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8 휴식. =========================================================================
토요일 아침은 연인들이 모두 기절해버려서 별수 없이 엄마가 해준 밥을 먹기 위해 39층으로 내려왔다. 미호와 히아리드를 데리고 내려왔더니 엄마가 활짝 웃으면서 반겨줬다.
“어머나? 아들, 아침에 어쩐 일로 내려온 거니?”
“아침 먹으러 왔어. 어제 밤늦게까지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게 잤더니 다들 피곤한지 아직 자고 있어.”
물론 전부 사실이다. 중간에 이야기 하나만 빠졌을 뿐! 엄마는 뭐가 어쨌든 내가 아침을 먹으러 왔다는 게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보다가 거실로 들어가니 누나도 자기 방에 붙은 욕실에서 씻고 나왔는지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데 위상 세계 이후로 부쩍 커진 가슴이 티셔츠 너머로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 너 왜 내려왔어?”
“다들 늦잠자고 있어서 밥 먹으려고 왔어. 근데 옷 입은 게 그게 뭐야? 되게 헤퍼 보여.”
“응?!”
내 말에 깜짝 놀란 누나는 자기 옷차림. 얇은 티셔츠에 숏팬츠를 내려본다. 티셔츠가 워낙 커서 숏팬츠가 안보여서 하의 실종처럼 보이는 차림이었는데 "헤프게 보여?!" 하더니 당황해했다.
“저것은 보여 줄 남자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입고 다닌다니.”
“…내 옷차림이 그렇게 이상해?”
“이것아! 젖꼭지가 다 비치잖니!!”
엄마의 잔소리에 움찔한 누나는 가슴을 손으로 가리더니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가슴이 평면일 때는 브래지어를 안 하고 다녀도 상관없었는데 이젠 계곡을 만들고 있으니 좀 자각을 했으면 좋겠다.
미호는 엄마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털 날리면 안 되니 아빠한테 가 있으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빠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의 팔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며 아빠가 보는 책에 관심을 보였다.
- 주인님 아빠. 뭐 봐?
“조선 시대의 문신인 율곡 이이가 저술한 격몽요결이라는 서술서다.”
- ??
어디서 고서적 복제본을 또 구했나? 미호는 전혀 못 알아들은 표정으로 새하얀 여우 귀를 연신 쫑긋거리다가 책을 만지작거리는데 아빠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손을 뻗어 미호의 흰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내가 저 나이 때 저랬다가 아빠한테 꿀밤 맞은 기억이 있는데….
평범한 반소매 셔츠와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누나는 나한테 다가와서 물었다.
“너 여름방학 동안 뭐 할 거야?”
“왜?”
“강한 이형종 출몰 때문에 공략이 중단된 폐허 지역이 몇 군데 있어. 수익이 조 단위로 예상되는 곳이라 그곳을 정리하려 하는데 네가 힘이 필요해.”
“아, 그거 어제 화연이랑 모여있을 때 이야기했어. 다음 주 월요일에 출발하는 레이드에 낄 생각이야.”
“그래? 그럼 나중에 화연이랑 이야기해야겠네.”
“위상 세계 입장하면 며칠 동안 레이드 해?”
타임리버는 한번 입장하면 7일간 위상 세계에서 머문다고 했고 그랑 블루는 5일이랬지?
“조사,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공략 전 같으면 폐허나 던전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10제곱킬로미터기준으로 3~4일 정도 걸려. 레이드는 목표를 제거하는 순간 레이들 종료, 탐색은 상황별로 틀리구. 토벌전은 기준으로 잡은 일수를 모두 채우는 편이야. 하지만 서하 니가 있으면 1/4 가까이 줄어들 거로 예상해. 근데 그건 왜 물어?”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아빠를 한번 보고 말했다.
“아빠 학술 회의 때 영국 따라가려고.”
“…소피아 씨 찾으려고?”
“그런 것도 있고.”
