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클로저스-237화 (237/517)

00237  아숨프레 수몰 폐허.  =========================================================================

주둔지로 돌아와 모두와 함께 아침을 챙겨 먹은 다음 팀원 전원을 모아 오전 업무를 분담하기 시작했다.

최수한과 생활 보조 1조와 2조는 부산물 해체 작업에 투입되고 누나와 1팀은 주둔지에서 대기하며 습격해올 이형종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화연이와 남은 3팀과 5팀은 전투 장비를 차려입고 수몰 폐허의 선발 탐색을 맡았다. 그리고 나와 프랑은 하늘에서 대기하며 접근할 중상위 이상의 이형종을 상대하기로 했다.

팀을 나누고 출발했을 때는 오전 10시였는데 수심 깊은 곳에 쳐둔 공간의 벽 덕분에 수위가 또 내려가 수몰 폐허의 진흙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드러난 호수 바닥은 뻘밭이 되어있어서 3팀과 5팀이 이동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공간의 벽을 회수하고 수몰 폐허의 상공에서 공간의 벽을 쳐두고 앉아있으려니 발아래에서 물비린내가 솔솔 올라온다.

그렇게 화연이와 3팀과 5팀이 드러난 폐허를 한참 탐색을 하는 와중에 공간의 벽 위에서 뒹굴다 보니 점점 지겨워졌다. 이형종도 다가올 생각을 안 하고.

“어우. 바닥이 드러나니까 비린내가 작살이네. 직접 탐색작업을 벌이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역일까.”

안쓰러운 눈빛으로 3인 1조로 폐허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사람들을 내려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프랑에게 물었다.

“이형 종들 상태는 어때?”

“크게 바뀐 점은 없어요. 아무래도 호수에 존재하는 1/3가량의 이형종 들을 등급 불문하고 모두 죽여서 호수 면적이 줄어도 균형이 나빠지진 않았나 봐요.”

등대처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프랑은 다시 호수를 죽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수위가 갑자기 낮아져서 당황했는지 자기들끼리 싸우는 갑각류 이형종 들이 몇몇 보이긴 해요.”

“지네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면 당분간 신경 쓸 일은 없겠네. 나도 내려가서 폐허를 좀 돌아볼 테니까 프랑은 주변에 이형종이 다가오진 않나 잘 살펴봐 줘.”

“맡겨주세요!”

공간의 벽을 치우고 아래로 뛰어내렸다가, 진흙이 가득한 곳에 착지했다간 신발을 비롯한 바지와 옷이 진흙 범벅이 될 거 같아 잽싸게 진흙밭 바로 위에 공간의 벽을 치고 그 위에 올라섰다.

어제 위상력을 감지했던 곳을 뒤져볼까?

아침에 화연이한테 위상력이 느껴진 다섯 곳의 위치를 표시한 종이를 줬는데 화연이는 주둔지에서 가까운 곳부터 조사를 시작하는 거 같으니 난 먼데 있는 걸 찾아봐야지.

물비린내가 진하게 나는 검회색 뻘밭을 보며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니 물이 빠지면서 물고기들이 뻘밭에 갇혀 펄떡거리는 게 보인다.

문득 멀리 떨어진 화연이와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증기에 근거리 통신기능이 있으면 위상 세계에서 무전기처럼 통화가 가능할 텐데, 기술력이 없어서 못 만드는 건가?

화연이가 위상력이 감지된 곳 근처를 2명의 팀원과 함께 조사하는 걸 보다가 시선을 돌려 콜로세움같이 생긴 건축물을 올려다봤다.

위상력은 콜로세움의 지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둘레 800m의 콜로세움은 내부도 넓고 큰 데다 중심에는 여기저기 장애물과 벽이 잔뜩 서 있고 중심을 둘러싸 관객석이 들어서 있는 모양이라 진짜 콜로세움으로 밖에 안 보인다.

물속에 오래 있어서 조금씩 부스러져 내린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전체적인 형상은 크게 부서져 내린 곳은 없었다.

