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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스-261화 (261/517)

00261  멀린, 그리고....  =========================================================================

반달이 머리 위에 올라올 때까지 사람은커녕 작은 새 한 마리도 공간 지각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지표면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아, 비 온다….”

프랑의 중얼거림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빗방울이 모닥불에 떨어져 치직, 치칙칙 거리는 소리를 낸다. 귓가에, 머리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눈썹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 읔! 눈에 들어왔다!

눈에 떨어진 빗방울 때문에 눈을 비비며 공간 지각으로 오두막 안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랬더니 그제야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오두막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아깐 왜 먼지에 신경을 못 썼지?

“…오두막에 쌓인 먼지를 보니까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좀 오래된 거 같아. 집주인이 자릴 비운 지 오래 됐나 본데?”

“그래도 안 돼요!”

“어?”

“…네?”

“뭐가 안된다는 거야?”

“앗, 아뇨 그게.”

얼굴이 붉어진 채 꼬물거리면서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프랑의 허리를 콱 잡으면서 으르렁거리듯이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건 아니지? 그치?”

“히익.”

어깨를 움츠리며 새된 비명을 지르는 프랑의 몸을 슬금슬금 다듬으며 오슬오슬 소름이 돋은 프랑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말했다.

“난 그냥 집주인이 자릴 오래 비웠다고 한 말인데, 프랑은 내가 하고 싶어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고 안 된다고 한 거, 그런 건 아니지?”

“으구구.”

손을 올려 찹쌀떡 같은 프랑의 뺨을 죽죽 잡아당기다가 프랑의 정수리에 꿀밤 한대를 먹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주인이 얼마나 자릴 비웠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밤비를 맞으면서 날밤새고 싶진 않으니 실례를 해야겠다.

오두막집은 땅을 다져서 30cm가량 높게 만들어놓고 그 위에 통나무를 사각형 형태로 쌓고 삼각형 모양으로 지붕을 세운 모습이다. 비가 아니라 호우가 쏟아져도 멀쩡할 거 같다.

공간 지각으로 확인한 10평 정도 돼 보이는 오두막 내부는 돌로 쌓은 벽난로 하나와 나무로 된 침대 하나, 통나무 테이블 하나와 의자 4개. 나무를 이어서 만든 창문 두 개에 나무 선반이 집안 곳곳에 달린 무난한 모습이다.

한쪽 구석에 양철통이랑 걸레와 싸리로 엮은 빗자루도 보이니 청소는 할 수 있겠군.

“하룻밤 묶는 대신 청소나 해주고 가면 되겠지. 실례하겠습니다~.”

오두막집 입구에 서서 노크를 하고 마악 문을 열려는 순간.

-예의 바른 손님들이군.-

“?!”

“아!?”

중후하고 듣기 좋은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뭐지?

주변을 휙휙 둘러보지만 나와 프랑 외에 살아있는 존재나 위상력은 하나도 없다. 어디서 들려온 소리지?

-괜찮으니 들어와라.-

“서, 서하?”

“나도 들었어.”

중후하고 위엄이 넘치는 노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하는데, 이 집 주인의 목소리인가? 어디서 말하는 거야? 오두막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무척이나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퍼져서 절로 경계심이 풀어지게 하는데 경계심을 풀 수야 없지. 머리로 마나 시브를 보내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목소리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일단 목소리뿐이라지만 허락이 떨어졌으니 오두막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프랑이 황급히 내 손을 잡고 멈춰 세운다.

“서하!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문을 열면 안 돼요!”

-허허허. 경계심이 심한 아가씨로군.-

그야 아무런 모습도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려오는 데다, 그 목소리는 우릴 지켜보고 있는 거 같으니 경계하는 게 당연하잖아.

어서 떨어지자며 프랑이 팔을 잡고 자꾸 뒤로 잡아당겨서 어쩔까 하는데 오두막의 문이 달칵하고 제멋대로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보이는 오두막집 안의 모습에 등 뒤에 서 있던 프랑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나도 깜짝 놀라버렸다.

제멋대로 열린 통나무 문 안쪽에는 당연히 비쳐야 할 나무로 된 평범한 통나무 오두막집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돌벽으로 이루어진 석조 건물의 내부가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문밖으로 쏟아져나온 오렌지 색 불빛이 어두운 숲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프랑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열린 문의 안쪽을 바라보니 아무리 넓게 봐줘도 오두막의 10배는 넘을법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다 문이 열린 순간부터 포근하고 따스한 공기가 밀려 나온다.

