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6 영국으로. =========================================================================
예정했던 일정을 모두 해결하고 났더니 홀가분하면서도 허탈한 이런 기분에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더니 프랑은 내 위에 엎어졌다.
“…매트로 삼으니까 좋아?”
“무척 딱딱하고 울퉁불퉁해서 별로네요!”
“콱 그냥!”
“꺄아~!”
빠진 힘을 채우려면 역시 그거지!
허탈한 기분을 다 털어버리기 위해 까르르 웃으면서 여우 같은 모습을 보이는 프랑을 침대에 쓰러트리고 흐물흐물 녹아내릴 때까지 진하게 괴롭…. 사랑을 나누었다.
철쭉처럼 달아오른 아름다운 나신을 끌어안고 사과 향기를 맡으며 쉬고 있는데 인증기에서 전화가 왔다.
에잉. 따뜻한 프랑의 몸에서 떨어지기 싫은데…. 누군지 확인했더니 리디아다. 아까 점심때 말했던 답변이 온 건가?
지쳐서 잠든 프랑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잽싸게 바지만 입고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더니 홀로그램 창이 뜨며 리디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밝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이상한 얼굴을 한 리디아는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사르르 붉어지더니 시선을 돌리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아뇨. 받아들여 주셨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여왕님의 심기가 별로 좋지 않으신 거 같아요]
“난 이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관두기로 했거든? 그래서 직선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까 물어볼게. 영국은 나랑 적대할 생각이야?”
[…! 아, 아니에요. 저희는 서하 경과 적대할 생각이 없으세요.]
“그럼 붙어. 내가 친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도 친구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천지 차이니까 남남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붙어.”
[네에….]
“혹시 알아? 그렇게 되면 경매 없이 고위급 위상석을 시세만 받고 팔아줄지도.”
[…그 말씀, 진짜죠?]
“어. 만약 여왕이 대가 없이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에 대해 알려줬다면 영국은 위상석 하나를 획득했을거야. 이제와서는 늦었지만.”
[…!!]
은원은 명확해 야한다고 아빠한테 배웠으니까. 담담하게 말한 내 말에 리디아는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이내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버렸다.
“넌 나랑 한 달가량 같이 지냈으니까 내 성격이 어떤지 대충 짐작하고 있지 않아?”
[아, 한 달은 아니었어요. 서하 경은 중간에 위상 세계에 15일간 들어갔다 나오셨으니까요.]
아무튼!!
“…너도 알잖아? 아무튼, 창구 기능을 해줘서 고마워. 허가해준 여왕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네!]
리디아는 내가 해준 말을 여왕한테 전해주려는지 얼른 통화를 종료했다. 나도 방금 대화가 영상으로 잘 기록됐는지 확인하고 화연이와 영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한밤중이겠지만 내일 아침 일찍 일을 처리하려면 미리 알려줘야지.
그런데 자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펑퍼짐한 회색 곰돌이 잠옷을 입은 영은이와 평범한 티에 반바지를 입은 화연이가 화면에 떠오른다.
“안 자고 있었어?”
[뜨거운 몸을 달래줄 우리 자기도 없는데 일찍 자서 뭐해? 일이나 해야지.]
킥킥거리면서 웃는 영은이는 내 주변을 살펴보는 듯하더니 슬쩍 앙가슴을 드러내며 나에게 도발을 시전한다. 하지만 바로 전에까지 프랑이라는 꽃에 사랑을 잔뜩 뿌려주고 온 참이라 저항력이 증가한 상태거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넘겼더니 당장 화연이와 영은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프랑은 어디 있지?] [프랑이랑 했구나!!]
…질투심에 불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 있으니 화연이와 영은이는 서로를 바라보다 뻘쭘한 표정이 돼버렸다.
“에델베르그 부부는 물론이고 세 남매도 한국으로 넘어가기로 했어. 방금 리디아를 통해 영국 여왕에게 허락도 받았다. 그러니 영은이가 에델베르그 가족을 데려갈 수 있게 손 좀 써줘.”
[그럴게.]
[소피아는 재판을 받게 하는 것만으로 용서할 생각인가?]
“용서해준다는 게 죽이거나 알카트라즈에 처박아 넣는 게 아니라면 맞아. 화연이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
[…서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로는 회복 능력자를 대동해서 반쯤 죽여놓는 걸로 용서해주려고 했었다.]
