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6 휴식. =========================================================================
사업 지원동의 창고를 나와 공간 지각으로 그랑 블루 빌딩을 쭉 살펴보니 한고은이랑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누나랑 혜령이 이모는 어느새 자기 집무실에 돌아가 있었다.
프랑은 화연이와 함께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화연이의 인증기로 영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겠지.
히아리드는 여전히 화분 옆이 자기 자리라는 듯이 멍하니 서 있었고 미호는 내 집무실 소파 위에 누워 게임 삼매경이다.
아빠는 환자를 진찰하고 있었고 엄마는 사무실에서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 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내 나름대로 소피아 그년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는 재판장에 나가기 직전에 날 죽이려고 작당했던 주범격인 다섯 놈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직접 만나 몇 가지를 물어봤었다.
왜 날 죽이려 했냐.
날 죽이려 한 이유는 영은이의 예상대로였다. 박물관 사태 이전에는 소피아 에델베르그가 보내주는 내 능력. 탐색 능력 범위와 내 성장 가능성, 거기다 자질을 보고받고 결심했단다.
거기다 별 능력도 없는 감지 능력자가 2회차에 홀로 입장해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걸 보고 그들도 자료를 토대로 지들 나름대로 시뮬레이터를 돌려보니 이게, 내가 사냥으로 벌어들일 수익이 국가가 천조국 소릴 듣게 해준다는 결과가 나왔단다.
배알이 뒤틀린 이놈들은 별 능력 없는 감지 타입이라면 손쉽게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소피아 에델베르그에게서 내 야외학습 시기와 장소를 듣고 때마침 구하게 된 소울리퍼의 함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 심어둔 몇 놈의 끄나풀과 정보를 가지고 소울리퍼의 함을 내 야외학습 장소에 보내놓는 데 성공한 그들은 야외학습 당일, 내가 국립 박물관에 온 걸 보고 소울리퍼의 함에 장착되어있는 봉인 장치를 끄나풀을 이용해 풀어버렸다.
그렇게 봉인이 풀린 소울리퍼의 함은 곧 주변에 수백 명의 생기를 보더니 깨어나기 시작하고, 그 낌새를 눈치챈 나와 애들이 박물관에서 도망 나오게 된 거지.
소피아의 보고를 통해 소울리퍼의 함 계획이 실패했다는걸 알게된 놈들은 날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며 직접 암살자를 투입하기로 했단다.
하지만 그 뒤로 알게 모르게 나에 대한 호위 인력이 늘어나 버려 슬슬 눈치를 보던 중 내가 신촌동에 거대한 수련장을 만들고 종종 그곳에서 수련한다는 이야기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 직후 놈들은 바로 습격 계획을 짜고 실행에 나선 거였다.
무슨 생각으로 총리를 죽이고 독살 혐의를 씌우려고 했냐.
국내에서 데모가 일어날 상황이라 다급하게 시선을 돌리려다가 죽은 미야비 일본 총리가 자기들을 한국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격분, 이대로면 자기들 생명이 위태로워질 거 같아 입을 다물게 할 겸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단다.
정황상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 나라의 수도 상공에 위협 행동을 벌일 정도의 성질 급한 애새끼라 독살시키면 각 국가의 경계와 의심이 나한테 쏠릴 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 그 머리속에 든건 뇌가 아니라 똥이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애써 참고 놈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녀석들은 수천만 명이 사는 도시에 직접 마포를 떨구진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수가 되어서 망테크를 타버린거고.
마지막 한 가지를 물어봤다. 소피아 에델베르그를 어떻게 매수했냐.
개잡년의 모친은 일본 출신으로 능력자 사태의 배상으로 영국에 파견한 신체 강화 능력자였다.
소피아 에델베르그의 모친은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 소속으로 공작에 소질을 보이던 여자였는데 당시 20세에 불과하던 그 여자는 외모와 능력을 바탕으로 수십 년에 걸쳐 에델베르그 가문의 인정을 받고 소가주와 결혼해 에델베르그 가문의 정부인이 되었단다.
그 뒤로 낳은 아이가 소피아 에델베르그와 다른 남자아이 둘이었다는데 소피아 에델베르그의 유독 남다른 친화력이 자신들의 계획에 무척이나 적합해 보였다던가.
