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4 영국으로. =========================================================================
아빠는 아침 7시에 출발한다고 해서 1시간 전에 일어나서 씻고 여행 가방을 챙겨서 나오니 그제야 프랑은 겨우겨우 일어나더니 산만큼 부른 배를 껴안고 힘겹게 욕실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화연이랑 영은이는 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서 밤새도록 덤비고 그런 거야? 새벽 즈음에는 정말 셋이서 날 잡아먹으려는 거 같아서 얼마나 무서웠는데!
산처럼 부른 두 사람의 배를 찰싹찰싹 때려주니 화연이와 영은이는 숨 막히는 비음을 흘리다가 눈을 뜨고 멍하니 날 올려다본다.
“나 출발할 건데 마중도 안 해주는 거야? 이러려고 밤새도록 날 덮쳤어?”
“으…. 아, 아니다.”
“아으우으응….”
…진짜 못 봐주겠네.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힐링 웨이브를 쓰면 둘 다 특정 부위에 고통에 가까운 쾌감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잘 안 썼었지만.
받아랏! 힐링 웨이브!
“꺄…!!”
“하아앙….”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몸을 파르르 떨던 화연이는 내가 또 능력을 쓸세라 반쯤 늘어진 영은이의 팔을 잡아 부축하며 욕실로 황급히 들어가 버렸다.
누나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밥은 꼭 제때 챙겨 먹고 밥 먹고 나면 양치하고 세수할 땐 클렌징폼 꼭 쓰고 세수하고 나면 로션 바르고 스킨 바르고…. 아주 그냥 초 단위로 내 일정을 예약해두려는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무슨 일 생기면 인증기로 꼭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좀.”
애도 아닌데 귀에 딱지가 앉겠다고 궁시렁거리니 그걸 들었는지 누나가 눈썹을 치켜뜨면서 말한다.
“니가 수행원도 안 데려가려고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아, 공개적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수행원은 무슨 수행원이야!”
“넌 이제 그랑 블루의 마스터라구! 비공개 방문이라고 해도 수행원 정도는 데리고 다녀야지!”
“이번 영국에 가는 일은 수행원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그치만!”
“아 쫌! 누난 수행원이 아니라 내 뒷바라지해주고 감시할 사람 붙이려는 거잖아! 그만 안 하면 화낸다?”
그렇게 누나 혼자 떠드니까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 하잖아.
우리 가족에 프랑이랑 화연이, 거기에 따로 출발해서 방금 도착한 영은이에 혜령이 이모와 최수한까지. 공항 로비에 예쁜 여자들이 우글우글한데 그곳에 남자라고는 나랑 아빠만 덩그러니 있으니까 사람들 시선이 장난이 아니게 모인다.
거기다 길가면 10명 중의 12명이 돌아볼 만큼 예쁜 누나가 이러니까 "저렇게 예쁜 여자가 걱정해주는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하면서 군데군데 적의가 느껴지잖아!
페도라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흰색 반소매 셔츠에 검은 면바지랑 캐주얼 구두를 하고 있는 데다 화연이랑 영은이도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서 일행의 정체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쉽게 못 보는 미녀들만 모여있으니까….
아무튼 더이상 사람들 시선이 쏠리는 게 싫어서 입 좀 다물라고 했더니 누난 또 삐져버렸다. 근데 프랑을 잡아끌고 뒤로 가더니 뭔가 지시하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페도라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생전 써보지도 않은 모자를 썼더니 좀 성가신 기분이라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까 프랑이 다가와서 페도라를 보기 좋게 고쳐줬다.
“서하의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숨기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서하처럼 앞머리를 잔뜩 길러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유행이 되고 있다구요?”
내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뒤를 부탁할게. 미호는 엄마 곁에 붙어 다니면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지켜줘. 알았지?”
- 우웅.
미호는 이번에도 날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데려갈 순 없다.
“엄말 지켜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엄마 곁에 꼭 붙어 다녀.”
믿을 건 너밖에 없다고 해주며 여우 귀를 숨기기 위해 쓴 모자를 살짝 들어 이마에 뽀뽀해줬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호는 활짝 웃으면서 폴짝거리면서 뛰어다닌다.