누나는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8월 15일 전에 끝마칠 건수를 찾아보겠다고 하며 엄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한데 묶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망할 년이 여러 사람 마음 흔들어놓는구만.
TV에서 일본의 선거 소식을 전해주는 뉴스를 보며 속으로 소피아에 대한 분노를 생성 중인데 아빠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영국에 가는 건 결심한 거냐.”
“응. 내가 원하는 영상을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래. 겸사겸사 다른 일도 처리하려고.”
“그래.”
TV 화면에는 사망한 미야비 야스히코 일본 총리의 딸이 화면에 나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자기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받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어받든가 말든가 두 번 다시 날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니 미호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부엌으로 다시 달려들어 가는데 누나의 손에 밀려서 도로 밀려 나왔다.
아침을 먹고 40층에 올라와서 이번 일본 사건으로 획득한 천총운검의 능력을 확인해보기 위해 칼집에서 뽑아 손에 들어봤다.
천총운검은 일본의 삼종 신기라고 불리는 검과 거울, 곡옥의 세 가지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천부인이라는 신화 속 물건과 동급 취급을 한다든가?
뭐, 일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네들의 왕이라는 일왕이 물려받을 때도 못 본다고 하던데 진짜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없겠지? 없으니까 안 보여주는 거겠지.
아무튼 천총운검의 검신은 은은한 푸른 색을 띄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광택이 전혀 없다. 거기다 크로스 가드 없이 검신에서 바로 직선으로 힐트와 이어지는 직선 모양의 특이한 검이었다.
그나마 손에서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힐트에 사람의 손 모양 홈이 나 있어서 꽉 쥐면 휘두른다고 손에서 흘러나가거나 하진 않겠지만…. 찌르기는 하지 말아야 할 모양새다.
힐트. 검자루는 16cm에 힐트를 제외한 검극까지의 길이가 84cm의 롱소드형태였다. 힐트까지 다 합치면 100cm인가. 무게는 여타 장식이 없는 것치고 무게가 2.5kg 정도 된다.
전체적으로 무광택에 은은한 푸른색을 띄고 있는 천총운검은 보고 있으려니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왼손에 천총운검을 들고 검신을 아래로 향하고 손을 들어 올려 하늘에 공간의 벽을 쳐보니 확실히 소비 TP가 20%가 줄어들었다.
누나랑 히아리드가 가지고 있는 나무 지팡이는 히아리드의 말로는 하늘 섬에 몇 그루 없는 지혜수 악스피리어스의 나뭇가지를 가공해서 만든 하늘의 지팡이라고 부르는데, 그 지팡이를 가지고 있으면 빛 속성 한정으로 특성을 강화해준다고 했다.
시간 날 때마다 누나가 테스트해본 결과 소비 TP는 5% 감소에 빛 속성의 위력이 10% 증가하고 발사속도, 캐스팅 속도 크기 등이 전체적으로 5% 정도 올랐다고 하더라.
하늘의 지팡이에 관한 이야기가 전 세계에 흘러나가니 빛 속성 능력자를 데리고 있는 나라와 빛 속성 능력자들이 판매할 의사가 없냐고 비밀리에 물어왔단다.
그래서 "하늘의 지팡이는 그랑 블루 마스터의 개인 소유에요. 저는 빌려서 쓰고 있는 거랍니다." 라고 공식적인 답변을 보냈는데도 계속 팔라고 연락을 하더니 내가 일본을 박살 낸 그 뒤로 연락이 일제히 끊겼다고 했다.
혜령이 이모는 수많은 나라가 날 꽤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해줬는데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야 날 어려워하고 무서워할수록 날 터치하려는 인간들은 줄어들 테고 덩달아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위협 역시 사라질 테니까.
그런 유명세에 비해 내 얼굴은 많이 평범한 데다 내 헤어 스타일 때문에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다니면 사람들이 내가 그랑 블루 마스터인 줄 몰라보니까 개인적인 행동에 제약을 받지도 않아서 더 좋다.
