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3 방학. =========================================================================
집에서 누나랑 프랑이랑 화연이랑 점심을 먹고 그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니 뭔가 빼먹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게 뭔지 머리를 굴리다가 내 다리 사이에 잠들어있는 미호를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나 위상 세계에 들어갈 거야.”
“…누구 위상 세계?”
“내 위상 세계.”
화연이는 당장에 눈썹을 찌푸렸고 누나도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프랑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내 뒤에 앉아 내 허리를 껴안았다.
“…곧 발족식인데 자리를 비우겠다는 건 찬성하기 힘들다.”
“그랑 블루의 마스터가 혼자 자릴 비우겠다니. 나도 찬성 못 해.”
뭐? 그럼 난 맨날 빌딩 꼭대기에 자리만 지키란 말야? 둘의 반응에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발족식 끝나면 레이드 팀이 정상적으로 가동 되지? 그럼 그 뒤로 여유 시간이 없어질 텐데 난 귀환 포인트를 찾아서 적당한 곳에 이동해야 한단 말야.”
“왜 이동하려는 거야?”
누나의 물음에 대답은 프랑이 대신해줬다.
“서하가 지금 위치한 곳에서는 6개월마다 대량의 비가 쏟아져요. 그 비는 십수 미터의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그 수위를 2달가량을 유지는 데 그전에 서하는 안전한 위치로 이동하려는 거에요.”
프랑의 설명을 들은 누나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잠시 날짜를 계산해보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연다.
저 한숨도 카운트 해야 하나? 날 보고 한숨 쉰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이동만 하고 나올 거지?”
“1차 목표는 그거야.”
“2차도 있니?”
“2차는 이형종한테 TP를 주입해서 상태변화를 지켜보려고.”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날 보는데, 누나도 자기가 한 말을 기억 못 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누나가 말했었잖아. 위상력이 적을 때 내 TP를 주입받으면 성질이 변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아.”
그제서야 누나와 화연이, 프랑은 내 무릎 사이에 앉아있는 미호를 내려다본다.
이옹?
시선이 몰리자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귀를 쫑긋하면서 새하얀 꼬리를 살랑 살랑거리는 미호의 등을 살살 쓸어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몇 마리만 잡아서 실험해보고 금방 돌아올게.”
누나는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화연이는 찻잔을 쪼갤 듯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따라가겠어.”
“엥? 화연이는 일 많지 않아?”
“…혜령이 언니에게 부탁하면 돼.”
우와. 자기 일을 남한테 미루는 어른이라니. 근데 화연이는 이번에는 절대 포기 못 한다는 표정으로 나와 프랑을 번갈아 보더니 단호하게 말한다.
“서하의 위상 세계는 이무기와 다른 여타의 위험성이….”
말하다가 잠시 말을 끊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뜸을 들인다.
“…아니, 핑계는 안 대겠어. 나도 이제 서하와 함께 위상 세계를 보고 싶어.”
저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리니 도리어 할 말이 없다. 누나도 "나도 보고 싶은데…." 하면서 중얼거리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테이블 위에 엎드려버렸다.
“화연이가 저렇게까지 솔직하게 나오는데 가지 말라고 하기두 그렇구, 혜령이 이모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되도록 빨리 다녀와야 해?”
“응. 하루 이틀 정도 밖에 안 걸릴 거야.”
1박 2일 예정이라는 말에 누나는 남은 차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가 일하러 사무동으로 되돌아갔다.
누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완전히 내려간 걸 확인하고 바로 인증기를 켜서 영은이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역시 나랄지, 홀로그램 창에 모습을 드러낸 영은이는 잠시 자리를 이동해 어느 방 같은 곳에 들어가더니 대성통곡하면서 쪼그려 앉아버렸다.
[으아아아앙!! 너무해! 나만 따돌리기야?!]
“현실에서 그냥 놀고먹기 뭐해서 그러는 거야. 솔직히 내가 현실에 있어 봤자 할 일도 없는데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으으. 그건 알지만…. 나도 서하 위상 세계에 따라가고 싶단 말이야~!! 으앙!!]
