“이 세상은 어떻게 된 거에요?”
“뭐가 말이냐?”
알면서 물어보네. 물어보면 노인 공경을 잘하는 내가 친절하게 이야기해줘야지.
“오늘 카멜롯 성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현시대랑은 맞지 않는 관념을 몇 개 봤어요. 상·하수처리장이라거나 공동 목욕탕이라거나 가로등에 마치 계획도시마냥 구역이 나뉘어있는 잘 짜인 모습이라거나….”
뮈르딘은 딱히 별말 없이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앞뒤로 흔들거린다.
“어떻게 된 거에요? 제가 있던 세계에서 여길 넘어오는 방법이 존재하는 거나 근원의 힘이라는 게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떻게 우리 세계와 연결됐는지 그것도 의문이에요.”
“허어.”
뮈르딘 할배는 계속 헛웃음만 내면서 대답을 해주지 않아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살던 세계에 뮈르딘은 멀린이라고 불리우고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는 소설로만 존재하고 있어요.”
“우리를 이야기 속의 존재로 여긴다니, 발칙한 것들이로고.”
끌끌 혀를 차며 엉망진창인 수염을 손을 갈퀴처럼 쓸어내리는 뮈르딘은 자기들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라고 해도 마음 상했다는 표정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지만, 우리가 글로 적어 쌓아온 역사와 이 세계를 비교해보면…. 같은 장소지만 다른 세계 같아요. 그러니 알고 계신 게 있다면 가르쳐주세요. 그 전설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면 뮈르딘은 현자이자 대마법사이고 드루이드이기도 하잖아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뮈르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흐으으으음. 네 녀석의 처지에서 본다면 머나먼 과거와 과거, 그리고 현재겠지.”
“여기가 과거라고요?”
“흘흘흘. 내 입장에서는 네 녀석과 거기 처자는 미래. 나는 현재, 그곳은 과거지.”
…대충 이해가 가는 거 같다. 우리가 위상 세계라고 불리는 그곳은 한번 역사가 리셋된 지구겠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요?”
“알다마다. 예전에 날 찾아온 불쟁이 녀석에게서 들어보니 네 녀석들의 세계는 어처구니없는 곳이 되었더구나.”
불쟁이? 우리 세계라니, 설마….
“그 불쟁이 이름이 제랄 패커드 아니에요?”
“알고 있었느냐?”
“와, 역시 이곳에 있었나보네요. 그 사람은 어디있는데요?”
픽 하고 콧방귀를 낀 뮈르딘은 심드렁하니 입을열었다.
“그 불쟁이놈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다짜고짜 덤벼들길래 어딘가로 날려버렸지.”
…그 일은 뭐 중요한 게 아니니 다시 물었다.
“어쨌든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건데요?”
“너무 맨입으로 들으려 하는 거 아니냐. 세상 살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제 능력을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면 미래의 브리튼을 나름 신경 써줄 테니 이야기해줘 봐요.”
뮈르딘은 엉망으로 자라있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날 어처구니없는 놈 보듯이 보다가 초롱초롱한 프랑의 눈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리고 다시 의자를 흔들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 네놈들의 머리만 좋아지고 지나치게 살기 편해진 탓인 게야.”
이어진 뮈르딘의 말로는 현실에 사람들이 강제소환되기 시작하는 이유는 위상력의 불균형에서 오는 차원의 비틀림이 원인이라고 했다.
“근원의 힘이 생겨나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신앙이 있겠지.”
미지? 미지 未知를 말하는 건가? 그게 왜?
“미지에 대한 동경과 경외를 가지고 정진을 하며, 미지를 두려워하고 신앙을 가진 자는 몸 안에 근원을 받아들이고 힘으로 개화시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어…. 능력자를 말하는 건가? 각성할 때 위상력을 받아들여서 각성하고 능력자가 되니까….
“그리고 죽을 때면 몸에 축적된 근원이 세상에 퍼져나가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렇게 퍼져나온 근원은 끊임없이 이 세계를 순환하며 비틀리고 일그러진 세계를 수복하는 데 쓰인단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하나의 폭탄이 떨어졌으니, 바로 전기의 발견과 전구의 발명이라고 했다.
미지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는 게 뮈르딘의 이야기다. 어떻게 전기와 전구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고 일단은 계속 듣기만 했다.
미지를 품은 어둠은 전구의 발명과 전기의 발전으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그 힘이 축소되어갔다.
전통과 미신을 멀리하고 과학을 가까이하니 지식은 늘어나지만, 정신이 나약해졌다. 사람의 상상력과 두려움에서 원동력을 얻게 되는 미지의 축소는 고스란히 근원의 감소로 이어졌다.
특히 인터넷이 만들어지고 휴대폰이 생겨나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딜레이 없이 손쉽게 대화를 나누는 세상이 고작 몇십 년 사이에 이루어지며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해버렸으니….
“과학이 발달하고 인터넷이 퍼지면서 미지에 관한 두려움과 신앙이 줄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거라고요?”
“그래. 단시일에 급격한 발전을 이룬 네 녀석의 세계는…. 세계가 미처 대비책을 내세우기도 전에 근원이 메말라버린 거지. 근원이 메마르니 비틀리고 일그러진 세계는 수복이 되지 않고 비틀리고 비틀리다 못해 끊어지기 직전이 된 게다. 그 결과 미지는 줄어들고 신기는 사라지고 초현실적인 이능과 기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잊혀져 단순한 이야기와 전설로 폄하되어 그 신격마저 지워졌다.”
…그 결과가 이형종이 등장하는 위상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연결인가.
