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254화 (254/517)

00254  영국으로.  =========================================================================

영상을 모두 보고 나서 의자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가 C 클래스에 올라서면서 봤던 환영과 하늘 섬에서 꿨던 꿈은 동일한 장소인 게 틀림없다. 우선 가장 먼저 든 의문점은 시점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거다.

피부는 약간 주황색이 감도는 동양인의 피부색이었다. 그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엄마뿐이지만 엄마는 36살이잖아. 위상 세계에 끌려갈 나이는 넘었어.

누나랑 화연이랑 영은이는 능력자라서 약간 노르스름한 황인종의 피부가 아니라 백인도 그렇다고 황인도 아닌 보기 좋은 살구색의 피부다. 프랑은 애초에 제외고.

그럼 대체 누구라는 거지?

아니 그 꿈은 미래를 보여준 건 맞는 거야?

방금 본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을 보면 확실히 C 클래스에 오를 때 엘리펀트로스 산에서 본 환상에서 나온 성은 맞다. 맞지만 주변 풍경이 전혀 다르잖아. 게다가 꿈에서 본 악마들보다 격이 떨어지는 것들도 그렇고.

으으으으.

머리가 복잡하다.

답답해져서 손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으니 리디아와 함께 도서관을 둘러보던 프랑이 잽싸게 나에게 날아온다.

“서하?”

“어 괜찮아. 머리가 좀 복잡해져서 그래.”

프랑에게 이야기해서 같이 고민해볼까 했지만…. 아직은 속에 담고 있어야겠다. 뒤늦게 도착한 리디아도 약간 걱정이 담긴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그 위상 세계의 호스트는 살아 있어?”

대부분 위상 세계의 호스트는 같이 입장해서 같이 나오는 걸 알고 있지만, 간혹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걸 알고 있어서 물어본 건데 리디아는 약간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런가…. 아무튼 잘 봤어.”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여왕 폐하께서는 원하는 정보는 가능한 한 모두 열람하실 수 있도록 허락하셨어요.”

궁금한 거야 많지. 하늘 섬에서 알게 된 대지, 대해, 하늘, 짐승의 주인이라는 자들이나 아숨프레 수몰 폐허에 관련된 이야기 같은 건 없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알붐 케투스같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고래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걸 검색해보면 전~부. 죄~~~다 여왕의 귀에 들어갈 거 같단 말이야. 그게 찝찝해서 검색해보는 게 싫다. 거기다가 검색해봐도 관련 내용이 나올 거 같다는 생각도 안 들고.

그래도…. 그 외의 부분은 확인해볼 수 있겠지? 알붐 케투스는 그랑 블루 PR 영상을 통해서도 알려졌으니 그걸 검색해봐도 괜찮을 거야.

“그럼 엘프에 관한 게 궁금한데. 검은 성의 푸른 피부의 악마들에 대한 것도 궁금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고래도 궁금해.”

내 능력과 내가 호스트로 있는 위상 세계에 관한 의문을 제외하면 남은 궁금점은 엘프와 관련된 거 뿐이다.

검은 성에대헤 의문을 가진다는 점은 이미 여왕에게 알려진 상황이니까 숨길 이유도 없으니 좀 더 정보를 찾아봐야겠다.

엘프 들도 이형종인지, 아니면 사람들처럼 능력자인지는 특히 궁금하다. 거기에 엘프 들이 다룬다는 정령도 어떤지 궁금하고.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존재들이 위상 세계에 널렸…. 널린 거 맞나? 미호랑 인어, 의사소통은 안됐지만 자기네들 언어를 가진 게 확실한 엘리펀트로스도 있고 하늘 섬에는 플라우비스 종족도 있고 플라우비스 종족이랑 치고받고 싸웠다는 사비라는 것들도 플라우비스만큼이나 지성을 가지고 있겠군.

거기다 누호디도 있고 엘프 들도 있고….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닌 거 같다.

“알라스토의 사악한 검은 성에 관련된 자료는 아까 보여드린 게 전부였어요…. 엘프에 관한 내용을 보시겠어요?”

“응.”

내 대답에 프랑은 바로 홀로그램 창 하나를 띄웠는데….