“영은. 이거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어디까지나 하루 이틀가량의 단기 진입입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영은이는 잔뜩 울상을 짓더니 나와 프랑, 화연이를 보다가 입을 삐죽이고는 이걸 들어주지 않으면 못 보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위상 세계에 있은 날짜 수 만큼의 사랑 우선권을 보장해줘. 기본 1일!]
프랑과 화연이를 보는 눈빛이 정말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거절했다간 따라올 기세다.
혜령이 이모에게 가서 위상 세계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일정표를 살펴보다가 끄덕이면서 5일을 넘기지만 말아 달라고 했다.
“히아리드는 발족식 이후 위상 능력자 연합 본부에서 파견관이 나와서 확인을 할 예정이에요. 그러니 그동안은 히아리드의 임의 사용은 자제를 부탁한대요. 그리고….”
흠. 안된다고는 안 하네.
연합의 협조성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혜령이 이모는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한 장의 서류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동시에 위상 세계 자유 입장 권한도 내려올 예정이니까 이번에는 능력자 연합에 가셔서 입장해주셔야 해요.”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위상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제가 펼쳐둔 공간의 벽이 사라질지도 모르니 그곳에 히아리드를 대기시켜놓을 거에요. 그건 지부장 형의 동의도 얻은 사항이니까 문제는 안될 거라 생각해요. 만약 문제가 있으면 혜령이 이모한테 연락하라고 할 테니 뒤를 부탁할게요.”
“네.”
“히아리드. 내가 돌아올 때까지 혜령이 이모의 명령이 내려오면 명령 조항에 따라 행동해.”
=네, 하늘님.=
아 맞다.
“혜령이 이모 남편분은 아직 미국에서 안 돌아왔어요?”
“네에. 며칠 전에 질병 치료를 받았는데 효과를 본 거 같아서 잠시 안정을 취한 후에 돌아오기로 했어요.”
혜령이 이모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 정말 행복해 보였다. 축하한다고 해주며 돌아오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회복을 한번 걸어주겠다고 하니까 잠시 말을 못하더니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을 매달며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바로 능력자 연합으로 이동해서 지부장에게 사정을 적어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최고층에서 순식간에 튀어내려 왔다.
“…고위 이형종이 현실에서 날뛰었다간 재앙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게 될 거다.”
“믿음을 가지세요!”
…여러 눈빛을 받아봤지만 저런 사이비 종교인을 보는 눈빛을 받는 건 처음인걸.
지부장은 우리를 따라와서 히아리드에게 내가 명령을 내리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보더니 그래도 불안하다는 모습을 보였다.
“제가 없다고 히아리드한테 수작을 부리다간 고위 이형종의 빛 벼락 맛을 보게 될 테니 다른 사람들의 접근은 잘 차단해주세요.”
“그래.”
만약 공간의 벽이 사라질 경우에는 오피스텔 내부에서 대기하다가, 하철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놈이 공간을 전이해서 나타나면 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격살하라고 한 다음, 공간의 벽이 그대로 유지될 때는 그랑 블루 빌딩으로 복귀해서 이혜령 부장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명령을 들으라고 해뒀다.
위상 세계 입장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능력자 연합 1층의 출입 신고 데스크에서 인증기를 꺼내며 본인 인증을 한 다음 2층의 소규모 입장 룸에서 들어가는 걸로 끝이었으니까.
그전에 화연이는 준비해야 할게 있다며 작은 등산용 배낭을 하나 사오더니 그 안에 속옷 몇 벌과 세면도구를 넣고 나머지에는 압축 음용 팩으로 가득 채웠다.
“압축 음용 팩은 뭐야?”
“물 속성 능력자가 없을 때 식수 보급용 팩이다. 팩 하나면 하루종일 물을 마실 필요가 없어.”
동그란 원통형 팩 같은 이게 소규모 파티의 필수품이라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10cm 길이인 음용 팩의 말랑거림이 마치 화연이 가슴 감촉 같다는 생각에 주무르면서 슬쩍 주변을 돌아보니 G 클래스에서부터 E 클래스 정도의 능력자들이 우리를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나랑 화연이의 장비는 눈에 확 띄긴 한다. 검은색과 푸른색이라니, 거기에 백금색의 프랑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까 시선을 끌 법도 하지.