위상 세계는 어떤 곳이길래 이런 폐허가 남아있는 걸까. 어떤 생명체들이 이곳에서 살았을까.

영상 기록을 켠 다음 입구를 통해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가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비린내가 심하게 난다.

어두컴컴한 내부를 눈에 마나 비전을 켜서 살펴보며 복잡하게 꼬여있는 건축물 내부를 공간 지각으로 훑어보니 물이끼가 안 낀 곳이 없다.

콜로세움의 내부로 깊이 들어가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곳은 물이 찰랑찰랑 고여있었다.

위상력은 저 안쪽에서 느껴지는데…. 첫째 인어의 진주가 있어서 물속에서 숨 쉬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쩐지 저 지하실의 물은 더러 울 거 같아 공간의 벽을 만들어서 지하에 고인 물을 죄다 없애버렸다.

물이 모두 사라지고 훤히 드러난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가니 계단에도 물이끼가 껴있어서 공간의 벽으로 공중을 걸어 다니지 않았다면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졌을 거 같다.

손가락을 뻗어 벽을 훑으니 거친 돌벽의 감촉은 온데간데없고 미끄러운 물이끼가 느껴 졌다.

빛 한점 안 통하는 지하지만 마나 비전 덕분에 회백색의 시야로 주변을 살펴보는 데 지장도 없고 공간 지각 덕분에 곤란한 점도 없어 지하로 10m가량 걸어 내려왔더니 눈앞에 길고 곧은 통로가 드러난다.

똑…. 똑….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덕분에 약간 소름이 돋는 기분이지만 저 위에서 열심히 경계 중인 프랑의 알몸을 훔쳐보며 으스스한 기분을 떨쳐냈다.

통로는 높이 4m에 폭도 3m 정도 되는 곳이라 사람이 돌아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 같진 않다. 관객석이나 통로도 전체적으로 거대했고….

통로는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있어서 지반이 물렁물렁해져 콜로세움 자체가 기울어진 거 같다.

길고 곧은 통로를 지났더니 지하 광장이 드러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새하얀 뼛조각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있었고 물이 사라지는 재앙을 만난 생선들이 바닥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주변 구조를 확인해보니 여긴 창살이 달린 감옥처럼 보였는데…. 공간 지각으로 통로와 연결된 위쪽을 살펴보니 이곳에서 콜로세움 경기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여기에 괴물이나 죄인들을 가둬놓고 경기가 시작할 때마다 꺼내 간 건가? 뿌리만 남은 창살의 흔적을 살펴보니 창살 굵기는 50cm가 넘었다. 이형종이라면 이렇게 두꺼운 창살로 막아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닐 텐데…. 사람이나 동물을 가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통하는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상력은 저 통로의 안쪽에서 느껴진다.

통로의 끝에는 웬만한 20인 사무실보다 큰 방이 하나 있었는데 물에 썩어 뭉개진 나뭇조각들과 종이 비스무리하게 보이는 것들 뭉개진 거 같은 게 바닥을 어지러이 메우고 있었다.

위상력은 방의 중앙에 썩어서 무너진 나뭇조각 더미의 아래에 있었다.

…손대면 병에 걸릴 거 같은 이미지의 썩은 나뭇조각 더미라서 공간의 벽으로 다 지워버리고 허리춤에 메고 있던 천총운검을 잡아서 얼마 남지 않은 잔해를 슬슬 헤치니 잔뜩 녹슬고 물이끼가 가득 낀 철판이 드러난다.

캉캉

천총운검으로 철판을 두드려봤지만…. 쇳소리로 뭔가 알아낼 지식 따윈 없으니 손을 뻗어 철판에 손을 대고 힘으로 들어올 리….

우웅웅웅우웅

…려는데 철판에서 진동과 함께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철판에 붙어있던 녹과 이끼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며 중2병 시절에 자주 본듯한 괴상한 마법진같이 생긴 게 드러난 순간 마법 진이 보라색으로 빛나며 시커먼 연기를 푸시식하고 뿜어낸다!

“뭐야!?”

불길한 보랏빛을 뿜어내는 마법 진의 모습에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천총운검을 검집에서 빼 들고 허공에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를 노려봤다.

