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1 방학. =========================================================================
영은이와 통화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내일 있을 방학식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을 무렵 엄마랑 아빠가 퇴근하는 모습이 공간 지각에 잡혔다. 동시에 화연이랑 혜령이 이모도 능력자 연합에서 되돌아 왔다.
잠시 화연이한테 전화해서 1층 홀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자기 집무실에서 일을 끝낸 누나랑 같이 화연이를 마중 나갔더니, 화연이는 말없이 내 모습을 보다가 인증기를 켜서 내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프랑도, 누나도 킥킥거리면서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빠가 오늘 저녁은 같이 먹재. 40층에 올라가지말구 같이 가.”
“알았어.”
다 함께 집에 올라왔더니 엄마도 두 손으로 뺨을 가리며 어머어머!만 연발하더니 휴대폰을 가져와서 또 날 찍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배고프다고 하니까 멋진 아들을 둬서 엄만 행복하다고 하더니 며느리들을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을 먹었더니 누나는 다시 일하러 가버리고 아빠는 그런 누나를 보더니 날 찌릿하고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넌 거기 좀 앉아봐라.”
“어?”
아빠 말대로 양털 카펫 위에 주저앉으니 프랑과 화연이는 나와 아빠 사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얌전히 서고 엄마도 주방에서 나와 아빠 옆에 앉았다.
“어제는 시간도 늦고 몇 가지 일도 겹쳐 그냥 보냈다만, 지금 하나 물어보마.”
“뭔데?”
“넌 시하가 위상 세계에 강제 소환되기 전에 공간 지각으로 징후 같은 건 못 느꼈느냐.”
“…느꼈어.”
“조치는…. 취해보지 않았군.”
“…….”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앉아있었더니 아빠는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랬느냐. 시하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면, 네 녀석의 머리라면 충분히 의구심을 가지고 그게 위상 세계 강제 소환의 징후라는걸 눈치챘을 거라 생각한다만.”
“그, 그땐…. 나도 모르겠어. 화연이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들떴던 거 같기도 하고 몇 가지 일이 겹쳐서 신경을 못 썼던 거 같기도 해….”
시무룩한 표정으로 양털 카펫을 내려다보니 아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조금만 더 정신을 집중하고 신경을 썼더라면, 하다못해 미리 징후에 대해서 네 아내들에게 말이라도 해뒀다면 며느리들이 그렇게 애를 태우진 않았을 거다. 네 녀석이 네 누이를 지키기 위해 뛰어든걸 뭐라 하는 게 아니다. 너의 행동으로 가슴에 상처를 받을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그 무식함이 탓하는 거다. 오히려 누이를 지키려 한 네 행동은 칭찬받을만한 것이지.”
“끙….”
아빠의 말을 듣고 프랑이랑 화연이를 돌아보니 둘 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하느냐.”
“응.”
“네 녀석의 생각 없는 행동이 네 아내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는 걸 언제나 생각해두거라.”
“…알았어.”
아빠는 말없이 잠시간 날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네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위치?”
“사회적 위치 말이다.”
“…그랑 블루 마스터?”
아빠가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가 내 사회적 위치라면 레이드 팀뿐이니까 그걸 말했더니 인상을 팍 쓰다가 한숨을 푹 내쉰다.
…왜 저러지.
“머리도 다 큰 녀석이라 널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 모르겠다. 나머진 바가지 긁히다 보면 행동이 바로 잡히겠지.”
…바가지?
아빠의 따끔한 질책을 듣고 프랑과 함께 40층에 올라가니 미호가 파다닥 달려와서는 내 품으로 뛰어올랐다.
끼웅! 끼잉! 끼잉!
“그래그래. 내가 좀 늦었지?”
끼이잉!
왜 그랬냐는 듯이 온몸을 뒤트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슬쩍 프랑이랑 화연이를 바라보니 둘은 서로 "씻을까요. 같이 씻겠습니까?" "좋아요. 저도 바닷바람을 쐬었더니 씻고 싶어졌어요."라며 사이좋게 욕실로 향한다.
“어, 나도 씻을래.”
“서하는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라.”
“어?”
“조금 있다 영은이 오면 그때부터 시작이에요. 알았죠?”
“뭐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지만, 프랑은 그냥 미소만 지으면서 검지를 들어 입에 갖다 댈 뿐이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보다 보니 갑자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바가지라고 했는데 설마…?
둘이 씻으러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은이도 엘리베이터에 튀어나오더니 정장 차림의 내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인증기를 켜서 내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다.
“영은….”
“아, 나도 씻구 올게?”