아, 천총운검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는데 또 정신이 딴 데 팔리네.
아무튼, 하늘의 지팡이도 세계 위상 능력자 연합에서 유니크 등급의 무기로 분류했는데 이 천총운검은 유니크를 넘어선 레전드리 등급이다.
대부분의 능력 증폭이나 TP 소비 감소 장비들은 속성이나 능력에 꽤 제약이 심한 편인데 이 천총운검은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소비 TP가 20%나 줄여주니까.
알 수 없는 재질의 천총운검의 검면을 살짝 팅겼더니 이이이잉 하는 가냘픈 여자의 앙탈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슬쩍 천총운검에 TP를 집어넣으니 여자의 흐느낌 같은 검명劍鳴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헐, 뭐지.”
살짝 떨리며 흐느낌이 계속 검신에서 흘러나오기에 공간 지각으로 검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딱히 거슬리거나 하는 점은 안보이는데.
“…?”
의아함에 이리저리 검을 휘둘러보지만, 궤적을 따라 푸른 검광만을 남기다가 TP 주입을 멈추니 검명도 멈추고 푸른 검광도 사그라진다.
“게임 같은 데서 보면 이런 건 꼭 에고 소드던데.”
내 능력이 모자라서 흐느낌으로만 들리고 목소리는 못 듣는다던가?
…그럴 리 없나. 뭐 에고소드라고 해봤자 딱히 도움이 될 거 같지도 않다. 난 검술이나 몸 쓰는 건 잘 못 하니까!
인증기를 켜서 에고 웨폰ego weapon을 검색어로 조사해봤지만 쓸데없는 소설 이야기만 잔뜩 나와서 천총운검을 검집에 꽂고 거실로 들어왔다.
직접 싸움에 사용하면 오래 못 쓸 테니 넌 그냥 내 촉매나 되어줘야겠다.
화연이가 사다 놓은 호두나무 검거치대에 천총운검을 올려놓고 큰방으로 들어갔더니 프랑과 화연이, 영은이는 아직도 침대 위에 늘어진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점심이 다되도록 일어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 힐링 웨이브 1단계를 쏴버렸다.
- 꺄하하아~!
문턱 너머에서 열린 방문 사이로 힐끔거리던 미호는 힐링 웨이브의 푸른 물결에 휩싸이고는 비명 같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꼬리를 팔랑거리면서 히아리드에게 달려가 버렸다.
연인들도 힐링 웨이브에 맞자마자 몸을 꿈틀거리다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언제까지 잘 거야? 벌써 해가 중천이라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프랑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드려주고 있으려니 화연이와 영은이는 그래도 신체 강화 능력자라고 비틀거리며 내 품에 안겼다가 천천히 큰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간다. 잠시 새하얀 네 개의 달덩이를 보다가 프랑에게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프랑. 프랑? 괜찮아?”
“아, 으으. 괜찮아요오…. 딸꾹.”
새하얀 나신으로 햇살을 받으며 두 손을 침대에 짚고 애써 버티던 프랑은 잠시 딸꾹질을 몇 번 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전기자극은 양날의 검이었어요…. 아휴.”
“그래? 그건 나도 생각도 못 했는데 기분이 꽤 좋았었어.”
“정말인가요? 에헤헤.”
배시시 웃은 프랑은 공중에 몸을 띄우고 욕실로 들어가더니 이미 씻고 있는 두 사람과 함께 씻기 시작한다.
씻고 나온 연인들과 점심을 해먹고 아침에 누나와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니 화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14일까지 끝낼 셈이라면 수몰 폐허가 적당하겠군. 그럼 나는 시하와 함께 계획을 짜놓지.”
말을 끝낸 화연이는 출근을 위해 드레스 룸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수몰 폐허는 물속에서 싸우게 되려나? 첫째 인어가 준 진주가 든 소켓을 만지작거리면서 공간 지각으로 화연이가 옷 갈아입는 걸 훔쳐보는데 영은이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날 보며 물었다.