-종족: 엘프(가칭)-

-언어: 엘프어(가칭)-

-특징: 긴 귀, 긴 머리, 녹색 체모, 정령을 다루며 검과 활에 대한 조예가 깊음.-

-포획한 엘프의 평균 위상력은 43,000-

“…저게 다야?”

“어, 어머? 아니에요! 영상 자료가 더 있네요!”

그리고 띄워진 홀로그램 창에 나온 내용은 리디아는 물론이고 프랑마저 안색을 굳게 만들었다.

[12번 메스.]

딸그락 달각달각. 끼기기긱.

[27번.]

스석스석스석.

새하얀 수술실, 두 개의 수술대 위에는 발가벗겨진 남자 엘프와 여자 엘프의 해부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두 엘프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수술대 위에 올려진 남자와 여자 엘프는 빗장뼈 아래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잘려 내장이 노출된 채 가늘게 숨을 이어가며 수술복을 입은 인간들의 손에 내장이 주물럭거려지고 있었다.

갈비뼈는 모두 잘려나가있었고 여자 엘프의 유방은 둘 다 도려내져 뭔가 누르스름한 액체가 담긴 병에 담겨졌다.

[심장이 세 개입니다.]

[폐도 4개로 나뉘어있군요.]

[이 녹색의 장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심장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

[이걸 보시죠. 질이 Y자 형태로 끝이 갈라져 자궁이 두 개에 난소가 4개입니다. 이렇게나 작은 허리로 한 번에 자궁 두 곳에 동시에 임신하는 걸까요.]

[번갈아 사용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심장과 모양이 약간 다른 심장 세 개가 연신 쿵덕거리고 갈비뼈를 잘라내 내부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이 충격적인데 더욱이 엘프 여자의 두개골이 가로로 쪼개져 뇌가 드러난 상태였다.

[뇌도 신기합니다. 사람과 같은 회백색 물질이 아니라 녹색을 품고 있는 데다 주름도, 대뇌피질도 다릅니다.]

[측두엽과 후두엽이 굉장히 발달한 것 같습니다. 두정엽과 전두엽 역시 마찬가지군요.]

해부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사이로 카메라가 이동해서 뇌의 모습이 로우 앵글로 잡힌다.

“…사람이면서 어떻게 저런 짓을….”

프랑의 중얼거림에 리디아도 흠칫하고 나도 흠칫했다.

아니 난 왜 놀란 거지? 히아리드는 이형종이라고! 확실한 이형종이었단 말이야! 그리고 난 저렇게까지 해부하진 않았어! 그러니까 영국이 나보다 더….

…그만하자.

리디아는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영상을 종료해버렸다. 푹 숙여진 고개를 한참 동안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충격이 엄청난 거 같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히아리드는 그나마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점, 커다란 덩치라거나 큰 넉 장의 날개 같은 게 두드러지지만, 엘프는 귀를 제외하면 무척이나 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이었으니까.

근데 처음 뜬 화면의 간단 자료에서는 이형종이라고 나와 있었지? 영국이랑 능력자 연합에서는 엘프를 아인 종이 아니라 이형종으로 분류해버린 건가?

“…난 정령이나 그런 쪽에 관해서 궁금했었는데 뜬금없는 내용이었어.”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나라가 그럴…. 그런….”

“나라가 완벽하게, 100% 깨끗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 영상을 다시 켜서 해부 장면은 넘기고 다른 화면을 보여줘.”

“…….”

리디아는 내 요청에 반쯤 죽은 얼굴로 다시 영상을 켜서 빠르게 넘겼다. 하지만 넘어가는 화면을 보니 전부 다 엘프를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하는 내용뿐이고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수백 년 전에 일본이 했던 마루타 실험 뺨칠 정도다. 그나마 나은 점은 강간 같은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일까.

…카메라가 안 잡히는 곳에서 어떤 짓을 벌였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저걸 보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국의 조사에는 절대 협력하지 않겠다고.

프랑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한번 보고 수동적으로 변해버린 리디아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려서 키워드를 검색해봤지만 결국 정령과 관련된 내용은 버킹엄 궁전 지하 3층의 자료 보관실에는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하늘과 고래라는 단어로 검색해봤지만 알붐 케투스는 커녕 고래 이형종에 관한 것도 없었다.