그래서 나이 많이 먹은 흔한 신체 강화 능력자보다 대인 관계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소피아를 간첩으로 키워 화연이 옆에 붙여버린 것도 전부 우리나라를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그것으로 여기는 이 개새끼들이 수작질을 벌인 거였다.
그년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내가 누나랑 위상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잠적해버려서 자신들도 찾을 수 없다는 말만 했다. 그래서 능력자 연합에 소피아 에델베르그가 위상 세계에 입장했냐고 물었더니 한참 뒤에야 입장한 적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다섯 놈에게 들은 이야기를 청와대에서 나오질 못하는 영은이한테 전해줬더니 부드럽게 웃어주면서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내가 알려준 건 이미 알고 있는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연이가 없는 데서 나더러 달링달링거리고 화연이가 있는 곳에서도 달링달링 거리던 것도 어쩌면 나랑 화연이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소피아 에델베르그는 처음부터 서하와 과도한 접촉을 시도하려 했었지요. 중간에 영은이 등장한 뒤로는 영은에게 번번이 가로막혔었지만요.”
프랑과 미호를 데리고 능력자 연합 한국 총괄지부로 향하면서 소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프랑도 이상한 점이 여러 가지로 보였다고 입을 열었다.
“과할 정도로 인맥이 넓은 것도 처음에는 그냥 마당발에 오지라퍼였다고 생각했는데 그 바탕에 스파이라는 항목을 대입해보면 정보 수집 목적으로 친목을 유지한 거라는 생각 밖에 안 들어.”
“그러네요…. 첫인상은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나도 동감이다.
일본 사태도 끝나서 약속했던 미호와 히아리드의 체세포와 혈액 표본을 제공할 겸 지부장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미호와 히아리드 둘을 데리고 혜령이 이모한테 갔다.
며칠 전 지부장이 아란 셰이커 본부장과 알티나 멜디오스라는 연구원과 나눈 이야기를 혜령이 이모한테 해주며 능력자 연합 한국 지부에 가보겠다고 하니 그럼 마스터 전용 차량을 이용하라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마스터는 이제 명실공히 그랑 블루의 마스터세요. 공적인 일로 움직이실 때는 전용 차량을 사용해주세요!”
…혜령이 이모가 저렇게 울 거 같은 표정으로 운전기사까지 고용했다며 말하는데 안 듣기도 뭐해서 30대 건장한 아저씨가 운전하는 푸른색 롤스로이스 팬텀을 타고 능력자 연합으로 이동했다.
능력자 연합에 도착해서 차에 내리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연합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겠다며 꾸벅 인사하고 차를 몰고 사라졌다.
…어쩐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인데.
내 옷차림도 캐주얼한 복장이라 롤스로이스 팬텀에 내리니 주변 사람들이 "저 꼬맹인 뭔데 저런 비싼 차에서 내리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때 하늘을 날아서 쫓아오던 히아리드와 미호가 내 곁에 내려서니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며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휴대폰을 꺼내 히아리드와 미호를 찍기 시작한다.
“야야, 그랑 블루 마스터 아냐?” “맞아! 천사와 육미호!”
잠시 사람 바글바글한 정문으로 갈까 고위 능력자 입구로 갈까 고민하다가 고위 능력자입구로 향했다. 나도 고위 능력자이기도 하고 사람 바글바글한 곳에 가서 시선 집중 당하고 싶진 않으니.
걸음을 옮기니 프랑과 미호와 히아리드가 날 따라오고 그 뒤로 행인들도 따라오며 사진을 막 찍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아닌 프랑과 미호, 히아리드만 찍는걸 보고 있으려니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저녁을 먹고 모두 모여 거실에서 쉬고 있을때 내 연인들은 갑자기 커다란 천과 가위와 빗을 가지고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었다.
그러고는 길게 길러 얼굴의 절반 가까이 가린 내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하길래 기겁하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가리며 내 앞머리에 손대면 혼자 위상 세계 들어가서 머리카락 자랄 때까지 안 나올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더니 다들 입을 불퉁거렸었지.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을 왜 드러내게 하려고 하나 몰라. 그래서 왜 내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하냐고 물어봤더니 그 예쁜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건 죄악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혹시 클래스가 오르면서 더 잘생겨진건가 살짝 설레서 거울을 봤지만…. 하나도 안 변한걸 보고 좌절했다.