그리고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프랑이랑 화연이 씻고 있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세 사람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간다. 화연이가 말한 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셋이 동시에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목욕 가운만 입은 채 날 거실 한가운데 무릎 꿇고 앉히게 하더니 자기들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는, 서하랑 떨어진 순간 기절하고만 싶었어요.”
“서하때문에 한쪽 가슴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낀 게 이번이 세 번째다.”
“나는 서하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쇼크였어.”
날 앞에 두고 내 앞에 프랑이 앉고 좌우에는 화연이와 영은이가 앉아서는 셋이 무표정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본다.
“미, 미안.”
“시아버님 말씀대로예요. 이번엔 정말 서하의 실수였어요. 만약 시하 님이 위상 세계에 강제 소환 될 거라는 징후를 발견했다면, 조금만 더 신경을 쓰셨더라면….”
“우리 서하는….”
“서하, 너는….”
무릎 꿇고 번갈아가면서 혼내는 세 연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져 온다….
“알았죠?”
중간에 필름이 끊긴 것 같지만 셋의 표정이 풀린 걸 확인하고 다시 잔소리가 날아올세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씻으러 들어가지.”
으어어….
미호는 두 앞발로 귀를 접고 이쪽을 바라보다가 날 일으켜 세우는 모습에 귀를 쫑긋하더니 이제 끝난 건가 하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리고 자기 집 옆에 있는 간이 소파에 앉은 히아리드를 올려다보더니, 히아리드의 무릎 위에 뛰어올라 편히 엎드렸다.
“어딜 보는 거니?”
“이쪽을 봐요, 서하.”
으어어?
언제 욕실로 들어온건지 멍하니 서 있었는데 세 사람은 부드러운 손길로 날 벌거벗기더니 뜨거운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로 데려간다.
그리고 극진하게 머리끝에서 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자신들의 육체를 이용해 내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혼나고 있었는데 지금은 날 왕처럼 섬기는 그녀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프랑은 커다란 가슴이 목욕 스펀지인양 비누 거품을 잔뜩 내더니 내 팔과 다리를 씻겨주기 시작한다.
화연이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 발을 올리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발과 발가락 사이를 씻겨주더니 곧이어 가슴으로 사타구니까지 씻겨주고 영은이는 내 뒤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4명이 들어가도 여유가 남는 커다란 욕조 안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한 명씩 촉촉이 젖어있는 아랫입으로 내 물건을 깊게 삼켜갔다….
욕실에서 왕이 부럽지 않을 대접을 받고 침실로 돌아왔더니 프랑이 침대에 누워 자신의 위로 날 끌어안았다.
벌거벗은 풍만한 프랑의 유방을 베개 삼아 그녀의 몸 위에 누웠더니 좌우에서 화연이와 영은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벌거벗은 내 몸을 마사지해주기 시작했다.
“박유희 과장은 영은이가 일부러 보낸 게 맞지?”
프랑은 언제 두피마사지를 배웠는지 내 머리를 이리저리 자극하기 시작하는데 그녀들의 손길에 나른함을 느끼다가 문득 낮에 보낸 문자에 답장을 받지 못한 게 생각나 물었더니 영은이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애가 조금 까탈스럽고 귀염성이 없지만 자기 일은 확실히 하는 애라서 보내줬는데, 도움이 됐니?”
“됐어. 아주 많이. 그리고 그걸 영은이도 알고 있었던 거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뜬금없는 이야기다 싶겠지만, 영은이는 살짝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 보다, 그 아이를 통해서 알려주는 게 충격요법으로 좋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그러고 보면 그때 프랑도 별다른 반응을 안 보여줬었지. 이미 영은이한테 귀띔을 받았었나 보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은 걸 알아뒀구나.”
“후후.”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피곤한 일 같아. 차라리 이형종을 상대할 때가 마음이 편했어.”
“그치? 나도 가끔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는걸.”
영은이는 내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골에 끼우더니 내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서하는 사람 상대하는 게 싫어?”
“날 죽이려 한 자들을 상대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청궁이나 수성처럼 직접 맞서지 않고 뒷수작을 부리려는 것들을 상대하는 건 싫어.”
“만약 상대해야 한다면 어떡하고 싶은데? 물리적으로? 아니면 금력 적으로?”
“상대할 수단이 몇 가지가 있는 거야?”
“응. 가장 간단한 건 위상 세계에서 고위 이형종 들을 간단하게 썰어 죽이는 걸 영상으로 기록하고 그걸 보여주는 거야. 조금 복잡하게 가는 거라면, 위상석 정제 공장을 하나 만들어서 그들보다 비싸게 수입하고 싸게 파는거려나.”
