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0 에너지 이터3 =========================================================================
37층의 자기 집무실에 있는 혜령이 이모를 보러 올라왔더니 언제나처럼 서류정리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디 몸이 불편한 곳은 없나 대충 살펴보면서 걸어 들어가니 날 발견한 혜령이 이모는 살짝 웃으면서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침에는 죄송했어요. 주말에도 쉬지도 못하게 하구….”
“아니에요. 어차피 출근하던 중이었거든요.”
히익. 토요일에도 일하는 거야?
볼 때마다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만 살펴보고 있던데…. 어른들은 다 저렇게 일해야 하는 건가? 사무동을 비롯해서 사업지원동 2개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비서 누나들도 다 출근해있는 거 같고.
“한창 바쁠 시기니까요.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하철수의 일이라면….”
“그 자식 일은 이모가 알아서 하셔도 돼요. 지금은 그냥 심심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후후. 사무동은 별로 재미있는 건 없을 텐데요. 사업지원부의 김 부장님과 하 부장님께 말씀드려놓을 테니 창고를 둘러보시는 건 어때요?”
창고? 이형종 부산물을 쌓아두는 곳 말이지? 으음. 별로 안내키는 데….
아 맞다. 이참에 에너지 이터를 다시 한 번 봐야겠는데…. 볼 방법이 있나?
“그건 나중에 볼게요. 것보다 일자산에서 잡은 에너지 이터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아…. 흰 여우는 곧 죽을 거 같아요.”
엥? 죽어? 왜?
이모는 "으음~." 하면서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서류 두 장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영양부족과 컨디선 악화로 사망 직전? 검사 날짜가 그저께네….
사유는, 에너지 이터의 종족인 사막여우의 주식인 작은 설치류를 비롯한 도마뱀과 작은 과일 같이 영양에 신경 써서 먹이를 챙겨주고 있었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살이 빠지고 말라가다가 처음 포획했을 때 몸무게가 1.2kg정도였지만 지금은 0.9kg까지 줄어있다고 적혀있었다.
이미 하루 중 대부분을 수면으로 보내는 중이며 점점 호흡곤란 증세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먹이를 안 먹는 것도 아닌데 점점 살이 빠졌다니…. 역시 에너지를 흡수 못 해서 그런 건가요?”
“연구진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하지만 체질이 변한 데다 위상석을 제공해줘도 관심도 없고 억지로 먹이려 들면 화내면서 물어뜯으려 한다고 해요. 입에 집어넣고 억지로 목으로 넘겨도 곧장 토해낸다고 해서 대책이 없대요.”
진짜 그 녀석이 죽기 전에 한번 만나봐야겠다.
“그 에너지 이터, 볼 수 있을까요?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데.”
“네? 으음…. 지금쯤이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알겠어요, 잠시 기다려봐요.”
혜령이 이모는 곧 책상에 비치된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더니 저번에 학교에서 만난 김무흘 원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하죠. 네? 호호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끊어요!”
김무흘 원장은 내가 뭔가 또 선물을 주는 건가 하고 기대하지만 혜령이 이모는 칼같은 반응을 보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젯밤에 조금 위험한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안정화돼서 잠들어있다고 하네요. 점심 드시고 오후 1시쯤에 찾아가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럼 40층에서 놀고 있을게요.”
“준비가 끝나면 전화할게요.”
살살 눈웃음을 짓는 혜령이 이모한테 손을 흔들어주고 40층으로 올라오면서 에너지 이터에 대해 생각해봤다.
에너지 이터는 내 TP를 맛보고 입맛이 변해서 위상석을 거부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TP를 먹고 특질? 체질? 아무튼, 뭔가가 변해서 일반 위상석을 몸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 걸지도.
내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인증기를 켜고 에너지 이 터에 검색해봤지만 내 관심을 끄는 글은 없었다.
대부분이 어떤 도시에 에너지 이터가 출몰했다거나 에너지 이터가 위상석 발전소를 습격해서 가동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한 지역 전체가 정전사태로 마비돼서 수천만 달러 규모의 피해가 났다거나 그런 거 뿐이다.
“흐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만 내 TP에는 뭔가 다른 사람들의 TP나 위상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 같다.