저거, 독이야? 이미지는 누나의 어둠 속성의 보호막이랑 비슷한 분위긴데.

몸에 마나 시브를 집중하면서 여차하면 공간의 벽으로 다 지워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검은 연기가 점점 뭉쳐지더니 어렴풋한 사람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머리의 눈으로 짐작되는 두 곳에서 시퍼런 빛이 뿜어져 나온다. 뭔가 꺼림칙한데 공간의 벽으로 그냥 치워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좁은 방 안의 공기가 떨리며 쇳소리와 비슷한 느낌의 바람 소리와 함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 뭐지, 동영상 재생 철판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쇳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모두 끝이다. 달부는 욕망과 번뇌와 광란의 대가로 종말을 고하는 제단이 되었고 제물이 된 자들의 공포와 증오와 광기가 담긴 정수의 투발投發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누호디의 경고를 새겨 들었어야 했다. 진동이 밀려온다. 그 당시에는 무슨 소으으으리이이이으으 그으니 이기 이 아아 아가가각….-

“으윽! 소름 끼치게!”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테러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목소리가 늘어지다가 비틀리며 소름 끼치는 소리로 변하길래 눈살을 찌푸리며 철판을 내려다봤다.

철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사람 형태로 뭉쳐진 검은 안개도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머리 부분에서 빛나던 두 줄기의 푸른 빛도 사라지고 검은 안개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빨간색으로 그려진 마법 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도 사라졌다. 뒷 이야기가 조금 궁금해졌지만, 안개도 사라졌고 또 이야기를 듣다가 소름 끼치는 테러를 당하고 싶지 않다.

조금 경계하는 기분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천총운검을 들고 철판을 캉캉 두드리, 으악?!

푸시시식!

-…그 당시에는 무슨 소리냐 일축했지만 누호디는 이런 이성체의 증오와 광기를 쌓는 행위는 대지님의 분노를 사 팔퀴투브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 예지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미 다른 도시와의 연락도 끊겼다. 남은 것은 우리뿐이리라. 대지님이시여 어으으이이이기기극그스어어거거으 그 극….-

캉캉캉캉!!

짜증 내면서 철판을 다시 두드리니 다시 연기가 뭉치며 또렷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거, 설마 TP나 위상력을 받아서 재생되는 영상기야?

-…대지님이시여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시어 지저의 국토에 향한 지로선을,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그리고 검은 안개가 뭉쳐진 안개 인간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고 마법 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도 천천히 사그라졌다.

“흠. 그러니까 콜로세움에서 온갖 개잡질을 벌이다가 대지님이란거의 분노를 사서 물에 잠기고 여기가 호수가 됐다는 건가? 그럼 수몰된 곳이 전부 도시?”

잠시 호수의 면적을 떠올려 봤다. …우리나라 토지 면적의 4배가 넘는 도시라니, 대체 얼마나 큰 거야.

일단 위상력이 느껴지는 게 이 철판인 거 같으니 이것만 따로 빼갈까. 잠시 철판의 주변에 뭔가 장치 같은 건 없나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고서 조심스럽게 철판을 잡았….

-이제 모두 끝이다. 달부는 욕망과 번뇌와 광란의 대가로 종말을 고하는 제….-

“됐고.”

이거, 아무래도 동영상이 기록된 마법진같다. 아까랑 똑같은 말을 꺼내는 검은 안개 인간의 모습을 신경끄고 내 몸통 크기만 한 철판을 내려다보니…. 역시나 TP에 반응해서 재생되는 거 같다.

내 몸에는 언제나 마나 모드가 지속하면서 TP랑 위상력이 회전하고 있으니까 접촉하면서 재생 스위치를 건든 거겠지.

그런데 철판을 뜯어내고 보니 아래쪽에 잔뜩 녹슨 보물 상자가!

가로 50cm 세로 30m 높이 30cm! 척 봐도 세심하게 세공된 데다 뭔가 보석 같은 게 여기저기 박혀있는 이끼 낀 백금색 상자라니, 보물 상자가 틀림없지!