역시 빛 좋은 개살구인가, 이걸 봐서는 내가 정말 궁금한 이야기도 없을 가능성이 100%군.

그 외에는 그다지 궁금한 점도 없고 해서 자료 보관실을 나왔는데 프랑은 그저 언짢은 표정일 뿐이었지만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의 리디아는 이리저리 휘청이는 게 꽤나 위태로워 보였다.

저렇게 멘탈이 약해서 영국의 여왕이 될 수 있겠냐?

뭐 여왕이 정말로 리디아를 후계자로 키우는지는 모르지만 저런 유리멘탈이라니, 정말 차기 여왕으로 삼을 계획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해주고 싶다.

버킹엄 궁전은 참 대단한 게 우리나라로 치면 청와대인 셈인데 몇몇 구역을 제외하곤 관광객들에게 전부 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1년 365일 개방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달가량 궁전의 중요한 곳을 제외한 전부를 개방이라니, 여왕의 사생활 같은 건 없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왔을 땐 점심시간이 다되어가고 있었는데도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다.

저 사람들이 낸 입장료로 버킹엄 궁전의 유지보수를 한다던데 확실히 이만큼 크고 오래된 궁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려면 한 두 푼 드는 게 아니겠다.

그나저나 열람이 끝나면 날 붙잡아서 점심 초대라던가 그럴 줄 알았는데 리디아는 아직도 엘프 해부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내가 신경 써줄 이유 같은 건 없겠지?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을 본 대가로 알려주기로 한 정보는 이미 머릿속에 정리해놨으니 나중에 영국 정부가 부르면 그때 알려줘야지.

리디아가 정신줄 놓고있을때 후딱 빠져나가자!

“…?! 앗! 서하 경, 잠시만요!”

에잉. 정신 차렸네. 프랑의 손을 잡고 도망가려 했더니 화들짝 놀란 리디아는 허둥거리며 따라오려다가 발이 꼬이면서 콰당! 하고 자빠져버렸다.

“꺄윽!”

이 틈에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하니 프랑이 내 손을 잡아당기면서 살짝 비난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자기가 발이 꼬여서 제풀에 넘어진 건데 왜 날….

쩝. 까진 무릎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날 올려다보는 리디아를 마주 보다가 손을 내미니 훌쩍거리면서 내 손을 잡는다.

일으켜 세워주고 까진 무릎에 힐링 터치를 걸어주니 눈물을 매달고서 에헤헤 하고 웃어주는데 진짜 푼수도 아니고.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네엥?!”

내 말에 리디아는 깜짝 놀라면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리는데 프랑은 황급히 내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그거 성희롱이에요! 공주님한테 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아몰랑. 제풀에 발이 꼬여 넘어지고 울먹거리다가 헤헤거리고 웃는 칠푼이 공주님이잖아. 밖에서 능력자 망신 다 시키겠네.”

괜히 프랑한테 한소리 들어버려서 심통 좀 부렸더니 리디아는 울상을 지어버렸다.

“아무튼, 왜 불러? 별일 없으면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머리도 복잡하고.

“아, 여왕 폐하께서 중식 오찬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어요. 바쁘지 않으시면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지 않겠어요?”

“…오찬에 초대된 인원은?”

“…서른 아홉분이세요.”

“패스!”

어쩐지 이야기하면서 내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더라! 그렇지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고위 인사들 파티에서 하하 호호 웃으라고?

거절한다!

홱 돌아서 가려는데 이번에도 리디아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더니 내 팔을 잡는다.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요! 그들과 안면을 익혀놓으면 서하 경의 인맥에도 큰 도움이….”

“내 능력에 그들의 인맥이 도움이 될 거 같아? 오히려 그들이 내 인맥에 목매달 거 같은데?”

“…….”

할 말이 없는지 리디아는 다시 울상을 짓는데 내 손을 안 놓는다. 놓든 말든 힘으로 잡아당기며 걸어가는데 저 앞에서 아론 템페스트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 아저씨는 나와 내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리디아를 보더니 갑자기 므흐흣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이야아. 이거, 요즘 대세가 자기주장이 강한 남자라고 하더니 정말이군 그래!”

“…무슨 소리에요?”

“무슨 말이냐니, 버킹엄 궁전에서 싫다는 영국 공주의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갈 정도인데 그 모습이 바로 강한 남자의 표본 아닌가!”