“아, 그거 좋다. 나랑 너랑 사이좋게 반씩 죽여놓는 걸로 끝내면 되겠네.”
[반반씩 죽이면 완전히 죽지 않니?]
영은이는 우리 이야기를 듣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보는데 화연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던진다.
[당연히 반 정도 죽여놓고 회복시키고 다시 반 죽이는 겁니다. 뭘 생각하는겁니까.]
화연이의 핀잔을 들은 영은이는 당연한걸 묻는다며 입을 연다.
[뭘 생각하긴! 내가 고안해둔 108 고문을 써먹지 못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고문이라….
[고문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걸 계획해둔겁니까….]
[소피아는 어차피 보호해줄 국가도 없는 간첩이잖니? 당연히 이 기회에 우리를 물 먹인 그 괘씸한 행동에 대해 온몸의 체액이란 체액은 모두 뽑아내게 만들어줘야지! 과거에는 고문의 후유증에 죽거나 그런 일도 있었다지만 이제 회복 능력자가 있으니 108가지 풀코스로….]
“영은이는 돌아가서 108번 절정에 오르게 해줄 테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해. 소피아는 돌아가면 세뇌해서 써먹는 걸로 해야겠어.”
108번 절정에 오르게 해준다는 말에 영은이는 딸꾹거리면서 황급히 두 손을 젓지만, 재빨리 영은이 통화 창을 음소거시켜버리고 화연이를 돌아봤다.
[그래. 고문이나 육체적인 학대보다는 세뇌해 두고두고 써먹는 게 좋을 수도 있겠군. 그러니 읍. 잠깐! 왜 나만 108번 한다는 건데?! 그랬다간 일주일간 걸어 다니지도 못할 거야! 너무해! …뭐 하는 겁니까! 저리비키꺄~! 어딜만는거니! 그러니까 좀 비키란 말입니다!]
…자기 홀로그램 창을 꺼버린 영은이가 화연이에게 난입하면서 난리를 피우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버렸다.
영국에 온 지 3일째가 되는 날의 아침, 프랑과 함께 영국 유명 레스토랑 중 하나라는 유명하다는 사보이 그릴에서 아침을 먹을까 했지만, 개점 시간이 12시, 점심시간부터라고 해서 저녁을 예약해두고 그냥 룸서비스를 시켜먹었다.
그러고 보니 영국에 와서 처음 먹는 평범한 식사인가? 내심 영국 음식의 아스트랄함을 기대했는데 소문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깔끔하고 부드러운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보면 영국 음식은 짜고 기름지고 흥건하다던데 되게 맛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전통 음식이 피쉬 앤 칩스라고 하는데 생선을 통째로 튀겼다던가 대구살을 얇게 튀겨서 한입 베어 물면 비릿한 생선 즙…이 주르륵 흘러나온다든가.
생선튀김이라고 해야 하나, 생선살을 발라서 전으로 만든 건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아무튼 비주얼만 봐서는 절대 맛있어 보인다고 못할 모습이었는데, 아침 룸서비스로 나온 생선튀김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의 생선살은 노릇노릇하게 익은 데다 빵도 촉촉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빵의 속살이 프랑 가슴보다 더 부드러워!!”
“…….”
빵을 조금씩 뜯어 먹다가 내 말에 귀엽게 흘겨보는 프랑을 보며 웃어주고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이제 1회차에서 프랑을 얻었던 이야기 중 중요한 진실만 숨겨서 적당히 알려주는 걸로 영국에서 할 일은 끝난다.
여왕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정령 연구에 관련된 학자들을 잔뜩 불러서 질문을 던지겠지. 그런 사람들이라면 중요한 학자들일 테고, 그들을 불러모으는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프랑과 함께 런던 관광지나 구경 다녀야지.
해부와 생체 실험을 당하던 엘프 들이 생각났지만,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니 고개를 저으면서 털어내 버렸다.
“프랑, 데이트하러 갈까?”
“?! 데, 데데 데이트요?!”
“어. 싫어?”
“아뇨! 좋아요!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활짝 웃으면서 후다닥 침실로 들어간 프랑은 들뜬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서 옷 모양을 바꾸고 챙이 넓은 나들이 모자를 써보고 구두나 액세서리 등을 확인하면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나야 뭐 아침에 새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이대로 나가면 되겠지?
에이전트들이 가득한 호텔 로비로 나가긴 싫어서 프랑과 함께 창문을 통해 템스 강 변으로 뛰어내렸다.