상자를 들어 올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동그란 동전 비슷한 거랑 이런저런 위상력이 깃든 돌멩이…에 보석 같은 것도 보이고 하여튼 무게도 100kg은 가뿐히 넘어가는 거 같다.

돌멩이는 6개뿐인데 위상력이 깃든 데다 보석이랑 금화하고 같이 들어있는 걸 보면 비싼 게 맞겠지?

보물 상자 속에는 물이 고여서 찰랑거리는데 상자를 기울여서 물을 모조리 쏟아내고 뚜껑을 닫았다. 동전과 보석에 잔뜩 물이끼가 껴있긴 하지만 물에 씻으면 되겠지!

보물 상자의 외견은 좀 녹슬어있지만 만진다고 부스러질 거 같진 않아 옆구리에 끼고 손에는 철판을 챙겨 든 다음 콜로세움을 되돌아 나왔다.

거대한 도시를 멸망시킨 욕망의 덩어리는 뭘 말하는 거지? 진동은 해일 같은 게 밀려오는 그걸 말한 게 아닐까.

거대한 땅을 휩쓸며 몰아쳐 오는 해일을 잠깐 상상했다가 등줄기에 소름이 솟아버렸다. 그나저나 그런 해일 규모의 물이 휩쓸었는데도 건물들이 용케 무사했네.

확실히 수몰 폐허는 어딘가 모르게 잘려져 나온 모습이긴 하다. 그럼 저 대륙 사구 아래쪽 해저 평원 쪽에 도시가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어제 이형종을 정리할 때 공간 지각에 건물 같은 건 아무것도 안 잡혔던걸 보면 다 쓸려나갔거나 한 거 같다.

그러고 보면 이곳도 수심 300m의 호수 바닥인 데다 호숫가에서 수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데 여긴 어떻게 발견한 거야?

콜로세움 밖으로 나오니 공중에 떠 있던 프랑이 내게 시선을 주고 있는 게 보인다. 내 옆구리와 손에 들린 보물 상자랑 철판이 뭔지 궁금한 모양이다.

날 보는 프랑과 시선을 마주치고 철판을 살살 흔들어주니 프랑도 웃으면서 내게 손을 흔들어준다. 그리고 뭔갈 찾았는지 조심스레 땅을 헤집으며 발굴하고 있는 화연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화연이는 물과 대지 속성 능력자인 두 여자와 함께 땅을 파내고 있었는데 타이즈 아머 위에 입고 있는 검은색 박스티가 가슴까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열심히 뻘밭을 치우면서 두 속성 능력자와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긴 내가 알려준 5곳 중 한 곳이었는데 발아래에는 중세 유럽에서나 썼을 법한 석재와 목재를 섞어 만든 건물 하나가 땅속에 잠겨있는 게 공간지각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상력은 그 집 안에서 느껴지고 있고. 근데 집을 이루는 목재가 다 썩어 문드러져서 유적 파내듯이 조심스럽게 파낼 게 아니라 그냥 다 퍼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다가오는 걸 발견한 물 속성 능력자가 화연이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면서 날 가르키자 화연이가 뒤돌아서며 날 향해 다가오더니 내 손에 들린 철판과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서하? 그건 뭐지?”

“수몰 폐허 10시 방향에 있던 위상력의 정체야.”

화연이는 내 손에 들린 철판에 관심을 보이는데 똑같이 진흙 범벅이 된 두 여자 속성 능력자는 내 옆구리에 끼인 보석상자가 더 흥미로운 거 같다.

철판을 돌려서 마법 진이 그녀들의 눈에 들어오게끔 보여주니 놀라고 진지하고 멍한 표정이 됐다.

“…유물이군. 어떤 것인지 확인은 해봤나?”

“응. 여기에 위상력을 흘려 넣으면.”

-했지만 누호디는 이런 이성체의 증오와 광기를 쌓는 행위는 대지님의 분노를 사 팔퀴투….-

“이렇게 재생되는 거 같아.”

“위상 세계 역사 유물이군!”