그런데 공간 지각으로는 평범한 오두막 내부만 감지되고 있었다. 꼭, 공간과 공간의 벽을 접붙여서 전혀 다른 장소와 연결한 거 같은 모습이다.

석조 건물 내부에는 노망난 거 같은 외모의 늙은 할아버지가 갈색 로브를 걸친 채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경계는 그만하고 어서 들어와라. 여긴 그곳에서 300km 떨어진 북쪽의 도시일 뿐이다.”

문이 열리자 귓가에 묘하게 울리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저 중후하고 듣기 좋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나저나 여기서 300km 떨어진 북쪽 도시? 그럼 맨체스터가 있는 곳인데. 이 문턱을 넘어들어가도 되는 걸까 고민하면서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신데요?”

“허허허. 네가 가진 궁금증에 대한 답을 아는 자 정도일까. 아무튼, 훈훈한 열기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으니 얼른 들어와라. 차가운 공기는 늙은이의 몸에 좋지 않아.”

“…내가 가진 궁금증이라니, 꼭 사이비 점쟁이 같은 말을 하시네요. 제가 궁금한 게 뭔지 어떻게 아시는데요?”

투두둑거리면서 점점 비가 많이 쏟아진다. 머리에, 어깨 위에 쏟아지는 물방울에 몸이 젖어가기 시작한다.

“자식, 의심은 많아가지고. 이마와 관자놀이에 뿔이 난 푸른 피부의 악마. 이렇게 말하면 알겠느냐.”

갑자기 체통 없는 말투를 꺼낸 할아버지는 곧이어 내 머릿속에 벼락을 한방 떨어트렸다.

그 이야기에 계속 경계 중인 프랑의 손을 잡고 오두막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 서하?”

그리고 한 발을 오두막과 석조 건물의 경계를 넘어 내딛는 순간,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무척이나 강렬한 느낌이 전신에 날카롭게 스며든다.

…이게 공간 이동의 감각인가?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전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일깨워지는 듯한 신기한 감각, 이 감각을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따로 연습해봐야겠다.

덜거덕.

문이 닫히는 소리에 되돌아보니 프랑의 뒤로 닫혀버린 나무문이 보인다.

“앗?!”

깜짝 놀란 프랑이 황급히 달려가서 문을 열었는데 문밖으로는 스톤헨지가 있는 숲 속이 아니라 돌이 쌓여 만들어진 벽과 나무판이 이어져 있는 바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복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돌아서서 우릴 초대한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별꼴 다 본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신다.

“이 괴물 같은 녀석. 공간 이동의 원리를 그 와중에 깨달은 거냐.”

“네? 아, 그런 거 같네요. 요즘 제가 좀 잘나가서요.”

이제는 띠꺼운 표정으로 꼴아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무시하고 문을 통과하자마자 확 바뀐 지형을 공간 지각으로 훑어봤다.

동그란 타워 같은 5층짜리 건축물.

지금 나와 프랑이 있는 건물을 확인해보니 원형의 타워? 망루? 돌로 만들어진 5층 타워의 3층에 서 있었고 타워 밖으로 노망난 겉모습의 할아버지의 말대로 백 수십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가 보인다.

4.5km의 범위로도 전부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도시다.

우리 현실처럼 고층 아파트 같은데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게 아니라 2~3층. 높으면 5층 건물이 대부분인 도시에 백 수십만 명이라니, 도시가 엄청 크다.

문을 닫고 내 뒤에 선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프랑의 눈을 힐끔 보고 흔들의자에 앉아 허허 웃는 할아버지를 내려다봤다.

키는 똑바로 서도 130cm가 안될 거 같은 데다 왜소한 몸에 새하얗게 샌 풍성한 더벅머리와 다듬지 않아 지저분하게 난 수염, 잔뜩 주름진 얼굴이 안타까운 할아버지다.

“허허허. 더럽게 큰 놈이군. 퍼시발보다 더 크겠어. 거기다 아주 싸가지 없는 모습인데 거짓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무척이나 희한한 놈일세.”

긴장을 풀려고 일부러 잘난척한 건데…. 그보다 희한하다니, 뭐가 희한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까부터 묘하게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도 그렇고 거기서 오는 외모와의 격차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이상한 할아버지다.