미호는 꼬리를 통이 넓은 긴 치마 아래에 숨기고 귀도 모자로 숨길 수 있었지만 히아리드는 덩치도 크고 날개 때문에 바로 연합 오피스텔로 다시 보내놨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하라고 내 휴대폰도 들려줬으니까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지.
나한테 이마에 뽀뽀를 받고 좋아서 헤죽거리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니 혜령이 이모랑 엄마가 입을 열었다.
“레이드 팀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조심해서 다녀오렴.”
“응.”
시간이 돼서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탑승 절차를 밟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영은이가 뒤에서 자기 왼쪽 손목을 가르켰는데,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거겠지?
아빠랑 프랑이랑 셋이서 캐리어를 끌고 최수한이 끊어준 항공권을 확인하고는 아빠한테 물었다.
“…퍼스트 클래스는 알겠는데 프리미엄 클래스는 뭐야?”
“가보면 안다.”
무뚝뚝한 아빠의 대답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프랑을 돌아보며 물었더니 쿡쿡 웃으면서 설명해준다.
“퍼스트 클래스보다 고급화되고 차별화된 서비스래요. 수한 씨가 티켓을 뽑을 때 봤더니 인터넷 같은 데서 예매하는 게 아니라 공항에 직접 가서 티켓팅을 해야 한대요. 그러니까 최소 아랫사람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끔 해놓고 한 번에 12명만 받는 그야말로 프리미엄 서비스라고 하던걸요.”
“저 큰 비행기의 가장 안전한 곳에 12명만 앉을 수 있는 좌석이라니, 무지 비싸겠네.”
“편도에 3천만 원이라고 들었어요.”
“헐! 비싸!”
“네 녀석은 돈 많이 벌지 않으냐. 가진 사람은 버는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할 의무가 있는 법이다.”
“가진 자의 의무인 거야?”
킥킥 웃으면서 텅비어있는 프리미엄 클래스 전용 탑승장에 도착해서 출국 심사를 받으려…고 했는데 그런 것도 없다.
뭐지 싶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우리가 탈 한국 항공 소속의 승무원 제복을 입은 누나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정수훈 님과 정…서하 님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단정한 스튜어디스 누나 둘은 아빠 말고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프랑을 보고 잠시 굳었다가 애써 웃음 지으며 우리에게서 캐리어를 받아들고 안내하기 시작했다.
“출국심사 같은 건 안 해요?”
궁금해서 내 앞에 가는 승무원 누나한테 물었더니 움찔하고 놀라면서 허둥거리더니 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날 향해 입을 연다.
그 몸짓이 무척이나 정중하고 절제가 있는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모습만 아니라면!
“프리미엄 클래스의 고객분들은 티켓팅을 할 때 외에 다른 출국 심사는 하지 않습니다. 도착 시에 입국 심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야. 비싼 값 하는구나. 요즘은 자동 출입국 심사기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아예 여승무원 누나가 나와서 짐도 들어주고 비행기까지 안내해주다니.
짐도 화물칸에 싣는 게 아니고 따로 보관해주나 보다.
출국 심사도 패스하고 도착한 비행기 내부는 몇 번 타본 비즈니스 클래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급스럽게 치장된 여객기 내부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원목과 천연 가죽으로 만든 12개의 좌석 배치되어있었고 바닥은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라운지 바 같은 것도 있고 한쪽에는 고객들을 위한 응접실까지 마련되어있었다.
신기해서 프리미엄 클래스 좌석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랑 아빠랑 프랑이 가장 먼저 왔는지 12개의 좌석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프리미엄 클래스에서는 한 사람 앞에 한 명씩의 승무원이 배치된다더니 진짜 프리미엄 서비스인가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행 동안 고객님의 편의를 봐 드릴 캐빈 크루 김선아입니다.”
“잘 부탁해요.”
오른손을 뻗었더니 승무원 누나가 화들짝 놀랐다가 황공스럽다는듯이 두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살짝 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러나 뒤쪽 승무원 공간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풀리는지 흐느적거리면서 동료의 어깨에 기댄다.
왜 저래?