억울하고 화나는 마음에 프랑의 콩깍지가 화연이와 영은이한테도 전염됐다고 날뛰자 프랑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고 화연이는 나만큼 잘생긴 사람은 없다고 덤덤하게 입을 열고 영은이는 그 예쁜 얼굴 어디가 못생겼냐고 펄쩍 뛰었었다.
물론 피부는 내 능력 덕분에 무진장 깨끗하고 보들보들했지만, 피부가 좋아졌다고 얼굴이 잘생겨지는 건 아니잖아.
예전에 생환 직후에 온 뒤로 처음 들어오는 순백색의 홀에는 여전히 두 대의 엘리베이터 사이에 순백색의 안내 데스크가 있고 그 뒤에 남녀 안내원이 한 명씩 서 있었다.
남자 안내원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는 곧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그랑블루 마스터님.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날 알고 있었나? 뭐, 1층의 안내 데스크를 맡을 정도니 국내 고위 능력자의 특징 정도야 외우고 있는 거겠지.
“약속 없이 찾아왔는데 지부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확인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된다 하면 그냥 알티나 멜디오스라는 여자한테 들렀다가 되돌아가야지. 하철수 그놈이 들어간 공간의 벽이나 체크하고 갈까? 겸사겸사 최수한이 교육 잘 받고 있나 확인하고 신촌동 수련장도 보고.
기다려달라고 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남자 안내원은 미소를 지으며 최상층으로 올라가면 지부장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이야기해주었다.
호출버튼 없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바로 문이 열리면서 라폴리스 꽃 화분이 벽에 매달린 새하얀 엘리베이터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미호는 라폴리스 꽃이 신기한지 몸을 띄워 연신 코를 킁킁거리면서 꽃향기를 맡기 시작한다.
위상 세계에서 상위 이형종이 된 뒤로 미호는 호기심이 부쩍 늘어났는데, 처음 보는 장소나 물건이 보이면 일단 살펴보고 만져보려 했고 눈앞에 현란한 무언가가 있으면 그거에 정신을 놓고 쫓아다니기 일쑤였다.
지금도 라폴리스 꽃에서 좋은 향기가 나니까 그 앞에서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다가 꽃잎을 뜯어서 입에 가져가려 하길래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잡아당기니 버둥거리다가 날 올려다본다.
“미호. 내가 밖에 나오면 뭐라고 그랬지?”
- 아, 우…. 마, 만지기 전에 물어보라구 그랬어요….
새하얀 귀가 납작하게 접히면서 조심조심 날 올려다보며 '혼낼꺼야?' 하는 표정을 짓는 미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히아리드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함부로 못 돌아다니게 끌어안고 있어.”
=네, 하늘님.=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 같은 모습이 된 미호는 안 혼나서 다행이라는 듯이 얼굴이 밝아지더니 히아리드의 옷깃을 잡고 엘리베이터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서하. 지부장님을 찾아온 건 역시 소피아의 일 때문인가요?”
“응. 해줄지 안 해줄지 모르지만 일단 지부장 형한테 말해보려고. 아니면 영국을 들쑤셔봐야지.”
그 우국 신민회 주범 자식들은 에델베르그 가문이랬지? 영국을 들쑤신다는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프랑은 내 팔을 잡아 끌어안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소피아 에델베르그를 잡아서 어쩌실 생각이세요?”
“어떡할지 솔직히 결정은 못 내렸어. 그래도 화연이를 배신하고 가슴 아프게 했으니까 일단 잡아놓고 생각해봐야지. 그전에 혓바닥 몇 번 뽑아주고.”
힐링 터치나 힐링 웨이브를 써주면서 혓바닥을 한 수십 번 뽑아버릴까 중얼거리니까 미호가 살짝 떨면서 나랑 프랑을 번갈아 본다.
최상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가 열리니 타임리버 빌딩의 화연이 집무실 앞이 생각나는 공간이 펼쳐 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흰색 위주의 얇은 정복을 입은 비서 누나가 있었다.
비서 누나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회전의자에 앉아 콧대를 문지르는 지부장이 보였다.
“어서 와라. 무슨 일이지?”
“알티나 멜디오스 씨의 부탁 들어주러 왔어요. 그전에 지부장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기도 하고요.”
“아아. 생각외로 일찍 왔군. 일단 연구소로 내려가면서 이야기할까.”
도착하자마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소피아 에델베르그를 찾을 방법이 없냐고 물었더니 지부장은 "그 이야기인가…."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인증기 추적 같은 건 안돼요? 인증기 커뮤니티에 접속하면 위치 정보 같은 게 남을 거 같은데.”