아침의 마탄도 그렇고, 내 연인들의 몸에 TP를 주입했더니 그대로 위상력이 되어서 쌓이잖아? 그걸 생각해보면 내가 TP를 먹이면 에너지 이터도 하위 이형종에서 중하위를 넘어 중위 중상위, 어쩌면 상위까지 오를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면 연인들이 먹었던 건 내 정에 포함된 TP였지, 생으로 먹여 본 적은…. 눈에 TP를 바르거나 피부에 바르거나 한걸 생각해보면 위험할 거 같지 않은데.
아, 직접 입으로 받아먹은 적도 많잖아.
으음…. 언제나 화연이나 영은이 몸을 스캔하고 다녔지만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진 점은 위상력이 늘어나서 더 예뻐진 거 뿐인가.
딱히 몸에 변화 같은 건 없었고.
확실한 건 3시간 뒤에 에너지 이터를 만나봐야 알 수 있겠다.
내 집무실에서 인증기를 가지고 놀다가 12시가 되자마자 집으로 올라가서 곤히 잠든 두 여인을 깨웠다.
영은이는 안 일어나려고 칭얼거리길래 내 정으로 가득 차 임신한 거 같은 아랫배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괴롭혔더니 다시금 H 스위치가 들어가면서 날 덮치려고 하더라.
마치 뱀처럼 내 몸을 휘감아오는 농밀한 육체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1시에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한다고 했더니 좀 아쉬워하는데 나도 아쉬웠다.
이제 일상이라는 것처럼 별다른 놀람도 없이 정을 비우고 나온 영은이와 프랑과 함께 점심을 먹고 에너지 이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영은이한테도 나갈 거냐고 물었다.
“으음~. 내 직책이 직책이다 보니까 가게 되면 우리 서하가 맘 편히 구경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좀 더 잘래.”
“그럼 그렇게 해.”
한 장의 숏팬츠에 가려진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토닥여주니 영은이는 여우 같은 웃음을 짓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1시에 혜령이 이모의 전화를 받고 프랑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저번에 탔던 빨간색 페라리 옆에 혜령이 이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너지 이터는 아직 해부하지 않았던 건가요?”
“해부 실험은 에너지 이터가 죽고 나서도 할 수 있으니 일단 관찰 기록을 우선으로 했다고 해요.”
강동구에 있는 능력자 연합 빌딩으로 향하면서 혜령이 이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한테서 에너지 이터를 인계받은 정부 + 능력자 연합의 합동 연구는 여전히 진척이 없어 제자리걸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만 에너지 이터지, 인간에게 적대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생명체가 돼버린 거니까.
능력자 연합 빌딩은 처음 왔을 땐 짧은 탐색 범위 때문에 감지에 다 들어오지 않았었고 두 번째 왔을 땐 2회차에 대한 심의에 집중하느라 못 봤었다.
그래서 한번 최고층부터 최저층까지 싹 훑어봤는데 뭐 별다른 건 없구나.
능력자 연합 빌딩은 높이만 450m에 89층짜리 건물이었다. 역시나 최고층에는 강현우 한국 지부장이 고급스러운 집같이 꾸며진 곳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공간지각으로 빌딩을 전체적으로 쓱 훑어봤지만 눈치채는 사람도 없고 그냥 평범…한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레이드 팀 빌딩을 생각나게 하는 구조다.
내가 확실하게 본 레이드 팀 건물은 타임리버랑 그랑 블루 빌딩 두 개 뿐이지만.
능력자 연합 이형종 연구소는 연합 한국 지부의 중간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연구소는 3개 층을 쓰고 있었는데 막 동물들 잡아놓고 생체실험하고 해부하고 분석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냥 평범한 연구소였다.
평범한 사무실같이 구획을 나눠놓고 뭔가 현미경 같아 보이는걸 들여다보고 있고 그 옆에서 서류를 쓰고 있거나 뭔가 모를 자그마한 표본을 가지고 살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에너지 이터 관련 일로 만났던 중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그랑 블루 마스터.”
