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9 휴식. =========================================================================
방배동 저택에서 볼일을 끝낸 우리는 신촌동의 수련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집사 할아버지와 영은이 사이에 흐르던 묘한 분위기를 물었더니 영은이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한이는 저택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꽃을 사기 위해 인근의 꽃집에 자주 들렀었어. 그 꽃집의 주인은 주한이 또래의 여자아이였는데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결혼하겠다고 나한테 알려왔었어.”
이야기를 시작한 영은이는 무척이나 아릿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주한이의 부인 역시 고아였는데, 부인은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아기를 가지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어. 하지만 주한의 부인은 주한과 자신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낳길 원했지. 그리고 원하는 대로 아이를 가졌지만, 임신 초기부터 위험한 순간이 몇 번 있었어. 그래도 주한이와 부인의 노력과 정성에 위험한 고비를 모두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영은이는 신호에 걸리자 핸들에 상체를 기댔다.
“정작 출산의 순간이 다가오니 의사가 이대로 간다면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한 거야. 그땐 이미 임신 합병증…. 임신 중독증이 찾아온 상태라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한 상황이었어. 그 당시 내게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주한이를 부인의 곁에 붙여놓고 회복 능력자도 수배해줬을 텐데 나도 정신없이 바쁜 때라 신경을 써주지 못했었지. 그리고 주한이 부인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주한이는 내 명령으로 장거리 출장을 나갔을 때였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차를 출발시키면서 이어 입을 열었다.
“당시의 일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야 하는 일이라 주한이를 보냈던 건데. 결과적으로 주한이는 자신의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하게 된 거야.”
“…….”
나도, 프랑도 아무 말도 못하고 영은이가 해주는 이야기만 듣고 있으려니 살짝 한숨을 쉰 영은이는 약간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돌아온 주한이는 난산 끝에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칠삭둥이를 보며 아내의 유골함을 품에 안고 오열할 뿐이었지. 그리고 태어난 칠삭둥이는 백일잡이도 하지 못하고 엄마를 따라가 버린 거야….”
“…그건 영은의 잘못이 아니야.”
“나도 일이 바쁘고 고되다는 핑계로 아내의 옆을 지켜줘야 할 주한에게 이런저런 잡일을 시키면서 같이 있을 시간을 뺏었어.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주한이의 부인에게 신경도 써주지 못했던 거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일은 아니야.”
프랑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은 영은이는 무척이나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별말 없이 오토기어에 손을 올린 영은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집사 할아버지가 영은이를 원망하는 이야기를 했었어?”
“…딱 한 번, 너무 힘들어하고 잠도 못 자는 모습에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했었던 적이 있었어. 술의 힘을 빌려 재우려고. 그때 술에 취한 주한이 아내를, 딸을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었어.”
목이 메는지 프랑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못하고 영은이도 쓴웃음을 지었다.
“집사 할아버지는 영은이를 원망하지 않고 있을 거야. 아내와 딸이 헤어질 순간이 남들보다 일찍 찾아온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그렇게 자책하지 마.”
내 위로에 영은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날 보더니 방긋 웃는다.
“어쩜 주한이랑 똑같은 말을 하니? 주한이도 그 말을 했지만,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뒤에는 주한의 외로움이, 주한의 부인이 느꼈을 감정이 나도 모르게 떠올라. 주한의 부인이 죽음을 앞뒀을 때 주한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주한의 따뜻한 손이,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나려고 해.”
“…….”
프랑은 손을 뻗어 영은이의 목을 살짝 끌어안고 나도 말없이 영은이의 손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조금 더 줄 뿐이었다.
신촌동의 수련장에 도착해서 천총운검을 들고 몸을 풀다가 영은이를 돌아봤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내 눈에는 센티 해진 영은이가 보인다.
한숨을 쉬면서 영은이를 힘껏 껴안았다.
“서, 서하?”
“정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이제 최수한을 미워하는 건 그만두고 두 사람이 조손 관계로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줘봐.”