“그 과학이란 것이 발전하고 지식이 쌓이면 자연히 미지에 대한 공포도 줄어들지 않느냐. 이 세계의 인간들은 먹구름 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은 신의 분노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너는 어떠냐.”
“기상악화로 구름과 지표면 사이에서 공중 전기의 방전이 일어나는걸 말하는 거죠.”
“것 봐라.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이라곤 개뿔도 없지 않냐.”
“그럼 어떻게 해야 강제 소환이 멈추는데요?”
“냅둬.”
“…네?”
“내버려두면 멈춘다. 언젠가는.”
“아 뭐에요 그게. 확 마탄 쏴서 카멜롯 성벽을 무너트려 버릴까보다.”
“떽!!”
뮈르딘은 내 말에 역정을 내며 흔들의자의 팔걸이를 탁탁 내려치면서 날 노려봤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고 뮈르딘을 노려보니 "에잉."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에잉. 이런 호랑 말코 같은 놈. 네 녀석의 세계와 연결된 세계의 근원의 격차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느냐.”
“…비교도 못 하죠.”
“바로 그거다.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근원의 양이 과거와 크게 벌어지니 네 녀석의 세계는 과거의 시간 축과 연결되면서, 아니 연결이 아니라 숫제 구멍이 뚫려버리면서 근원이 흘러들어와 자정작용과 함께 세계의 수복이 시작된 거다. 그게 뭘 말하는지 알겠느냐?”
…위상 세계에 주기적으로 강제로 소환된 사람의 자리에 무지개 물방울이 생기고, 죽으면서 현실에 나타난 무지갯빛 물방울이 터지는 게 그런 이유에서였어?
“그럼 과거의 위상력이 계속 현재로 밀려들어 와 과거의 위상력이 모자라게 되면 어떻게 돼요?”
“클. 인간은 가장 큰 근원력의 생성기다.”
“…빌어먹을 일이네요.”
위상 세계에서 죽는 사람이 있는 이상 과거의 위상력이 사라질 이유는 없다는 건가.
“그러니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그냥 기다려. 기다리다 보면 사라진다. 그게 500년이 되었든 1000년이 되었든.”
…적당한 위상력이 세상에 퍼질 때까지 기다리라니,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줄 알고….
거기다 현실에 위상력이 가득 퍼지게 되면 동물들이 위상력을 흡수해서 이형종화 하겠군.
그렇게 능력자들이 현실에서 나타난 이형종과 싸우다 죽어가 나게 되면 위상력은 점점 불어날 테고 그럼 불어난 위상력에 현실에서도 각성해서 능력자가 되는 사람도 나올 테고 능력자들은 현실에서 변이하는 이형종과 싸우면서 위상력을 점점 불려 나가는 건가.
이게 사람이 우주로 나갈 만큼 과학이 발전한 대가라고?
“하아….”
무슨 아침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난데없는 출생의 비밀에 세계의 진실까지 알게 되니 참 기분이….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걸 떠올렸더니 다시 우울해질 거 같지만,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프랑 덕분에 우울함은 금방 사라졌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악마와…. 혼혈이라는 걸 아셨어요?
“…클.”
뮈르딘은 그냥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세계의 비밀같이 비밀스럽고 무거운 내용은 잘도 말하더니 뭔가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는 거 같다.
“…혹시 제 어머니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아요?”
“몰라.”
“…….”
뮈르딘의 모른다는 말에 가슴이 콱 멨다.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그건 어쨌든 이제는 뮈르딘에 대해 의문점이 든다.
“뮈르딘은 왜 생판 모르는 남인 우리한테 그런걸 알려주는 거에요?”
“널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브리튼의 미래 때문이지.”
“…?”
“네 녀석을 보고 있자면 마치….”
마치? 뮈르딘의 이어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만 기분이 잔뜩 가라앉은 노망난 얼굴이라 어째 더는 말 안 할 거 같다.
전기나 전구에 대한 거, 이 세계에는 없을 코스프레라는 의미에 대해 아는 걸 물어보고 싶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말았다.
그 제랄 패커드라는 사람이 알려줬겠지.
눈을 감은 채 연신 수염을 쓸어내리는 뮈르딘의 왜소한 몸집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고마워요. 멀린. 현실로 돌아가면 적어도 영국이 막장 짓을 해서 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힘써볼게요.”
“불쟁이 놈도 그렇고 네놈도 왜 자꾸 날 멀린이라고 부르는 거냐. 내 이름은 뮈르딘이라니까! M Y R D D I N E !!”
“알고 있어요. 표정이 더욱 노망난 할배같에서 불러봤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
뭐 이런 놈이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어이없이 바라보던 뮈르딘은 이내 같잖다는 듯 비웃으며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노망난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까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군.
“저 아가씨도 네 녀석처럼 이미 이계에 한 발을 들여놓은 상태라 인간으로 돌아갈 방법 따윈 없다고 말해 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안 해줄 거라면서 다 말해주네.
“…뮈르딘은 전지한 존재에요?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다 아는 거에요?”
“전지全知 하지 않지만 만지萬知 정도는 되지. 네 녀석이 피워올리는 감정의 파동…. 아 됐고. 인제 그만 네 갈 길 가라. 이제는 알려줄 것도 없고 네 녀석의 등신 같은 호기심에 성가신 아이가 네게 눈독을 들였다. 여기에 오래 있어 봤자 좋아질게 없어.”
중후한 목소리로 진지한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낮에 카멜롯 성에서 본 검은 머리의…. 색정적이고 야한 옷차림의 마녀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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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