통통한 살집의 나보다 조금 작은 김무흘 원장은 여기가 자기 연구실도 아닐 텐데 주인처럼 우리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정부 소속의 김무흘 원장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고 흔들어주니 싱글거리면서 웃다가 내 옆의 프랑을 보더니 눈을 번뜩인다.
“김무흘 원장님. 저희 마스터에게 플랑드르 씨는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이니 생각 없이 말을 꺼내시진 않으리라 믿어요.”
프랑을 연구 거리로 보는듯한 눈빛에 살짝 기분이 상하려는데 혜령이 이모가 한발 앞으로 나서면서 김무흘 원장에게 경고를 날렸다.
“어, 어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자자, 이리로 오시죠. 흰여우는 시크릿 룸에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비쩍 마른 녀석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버둥거리면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을 꺼내진 않고 앞장서는 김무흘 원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쳐서 두 명의 G 클래스 신체 강화 능력자가 지키는 전자식 문 앞에 도착했다.
김무흘 원장이 감식장치 앞에 서서 손바닥이랑 망막을 동시에 스캔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입구가 닫히고 곧 벽의 공기 분사기에 공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치마를 입고 있는 혜령이 이모의 치마를 손으로 눌러주니 잠깐 놀랐지만, 곧 벽의 구멍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6면에서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면서 먼지를 털어낸 다음 이런저런 연구기기가 늘어서 있는 클린 룸으로 들어가니 클린 룸의 중앙에 마련된 공간에 갇혀 있던 흰여우가 날 보더니 바르작거리면서 반응을 보였다.
새하얀 털과는 대조적인 까만 눈에서는 무척이나 반가움이 느껴져서 그만 쓴웃음을 지어버렸다.
“허어. 이 녀석이 왜 이러지?”
김무흘 원장은 갑자기 버둥거리는 흰여우가 이상한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는데 클린 룸 안에 있던 다섯 명의 연구원 중 한 명이 김무흘 원장에게 다가와서 속삭인다. 근데 방 안이 워낙 조용해서 다 들린다.
“아까부터 이러더군요. 저 소년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 같습니다.”
“어허! 소년이라니! 그랑 블루의 마스터일세, 말조심하게!”
원장은 연구원에게 작게 호통을 치는데 연구원도 눈이 휘둥그레지며 날 바라보고 주변에 있던 네 명의 연구원들도 덩달아 놀라면서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흰여우 녀석은 1평 남짓한 공간을 감싸는 투명한 재질의 케이스 안쪽에 있었는데 케이스는 높이 조절이 되어있어서 1m가량 솟아올라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내려볼 수 있게 위치가 조절되어있었다.
안쪽 전체에는 푹신해 보이는 쿠션이 가득 차있어서 불편해 보이진 않는다.
녀석은 뼈만 남았다고 할 만큼 마른 몸으로 계속 바동거리면서 나한테 다가오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뼈만 남아 힘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놈도 금방 버둥거림을 멈추고 날 올려다본다.
“이놈, 왜 이제 왔냐는 거처럼 올려다보는데?”
내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프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더니 프랑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끼웅. 끼잉. 끄웅.
나직한 울음소리를 낸 흰여우는 지쳤는지 눈을 감고 주둥이를 쿠션에 파묻어버렸다.
흰여우의 몸 안을 공간 지각으로 살펴보니 위상력이 9까지 줄어있었다. 4월 14일에 김무흘 원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89였는데…. 아무래도 몸 안의 위상력을 소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거 같다.
음? 오늘이 7월 4일이고 4월 14일에서 오늘까지 날짜 계산을 해보면 딱 80일이네. 그리고 저 녀석의 몸에 위상력이 정확히 80이 줄었지?
하루에 1씩 줄어든 건가, 위상력이 0이 되면 이 녀석도 죽을 거 같은데, 그럼 9 일만 늦게 왔으면 못 만났겠네.
아, 그사이 1이 줄어서 8이 됐다. 그나저나 조그마한 몸에 배 부분이 빠르게 들썩거리는 걸 보니 숨이 가쁜 모양이다.
흰여우를 살펴보고 있으려니 김무흘 원장도 옆으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흰 여우는 미국 알츠하곤 연구소에서 제공한 위상력 패턴을 비교 분석해본 결과, 에너지 이터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감별기로 다시 한 번 살펴본 결과 이형종의 다운 버전이라는 분석 결과만 나왔지요.”