내 품에 안긴 영은이는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내 등에 팔을 돌리고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풀렸는지 방긋 웃는 영은이를 마주 보며 웃어주고 탱탱한 엉덩이를 두들겨주니 "꺅~" 하면서 엉덩이를 가린다.
“근데 난 최수한을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냥 우리 서하한테 먼저 귀여움 받으려는 게 건방져서 그랬을 뿐이야.”
“…귀여워해 준 적 없어.”
“프랑이 말리지 않았으면 사랑의 매를 최수한한테 먼저 들이댔을 거잖아? 부인인 우리를 두고 최수한에게 먼저 시험하다니, 그게 귀여워하는 거 아니면 뭐니?”
“아냐! 그건 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여자한테 주먹질하고 발길질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도구를…!”
“서하는 사디스트 기질이 많잖아요.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가 괴로움에 헐떡일 때마다 딱딱이가 더 커지는 것도 알고 있어요. 최수한 씨에게 곤장을 칠 때마다 살짝살짝 흥분하기도 했잖아요?”
…!!
“어머. 그랬니?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응. 특히 입으로 해주면 목젖을 스칠 때마다 딱딱이가 꿈틀이가 되는걸?”
“어쩐지~ 우리 배를 임신한 것처럼 불려놓을 때마다 좋아하는 모습에 의심은 했는데. 우리가 괴로워할 때마다 흥분해서 그런 거였구나?”
당황한 내 표정을 프랑과 영은이는 음흉한 얼굴로 속닥이는데, 아니 속닥일 거면 안 들리게 하라고! 다 들리잖아!
무시하자! 무시가 답이야!
나는 왼손으로 검집을 잡고 천총운검을 뽑아 들어 TP를 주입한다. 그리고 주입된 TP가 일정수치 이상이 되니 역시나 여인의 한 맺힌 흐느낌 같은 소리가 검신에서 흘러나온다.
흐느끼는 검명을 귓가로 흘려넘기며 공간의 벽을 치…는 데 소비 TP가 20% 넘게 줄었다?
뭐지? 1m 정육면체를 만들었는데 원래라면 80이 소비 되야 하는데 70이 줄었다. 잠시 흐느낌이 흘러나오는 천총운검을 들어 올리니 시퍼런 잔상이 허공에 남으며 눈을 어지럽힌다.
혹시 이거 때문인가?
주입한 TP를 회수하니 검명이 멈추고 시퍼런 빛도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1m 정육면체의 공간의 벽을 생성하니 80 TP가 소비된다.
내 마나 시브로 이런다면 위상력 운용 기술을 써도 비슷한 효과가 나는 걸까?
“방금 그 소리는 뭔가요? 검에서 흘러나온 거 같은데!”
여인의 흐느낌 같은 검명을 들은 프랑과 영은이는 눈동자가 눈썹에 메달린것마냥 놀라면서 다가왔다.
“검명은 처음 들어! 어떻게 된 거니? 푸른 빛도 번쩍이던데 마나 시브의 효과인 거니?”
“응. TP를 주입하니까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소비 TP 감소가 30%로 늘어나네. 프랑도 한번 해볼래?”
신기해하면서 만져보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에 프랑에게 천총운검을 건네주니 눈을 반짝이며 한 손으로 검을 받아드는 순간 덜컥하면서 프랑이 땅에 넘어지려 해서 잽싸게 손을 뻗어 프랑의 손을 받쳐줬다.
“윽. 죄송해요!”
잽싸게 두 손으로 힐트를 잡은 프랑은 검을 떨어트릴 뻔 했다는 표정으로 민망해하고 미안해했다. 무척이나 창피해하는 모습이라 왜 그런가 했더니…. 기사가 검을 떨어트리는 건 수치라고 생각한다든가?
프랑은 검신을 들어 올려 검극을 내가 만들어둔 공간의 벽에 향하더니 "합!"하는 기합성을 지른다.
파칫!
손가락 굵기의 자그마한 번개 한 가닥이 검극에서 뻗어 나오며 땅을 긁어나가고 진로에 있던 자갈들이 따다다닥거리며 튀겨진다.