“눈이 삐었어요? 지금 누가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지 안보이세요? 제가 잡고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리디아가 제 손을 잡고 안 놔주는 거거든요?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시죠!”

“응? 에이, 뭐야. 그런 거였나?”

그제서야 리디아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걸 확인하더니 "좋다 말았네." 하고 입맛을 다신다.

영국의 숨겨진 검이라더니 성격이 너무 가벼운 거 아냐? 입맛을 다시는 아론 템페스트를 보니 영국의 미래가 심각하게 걱정되기 시작한다.

“아, 오해받으니까 좀 놔! 놓으라고!”

“아이잉. 서하 겨어엉. 만찬에 한 번만 참석해주세요! 아론 아저씨도 뭐라고 좀 해보셔요~!”

“얘야. 나도 빠지고 싶은 만찬이란다. 그런 나에게 도와달라는 거냐.”

그러고 보니 아론 템페스트도 뭔가 번쩍번쩍한 예식용 정장이었다. 삽시간에 진중한 표정으로 바뀐 아론 템페스트를 리디아는 당혹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이때다!

리디아의 손아귀에 힘이 살짝 풀리는 순간 잽싸게 팔을 빼고 후다닥 달려나가려니 아론 템페스트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내 앞길을 막는다!

우와, 이 아저씨의 순간 가속은 내가 마나 모드 - 가속으로 움직이는 거랑 비슷한 속도다. 최고위 이형종의 움직임이 이 정도 수준인 건가?

그렇다면 최고위 이형종과의 근, 중거리 전투는 위험하겠네.

마나 모드 - 가속에는 사고 가속도 포함되어있으니 순간 판단에는 내가 좀 더 우위에 있겠지만, 육체적인 속도는 솔직히 내가 조금 밀리는 거 같다.

그런데 이 정도면 신체 강화 9배가 아닌데? 단계가 오를수록 신체 강화도 1배씩 오르길래 B 클래스에서 A 클래스로 넘어가면 8배에서 9배가 될 줄 알았는데 저 아저씨 수준이면 10배 정도 되는 거 같다.

“미안하네. 나 혼자 당할 수는 없지 않겠나! 저 불쌍한 아이를 봐서라도 같이 만찬장에 감세!”

“…아 진짜. 전 아직 우리나라 정부 만찬에도 한번 안 나간 몸이거든요? 근데 외국의 만찬장에 얼굴을 먼저 비쳐 봐요! 어떻게 되나!”

“음? 그, 그랬나?”

내가 톡 쏘는 말을 내뱉으니 리디아도 그렇고 아론 템페스트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번에는 비공식으로 세 명만 모이는 자리래서 나갔던 거지 그때도 이번처럼 대규모 만찬회였으면 참가 안 했을 어요!”

물론 영은이는 내가 그런 만찬처럼 사람 시선이 모이고 하는 건 안 좋아하는걸 알고 있어서 한 번도 안 부른 거지만 일단은 한 번도 안 간 게 사실이니까!

그래도 조만간 한번 얼굴을 비쳐야 할 거 같긴 하다. 나도 이제 우리나라 레이드팀 랭킹 1위의 마스터니까.

어쨌든 이 핑계가 먹혔는지 아론 템페스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한발 물러나고 리디아도 으으 하면서 신음을 흘린다.

만약 여왕이 있었다면 오히려 기회라고 더욱 달라붙어서 날 끌고 갔을 텐데 이 둘은 역시 정치적인 성향이 없어 보인다.

“거기다 지금 절 만나기 위해서 세계 각국의 에이전트나 헤드헌터가 사보이 호텔에 모이고 있는 거 아시죠? 이번 만찬 이야기가 흘러나가면 그 인간들이 어떻게 날뛸지 짐작도 안 가요. 어젠 미국의 부차관인지 부차관보인지가 G.S의 서브 매니저가 절 찾아왔다고요!”

“허허. 장관도 아니고 부차관보가? 거기다 메인 매니저도 아니고 서브 매니저라니, 자네도 어지간히 얕보였구먼.”

“얕보든 말든 건들지만 않으면 돼요. 귀찮게 굴었다간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하나 만들어버릴 거니까. ”

별거 없다는 투의 내 말에 두 사람은 흠칫하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어쨌든 비켜주세요. 이번에도 막으면 궁전을 뚫고 나가버릴꺼에요.”