“가능은 하다. 그런 기능이 없다면 위상 세계에 멋대로 출입하는지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제공해줄 수는 없어.”
“능력자 보호법 때문에요?”
“잘 아는구나.”
하지만 소피아 에델베르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갔는데…. 이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지부장이 설명해준다.
“완벽한 추적기능이 달린 인증기는 범죄자 출신 능력자나 알카트라즈에 수감된 능력자들의 체내에 심는 인증기뿐이다. 일반 능력자들의 인증기 신호는 그저 현실에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아. 그리고 네 말대로 능력자 보호법으로 능력자의 사생활 보호의 수준은 매우 높아.”
“하지만 그 녀…자는 범죄자잖아요. 저에 관해서 정보를 빼돌리고 살인 공모를 했는데?”
“증거가 불충분하다. 심증이야 100%지만 소피아 에델베르그가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지 않나.”
“…그 여자를 화연이한테 버디 시스템으로 소개해준 게 능력자 연합이라고 들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지부장을 보니 위궤양이 도진다는 표정으로 명치를 쓸더니 한숨을 푹 쉰다.
“그점에 관해서는 나도 의심스러워 직접 조사해봤지만, 우연과 우연이 겹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넌 네 가족이나 친구들이 너에 대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남들에게 한다고 그걸 사생활침해로 고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고소한다고 해도 그걸 증빙할 자료 같은 건 있고? 경범죄 수준의 범죄 이력으로 수배령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지부장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어지간히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연합에서 능력자를 쫓는 일을 도와줄 수는 없어.”
역시 안 되나…. 나도 일을 시킬만한 사람들을 모아서 부서를 만들까. 실장이나 뭐 그런 직책으로.
지부장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번에 한 번 왔던 연합 빌딩 내부의 연구소였다. 미호는 연구소가 기억에 남는지 얼굴을 찌푸리다가 약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 주인님. 여긴 왜 온 거야? 나 버리려구…?
“안 버려. 왜 그런 생각 하냐. 오늘은 네 피 조금 뽑으려고 왔어.”
- 응!
나도 연구소를 지어야겠는데. 블루 스톤도 검사해봐야 하고 내 능력이랑 미호와 히아리드의 차이점도 궁금하고….
연구소를 크게 지으려면 역시 위상석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야지. 돌아가면 화연이한테 돈 벌러 가자고 해야…. 아, 영국에도 가봐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리디아한테 연락해서 검은 성에 관련된 것도 물어보고 싶고….
할 게 많군.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분류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알티나 멜디오스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다다다다 달려오더니 펄쩍 뛰어서 히아리드와 미호에게 다이빙한다.
진짜 점프해서 날았다.
“히아리드, 피해.”
=네.=
“꺄~!”
받아줄 거라고만 생각했지 피할 줄은 몰랐는지 히아리드가 한걸음 옆으로 물러서니 알티나 멜디오스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다급한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뒤에 서 있던 지부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알티나 멜디오스를 받아서 세워주니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날 돌아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숙녀가 뛰어들면 받아주셔야지 물러나라고 하는 게 어디 있죠?!”
아니, 숙녀가 뛰어든다고 내가 받아줘야 하는 법이 어딨는데?
어깨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금발을 찰랑거리며 항의하는 알티나 멜디오스를 보니 어이가 없어서 나도 따져 물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제 펫에게 달려드는 여자를 배려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데요? 있으면 2,000자 원고지 100매에 써서 제출하세요.”
“하라면 못할 줄 알구요?!”
“대신 표본 제출은 없던 일로 하죠.”
“…….”
입을 다물어버리는 알티나 멜 디오스를 보며 씨익 웃어주니 울컥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표본은 어디까지 허용해주실 건가요? 난자까지 제공해주시면 정말 기쁠 텐데.”
울컥한 표정과는 다르게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서류 두 장을 가지고 오는 알티나 멜 디오스를 주변에 서 있던 연구원들과 지부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본다.
그런 시선을 당사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져온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알티나 멜디오스씨가 제가 만들 연구소에 평생 취직한다면 고려해보죠.”
준다고 안 했다. 고려해본다고 했다.
“정말인가요?!”
“서하! 멜디오스 씨!”
내 이야기에 지부장이 경악한 표정으로 다급히 소리친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짜증나는지 알티나 멜디오스는 하얗고 조그만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리니 허리에 손을올리고 으르렁거리듯이 외쳤다.