“어디부터 가볼까요?”
화사한 하늘색 원피스에 웨지 샌들과 검은색 비단 천을 리본 모양으로 포인트를 준 나들이 모자를 쓴 프랑은 기분이 좋은지 방글방글 웃으면서 물었다.
템스 강 인근을 걷고 있으니 많은 연인이 팔짱을 끼고 오가길래 나도 프랑과 팔짱을 끼며 말했다.
“런던탑부터 가볼까?”
“…네에.”
팔짱을 끼니 움찔하고 놀랐다가 얼굴이 약간 붉어진 프랑은 조용히 대답했다.
가장 먼저 살펴본 곳은 영국에 막 도착했을 때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살펴본 타워 오브 런던, 런던탑이었다.
지어진 지 11세기가 넘어가는 무진장 오래된 이 건축물은 중앙에 높이 28m의 화이트 타워가 있었고 그 뒤에 1200년대에 지어진 성벽이 화이트 타워를 중앙으로 2중으로 세워져 있었다.
런던탑 성벽 내부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의 4층 5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중앙에 화이트 타워가 있었는데 관광객들 사이에서 함께 움직이며 눈으로는 화이트 타워의 외부를 보고 공간 지각으로는 화이트 타워의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는 2중 관광을 했다.
“화이트 타워가 아니라 그레이 타워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당시에는 백색이라고 할 만큼 하얀색이었대요. 근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모습이 변했다구 해요. 그래도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는 날에 멀리서 보면 순백색으로 보인대요!”
박물관 비스무리하게 꾸며진 화이트 타워 내부를 대충 둘러보고 나와서 역대 영국의 왕들이 쓴 왕관을 보관한다는 크라운 주얼리 하우스에 들어가 보니 왕관 외에도 여러 가지 보석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투어 가이드를 이끌고 온 무리 근처에서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펴보는데 역시나 죄다 모조품이고 중간중간 진품이 끼어있는 형식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곳의 지하에 진품을 보관하고 있다는 거다.
경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건가? 공간지각으로 진품과 모조품을 비교해보며 프랑과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오니 화이트 타워 옆의 잔디밭에서 옛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작은 연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프랑과 함께 연극을 구경하다가 성벽 밖으로 나와 바로 앞에 보이는 타워 브리지를 구경했다.
“뭔가 신기하긴 하지만 멋져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밤에 와야 조명이 켜져서 멋지대요.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와요!”
“그러자.”
그 뒤로 장엄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궁전을 구경하고 바로 옆에 있는 빅 벤이라고 불리는 무진장 큰 시계탑을 봤는데 프랑은 시종일 팔짱을 낀 팔을 풀지 않고 내 팔에 기대며 신기한 게 보이면 꺅꺅하면서 날 끌고 구경하러 다녔다.
그 와중에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존재들이 있었지만, 괜히 이야기해서 모처럼 즐거워하는 프랑의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다.
그 뒤 버킹엄 궁전으로 가서 붉고 검은 옷과 검은 말의 근위병 교대식을 구경하고 휴대폰이나 일반 카메라로 찍는 게 아니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돈 받고 사진을 남겨주는 사람에게 사진도 찍고 군것질도 하면서 밤이 될 때까지 프랑과 데이트를 즐겼다.
저녁에는 호텔로 돌아와 예약해둔 사보이 그릴 레스토랑에서 주방장의 추천을 받은 코스요리를 먹는데 문득 주방장을 보니 나도 아는 얼굴이다.
영국의 유명한 스타 쉐프가 여기서도 레스토랑을 하고 있구나.
“저 주방장이 무진장 불같은 성격이라더라.”
“…저분이요?”
미디엄 스테이크를 조심스레 썰던 프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밖으로 나와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주방장을 힐끔 바라본다.
“응. 최고의 셰프를 뽑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헬즈 키친이라는 프로그램이 저 주방장의 거친 입담 덕분에 무지 인기를 끌었다고 해.”
“되게 인품이 깊어 보이는 분이신데….”
“실제로도 그렇대. 방송에서 F로 시작되는 글자를 무시무시하게 쏟아내는 모습이 조명돼서 그렇지 실제로는 인격자라더라. 거기다 요리 실력도 미슐랭 스타를 자기 레스토랑을 다 합치면 십수 개나 받을 정도니까 지금 이렇게 손님이 많은 거겠지?”