화연이는 놀라면서 내게 달려와 손을 뻗었는데 자신의 손에 가득 묻은 진흙을 보더니 뒤따라 달려온 물 속성 여자 능력자에게 물을 뿌려달라고 한다.

검은색에 군데군데 물빛 머리카락이 섞인 짧은 숏컷 여자 능력자가 손에서 물을 뽑아내 화연이의 두 손을 씻겨주니 두 손을 빠르게 털어 물기를 제거하고 나한테 철판을 받아든다.

-팔퀴투브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 예지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미 다른 도시와의 연락도 끊겼다. 남은 것은 우리뿐이리라. 대지님이시여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시어 지저의 국토에 향한 지로선을,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화연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철판 위에서 솟아 나온 검은 안개 인간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그 안개 인간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유심히 듣기 시작하는데 두 명의 여자 능력자는 철판보단 내 옆구리에 들린 보물 상자에 호기심을 잔뜩 내비친다.

“마스터? 그거, 혹시, 보물, 상자에요?”

“보물?! 보물보물!”

“보물 상자가 맞아요. 금화랑 은화랑 보석도 많이 들어있어요.”

“꺄아! 보물이래 보물!”

“대박! 위상 세계 역사 유물에 보물 상자까지! 완전 대박!”

호들갑을 떠는 두 여자 능력자는 보물 상자 안을 보고 싶어 하는데 무거워서 이곳에서 보여주긴 힘들다고 고개를 저어 보이고 화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파묻힌 건물 파내려는 거야?”

“음. 위상력이 느껴진다고 한 곳이 여기인 거 같아서 표시하는 중이다.”

“근데 너무 진흙 범벅이 된 거 아냐?”

화연이와 두 여자 능력자는 자신의 진흙투성이 차림을 내려다보더니 머쓱해 하면서도 공간의 벽 위에 서 있는 깔끔한 내 모습을 새초롬하게 바라보는 게 샘이 나나 보다.

“어쩔 수 없지. 뻘 투성이라 조금만 걸어 다녀도 진흙이 잔뜩 묻으니까.”

화연이는 내게 철판을 돌려주면서 저 하늘 높이 떠 있는 프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경계는 프랑에게 맡긴 건가.”

“응. 주둔지에 보물 상자랑 철판 갖다놓고 올게.”

“아니, 같이 가지.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주둔지에 돌아가야 한다.”

“그럼 오후에는 발굴에 올인하는거야?”

“그래. 서하가 지켜주니 생활 보조 능력자들도 전부 동원해서 빠르게 발굴할 생각이다.”

화연이의 말을 들으며 공간 지각을 돌려보니 폐허의 여러 곳에 퍼져있던 3인 1조씩 11개 조가 이쪽을 향해 이동하는 게 보인다.

그들과 함께 주둔지로 이동하니 주둔지에서는 이미 점심 준비가 한창이었다.

누나는 내가 찾은 두 개의 성과를 보더니 무척이나 기뻐하며 각 팀장과 조장들을 불러 회의용 천막에서 철판을 다시 재생시켰다.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재생이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검은 연기 인간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연신 감탄하며 이끼가 제거된 철판에 드러난 마법 진을 눈여겨보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거 굉장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철판을 제작한 지는 둘째 치고 명확한 지성 생명체의 존재를 확실히 증명하는 첫 번째 물건 같습니다만….”

“우수훈 3팀장 말대로군요. 그간 폐허나 유적 같은 곳의 공략과 예술품의 출토가 있었지만, 이것처럼 명확하게 지성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건은 없었죠.”

서글서글하게 생긴 3팀장의 이름이 우수훈인가보다. 5팀장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로 위상력을 받아서 재생되고 있는 검은 안개 인간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저 연기 인간의 모습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신경 쓰입니다만….”

약간 통통하게 생긴 생활 보조 1조 장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입을 여는데 어제오늘 회의 중에 처음 말을 한 거 같다.

“정수의 투발이라는 건…. 악의를 담아 터트렸다는 뜻일까요? 수몰된 건 인재에 의한 천재지변의 소환?”