“음. 3개월 전에 만났을 땐 원장님은 에너지 이터를 하이브리드 타입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다운 버전이 되었다고요?”
“네? 아아, 기본 감지 타입에 그저 위상력 그 자체를 주둥이로 흡수한다는 특이점이 있어 하이브리드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랑 블루 마스터처럼 신체 강화 타입과 감지 타입, 두 종류를 가진 하이브리드, 스페셜 타입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나? 하긴 그때도 하이브리드 라고 했지 하이브리드 타입이라고는 안 했으니까.
“그 다운 버전이라는 건 뭐에요?”
내 질문에 김무흘 소장은 까칠까칠한 수염이 나 있는 턱을 쓰다듬으며 녀석을 바라본다.
“보통의 이형종 들은, 몸에 받아들인 위상력은 그대로 유지하는 게 보통입니다. 중상위 이하의 이형종 들은 비록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먹어 에너지를 보급하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다만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행동일 뿐, 위상력 자체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흰 여우는 보시다시피 음식으로도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상력 자체도 점점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꺼내 자그마한 홀로그램 창을 띄우더니, 에너지 이터의 위상력 감소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을 보여준다.
역시나 매일매일 1씩 줄어들었다고 나온다.
“위상력을 보충시켜주기 위해 위상석을 공급해주기도 해보고 억지로 먹이려고도 해봤지만, 생리적인 현상 때문인지 위상석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안경을 벗고 흰 가운에 대고 닦으면서 입을 연다.
“위상력 타입은 감지 타입이지만 위상석으로 위상력을 보충하지도 못하고 자체적으로 위상력을 수급하지도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위상력이 감소하는 이형종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데미지를 받을 때마다 위상력이 감소하다가 0이 되면 소멸해버리는 악령, 유령형태의 이형종을 생각해봤을 때 이형종 들도 위상력이 0이 됐을 경우에는 죽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건 알츠하곤 연구소에서도 공감했던 부분이고요.”
그러니까 8일 뒤에는 흰여우가 죽는단 거구만. 기왕 죽을 거면 내가 데려가서 좀 살펴보고 싶은데…. 허락해주려나?
“때문에 자가 생존을 하지 못하는 녀석을 다운 버전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이 녀석을 제가 데려갈 수는 없을까요? 기왕 죽을거라면 제가 데려가서 좀 살펴보고 싶은데.”
“네? 으음. 그건….”
내가 생각해도 좀 막무가내식 부탁이긴 했지만 역시나 곤란한 표정을 짓는 김무흘 원장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봐서는 조금만 설득하면 넘어올 거 같은 분위기를 보인다.
“이제 에너지 이터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국가 지정 유해 이형종 분류에서도 떨어지지 않나요? 게다가 저한테 보인 반응을 보면 어쩌면 살아날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두면 8일 뒤에 죽을거잖아요.”
말하는 중간부터는 혜령이 이모를 돌아보고 물어보니 이모는 손에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딱히 안될 이유는 있나요? 몇몇 깜찍하게 생긴 최하위 이형종이나 하위 이형종은 사육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에너지 이터였다면 힘들었겠지만 흰 여우는 이제 에너지이터도 아니고 곧 숨이 넘어갈 상황이니까…. 요청하면 들어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김무흘 원장님?”
“음~ 흰 여우가 이런 반응을 보인 적도 없으니 어쩌면 그랑 블루 마스터의 손길이라면 위상석을 먹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 지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게 어떠십니까.”
“그래보도록 하죠.”
“혹시 살아난다면 가끔이라도 좋으니 혈액과 체모의 채취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혹시나 이 녀석이 죽게 되면….”
“그땐 사체를 회수, 해부하는 쪽이 될 겁니다.”
뭐 그렇겠지? 곧 혜령이 이모는 김무흘 원장하고 이야기를 나누러 가버리고 나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흰 여우를 다시 내려다봤다.