“정말이에요.”
프랑은 내 이야기를 듣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실제로도 빈 좌석 없이 손님이 가득 차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끝내고 나와 로비를 통해 객실로 이동하려는데 토요일 오후에 찾아왔던 미국의 부차관보에 G.S 레이드 팀의 서브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시 다가왔다.
서브 매니저라는 자가 되돌아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라서 좀 재수 없는데.
아까 프랑이랑 팔짱 끼고 데이트 할 때도 신경 거슬리게 미행하고 다니던데 그게 저 인간들이 보낸 작자들이었을려나.
그게 아니면 우리가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올 리가 없잖아.
우릴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오는 두 남녀를 보고 한숨을 쉬면서 로비 주변을 둘러보니 홀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만 십수 명이다.
인종도 다양한데 저 사람들이 전부 날 꼬드겨서 자기네 나라로 이민 오게 만들려는 에이전트들인가?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블루 지니어스.”
…거기다 내가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는 걸로 내 기분을 상큼하게 말아 드시게 해주신다.
서브 매니저라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리디아도 나랑 대화할 때는 한국어로 말하는데 말이지.
적어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거라면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어야지. 거기다 내가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다니, 앞으로 나서며 막으려는 프랑을 제지하고 별로 좋지 못한 기색으로 G.S의 서브 매니저를 바라보며 까칠하게 말했다.
“별로 안녕하진 못한데요.”
하지만 신경 안쓴다는 듯이 밝게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서브 매니저와 눈웃음 짓는 부차관보 여자.
“하하. 그건 저희의 제안을 들어보면 바뀌실 겁니다. 저희 미국과 세계 최고의 레이드 팀인 그라나도 스파타에서 미스터 블루 지니어스에게 좋은 제안을….”
“그 별명은 짜증 나니까 부르지 마시구요. 그리고 G.S에서 절 회유할 생각으로 온 거에요?”
“아, 실례했습니다. 미스터 정서하의 생각이 맞습니다.”
마스터도 아니고 미스터구만. 서브 매니저라는 남자는 내 반응에도 빙긋 웃으면서 들어보라는 식으로 입을 연다. 그러니까 대충 요약하자면,
“저희 G.S는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세계 랭킹 1위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정서 하의 고국인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지원을 미국과 G.S에서는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와 평등의 나라 미국의 품에 안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라는 이야기다. 여러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길게 말을 했지만, 요점은 저거다.
내 옆으로 다가오는 부차관보라는 금발 아가씨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를 돌아보니 날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미스터 정서하가 미국의 품에 들어오신다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부와 명예를 누리실 수 있을거에요. 한국 정부는 고작 미스터 정서하의 능력에 대한 인정과 함께 약간의 감세 혜택뿐이잖아요? 미국으로 온다면 취득한 위상석의 개인 판매는 물론 직접세와 간접세까지 완벽한 면세 혜택을 드릴 수 있어요.”
그러면서 내게 요염한 몸짓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 한 손은 자기 허리에 걸치고 다른 손은 내 어깨에 올린다. 그리고 살짝 상체를 숙이며 가슴골을 보이는데…. 뭐야, 미인계야?
…몸매도 별로인 게.
찜찜한 얼굴로 부차관보라는 여자의 손을 밀어서 치우니 살짝 눈썹을 뜨며 은근히 미소를 머금는다.
내 뒤에 프랑도 벼락을 쏘면 B 클래스를 능가하는 위력을 보이는데, 이 여자가 지금 자기 행동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릴 집어넣는 행위란 걸 모르나 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스터 정서하가 미국의 G.S 레이드팀에 오신다면 단독 활동 보장 및 수천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와 수련을 위한 장소도 제공할 것이며 모든 생활에 대한 편의를 제공해드릴 것입니다. 이것은 미스터 정서하에게 드릴 혜택의 일부에 불과하며 이후로도 추가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미스터 정서하의 능력에 비해 대우는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미스터 정서하의 능력에 대한 폄하 행위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희 미국만큼 미스터 정서하의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 드릴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부차관보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내 팔을 잡더니 자기 가슴 사이에 끼우려 든다. 그 모습에 프랑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는게 보였다.
저 두 명이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정부가 내 뒤를 봐주고 있다는 건 모르는 게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저 인간들이 저렇게나 자신에 찬 모습으로 제안을 내비칠 리가 없겠지.