“첫 번째는 이해하겠는데 두 번째는 뭐야?”
“위상석은 큰 건 그 자체로 발전소용으로 사용하거나 직접 TP를 추출해서 쓰지만, 소규모 파티로 움직이는 이들이 구해오는 자잘한 위상석은 정제해서 추출해 사회 전반에 사용하는 건 알구 있지?”
“응. 의약품에서부터 시작해서 미용용품에 합금을 만들 때도 첨가하고 기계를 만들 때까지 다양한데서 쓰잖아.”
“맞아. 그 위상석 정제공장을 크으으게 하나 짓는 거야. 그리고 이윤은 얼마 남기지 않고 수성이나 NG보다 비싸게 사들여서 수성이나 NG보다 싸게 파는 거지.”
“그럼 그들 밑에 있는 중소규모의 기업이 영향을 받아서 도산하거나 하지는 않아?”
“할 수 있겠지. 무관한 사람들이 피해입는걸 막기 위해서 그들에게 일정량의 대리 정제를 맡기거나 아니면 압도적인 금력으로 그들의 시설을 흡수하면 되는 일이야.”
영은이의 두 번째 이야기가 솔깃해서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화연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전부 서하의 충전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위급 위상석 이상을 정제하는 정제소는 없지만 서하라면 TP를 다 쓰고 폐기하는 위상석만 있다면 얼마든지 충전할 수 있으니 아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상위 위상석을 그곳에서 정제한 뒤 에너지 결정화시켜 수출할 수도 있고 위상 세계에서 획득한 척, 포장해서 되팔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위상석 세탁 공장이네?”
“후후. 그렇게 위상석 관련 매출을 틀어막아 버리면 수성과 NG 따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자금난에 허덕이다 휘청거리기 시작할걸?”
“재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돈이다. 아무리 거대규모의 기업이라지만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점에서는 소기업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곳이기에 서하의 충전 능력이 끼어들면 돈에 휘둘리는 구조인 이상 그들로는 절대 이기지 못할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거다.”
누워서 좌우에 있는 화연이와 영은이를 올려다보니 커다란 가슴에서 시작해서 젖꼭지의 모양이나 표정, 행동까지 진짜 동일인물이 분신을 쓴 거 같이 닮았다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차피 위상석 정제소를 지어야 할 거 같으니까 두 번째로 가자. 첫 번째는 일본을 박살 내는걸 보여주고 그래도 앵겨오면 그땐 전부 뒤집어버리는 걸로.”
“우후후. yes your highness!”
영은이의 장난기 어린 대답이 나오자마자 그녀들의 야릇한 손짓에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던 남근은 자신을 기다리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연이라는 이름의 꽃집에.
다음 날 아침은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비록 토요일인 25일 오늘 여름 방학식이 있었지만, 오늘만 나가면 당분간 학교에 갈 일은 없으니 마음이 가볍다.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에 있는 애들을 돌아보니 꽤 많은 수의 아이들 피부가 그을려있었다.
“태닝 한변 찐하게 했네.”
그중 운동부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짧은 포니테일을 한 채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가는데, 드러난 목덜미나 팔, 치마 아래에는 스패츠를 입었는데 그 아래로 보이는 허벅지 등이 초콜릿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어딜 보시는 거예요?”
살짝 불퉁한 표정의 얼굴로 내 시야를 가린 프랑은 "다른 여자들한테 눈 돌리시는 건가요~?" 하면서 내 뺨을 콕콕 찌른다.
“그럴 리가. 위상 세계에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방학 직전 2일간의 임해 합숙에 참가 못 해서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임해 합숙은 23일과 24일 이틀간에 걸쳐있었는데, 23일 날 복귀하고 24일은 PR 촬영 도중 쉬는 시간에 녀석들에게 문자를 보내놨더니 점심 즈음에 답글이 달렸었다.
[살려줘~]
라고.
“그러니까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어도…. 아따따!”
교실에 들어섰더니 남국 소년이 된 김창현은 날 향해 삿대질하다가 기괴한 어깨춤을 추더니 목의 칼라를 잡고 억지로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목의 피부가 다 벗겨졌나 보네.
“선크림 안 발랐냐?”
“발랐는데 소용이 없더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수영만 시키는데 죽는 줄 알았어.”
마찬가지로 까맣게 그슬린 강주찬이 목깃을 잡은 채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라니 무슨 말이야?”
책가방 들고 비틀비틀 쭈뼛거리면서 걸어오는 조민호를 보다가 강주찬을 돌아보며 물었다.
“교장 선생님이 네 모습에 감명받고 임해 합숙 시설에서 올해부터 혹독하게 훈련시키겠다고 하셨거든.”