번개 줄기는 내가 만들어둔 두 개의 공간의 벽 중 하나에 적중했는데 공간의 벽에 빨려들듯이 사라진 벼락을 보며 프랑에게 물었다.
“10 TP 짜리를 쓴 거야?”
“네에.”
소비된 TP는 8이었으니까, 프랑은 그 뒤로 72 TP 108 TP 등의 벼락을 공간의 벽에 떨구지만 맞을 때마다 뭔가가 공간의 벽을 건든다는 느낌만 있을 뿐 호박색 투명한 벽은 멀쩡했다.
“그럼 내가 해볼까?”
프랑의 벼락 시연장면을 구경하던 영은이는 천총운검을 받아들고 한 손으로 가볍게 횡 베기와 종베기를 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혀있어. 크로스 가드가 없는 기형 검이라니, 창포 검이랑 비슷하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왼발을 앞으로 향하며 왼손을 힐트의 위쪽을, 오른손은 아래를 잡는 기수식을 취하더니 내려치기 사선 올려 베기에 오른 수평 베기 직후 찌르기를 연달아 펼쳐낸다.
물 흐르듯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동작은 역시 검덕후 영은이답게 굉장히 깔끔하고 빠른 모습이다.
검이랑 단검 수집이 취미라는 영은이는 나한테 선물로 준 익스트리마레이쇼 EX만 봐도 무시무시하게 비싼 돈을 물 쓰듯이 쓰는 수집가였으니까.
이윽고 위상력 운용 기술을 사용하는지 몸 안의 위상력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회전력이 검신에도 주입되며 천총운검이 물빛을 출렁이기 시작한다.
물빛이라니, 다른 사람 눈에는 안보이겠군. 혹시나 해서 프랑에게 물어보니 무색의 투명한 아지랑이가 검 주변에 보인다고 대답했다.
“하앗!”
순간 오른발을 내디디며 왼 올려 베기를 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땅을 밀어 차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나는 순간 오른 내려 베기를 한다.
검이 허공을 두 번 베는 순간 거대한 물빛의 반월이 펼쳐지더니 바닥에 두 줄기의 날카로운 참격의 흔적을 남기며 10m가량을 나아가서 공간의 벽을 후려치지만, 아니 참격이 공간의 벽에 닿는 순간 형태가 일그러지며 사라져버렸다.
“흐응. 역시 공간의 벽은 무서운걸. TP를 30만이나 쓴 반월 검인데 약간의 흠집도 안 나다니.”
검기를 날리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지만 별로 세진 않은 거 같다. 멀쩡한 공간의 벽의 모습에 혀를 내두른 영은이는 내게 천총운검을 넘겨주며 말했다.
“운용 기술로 검에 TP를 집어넣었지만 검명도 없고 소비 TP는 20% 정도 그대로네. 아무래도 마나 시브에만 반응하나 봐?”
“그런가. 일본은 이 검을 어디서 얻은 거래?”
돌려받은 천총운검에 TP를 집어넣으니 다시 흐으으으 하는 흐느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카후밀의 왕릉 같은 곳에서 얻었대.”
카후밀이라면 마라우소와 같은 언데드 지역? 시간 되면 거기도 레이드 팀을 이끌고 한번 가봐야겠다.
그동안 공간의 벽을 쓰면서 의심해본 건데 내가 지정한 사람을 공간의 벽이 상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야 날 제외한 모든 걸 분해해 버리는 공간의 벽이지만,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나 의복에는 아무런 영향을 안 주는 모습을 보면 그런 걸 의심할 법도 하잖아?
미호는 넓은 땅에서 신나하며 여섯 꼬리를 이리저리 휘날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녀석의 조그마한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간지각으로 감지해봤다.
머리 위에 여우 귀 2개와 사람의 귀 2개. 꼬리뼈에서 시작된 6개의 꼬리. 성징이라곤 전혀 없는 밋밋한 몸속에는 심장이 명치에 하나, 복부에 1개 해서 2개가 있는 걸 빼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몸이다.
“미호, 이리와.”