화연이는 저번에도 봤던 차림이었는데 건틀릿과 뱀브레이스, 부츠를 제외한 폴 딕트의 타이즈 아머만 입고 그 위에 푸른색 포스레더 세트를 입었다.
재킷과 바지, 롱부츠가 한 세트인 포스레더 아머는 비싸지만 비싼 값을 하는 명품이라던데 솔직히 장비빨의 영향을 안 받는 나는 이게 좋은지 잘 모르겠다.
나도 검증단 때 입었던 검은색 포스레더 아머를 입고 품 안에는 영은이가 선물로 준 단검을 차고 있었다.
“…프랑이 부럽군요.”
보기 예쁜 원피스 차림에 통굽 샌들을 신고 공중에 떠다니는 프랑을 본 화연이는 자기 차림을 내려보더니 살짝 한숨을 쉬었다.
“…화연은 서하와 커플룩이잖아요.”
화연이는 허리춤에 소드 벨트를 차고 장검을 끼고 있었는데 등에도 등산용 배낭을 매고 있어서 배낭은 내가 멜 테니 달라고 했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거부했다.
“서하는 어디까지나 원거리 특수 전투 요원이다. 이런 짐은 근접 신체 강화 타입인 내가 들어야해.”
단호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출발할까?”
그리고 신고 절차를 마친 다음 프랑, 화연이와 미호를 데리고 위상 세계에 입장했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만 입장하는 건 이번이 첫 번째군.
입장하는 순간 내장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전신에 간지러움을 준다.
사방에 가득한 푸르른 하늘, 그리고 발아래 보이는 거대한 대륙의 모습. 그리고 추락하는 나와 화연이.
귓가를 두드리는 거친 소리에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화연이는 아래쪽에 펼쳐진 거대한 대륙의 모습에 사색이 되어서는 두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나에게 다가오려 애쓰고 있었다.
“서하!” “서하?!”
프랑도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같은 속도로 낙하하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패닉에 빠져버렸다.
난데없이 초고도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되다니. 일단 상황 파악은 나중에 하고 지금 상황부터 해결해야겠다.
우선 가까이 다가온 화연이의 허리를 잡아 끌어안으며 귓가를 우레처럼 두드리는 바람 소리를 의식해 크게 외쳤다.
“화연아!! 공처럼 웅크려!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펴면 안 돼!”
“?!”
“프랑은 영혼석 안으로 들어와! 미호는 날 꼭 붙잡고!”
질문은 나중에 하겠다는 듯이 화연이는 바로 내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 두 손을 무릎을 감싸 안으며 목까지 숙인다.
내 목을 붙들고 있는 미호를 잡아떼고 화연이 품에 쑤셔 넣은 다음 몸을 동그랗게 말은 화연이를 품에 안았다. 프랑도 영혼석 안으로 들어온 걸 확인하자마자 마나 모드 - 가속을 키고 마나 시브를 집중해 몸을 최대한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에 직각으로 떨어져 내리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아치 모양의 거대 미끄럼틀을 만들었다.
미끄럼틀이 시작하는 부분에 몸이 닿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몸을 강타하고 이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크우어어어~~!”
“으으읏~!!”
앗 하는 순간 미끄럼틀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 그 앞에 부채꼴 모양으로 거대하고 긴 공간의 판을 만들고 끄트머리로 갈수록 경사가 높아지게 해놨다. 미끄러져 나가다가 멈추게끔.
판이 만들어지는 순간 미끄럼틀이 끝나며 부채꼴 모양의 판 위를 거침없이 미끄러져나가다가 판의 중간쯤에 몸이 멈추었다.
“으읏….”
몸이 멈춘 걸 느꼈는지 화연이는 미약한 신음을 흘리더니 몸을 움직이려 든다.
“몸 펴지마. 화연이가 공간의 벽에 닿으면 닿은 부분이 분해돼.”
몸을 펴려던 화연이는 내 말에 흠칫 놀라면서 다시 몸을 굳힌다. 몸을 동그랗게 말은 화연이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 판 위에 일어서니 호박색 투명한 판 너머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 높이면 지상 20km는 되겠는데.”