“서하는 오후에 뭐할 거니?”
“최수한이 교육 잘 받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남는 시간은 수련장에서 수련할 건데, 할 거라도 있어?”
“그러니? 주한이가 마침 최수한의 집사 교육이 끝났대서 가보자고 하려 했는데 잘됐네.”
“최수한 씨가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저번 7월 5일이었지 않아? 이제 한 달째인데 벌써 다 배웠대?”
프랑도 놀란 눈으로 영은이를 돌아보면서 물어보는데 나도 놀랬다. 집사 일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 텐데 한 달 만에 다 배웠어?
내 놀란 표정에 영은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기로 된 찻잔을 들어 올려 녹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집사 일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손에 일을 놓지 않고 배웠다더라? 집사 일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도 있는 대로 사면서 하루에 잠을 세 시간도 안자고 배웠대.”
…나중에 상이라도 줘야겠네. 굉장히 꼼꼼해 보이는 집사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면 정말 집사 일에 대해 모두 다 배웠을 거 같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데 검은색 여성용 정장을 입은 화연이가 걸어 나오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내 턱을 잡고 살짝 들어서 키스를 해준다.
“그럼 다녀오지.”
어벙한 내 얼굴을 보며 후 하고 웃은 화연이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섹시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켜버렸다.
20대 생기발랄한 처녀 같은 옷을 입은 영은이는 발랄한 모습으로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나는 10분 정도 있다가 천총운검을 챙겨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내 표정을 살피던 프랑이 내 손을 잡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서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영은이를 혼자 내보낼 때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게 프랑의 눈에 보였나 보다. 히아리드의 등에 매달린 미호와 히아리드도 날 힐끔거리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였다.
“영은이도 내 연인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남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동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프랑은 내 정령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스킨십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화연이와 영은이는 모녀지간이니 연인처럼 보이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는 게 점점 마음에 안 든다.
“영은은 그런 부분까지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에요.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그리고 영은이가 운전하는 페라리 엔초를 타고 방배동 저택으로 이동하는 중에 영은이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서하의 세 번째지?”
“응.”
“우후훗. 난 그걸로 충분히 만족해. 거기다 서하가 차별받는다는 느낌이 안들 정도로 몰래몰래 신경 써주고 있잖니?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쭉~ 우리 자기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난 더 바랄 게 없는걸.”
신호를 받고 정지하는 순간 영은이는 핸들에서 손을 떼고 보조석에 앉은 내게 상체를 들이밀며 입술을 훔쳐간다.
진심 시리즈에 버금갈 만큼 본심을 보여준 영은이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방배동 저택에 도착해서 정원으로 들어가니 어째 예전보다 더욱 보기 좋아진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저택 정문에는 집사 복을 입은 최수한과 집사 할아버지가 정자세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와, 근데 최수한은 가랑이 사이에 딸랑이가 없고 엉덩이가 조금 크고 허리가 남자보다 조금 가늘다는 점을 빼면 남자랑 다름없는 몸매였는데….
지금은 한 듯 안 한 듯 안 미약한 화장에 한 달 동안 머리카락을 열심히 다듬고 관리했는지 등까지 내려오는 그야말로 매끄러운 머릿결을 자랑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목 뒷부분에서 푸른 리본으로 동여맨 모습이 가슴이 심히 안타까운 참한 처자가 집사 복을 입은 모습으로 보인다. 도톰한 입술은 살짝 윤이 나고 맑은 눈동자 속 깊숙한 곳에는 나를 향한 열망이 보였다.
그리고 일정 거리까지 다가가니 최수한과 집사 할아버지가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두 사람이 동시에 내뱉은 단어는 똑같았지만 젊음의 힘과 늙음의 노회함. 남자의 중저음과 여자의 고음이 어우러지며 화합을 이루어낸다.