1조 장의 이야기를 받은 정태령 2조 장도 뭔가 고민하는 표정이 된다.

확실히 검은 안개 인간이 하는 말은 이 호수의 생성 배경을 알려주는 거 같긴 한데, 그게 의미가 있나 싶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누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말 그대로 역사일 뿐이네요. 위상 세계 역사학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겠지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점심을 먹고 수몰 폐허를 발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그럼 저희 3팀의 팀원들에게 보고받은 수몰 폐허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글서글한 미남인 박윤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메모한 내용을 보며 입을 연다.

“일단 저희 3팀이 맡은 지역인 폐허의 중심부에 있는 탑을 기준으로 12시에서 4시 방향을 조사해본 결과….”

그 뒤로 3팀과 5팀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질이 어떻다느니 건축양식이 어떻다느니 돈 될만한 물건은 그다지 보이지 않고 금속류 몇 가지만 보이는 상황이라고 한다.

어쩐지 발표를 듣고 조금 침울한 분위기가 돌 때 정태령 2조 장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마스터께서 발견한 보물 상자와 마스터께서 잡으신 이형종 시체 외에는 눈물 날 만큼 속 빈 강정인 거 같네요. 아숨프레 수몰 호수에 오면서 어슴푸레 이런 일이 벌어질 거 같았습니다.”

“큭큭큭.”

“태령 씨같이 젊은 처자가 그런 아재 개그를….”

“킥킥”

“그렇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저희 마스터는 무력뿐만 아니라 감지 능력에서도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시니까요. 현재 수몰 폐허에 다섯 곳에서 위상력이 감지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가져오신 보물 상자와 철판은 그중 하나지요.”

“헉쓰.”

“헐.”

화연이의 말을 들은 팀장과 조장들은 "이런 대박이 4개나 더 남아있다고?", "역시 우리 마스터." 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1조 장의 불안감은 이해합니다만 이것은 기록으로만 남은 상황이니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 듯한 내용입니다. 다들 점심을 먹으시고 휴식을 취한 다음 3팀이 주둔지를 경계하고 그 외에는 전원 오후 1시부터 발굴을 시작하겠습니다.”

화연이의 회의 종료 선언이 나오고 팀장과 조장들이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우르르 천막 밖으로 나간다.

“위상력이 느껴지는 곳이 있다는 말이 저렇게 기뻐할 만한 일이야?”

“위상력을 머금은 아이템들은 대부분 유용하고 비싼 것들이다. 예로 들면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천총운검만 봐도 그렇고 이 철판 역시 역사학자들과 위상학 관련 분야에서 얼마나 군침을 흘릴지 모르겠군.”

“어?”

“어휴. 넌 남자가되가지구 무슨 욕심이나 야망 같은 건 없어? 강한 능력을 얻었으면 그 분야에 공부도 좀 하구 그래야지. 이번에 사냥으로 얻은 부산물 전부를 합쳐도 이 철판 하나만큼의 값어치도 못한단말야.”

야망이라니, 그게 뭐임? 난 내 연인들이랑 놀고먹을 수 있으면 만족인데?

“방금 그냥 놀고먹고 싶다고 생각했지? 꿈 깨셔~”

“…왜.”

얄밉게 나불거리는 저 주둥이를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퉁거렸더니 누나는 킥킥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가 가만히 있고 싶어도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누나의 말에 프랑도 키득거리면서 누나와 함께 천막을 나서고 화연이도 피식 웃으면서 철판을 들고 천막을 나선다.

“아 진짜. 누나가 저렇게 말하니까 진짜 소름 돋는데.”

울컥해버려서 누나 발밑에 확 구멍을 만들어서 빠트려버릴까 했지만…. 후환이 두려우니 관뒀다.

언젠가 진짜 크게 골탕 먹일 순간이 오겠지.

============================ 작품 후기 ============================

낮에 볼일보러 잠시 나갔는데 황사 + 노란 꽃가루가… -_-;

아직까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목이 아프네요.... 당분간 황사에 꽃가루가 심하다던데 다들 목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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