발아래 흐르고 있는 구름 조각들을 보다가 내 품에 안겨서 날 보는 화연이를 보며 말하니 화연이도 하늘과 호박색 투명한 벽 너머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스타팅 포인트가 하늘일 수 있는 건가?”
“누나의 1회차 스타팅 포인트는 누나의 위상 세계가 아니라 내 위상 세계였다는 거겠지.”
그때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에서 환한 빛이 퍼져 나오다가 프랑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 걱정해, 했어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날 끌어안은 프랑은 몸을 떨고 있었다. 추락해서 죽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나도 좀 놀라긴 했어. 그래도 공간의 벽이 있어서 낙사같은 일은 안 일어나. 혹시나 하늘에서 추락하는 일이 생길까 봐 미리 공간의 벽을 마음대로 만드는 연습도 했었고.”
발밑에 자그마한 공간의 벽을 친 다음 거대한 부채꼴 모양의 공간의 벽은 치우고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품에 안겨 두 팔을 내 목에 감은 화연이도 고개를 내밀어 까마득히 아래 펼쳐진 대지를 살펴본다. 프랑도 곧 진정하고 같이 대지를 내려다보는데,
“프랑.”
“네?”
“여기, 아무래도 엘리펀트로스 산이 있는 지역의 상공인 거 같지?”
“네. 발아래 회색으로 물든 곳은 엘리펀트로스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가 쌓인 곳이 아닐까요?”
프랑의 말대로다. 하얀 연기가 퐁퐁 솟아오르는 엘리펀트로스 산(이라고 의심되는 곳)을 중심으로 북쪽부터 동쪽까지 45도 방향으로 광범위한 지역이 지평선 끝까지 회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일단은 저기로 내려가 볼까.
“또 미끄럼틀 만들 거야. 프랑은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도록 해. 미호는 그대로 화연이 꼭 잡고.”
끼웅! “네!” “알았다.”
수십 킬로미터 미끄럼틀을 한 번에 만드는 건 TP의 용량 적으로 무리라서 중간에 한 번 쉬면서 TP를 회복하고 다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리고 2달 만에 다시 들어온 내 위상 세계는 싱그럽던 초지와 숲은 다 사라지고 잿빛 황무지만 남아있었다.
땅에 내려와서 화연이를 내려주니 미호는 화연이의 몸을 타고 올라 내 어깨 위로 이동한다.
분명 여긴 녹음이 우거진 숲이었는데 이제는 회색빛 천지다. 손을 뻗어서 옆에 있는 덤불을 건드렸더니 푸스스하고 회색 가루가 흩날린다.
끼웅.
흩날리는 화산재가루에 미호가 인상을 쓰더니 땅에 가득 쌓인 화산재를 보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여우 목도리처럼 내 목을 감싼다.
“그럼, 어떻게 하늘에서 나타난건지 설명을 해주겠나.”
화연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슬쩍 손을 뻗어 내 손을 잡는다. 시선은 딴 데로 돌린 채 손가락만 꼬물거리는 게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손을 꼭 잡아주니 화연이도 날 돌아보며 살짝 웃어줬다.
프랑도 설명해달라는 듯이 옆으로 다가와서 내 팔을 껴안는다.
“누나가 위상 세계에 휩쓸릴 때 내가 난입했잖아. 그때 무언가가 날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마나 시브를 집중하면서 억지로 버텼었거든.”
“그리고 도착한 곳이 하늘섬이었구요?”
“응. 그런데 하늘 섬도 다른 능력자들의 1회차 장소와 차원이 다른 곳이었어.”
“하늘, 섬, 폐쇄된 공간. 최하위부터 최고위 이형종까지 전부 존재하는 곳….”
화연이는 심각한 표정이 되면서 날 올려다본다.
“마나 시브의 영향인지, 아니면 둘이 겹쳐있었던 영향인지 시하가 원래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아닌 서하 너의 위상 세계에 편입돼버린 건가. 그럼 시하가 입장하게 되면 서하 너와 비슷한 곳에서 나타나겠군.”