영은이도 두 사람의 모습에 눈썹을 들어 올리며 감탄하고 나도 최수한의 완전히 바뀐 모습에 놀랐다.
“와오? 대단한데. 절도 있는 자세가 주한이 젊었을 적을 떠올리게 하는걸.”
“허허. 저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제 지식을 모두 빼앗길 줄 몰랐습니다.”
표현과는 다르게 집사 할아버지의 표정은 흐뭇함이 가득 묻어난다.
“…수고했어.”
나 이외에는 시선에 넣지도 않고 날 조용히 응시하는 최수한의 눈빛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니 오른팔을 명치에 대고 왼팔은 허리 뒤로 돌리더니 45도 각도로 상체를 숙였다가 올리며 입을 연다.
“모두 할아버님의 지도 덕분입니다.”
할아버님? 의아한 표정으로 집사 할아버지를 보니 노신사의 웃음을 보인다.
두 애완동물은 밖에서 놀라고 하고 1층 응접실로 이동한 우리는 최수한이 우려내온 차를 마시며 집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 하고도 3일 동안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자신의 지식을 흡수한 최수한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는 집사 할아버지는 정말로 흐뭇한 표정이었다.
또 가족이 없다는 최수한에게 집사 일을 가르치다 보니 정말로 손녀 같아졌다는 말도 해주셨다.
집사 할아버지는 일찍이 결혼했지만, 부인이 첫 출산에서 산고로 인해 요절하고 난산으로 태어난 아이마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어미를 따라 하늘나라에 가버린 후 재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살아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고아 출신의 최수한 역시 부인과 아기와 사별하고 홀로 살던 집사 할아버지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집사 할아버지는 최수한에게 정을 주며 가진 지식을 전부 전수해주었고 최수한 역시 자상한 모습의 할아버지 같은 집사 할아버지를 마음으로 따르게 됐단다.
그렇게 교육을 시작한 지 5일 만에 최수한은 집사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처럼 모시기 시작했고 집사 할아버지 역시 그런 최수한을 기꺼운 마음으로 손녀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영은이는 앞에 앉은 집사 할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서 하는 곧 만들 자선 목적의 비영리 재단의 관리·감독을 주한이가 맡아주길 바라고 있어.”
“그렇다면, 저는 집사직에서 해고입니까?”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집사 할아버지의 농담에 영은이도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새로운 피도 수혈되었으니 늙은이는 편히 쉬어야지?”
“여사님한테 집사 할아버지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집사 할아버지가 제가 만들 재단을 관리·감독해주시면 저는 마음 편히 레이드 활동을 할 수 있을거에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은퇴하면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위명이 자자한 그랑 블루 마스터께서 직접 권유하시는데 거절할 수야 없는 일이지요.”
“그래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그리고 이 저택은 매물로 내놓을 거니 정리가 모두 끝나면 여기에 적힌 곳으로 가.”
그러면서 품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집사 할아버지에게 넘겨준다.
“퇴직금이야. 집의 명의는 네 앞으로 해놨으니 재단 일을 도와주면서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도록 해.”
“…아가씨의 배려에는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집사 할아버지의 말에 영은이는 쓰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냥 봐서는 오랜 시간 집사로서 일해온 시종인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주는 모습 같지만, 마지막에 보인 반응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거 같다.
영은이랑 집사 할아버지 사이에 뭔가 일이 있는 건가? 나중에 물어봐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얌전히 서 있는 최수한에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화연이한테 이야기해둘 테니 이곳에 정리가 끝나는 대로 그랑 블루로 돌아와서 능력자로 활동하도록 해. 신촌동에 지을 저택이 완공될 때까지 지내면 될 거야.”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지기로 한 이상 TP를 먹여서 적어도 C 클래스 최상급까지는 끌어올려 주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
음…. 이건 밤에 연인들이랑 상의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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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