다리가 풀린 상태면서도 무시무시한 손놀림으로 카트에 이것저것 뭔가 준비해놓고 메뉴판 같은 조그마한 걸 들더니 얌전한 몸가짐으로 모델 워킹을 하면서 나한테 다가왔다.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있다고 하면서 음료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와서 뭘 달라고 해야 할지 몰라 프랑을 돌아봤더니 프랑이 대신 주문을 해줬다.
달콤한 생과일주스를 마시며 좌석 앞에 달린 대형 패널 TV를 건드려보는데 승무원 누나가 수시로 찾아오며 필요한 거 없냐고 편의를 봐주려는데 솔직히 너무 자주 와서 좀 귀찮아졌다.
그러는 중에 번듯한 양복 차림의 다른 손님 5명이 들어오자 기장이 직접 와서 나랑 프랑을 포함해 8명에게 차례차례 돌아가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특히 내 앞에 와서는 90도로 숙이면서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이야기와 함께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저 승무원 누나들도 그렇고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인 거 같다. 날 보는 눈에 공포심이 좀 어려있는 거 같거든….
딱히 나한테 해코지한 일본 외에는 난리 피운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지?
잠시 후에 퍼스트와 비즈니스, 이코노미석의 손님들이 다 들어온 것인지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진동도 없고 소음도 없어서 움직이는 거 같지도 않다.
거의 싱글 침대 사이즈에 가림막이 멋스럽게 꾸며진 좌석에 앉아 프랑을 다리 사이에 앉히고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한국을 떠나 영국을 향해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넌 영국에 도착하면 뭐할 거냐.”
비행기가 떠오르고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니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왔다.
“음. 일단 리디아 만나보고 에델베르그 가문에도 찾아갔다가 볼일 다 보면 그냥 여기저기 놀러 다닐 생각인데?”
“그러냐.”
“할 말 있으면 해. 무슨 일인데?”
“…이번 학술회의 때 의장을 맡은 사람에게 부탁을 받았다. 그는 네가 학회에 출석해주길 바라는 눈치더구나.”
“의학 학술회의 의장이 왜 날 찾아?”
의아해져서 몸을 일으키며 아빠를 보니 내 다리 사이에 앉아있던 프랑이 몸을 살짝 띄우며 자리를 비켜준다.
“네가 소울 리퍼의 정신 지배를 받은 사람들을 회복시켜주지 않았느냐. 그거 때문인 게지.”
“아. 그런가. 언제쯤 가주면 돼?”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다.”
“뭐야. 확실히 말해. 가? 말아?”
“오지 마라.”
아빠의 표정을 보니까 그 의장이라는 사람이 내가 회의에 출석하면 내 명성에 빌붙으려는 그런 게 있나 보다. 대단치 않다는 아빠의 표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신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다.”
용무는 그걸로 끝인지 돌아가 버리는데 무뚝뚝한 아빠 모습이 뭐가 웃긴지 프랑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면서 웃는다.
그 틈에 만면에 웃음을 띤 50대 남자가 날 향해 다가온다. 그의 앞을 프랑이 안색을 굳히며 막아섰다.
“어….”
“무슨 일이죠.”
“아, 그게, 그랑 블루 마스터님의 명성을 듣고 인사 겸해서….”
“알겠습니다. 전해드릴 테니 돌아가세요.”
“…네.”
프랑은 웃으면 화사하고 포근한 달빛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정색하고 굳은 표정을 지으면 시리도록 냉정한 분위기에 살 떨리는 느낌이니까 말을 함부로 걸기 힘든 위압감 같은 게 느껴진다.
남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버리는데 내 쪽을 엿보던 다른 2명은 말 안 걸길 잘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살짝 쉬었다.
“왜 그랬어? 아, 귀찮은 걸 막아줘서 고마워.”
“시하님이 부탁하셨어요. 제가 대신 수행 역을 맡아달라고 하셨거든요.”
…으이구. 누나도 진짜….
“서하. 돈을 조금 더 벌면 프라이베이트 제트기 한대 사시는 게 어떠세요?”
“개인용 제트 여객기? 앞으로 외국에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데 딱히 살 필요가 있을까?”