“그리고 추락하겠지. 아무튼, 누나가 입장할 때 나도 같이 따라 들어가 봐야겠어. 정말 내 위상 세계 쪽으로 편입됐다면 저 하늘 위에서 나타날 테고 아니면 원래 누나가 가야 할 곳으로 이동하겠지.”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갈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내 좌우에 선 프랑과 화연이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위상 세계에 들어온 목적을 빠르게 처리하고 나가자. 그사이에 누나가 들어 올리는 없겠지만 만약이란게 있으니까.”
“그럼 엘리펀트로스 산으로 돌아갈까. 그곳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화산재가 없었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챙겨온 방진 마스크를 프랑과 화연이한테 나눠주니 프랑은 미호의 주둥이에 방진 마스크를 감아줬다.
미호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자신의 주둥이를 감은 하얀 방진 마스크를 보더니 고개를 털면서 벗으려고 하길래 녀석의 주둥이를 꽉 쥐면서 말했다.
“화산재를 들이마시면 일찍 죽으니까 답답해도 참아. 벗으면 TP 안 준다?”
끼우웅…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뒤쪽으로 잿가루가 날리는 모습이 장난이 아니다. 방진 마스크를 챙겨오길 잘했다. 미호도 뒤쪽에서 잿가루가 먼지 구름처럼 일어나는 모습을 보더니 더욱 내 목에 달라붙는다.
한참을 달리다가 문득 호수에서 만났던 인어들이 생각났다.
“가기 전에 호수에 들렀다가 가보자.”
“호수? 인어를 만났다는 곳 말인가?”
“응. 화산 터지는 거 보고 도망가라고 해줬는데 생각해보니까 도망갈만한 곳도 없었을 텐데,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이형종이라면 죽게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나요? 서하가 일부러 신경을 써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프랑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화연이를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건 화연이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화연이 역시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있었으니까.
“지금 위상 세계에 들어온 두 번째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두 번째 목표를 까먹은 거야?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거 때문은 아니지? 그치?”
은근한 눈빛으로 오른쪽에서 달리고 있는 화연이와 프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니 화연이도 프랑도 헛기침을 하면서 내 시선을 피한다.
“…걔네들은 중위 이형종이긴 하지만 인간형이야. 적대감도 없고 이쪽 이야기를 알아들으니 잘만 이야기하면 구슬려서 TP 주입 실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
실제로는 히아리드를 대상으로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그 녀석을 굴복시킬 때 입을 통해서 TP를 잔뜩 집어넣고 피부로도 흡수시키고 한 게 대충 50만 가까이 되는데 딱히 변한 부분은 없었거든.
미호한테 먹였던 TP는 17 정도로, 원래 녀석의 위상력이 72였으니 23%가 좀 넘는 양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에너지 이터의 특성이 사라져버렸지.
하지만 히아리드한테도 25% 정도를 먹였는데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잖아. 그래서 조금 더 먹여볼까 했지만…. 어쩌면 위상력이 많아서 변화가 잘 안됐을 수도 있고 여차하다 녀석이 최고위 이형종이 돼버리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해서 관둬버렸다.
“그럼 위상력이 적은 최하위나 하위 이형종도 찾아서 테스트를 해봐야겠군.”
“그래야지?”
미호는 자기 이름이 나오고 하지만 복잡한 이야기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주둥이를 벌리며 하품을 하려 한다. 하지만 방진 마스크 때문에 주둥이가 벌려지지 않으니 앞발로 자기 주둥이를 토도독 내려치기 시작했다.
엘리펀트로스 산으로 향하다가 방향을 꺾어 호수가 있는 곳을 향한다.
“여기서 직선으로 70km 정도 가면 호수가 나와.”
그리고 공중에 발판을 만들며 허공 답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중에 발판을 만들고 달리는 거니까 일단은 허공 답보가 맞지?
후후후. 허공 답보는 다시 봐도 멋진 거 같아. 허공을 박차며 달리는 내 모습이라니!
그러니 그냥 달리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공간의 벽을 치고 달리는 연습을 해야지.
이제는 내 발크기와 거의 흡사한 공간의 벽을 친 다음 그곳을 밟고 발을 떼는 순간 공간의 벽을 회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1초 동안 공간의 벽이 남는다는 이야기지.