영은이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내가 레이드 팀 운영이나 위상 세계 활동에 있어서 사전 준비와 대책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써도 될 만큼 정부가 날 챙겨주고 있다.
그걸 얼마나 비밀리에 지원을 해주는지 미국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라니, 새삼 영은이의 능력과 정부의 장악력이 대단하다는걸 알 거 같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입을 열었다.
“뭐 혜택이나 지원은 둘째치고 미국과 세계 최고의 레이드 팀이라는 G.S의 정보력은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전략도 형편없고 생각도 형편없고 판단도 형편없어요.”
갑작스레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신랄한 말투에 두 사람의 표정이 뜨악해지고 이쪽을 주시하던 다른 자들도 얼굴에 호기심이 스며든다. 저만한 조건으로도 날 끌어들이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엿보인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요. 미국과 G.S가 경험해보지 못한 지원과 부와 명예를 누리게 해준다고? 그딴 건 관심도 없고 관심 있다 해도 내 능력으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들인데, 겨우 그걸 가지고 기세 좋게 회유하러 왔다니, 웃겨서 말이 안 나와요.”
이어지는 날카로운 말에 두 남녀는 표정이 굳어졌다. 내 팔을 가슴 사이에 끼우고 있는 여자에게서 팔을 빼내고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연다.
“제가 18살이라서 적당히 듣기 좋은 이야기로 구슬리면 손쉽게 넘어올 거라 생각했어요? 거기에 몸으로 접근하면 침흘리면서 좋다고 할 줄 알았어요? 살다 살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얼마나 멍청한 사람에게 멍청한 지시를 받았는지 멍청함이 흘러넘치다 못해 기가 막혀 죽을 판이에요.”
내 노골적인 면박에 서브 매니저는 물론이고 부차관보라는 여자의 안색도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특히 부차관보는 몸으로 접근하려다 받은 면박이라 더욱 붉어졌다.
지들은 좋은 의도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전~혀 아니라고. 아, 물론 면세 혜택은 조금 귀가 솔깃하긴 한다.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화가 나시나 보네요. 제 성격도, 기호도, 하다못해 취미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찾아와서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들은 저도 화가 난 상태라는 생각도 안 들죠?”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희가 제시한 조건이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신 지요.”
“전부요. 전~~부. 최소한 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알고 왔어야죠. 그 정도도 신경 쓰지 않고 웃기지도 조건에 어처구니없이 얄팍한 미인계라니. 진짜 한심하네요. 그 멍청한 짓이 미국 정부의 뜻이에요?”
“…….”
부차관보라는 여잔 얼굴이 시뻘게져서 부들부들 떨며 아무 말도 못하고 서브 매니저도 얼굴이 굳어지며 내게 약간 적대감을 비추면서 입을 연다.
“말이 심하십니다. 미스터 정서하의 능력이 아무리 강한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미국은 일본과는 다릅니다.”
“정말 다른지 해볼까요? 제가 왜 이렇게 모나게 반응하는지 이해도 안 가죠? 프랑하고 둘이서 놀러 다닐 때 신경 거슬리게 미행 붙여놓은 것도 당신들 아니에요?”
정말 이 인간들이 붙여놓은 미행이었는지 미행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졌다가 펴지지만 이어진 이야기에 다시 얼굴이 구겨진다.
“표정을 보니 진짜였나보네. 아무튼 돌아가세요.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땐 지금처럼 말로 끝나지 않을 거니까 방해하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마시고요. 알겠어요?”
이 이상 말을 하는 건 내 분노를 부추기는 것 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썩은 과일을 입에 문 것 처럼 얼굴이 구겨진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만나지 않겠다는 말도 무시하고 계속 다가오는 거지? 미국은 고위급 위상석은 필요 없는 건가?”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니 내게 접근한 두 남녀는 물론이고 홀에서 매의 눈으로 날 살펴보던 다른 사람들까지 뜨악한 표정이 된다.
그런 자들에게 마나 비전을 켜서 눈을 한 번씩 노려봐줬더니 헛기침하면서 눈을 피한다.
이딴 귀찮은 꼴을 안 보려면 어찌 해야 하려나…. 에휴.
진짜 하늘을 날아다니는 호텔이라는 개인용 제트기를 구매하는 건가. 문득 누나가 수행원을 데려가란 잔소리가 생각났다.
수행원을 데려왔으면 이꼴을 안봤으려나….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