나비를 쫒아다니며 까르르 웃던 미호는 내 부름에 잽싸게 날아왔다.
- 주인님 불렀어?
“…아니다. 가서 놀아.”
고개를 갸웃한 미호는 이내 쫓던 나비를 찾아 다시 팔랑거리면서 돌아다닌다. 시선을 돌려 프랑과 화연이를 보지만…. 잘못하면 다칠 수 있으니 그녀들은 제외하고.
얌전히 서 있는 히아리드의 머리에서 발 끝까지 남김없이 공간지각으로 살펴보고 손을 뻗어 감촉이나 형태 등을 진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야? 만질게 필요하면 내 몸을 만져!”
히아리드의 가슴에서 복부로 내려왔다가 엉덩이와 허벅지, 가랑이 사이를 만지기 시작하니 영은이가 조금 화난 표정으로 커다란 가슴을 나한테 들이밀면서 외친다. 프랑도 불퉁한 표정으로 날 흘겨본다.
“어? 아냐. 공간의 벽이 내가 지정한 대상에게 피해를 안 줄 수도 있는지 실험해보려는 거야. 프랑이나 영은이는 몸 구석구석 다 기억하고 있지만 잘못되면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까 튼튼한 히아리드를 대상으로 시험해보려고.”
“아….”
“그런 거였어?”
…민망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에게 썩소를 날려주고 히아리드의 날개까지 만져본 다음 손을 털고 입을 열었다.
“널 대상으로 공간의 벽을 시험해볼 거야. 크게 다칠 수도 있지만 다치면 회복시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하늘님의 시험에 제 육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수박만 한 가슴 사이에 끼운 히아리드는 눈을 감고 조용히 서있는다. 아깐 공간 지각으로 샅샅이 살펴보고 저 몸을 확실하게 자각하면 될 거 같은 느낌이었는데….
…으음. 왠지 이대로 공간의 벽을 쳤다간 히아리드가 죽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드는 게, 실험해보기 좀 꺼려진다. 손을 들어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머리를 굴려보지만 뭐 때문에 갑자기 예감이 바뀐건지 모르겠다.
팔짱을 끼고 수십 분째 고민하고 있으려니 프랑과 영은이, 히아리드는 지겨운 줄 모르고 날 계속 응시하고 있….
아.
공간의 벽을 제한 없이 치기 위해서는 여분의 위상력을 온몸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벽을 어떤 모양으로 칠지 정하고 위치를 지정하면 저절로 그 위치에 공간의 벽이 생성된다.
그 행위는 팔을 뻗어 물건을 잡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행위다. 즉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무의식 레벨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라는 거다.
그러니 공간의 벽을 치는 걸 의식하면서…!
끙…. 안되네.
이 방법이 맞다는건 확신할 수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2시간을 공간의 벽과 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한 번도 성공을 못 했다.
서른 세 번째 분해되어버린 히아리드의 검지를 힐링 터치로 원래대로 돌려주고 한숨을 푹 내쉬며 연인들을 돌아보니 프랑의 품에 안겨서 콜콜 자는 미호와 서로 잡담을 나누며 내 모습을 찍고 있는 프랑과 영은이가 보인다.
…집중력도 떨어지고 여기까지 해야겠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프랑과 영은이가 다가오면서 웃는다.
“잘 안된 거니?”
“응. 뭔가 얇은 벽 같은 게 날 가로막는 거 같아.”
“그 능력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니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거에요.”
“고마워. 집에 가서 좀 쉬다가 다시 연습해야겠다.”
집에 돌아왔을 땐 화연이는 테라스에서 시화 유선을 연습하고 있었다. 일은 다 끝난 건가?
스판 트레이닝 복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집중해서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영은이도 트레이닝 복을 입고 테라스로 나가더니 화연이의 시화 유선을 방해해서 멈추게 하더니 화연이와 대련을 시작한다.
두 사람이 엉겨 붙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인증기를 켜서 리디아가 귀국하기 직전에 건네준 자신의 인증기 메일을 연락처에 등록하고 전화를 걸었다.