“신촌동 수련장도 1자형으로 긴 지역이니까 그곳에 저택 짓고 활주로도 만들면 좋지 않을까요? 아버님이나 어머님과 함께 해외여행 다닐 때도 편할 테고요. 지금처럼 귀찮게 오갈 필요가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음…. 한번 생각해볼게.”
나랑 프랑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과일 주스를 가져온 승무원 누나가 우리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썹 끝이 파르르 떨고 있었고 다른 손님들도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우리가 있는 좌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비행기 사려면 얼마 하려나?”
“이만한 여객기는 필요 없지만…. 얼마 전 발족식 때 참석하신 아랍 에미리트의 제이크 왕자에게 물어보면 잘 알려줄 거 같아요.”
“음. 영국 갔다 와서 알아보자.”
남들은 시중을 받으면 호사라고 하면서 좋아하던데 난 왜 이렇게 거북하지…. 청개구리도 아니고.
12시간을 승무원 누나의 과도한 친절을 받으며 비행해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40분이었다. 입국심사도 받지 않고 런던 시티 공항을 나왔더니 구름이 잔뜩 껴서 흐린 날씨다. 거기다 이 시간에 해가 뜨고 있었다.
영국은 여름의 아침이 빠른 건가?
아빨 호위할 경호팀은 어제 미리 도착해서 호텔을 잡고 경호 체계 연습을 한다고 했는데…. 오, 저기 있다.
공간지각으로 쓱 훑어보니 누나가 이야기해줬던 특징과 일치하는 신체 강화 3명 회복 1명 바람 속성 1명 해서 5명이 리무진 두 대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으로 눈에 익숙한 네 명의 여자애들과 검은 정장의 양키들이 우릴 향해 다가왔다.
검은 정장의 덩치들이 나랑 아빠한테 우르르 다가오는 모습에 다른 쪽에서 우릴 기다리던 경호팀 5명도 황급히 뛰어온다.
“마스터!”
“괜찮아요. 이쪽은 리디아 이슬라 마리에타, 영국의 공주에요.”
황급히 뛰어온 제일 앞의 보이쉬 컷의 여자 능력자에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리디아를 소개해주니 그제야 5명도 긴장을 적당히 풀고 아버지의 뒤쪽에 가서 선다.
경호 팀원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리디아는 날 향해 생긋 웃으면서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줬다.
“안녕하세요? 20일 만이네요, 서하 경!”
“되게 이른 시간인데 어떻게 알고 나온 거야?”
“후훗. 한국의 그랜드 마스터께서 오시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사실 시하님에게 들었어요.”
화사하게 웃으면서 날 환영하던 리디아는 내 표정이 썩어가는 걸 보더니 황급히 말을 덧붙인다.
“진짜예요! 시하 님이 전화 주시더니 서하 경이 오전 8시에 한국 항공을 타고 출국하셨다고 하셨는걸요!”
적은 내부에 있었군.
당황해하는 리디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더니 시선을 돌려 아빠한테 다가가 정중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한다.
“영국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닥터 정 수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프린세스.”
그러면서 내 손을 잡고 자기네들 리무진으로 안내하는 리디아였다.
“저희는 뒤따라가겠습니다, 마스터.”
검은 정장의 덩치들이 나랑 아빠한테서 캐리어를 받아 들고 리무진의 트렁크에 실으니 경호 팀원들은 저쪽에 세워진 고급 세단 2대에 올라탔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지만 공항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공항을 오가던 사람들이 리디아를 보며 "이슬라 공주님?", "빛의 공주님 아니신가." 하고 수군거리다가 나랑 프랑을 보더니 "오 맙소사. 파괴 신이잖아!", "빛의 공주님께서 파괴 신과 아는 사이셨다니?", "오 하느님. 우리 영국이 파괴 신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소리가….
내가 왜 파괴 신이야? 갓 오브 디스트럭션이라니! 난 일본한테 위협밖에 안 했는데!!
…그래도 블루 지니어스보다 파괴 신 쪽이 더 맘에 든다.
“영국은 날 파괴 신으로 보는 거야?”
차 안에서 날 보며 배실 배실 웃는 리디아에게 한마디 툭 던지니 화들짝 놀라면서 양손을 파닥거리며 젓는다.