으음…. 확신은 잘 못 하겠지만 어쩐지 이 녀석도 나한테 중요한 무언가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십수 분이 지난 뒤에 돌아온 혜령이 이모는 만약 흰 여우가 사고를 치거나 하면 그 잘못은 전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강현우 지부장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새 지부장이랑 이야기를 나눈 건가?
“사람을 공격하거나 국가 기반 시설을 습격해서 망가트리는 일이 아닌 이상에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부분들이에요. 그리고…. 혹시나 흰 여우가 살아날 경우에는 최소 반년에 한번은 능력자 연합에 흰 여우의 생존 여부를 신고하고 가능한 조사에 협조를 해줬으면 한다는 약속을 요구받아서 승낙했어요.”
혜령이 이모는 메모장에 몇 가지 메모한걸 체크하면서 나한테 알려주는데 메모장에는 열 몇 가지 항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 줄이 그어져 있고 체크된건 두 가지 항목, 흰 여우가 난동부릴 때 책임져야 할거랑 반년에 한 번씩 생존 신고 두 개 뿐이었다.
그사이에 협상을 해서 이상한 항목을 모두 거부했나 보다. 줄이 그어진 항목 중에는 대표적인 게 매번 흰 여우가 성장할 때마다 그 성장 기록을 적어서 제출하라던가, 흰 여우로 인해 이득이 발생할 경우 능력자 연합과 그걸 공유할지에 대한 거라던가, 내가 받아간 에너지 이터 포상금을 뱉으라던가.
아무튼, 고작 십 수 분 만에 저걸 다 처리한 혜령이 이모의 협상 실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왠지 능력자 연합의 차훈 팀장이 혜령이 이모가 실무진으로 나선다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린 이유를 알 거 같다.
“제가 목줄 쥐고 잘 다녀야겠네요. 제가 받았던 포획 보상금은 뱉어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되돌려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건 말 그대로 포획 보상금이었으니까요. 잡는 데 도움을 줘서 받게 된 보상금이잖아요? 그걸 다시 돌려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생리에도 어긋나구요.”
어쩐지 대부분의 요구 조건을 반박당해서 취소된 상황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지부장이 생각난다. 아니 실제로 최고위층에 있는 지부장의 얼굴이 떫은 감을 먹은 것 마냥 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채찍만 때렸으니 당근 하나 정도는 줘야 할 거 같은데 뭐가 좋을까….
“아, 오늘 아침에 제 수련장에서 중하위 이형종 하나가 자연 발생했던 걸 처분했는데 그거에 대한 보상금 같은 건 없나요?”
“아! 신촌동의 수련장…. 으음. 자연 발생한 중하위 이형종이라면 보상금으로 적지 않은 돈이 나올 거에요.”
“그럼 그걸 주는 걸로 대신하죠. 그래도 한국 지부장인데 너무 이득만 챙기는 건 좀…. 그렇죠?”
혜령이 이모는 내 말을 듣더니 조금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지부장님과 대화하다가 저도 모르게 직업 정신이 튀어나왔나 봐요.”
“주는 방식은 혜령…. 부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무흘 원장은 나와 혜령이 이모의 대화가 끝난 걸 보고 다가왔다.
“어쩐지 이 녀석이 그랑 블루 마스터에게 가면 멀쩡해질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건강해진다면 꼭 좀 연구를 부탁드….”
“김무흘 원장님! 지금 마스터께 직접 청탁을 넣으시는 건가요?!”
“네, 넷?!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거에요?! 저희 마스터는…!”
…혜령이 이모는 자길 건너뛰고 나한테 직접 부탁을 건네오려는 김무흘 원장을 보더니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다다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해명하려 애쓰는 김무흘 원장을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연구원에게 케이스를 톡톡 건드리면서 신호를 보내니 곧 케이스 근처에 있는 컴퓨터에 다가가서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스으응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케이스가 천천히 천장으로 밀려 올라간다.
케이스가 열리고 있지만 흰 여우는 여전히 주둥이를 쿠션에 파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흰 여우에게 손을 뻗어 품에 안으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날 올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얼른 집에 가서 TP를 조금 먹여야겠군.
잔뜩 뿔이 난 혜령이 이모를 달래니 김무흘 원장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고마워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김무흘 원장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니 흰 여우 놈도 귀를 쫑긋하더니 살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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