“…하아.”
조민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시체놀이를 하는데 그건 반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마찬가지였다.
“3학년이 이 정도면 1학년이랑 2학년은 전멸이겠는데. 사고는 안 났냐?”
“혹독하게 훈련하는 대신 안전 요원과 장비도 작년의 두 배가량 배치하셨더라고.”
…한고은과 수유리는 서로 몸을 부둥켜안고 힘들게 교실로 들어오고 있고 그 뒤에 리디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둘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세쌍둥이는 여전히 무표정이구만.
그 뒤에 강소라도 따라 들어왔는데, 강소라도 조금 피부가 탔지만, 근육통은 없는지 멀쩡하다. 경기용 수영복을 고를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라니, 평소에도 수영하면서 근육을 단련하나 보다.
“어서 와.”
“서하, 미워어어.”
“미워어.”
한고은과 수유리가 날 보며 울먹거리는 모습에 조금 황당해졌다.
다들 아침조회 시간에 맞춰서 좀비처럼 들어오는 걸 보니 정말 힘들긴 힘들었나 보네. 좀 있으면 조회 시간인데 애들이 다 왔는지 확인해보고 1단계 힐링 웨이브를 발사했다.
파란 물결이 일순간 교실 안을 휘몰아치다 사라지는데, 신기하게도 초콜릿색으로 그을린 피부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껍질이 벗겨지는 목덜미나 피부와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던 모습도 전부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어?” “뭐야뭐야?” “파란빛? 뭐지?”
반 애들은 놀라서 내 쪽을 돌아보고, 내 몸에서 퍼져나오는 푸른빛의 물결을 목격한 애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본다. 그런데 역시나 여자애들 얼굴이 자기도 왜 상기된건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뺨을 만지작거리고 몸을 살짝 배배꼰다.
프랑도 살짝 얼굴이 붉어졌는데…. 남자애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곧 놀란 눈이 되었다.
“어…. 뭐야 이거?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근육통이 사라졌어!”
“난 상처 난 것도 없어졌어! 껍질이 일어난 피부도!!”
남자들은 성적인 영향을 안 받나? 아이들은 햇볕에 그을린 자신의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상처와 근육통까지 회복된 모습에 교실이 소란스럽게 변한다.
한고은들도 놀란 표정으로 날 보고, 리디아 공주와 세쌍둥이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도 이보다 놀라진 않을 표정이다.
“광역 회복.”
“…회복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고? 무슨 능력이…. 설마 너?”
강주찬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진짜? 정말로?'하는 표정으로 기묘한 표정을 짓고 교실 안에 있던 애들도 전부 날 바라보길래 고개를 끄덕여줬더니,
“B 클래스야.”
“우와아아아?!!” “B 클래스?!!” “꺄아아! 서하야 나 사인 해줘!”
교실은 소란을 넘어 난리가 나버렸다.
처음에는 박물관 사건으로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매스컴을 탔고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습격자에게 공격받은 걸로 동정의 여론이 생겨났다. 세 번째는 검증 영상으로 짧지만 강렬한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확실히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비교적 좋게 받아들이는 거 같다.
그렇게 몇 번의 매스컴을 탔지만, 우리나라의 인기 능력자들에 비하면 내 명성은 톱스타 배우와 신인 배우 정도의 인지도 차이가 있었다.
물론 내가 신인 쪽이지.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은 뭐 저런 사기 같은 인간이 다 있나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뭐? 하는 정도의 온도 차이가 존재했다.
후자 쪽인 수성과 NG 그룹이 청궁과 무화령 및 기타 등등이 모인 협회를 앞세워 날 깔아뭉개려고 한다면 전자인 리디아는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방학식을 위해 강당으로 이동하던 날 잡아 세웠다.
“서하 경?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방학식을 앞두고 강당으로 이동하던 중 리디아가 인적이 드문 창고 뒤편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저기 말이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넌 왜 나한테 자꾸 sir를 붙이는 거야? sir는 작위 같은걸 받은 사람한테 붙이는 칭호 아냐?”
“후후. 저 개인적인 경의의 표현이랍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경을 붙일 수 없겠지만요. 그리고 미국 영화를 보면 군인들도 대답할 때 sir를 붙이잖아요? 그렇게 딱딱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칭호에요.”
그런가?
방긋 웃으면서 대답하는 리디아는 곧 표정을 가다듬더니 잔잔하지만, 어딘가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그래서? 날 이렇게 따로 부른 이유가 뭐야?”
리디아는 내 뒤편에 서 있는 프랑을 한번 보더니 잠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참 다채롭게 변한다고 생각할 무렵 우물쭈물하던 리디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서, 서하 경. 저와 사귀어주실 수 없으신가요?!”