눈앞에 뜬 연결 대기 중 글자가 뜬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섯 번 정도 신호가 간 다음 전화가 연결됐다.
[어머? 서하 경!]
“안녕.”
[처음 보는 연락처여서 누굴까 했는데, 서하 경이 전화를 걸어줘서 기쁘네요.]
옅은 금발의 처녀는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준다. 구김살은 전혀 없는 새하얀 블라우스에 파란색 끈으로 목에 나비매듭을 맨 차림인 리디아는 날 보며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저기에 정수리에 바보 털 한 가닥을 만들면 딱일거 같은데.
“돌아가서 여왕님한테 혼나진 않았어?”
[후후. 아쉬워하셨을 뿐이지 혼나진 않았답니다? 그리고 일본에 사과를 받아내신 것, 축하드려요.]
“축하받을 일은 아니야. 당연히 받아내야 할걸 받은 거니까.”
리디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풀썩 웃어버렸다.
[그렇지요? 그랜드 마스터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이번 일본의 일로 많은 국가가 한국과 그랑 블루, 서하 경의 이름을 주목하고 있답니다.]
내 이름이 조금 널리 알려진 거 같아서 기쁘긴 하네. 그나저나 그랜드 마스터는 뭐야? 다른 별명이 생긴 건가?
“그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네.”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고 계신 분이 서하 경이세요. 저희 영국에서도 서하 경을 꼭 한번 초대하고 싶은 정도인걸요?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슬퍼하는 건 관심이 집중돼서 싫다는 거야.”
[아….]
“그리고 초대는 사양할게. 모르는 데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하하 호호 웃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그래도 이번 달 중순쯤에 영국에 한 번 방문할 예정이야.”
그 순간 리디아의 주변에서 살짝 소란이 일어난다. 지금은 영국 시각으로 아침 8시 아닌가? 토요일 아침인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굴 만나는 거지.
하지만 공주는 주변의 소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와의 대화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와아. 무슨 일로 방문하시는 걸까요? 혹시 보고 싶으시다던 그것 때문인가요?]
“그 이유도 있고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어.”
[어떤 이유인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원하시는 것에 대한 거라면 제 임의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답니다. 하지만 여왕 폐하께서는 틀림없이 허가를 내어주실 거에요!]
리디아는 무척이나 기대하는 표정으로 날 보며 두 손을 맞잡고 환히 웃는다.
“그래. 혹시 마중 나올 생각이야?”
[그야 당연…!]
“그러지 마. 가는 건 한국이나 그랑 블루의 일로 가는 게 아니고 내 개인적인 볼일로 가는 거니까. 지금 알려주는 것도 한 달뿐이지만 같이 학교에 다닌 안면으로 알려주는 거야.”
[…서하 경은 이제 평범한 분이 아니세요. 자신의 지위와 권위에 맞는 모습을 갖추실 필요가 있어요.]
“아무튼 그때 다시 연락할게. 이만 끊는다.”
[앗. 그럼 그때 봬요!]
화연이와 영은이가 대련을 마치고 들어오는 모습에 리디아와의 전화를 끊으니 옆에서 프랑이 두 손으로 내 왼손을 잡으며 입을 연다.
“저도 리디아 공주와 같은 생각이에요. 서하는 이제 평범한 능력자가 아니세요. 세계가 기억하는 서하는 무력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일본을 무릎 꿀린 초유의 능력자로 보고 있어요.”
“그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서하의 소식을 들을 거에요. 서하가 행동하면 그 소식도 함께 퍼질 거구요. 서하의 행동에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그랑 블루의 이미지가 영향을 받게 돼요.”
“…알았어. 기억해둘게.”
결국, 품격에 맞는 행동을 하란 건가.
============================ 작품 후기 ============================
이번화의 초반부를 쓸땐 Andre Rieu (Love Theme From Romeo & Juliet) 를 듣고 있었습니다.
러브 테마라고 되어있죠? 저거 낚시에요 낚시! 러브 테마가 아니야!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게 아니니 어떤 의미에서는 맞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