“아아아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서하 경은 한국에서 존경받는 파괴…. 아니! 그랜드 마스터시잖아요!”
“파괴 신이라고 하려 했지! 너무해!! 난 실제로 일본을 부순 건 거의 없단 말이야!”
“릭터 규모 6.9의 지진에 건물이 쉽게 무너진 건 네 녀석이 하늘에서 터트린 마포의 충격파에 덕분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 참이다. ”
헉스….
“도쿄 상공 수 킬로미터에서 비행 중이던 여객기가 추락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지.”
쩝. 비행기는 생각도 못 했네.
생각지도 못한 아빠의 공격에 입맛을 다셨더니 리디아가 쿡쿡 웃으면서 입을 연다.
“우리 영국을 방문해주신 닥터 정과 서하 경을 위해 호텔을 예약했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미 호텔을 예약해뒀기에 공주님의 권유는 사양하겠습니다.”
“아….”
리디아는 아빠가 자신을 한번 편들어 준 걸 가지고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당연히 권유를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거부당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아빠의 경호원들도 같이 묶을 거라서 예약해둔 호텔에 갈 거야.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그, 그런가요…? 그럼 어디서 묶으시는지라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가 어디에 투숙하는지라도 알아내려는 리디아를 보며 프랑이 입을 열었다.
“사보이 호텔 스위트 룸을 예약했다고 들었어요, 공주님.”
“그런가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프랑. 하지만 두 분은 저희 왕실의 손님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그 호텔이 왕실 호텔이었던 거냐?!
근데 어떤 소설에서는 왕실 호텔은 감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니, 영국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판타지 소설에서 말이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지금은 내 개인적인 이유로 찾아온 거라 곤란해. 왕실의 손님으로 가면 손님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거 아냐.”
“하지만 서하 경은 그 영상을 보러 오신 거 아닌가요?”
“보고 싶긴 하지만 보여주는 대신 뭘 요구할지 몰라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기도 해. 아무튼,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부탁할게.”
그때 가선 건방지다고 투숙을 거절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인지도를 생각해보면 그럴 일은 없으려나?
“네에….”
조금 생각하는 모습이 된 리디아를 내버려두고 처음 와보는 외국의 풍경을 공간 지각으로 확인해본다. 근데 이렇게 공간지각으로 보니 데이터로만 느껴지지 풍광 같은 건 개코도 없군.
그래서 차창을 내려 바깥 풍경을 보는데 뭐…. 빌딩 숲 사이에 가로수가 서 있는 풍경이 우리나라랑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가 옆에 고풍스럽게 생긴 성이 있는 곳을 지나가는데 성안의 여러 곳에서 위상력이 느껴진다. 이 패턴은 위상력이 깃든 물건으로 만든 아이템?
파란 아침 공기 사이로 철제 펜스 옆을 지나다니는 관광객 복장의 사람을 보다가 성 내부를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고 있으려니 내가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옆에 있던 리디아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런던탑이에요. 공식 명칭으로는 여왕 폐하의 왕궁 겸 요새지요. 우리 런던의 자랑거리 중 하나랍니다.”
“탑? 성인데?”
“후후. 어째서인지 아무런 수식어 없이 탑으로 부르던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공식 명칭보다는 런던탑으로 더 많이 불리우는 곳이에요.”
살짝 미소 지은 리디아는 내 관심이 기쁜 듯이 계속해서 설명해줬다.
“런던탑은 왕궁이자 요새로 사용됐었지만 가장 많이 사용된 용도는 교도소였어요. 신분이 높은 자들을 감금해두는 곳이었지만 1300년대부터는 왕실에서 사용한 보석 왕관을 보관해두는 용도로 쓰고 있지요.”
설명을 들으며 런던탑에서 위상력이 느껴지는 물품을 살펴보니 확실히 리디아 말대로 왕관처럼 보이는 게 대다수다. 위상 세계에서 획득한 왕관을 쓰거나 보관하고 있는 건가?
그 뒤로 영국에서 관광지로 볼만한 곳을 추천해주는 리디아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면서 나중에 프랑이랑 둘이서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