“와! 서하, 멋져요!”
프랑은 공간의 벽 위에 올라타는 걸 봤지만, 이런 식으로 공중을 달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놀란 눈이고 화연이는 저렇게도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한 표정이었다.
23일, 위상 세계에서 복귀한 그날 밤 내가 새로 얻었던 능력에 대해 모두 앞에서 설명해줬는데 막상 이런 식의 응용법을 실제로 보니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발판을 그냥 반듯하게 일직선으로 치는 게 아니라 100m 달리기에 자세를 잡을 때 발을 디디는 스타팅 블럭처럼 대각선으로 세워 힘을 받게 했더니 속도도 좀 더 빨라졌다.
지면에서 50cm 높이를 빠르게 달리면서 죽어서 쓰러진 나무를 좌우로 피하고 점프해서 달리니 이것만으로도 꽤 수련이 되는 거 같다.
옆에서 같이 달리던 화연이도 예쁜 미소를 짓더니 내 속도에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화연이와 거의 비등하게 달릴 수 있는 데다 프랑은 나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날 수 있다. 그러니 70km의 거리는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더운 햇살 아래 전력으로 달리니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어쩐지 달리다 보니 흥이 나서 전력으로 달렸더니 날 따라 화연이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건 화연이도 마찬가지인지 이마에서 땀을 살짝 흘리면서 목까지 채웠던 포스레더 재킷의 지퍼를 가슴 중간까지 내렸다.
그런데 같은 B 클래스 급이라고 해도 화연이보다는 반걸음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 같다. 게다가 허공 달리기도 평지를 달리는 것만큼 완벽하게 펼치지는 못하고 있고.
그러니까 난 땀을 줄줄 흘리고 화연이는 살짝 흘리는 정도의 차이가 생겨난 거지. 덕분에 40분 정도를 달렸더니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땀을 흘릴 만큼 전력으로 달렸더니 조금 속이 답답했던 게 풀리며 가슴이 상쾌하다. 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회색 화산재가루들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야.
“수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호수란 건 참 대단하네. 그리고 범위안에 생명체가 아무것도 없는 것도 대단하고.”
호수는 대강 엘리펀트로스 산기슭을 포함한 넓이 정도일까.
“하늘에서 인어가 있나 한번 찾아볼게요.”
“어, 나도 올라가서 볼 거야.”
“…….”
…화연이는 자기도 보고 싶은지 살짝 머뭇거리길래 가방을 뺏어서 어깨에 메고 화연이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더니 얼굴이 붉어진다.
등을 받치고 무릎 뒤쪽에 팔을 넣어 안아 올리니 화연이도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1km 상공까지 발판을 만들어 올라가니 호수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의 모습은…. 그냥 호수가 호수같이 생겼지 뭐.
가장 폭이 넓은 곳은 공간 지각 범위안에 들어온 길이를 측정해봤을 때 20km가 넘어가는 거 같다. 이 정도면 한강 너머 서울이 통째로 들어갈 만한 거 같은데?
“호수도 죽어버린 것 같군.”
“그런 거 같아요….”
화연의 말에 프랑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면 위를 날아가서 빠르게 훑더니 다시 올라와서 입을 열었다.
“물고기 같은 생물이 하나도 없어요. 다들 죽어서 가라앉았거나 할 거 같…. 아!”
“뭔가 발견했어?”
“저쪽, 호수의 6시 방향에 사람 모습 같은 존재들이 수면 가에 앉아있어요!”
프랑의 눈은 진짜 대단하네. 1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데 그게 보이는 거야?
“세상에. 1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데 그게 보이는 겁니까?”
…내가 한 생각이랑 똑같은 말을 뱉는 화연이를 힐끔 보고 프랑이 가리킨 쪽으로 공간의 벽을 조작해 미끄럼틀처럼 만들어서 쭈우욱 타고 내려간다.
“으읏?!”
갑작스러운 낙하의 기분은 B 클래스라도 오금이 저린지 품 안에서 몸을 살짝 움츠리는 화연이를 느끼며 맞은편 호수 변을 향해 내려간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