내 뒤에 선 프랑은 퍼시발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일단 싸가지 없이 계속 나가보자.

“제가 좀 희귀하긴 하죠. 어쩌면 세상은 절 중심으로 돌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흐흐.”

“넌 주인공이 아니야. 그저 특별한 능력을 각성해서 레전더리할 뿐이지.”

“제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겉모습은 노망난 할아버지 같은데 목소리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다. 뭐냐고 대체.

툭툭 던지는 말 속에 그냥 무심히 넘기면 안될 거 같은 뜻이 내포되어있는 거 같다. 어깨에 내려앉은 물방울을 털고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잠시 생각해봤지만….

일부러 잘난 척, 싹수없어 보이게 하는 건 관두자. 이 할아버지 앞에서 가식 같은 거 보이면 안될 거 같아.

“…진짜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말하면 아냐?”

“그렇다고 말 안 하면 어떻게 알아요?”

“흘흘, 그건 그렇지. 뮈르딘이라고 불러라.”

“멀린!”

할아버지의 말에 내 옆에 서 있던 프랑이 깜짝 놀라며 외친다. 뭐? 뮈르딘이 멀린이라고?

프랑은 할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라고 난 프랑의 말에 깜짝 놀라고 할아버지는 프랑의 외침에 짜증을 버럭 냈다.

“뮈르딘이라니까! 네 녀석들은 남의 이름을 맘대로 바꿔 부르는 게 취미인 거냐!”

“아?! 아, 죄, 죄송해요.”

허둥거리면서 사과하는 프랑을 슬쩍 등으로 가리면서 멀린…이 아니고 뮈르딘이라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취미는 없어요. 그보다 우리를 부른 이유는 뭐에요? 그리고 푸른 피부의 악마에 대해서 어떻게 아시는거에요?”

“찾아온 건 네놈 년들이면서 왜 나한테 묻는 거냐.”

“…우린 스톤헨지를 보러 왔다가 밤이슬 피하려고 오두막에 들어가려 했을 뿐이지 할아버질 보러온 건 아니에요. 애초에 오두막의 주인이 누군지도 몰랐는걸요? 근데 할아버지가 우릴 불렀잖아요.”

“그러냐? 그 오두막은 내가 지어놓은 거라 거기 찾아온 손님들은 전부 나에게 연락이 와서 날 찾아온 줄 알았지.”

자신이 뮈르딘이라고 소개한 할아버지는 '아니면 말고.' 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날 힐끔 올려다보고서는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에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 희한한 놈일세. 대체 넌 뭐하는 놈이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진 않은데 이 할아버지는 목소리랑 외모랑 차이가 너무 심해서 대화에 집중이 잘 안 된다. 그나저나 내가 희한하다고?

거기다 진짜 멀린 맞아? 멀린이라면 그, 키 크고 뾰족 마법사 모자를 쓰고 하얀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후한 마법사 아냐? 아, 그건 간달프던가.

“이형종 사냥하는 놈인데요? 그러는 할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세요?”

“네 녀석은 인간이 맞긴 하냐?”

어째 내 질문에 대답은 안 해주고 자기 할 말만 하는 할아버지를 조금 입맛을 다시면서 대답했다.

“좀 비인간적으로 세긴 하지만 인간 맞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할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정말 싱숭생숭하다. 내가 푸른 악마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걸 아는 것도 좀 꺼림칙하고.

프랑 말대로 이 할아버지가 멀린이 맞다면, 이 왜소하고 노망난 거처럼 생긴 할아버지가 브리튼의 대 마법사이자 현자라는 거지?

그래서 목소리도 그렇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해서 알고 있는건가….

다시 머리로 마나 시브를 좀 더 많이 보내 머리를 보호하기 시작하니 뮈르딘은 같잖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더니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날 올려다본다.

“아니야. 몸은 인간이지만 네 본질은 인간이 아니다. 네 부모는 인간이 맞는거냐.”

“…? 우리 부모님은 순수 100% 인간 맞으신데요.”

“그럼 그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겠지.”

분명 지금 화내야 할 타이밍이 맞지? 근데 이 할아버지…. 할배의 목소리 때문에 화가 안 난다. 거기다 저 할배가 하는 말을 들으니까 몇 가지가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썩은 표정 봐라. 너도 짐작이 가는 게 있는거구만.”

“…그분들은 제 부모님이 맞아요.”