“끄으응…. 우리 여왕님한테 또 한소리 듣겠구먼.”

세게 나오는 내 모습에 아론 템페스트가 옆으로 비켜서고 그곳으로 프랑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뒤에 따라오고 있는 리디아에게 말했다.

“아무튼, 자료는 잘 봤어. 나중에 질문할 준비가 다 되면 그때 적당히 찾아와.”

“네에….”

리디아는 날 초대하지 못하자 울상을 짓다 못해 시무룩해져 버렸다.

“하아. 피곤해….”

“누워서 쉬세요. 점심 준비 다 끝나면 깨워드릴게요.”

“응. 점심으로 야채 볶음밥 해줘.”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침실로 들어와 보니 그새 호텔 룸 메이드가 다녀갔는지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가 보여서 바로 드러누웠다. 연인들의 과일 향기가 잔뜩 묻어있는 침대도 좋지만, 햇볕 냄새가 나는 침대도 좋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늘 섬에서 꿨던 꿈에서 등장한 여자는 누군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알라스토르의 사악한 검은 성 주변이 화사하게 변한 이유도 모르겠다.

내가 꾼 꿈과 C클래스에 올라설 때 봤던 풍경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준 것인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보여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만약 어느 위상 학자의 주장대로 같은 장소가 각자 다른 시간 축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아까 봤던 영상에 나온 위상 세계는 내가 호스트로 있는 세계보다 시간대가 앞선 세계일까 뒤쫓아오는 세계일까.

성이 무너져있으니 미래일 수 있겠지만, 악마들이 성을 복구해서 음침한 환경이 됐을 수 있다는 가정도 버리기 힘들다.

그곳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

왜 자꾸 그 성에 관한 환상을, 꿈을 보는 걸까….

…….

살짝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뜨니 프랑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지?

예쁜 눈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호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곧 나에게 다가와 입술에 살짝 키스해준다.

“깨어나세요, 저의 왕자님.”

“킥킥.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이야?”

방긋 웃는 프랑의 손에 이끌려 다이닝 룸에 들어갔더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야채 볶음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응. 조금 잤더니 괜찮아졌어.”

잠들었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푹 자고 일어났더니 무거워졌던 머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역시 잠이 보약이군.

볶음밥이 담긴 그릇을 보다가 방에 있는 소피아를 데리고 나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음식이 목에 잘 안 넘어가는지 절반 정도만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프랑의 사랑이 잔뜩 들어가 있는 볶음밥을 들고 마시듯이 흡입해서 깔끔하게 비우는 내 모습을 소피아는 잔잔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 먹어. 네가 못 먹고 병에 걸려 죽는다거나 굶거나 쇼크사하면 네 뒤를 따라 네 가족도 보내버릴 테니까.”

“…….”

가족 이야기를 꺼냈더니 다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내 그릇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인데 저것도 못 먹으면 언제 살이 찌겠냐.

팔짱을 끼고 소피아가 음식을 다 먹는 걸 끝까지 본 뒤에 침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뒷정리를 하려는 프랑의 허리를 잡아내 무릎 위에 앉히며 물었다.

“프랑은 자기 정체를 밝히는데 어떻게 생각해?”

“제가 정령이 아니라는걸 알리시려구요?”

“응. 처음에 프랑의 정체를 숨기려 했던 건 내 힘으로 프랑의 영혼 석을 지키지 못할까 봐 그랬던 거였잖아. 이제는 그런 부분에 신경을 안 써도 될 만큼 강해졌으니까 프랑이 괜찮다면 정체를 밝혀서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프랑은 잠시 날 빤히 바라보더니 방긋 웃으면서 내 뺨에 키스해준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인간이었단 걸 밝히면 IWO와 능력자 연합이나 각종 연구소에서 서하를 귀찮게 할 것 같으니 숨길래요.”

“귀찮게 하면 다 뒤집어버린다고 협박해도 되는데.”

“그렇지만 괜히 벌집을 들쑤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서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으니 그냥 우리 가족들의 비밀로 해요.”

프랑이 원하면 그렇게 해야지.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 프랑을 보며 나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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