“없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더니 리디아는 립글로스라도 발랐는지 반짝이며 촉촉한 입술을 삐죽 내민다.
“역시 그렇겠죠?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봤다는 모습의 리디아를 보며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본국에서 미인계를 써보라는 이야기라도 나온 거야?”
“네에…. 어젯밤에 여왕 폐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제 몸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서하 경을 회유해보라구요.”
살짝 얼굴을 붉힌 리디아는 내 옆에 서 있는 프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뜬금없는 리디아의 고백에 얼굴을 굳혔던 프랑은 이어지는 대화에 표정을 풀더니 리디아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냥 친분을 다지는 걸로 한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아.”
어제 PR 영상 촬영, 그거 때문인가. 내 탄성에 잠깐 고개를 갸웃한 리디아는 개의치 않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인천 국제공항 인근에서 능력의 실기를 보였지요? 하늘에 만들어낸 거대한 빛의 폭발…. 그게 본국 정보국을 통해 이야기가 들어갔나 봐요. 서하 경이 대영 제…. 영국으로 와주신다면 영국에서는 서하 경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줄 거라고, 그걸 이용해서 서하 경을 유혹해보라는 말이 나왔어요.”
“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니 진실성은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걸. 하지만 거절하겠어. 난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거든.”
“그으…. 영국에서는 서하 경과 함께 오는 인물들에게 국가 단위의 편의를 제공한다고 해요.”
“소용없어. 난 권력이나 명예욕, 돈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
“…후후. 귀국하면 혼나겠는걸요.”
내 대답에 순순히 물러나는 리디아를 보며 음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 너무 물러.”
“제게 무른 면이 있다는 건 저도 자각하고 있어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발끈한 표정으로 항의하는 공주는, 확실히 귀여운 모습이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동생이 있었으면 할 정도로.
“너 말고 영국. 리디아 넌 내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알고 있어?”
“…최소 D 클래스 급의 신체 강화 능력. B 클래스 급의 속성 능력. 측정 불가의 감지 능력. 마찬가지의 회복 능력….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능력의 집합이라고 알고 있어요.”
공주는 자신이 파악한 능력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폭 내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맞는 이야기지만 지금은 대폭 바꼈지.
“그럼 영국은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자질이 무척이나 뛰어난, 다음 세대의 선두에서 능력자들을 이끌어나갈 가능성이 큰 인재라고 보고 있어요.”
“가능성이 큰 인재인가. 역시 나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진 않네.”
“…네?”
“B 클래스 신체 강화 능력. 순간적으로 증폭하면 A 클래스까지 늘어나. 쏘아내는 공격 스킬은 공간 지각의 변형이라 생각하겠지만 틀려. 내가 이름 붙인 건 1단계로 마나 탄. 2단계로 마탄이라고 이름을 붙였어. 거기에 광역 회복능력과 공간 지각. 그리고 공간 지각에서 파생된 비기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그리고 리디아의 앞에서 가로세로 높이 10cm의 호박색 큐브를 만들어 보였다.
“…그건.”
“그게 나야. 솔직히 말해줄까, 아니면 비유적으로 돌려서 상냥하게 말해줄까.”
리디아는 내 손바닥 위에 겹쳐지고 겹쳐지다 못해 두리안 같은 모습이 되어가는 공간의 벽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시는걸 부탁드려요.”
“지금의 나라면 혼자 영국을 지워버릴 수 있을 거 같아.”
“…?!”
“고위 이형종을 증발시키는 지름 150km의 폭발 공격. 영국은 막을 수단이 있어?”
“무…슨.”
리디아는 얼이 빠질 만큼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말을 제대로 못 꺼낸다.
“리디아 네가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을 믿고 이야기해주는 거야. 너도 어제 점심 즈음에 하늘에서 터진 빛의 폭발을 봤을 거 아냐?”
“네에….”
“그게 지상 몇km의 높이에서 얼마만큼의 범위로 터졌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그리고 어째서 이런 말을 해주는지도.”
“까불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 단어, 누구한테서 배웠어?”
“창현 군에게….”
“그런 단어는 함부로 안 쓰는 게 좋아.”
“이, 이런 상황에서 쓰는 단어가 아닌가 보네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리디아에게 한숨을 쉬어주고 입을 열었다.
“니가 직접 알아봐. 아무튼, 난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잠자는 사자한테 다가가서 코털을 뽑는 짓은 하지 마.”
내 말에 다시금 긴장해버린 리디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화난 사자는 물불 가리지 않을 테니까.”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