“누가 뭐라느냐. 낳은 부모와 길러준 부모가 다를 수도 있는 법은 의외로 흔하다.”

할배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심장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엄마랑 아빠가 내 친부모님이 아니라고?

이 순간 검은 성의 꿈에서 본 여자가 떠오르는 건 왜지?

벽난로에 피어오르는 노란 불이 날 잡아먹으려는듯이 일렁이며 샛노란 주둥이를 벌리는거처럼 아찔하다….

프랑은 나와 할배의 대화를 따라오기 힘든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할배를 번갈아 보고 있지만, 프랑의 이해를 도와주기보다 엉망진창이 되는 머릿속을 다스리기도 벅차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진정시키려 애쓰며 힘겹게 입을 뗐다.

“저, 저는 사람이에요. 병원에서 검사받을 때도 사람이랑 다를 게 없다고 나왔는데.”

“그 병원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영적인 부분도 검사해주냐? 네 녀석의 영靈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섞였어.”

아….

이 할배의 말이 열쇠가 되어 머릿속에서 맴돌던 의문과 궁금증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여 한 장의 밑그림이 완성된다.

C 클래스에 오르면서 본 환영.

B 클래스에 오르기 직전 하늘 섬에서 꾼 여자 시점의 꿈.

히아리드가 내게 한 말.

알붐 케투스가 내게 한 말.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에 대한 영상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과,

그리고 초거대 거북이가 나에게 했던 말까지.

저 할배의 이야기에 모든 게 한 데 묶이기 시작한다.

무척이나, 굉장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면서 머릿속에 완성된 하나의 사실에 미칠 것만 같다. 가슴이 찢어지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괴로움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처럼 생각이 꼬이고 머리가 무거워진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니 몸 안의 위상력도 날뛰는 거 같다….

“말도 안 돼. 그럴리가….”

…….

“허허. 저러다 카멜롯을 날려버리겠구먼. 거기 아이야. 얼른 보듬어주어라. 저러다 폭주하면 수십만 명이 죽겠다.”

“…?! 서하!!”

“으허허. 그야말로 선과 악이 한데 버무려진 혼돈이 형태를 이룬 모습이로다.”

“자, 자꾸 무슨 말씀이세요! 서하를 더이상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

“뭔 말이냐. 이건 저 녀석이 알고자 하던 이야기거늘. 거기 옆에 앉거라.”

“서하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어요! 서하, 서하? 괜찮으세요?”

“원래 인지를 벗어난 존재는 자신의 근본에 자연스레 다가서는 법이란다. 저 녀석이 날 찾아오게 된 것도 그에 따른 일환인게지.”

“…! 아, 그…. 그게. 무슨…. 아, 정말! 서하, 서하?”

“헐헐. 용케도 여태까지 살아남았구먼. 대부분의 혼혈 마인은 10살이 넘기 전에 뒈지기 십상이거늘. 대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기에 목숨도 부지하고 겨우 저 정도의 비틀린 성격으로만 자란 것인지, 저놈을 양육한 양부모의 인성은 참으로 훌륭할 듯하군.”

“확실히 아버님 어머님은 확실히 인격자시지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서하가 호, 혼혈이라뇨?”

“그뿐만 아니라 저 녀석의 음습하고 어두운 감정을 받아준 여인들이 넷이나 되는구먼.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그 양부모와 세 여인, 거기에 너도. 너희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나 마찬가지다. 자긍심을 가져도 된다.”

“…뮈르딘님이 하는 이야기는 쫓아가질 못하겠어요. 그리고 절 포함해서 넷이라니요? 셋인걸요?”

“아니야. 너보다, 다른 둘보다 월등히 오랜 시간 사랑을 쏟아부어 저 녀석이 뒤틀리지 않게 잡아준 여인이 저 녀석의 옆에 하나 더 있다.”

“…설마?”

“짐작 가는 그 설마가 맞을 거다. 허허허. 그런데 어째서 그리 생뚱맞은 표정을 짓는고?”

“그분은…. 아니 하지만…. 그렇다면….”

“하여간 자신의 본질을 깨달은 저 녀석에게는 휴식이 필요할게야. 당분간 옆방을 쓰도록 해라.”

“네에….”

서서히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프랑이 걱정스레 날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이다가, 퓨즈가 나가듯이, 정신이 아득해진다.

============================ 작품 후기 ============================

259화에 기사와의 대화 부분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했다. -> 윈체스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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