“왜요! 제가 10년 전으로 타임 리프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멱살을 잡고 IWO에 들어가는 걸 결사적으로 막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아니….”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게 해준 댔으면서 정작 시시한 이형종의 체 조직 분석 따위나 시키잖아요! 전 혈액 표본이나 피부조직을 연구해서 생활 방식을 유추하는 걸 하고 싶어 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지부장은 알티나 멜디오스의 격한 항의에 표정이 썩어가며 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본다. 그걸 무시하고 서류를 보니 일종의 협력 계약서였다. 그걸 읽으면서 멜디오스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히아리드의 난자 채취는 절대 금…. 아 뭐야.”
…알티나 멜디오스가 가져온 서류는 일종의 계약서인데 평범하게 상위, 고위 이형종의 혈액이나 체조직 표본 등을 제공하고 연구 결과를 공유 받는다는 평범한 계약서인데.
중요한 건 그 아래 좁쌀만 한 글씨로 해당 연구책임자가 요구하는 모든 소재를 제공해줘야 한다는 미친 항목이 적혀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꼼꼼하게 살펴봤더니…!
“좁쌀만 한 글씨로 연구 책임자가 요구하는 모든 소재를 제공해? 안 해. 돌아가자.”
짜증 내면서 서류를 홱 집어 던졌다가 저 서류에 묻은 내 지문 가지고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몰라 도로 잡아서 공간의 벽으로 지워버렸다.
“아앗! 그랑 블루 마스터! 잠시만요~!”
경악하는 연구원들 사이로 되돌아가려니 알티나 멜디오스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고위 이형종 시체를 통째로 제공해줬는데 대가가 불법 계약? 저 여자가 이딴 식으로 수작을 부리니 IWO에서 항의를 해온다고 해도 맞받아칠 명분은 충분해!
“계약서에 수작 부리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거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당황한 알티나 멜디오스는 후다닥 달려와서 내 셔츠 자락을 붙잡으며 못 가게 막으려 들길래 손등을 때려 치우게 하고 으르렁거리니 '그걸 어떻게 봤지…?' 하는 표정으로 곤란 해한다.
“표본 제공은 없었던 일로 해요. 고위 이형종 시체를 통째로 제공해줬는데 이딴 식으로 좁쌀만 하게 글을 적어서 불법 계약 유도를 하다니, 확 고소해버릴까 보다!”
버럭 승질내면서 알티나 멜디오스를 노려보니 찔끔하면서 눈을 피한다. 그때 뒤에 서 있던 김무흘 원장이 헐헐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계약서 같은 건 안 하셔도 됩니다. 뭣하다면 영상 기록으로 지금 대화를 기록해두셔도 좋습니다. 그저 히아리드 양과 미호 양의 혈액과 구강 상피 세포와 머리카락 세포만 제공해주시면 됩니다.”
“김무흘 원장님!”
알티나 멜디오스는 갑자기 튀어나온 김무흘 원장을 보며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은 김무흘 원장은 한숨을 쉬며 '이런 철없는 아가씨를 봤나.' 하는 표정이 된다.
“우리가 이런 고위 이형종과 상위 아종의 세포 연구라도 할 수 있는 건 그랑 블루 마스터의 덕분이라는 걸 모릅니까? 그런데도 개인의 연구 욕심에 계약서에 깨알만 한 글씨로 불공정 거래를 유도하다니, IWO에서 알게 되면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김무흘 원장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지 알티나 멜디오스는 히아리드와 히아리드의 품에 안긴 미호를 보며 발을 동동 굴린다. 그러면서 날 힐끔 바라보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무흘 원장은 답답하다는 표정이 됐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버럭 하고 소리친다.
“이 철부지 아가씨야! 이 연구는 그랑 블루 마스터의 협조 없이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는 일이라고! 이러다 살아있는 체조직 연구조차 못하게 되면 멜디오스 씨가 책임질 겁니까?!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는 능력자 연합과 IWO에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럼 아가씨 연구 인생도 끝이라고요!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아, 알았어요….”
“이미 안된다고 선언한걸 이런 식으로 계속 자극하면…. 하여튼 좋을게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으으.”
김무흘 원장은 물론이고 주변에 서 있는 능력자 연합 소속과 정부 소속의 연구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알티나 멜디오스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