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영국에서 온 공주. =========================================================================
흔한 만화책이나 소설을 보면 전학생은 꼭 주인공이 있던 반으로 전학을 오더라.
“리디아 이슬라 마리에타입니다. 잘부탁드려요, 여러분.”
뭐야. 한국어 좀 하잖아?
담임 선생님과 함께 온 저 여자애는, 뒤에 세쌍둥이를 대동하고 미소를 띤 채 지긋이 날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반으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날 뚫어지라 바라보는 저 여자애의 눈빛이 좀 부담스럽다.
근데 지금 영국 왕실 직계의 라스트 네임은 윈저 아닌가?
얼핏 보면 프랑처럼 백금발로 보이지만 그늘에 들어오니 금빛이 도드라진다.
백금발이 아니라 옅은 금발이지만, 하지만 프랑과 맞먹을 정도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목에서부터 한 갈래로 만들어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서 무척이나 귀한 집 자식으로 보이게 만든다.
얼굴도 서양인 특유의 작고 달걀형에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얼핏 보면 인형처럼 보일 만큼 깜찍하게 생겼지만.
내 관심 밖이야.
“리디아 이슬라 마리에타 양은 영국의 이튼 칼리지에서 한 달간의 단기 유학으로 한국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영국 왕실의 공주님이에요. 한 달간 함께 하면서 한국의 좋은 점을 많이 배우고 가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여자애가 아니라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튼 칼리지라면, 백 년 전에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는 오랜 명문 학교인 걸로 아는데 거기서 뭐 배울 게 있다고 우리나라로 오냐.
“올리비아입니다.”
“릴리입니다.”
“클로에입니다.”
별 표정과 감정 없이 입만 열어 자기소개를 한다. 그런데 박초롱 박현지 자매처럼 위상력이 다른 게 아니라 셋 다 20만 정도의 능력자고 공주도 20만의 D 클래스 능력자다.
공주의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쌍둥이는 그야말로 금발 숏컷 빈유라는걸로 모든 게 표현되는 여자애들이다.
그때, 교실 뒷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네 명의 건물관리직원이 책상과 의자 4개씩 들고 와 빈자리에 놓고 나갔다.
근데 하필이면 내 뒤냐. 아니, 내 뒤에 조민호가 있으니까 바로 뒤는 아니지?
“그럼 공주님은 저쪽 빈자리에….”
“선생님? 저는 학생이니 말씀 편히 해주시면 좋겠어요.”
“아, 응. 그럴까? 그럼 마리에타 양과 올리비아, 릴리, 클로에는 지금 가져온 책상에 앉으렴.”
아무리 공주가 요구했다지만 칼같이 말을 놓다니, 우리 선생님도 어찌 보면 간이 크단 말야.
한쪽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뚱한 표정으로 공주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공주는 방긋 웃으면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자리에 앉는다. 그 와중에 교실 뒤편에서 몸을 띄워 앉은 프랑과 눈을 마주치는데 무척이나 호기심 넘치는 눈빛이다.
그리고 특별한 소식 없는 조회를 끝내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니 애들이 슬금슬금 공주에게로 다가간다.
공주는 뭐, 특권의식 같은 건 없는 모습으로 접근한 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질문에 대답해주며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주에게 극도의 관심을 보이던 김창현은 정작 공주가 왔는데도 접근하지 않더니 뒤 돌아앉으면서 내 귀에 속삭인다.
“야야. 공주님이 널 계속 힐끔거리는데 말이라도 안 걸어보냐?”
“화연이한테 지금 니가 말하는거 녹음해다가 건네줘도 될까?”
“…미안. 살려주라.”
날 신경쓰는건지 반 애들은 내 쪽으로는 몰려들지 않아서 강소라나 조민호가 치이는 일은 없지만, 조민호는 자기 뒤에 한 나라의 공주님이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공황장애를 일으킬 거 같은 표정이다. 소심도 저 정도면 병인 거 아냐?
“크으…. 진짜 부럽다. 나도 너처럼 인기 좀 있어 보고 싶은데, 나도 능력자가 되면 인기 있어지려나?”
“꿈 깨시지~?”
너 같은 건 100번 갔다 와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리는 강소라를 김창현이 정색하면서 말한다.
“100번을 반복하면 그중에 한번은 서하같은 능력을 지닐 수 있을지도 모르잖냐.”
“그중에 70번은 죽고 말이지~.”
“큭!”
“나, 나는 서하가 잡았다는 솔리드 스네이크를 만나면…. 무서워서 죽을 거야.”
조민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김창현의 옆으로 가서 서더니 한숨을 폭 쉰다.
“뭐 솔리드 스네이크가지고 그래. 더 멋진 거 보여줄까?”
내 머리 위로 날아와서 둥둥 떠다니는 프랑을 올려다보며 애들한테 말했더니 공주 주변에 몰려있던 애들이 일제히 날 돌아본다.
공주와 아이들도 포함해서.
“뭔데?! 보여줘보여줘!”
저 멀리 있던 한고은과 수유리, 강주찬도 달려오더니, 한고은과 수유리는 내 책상에 달라붙으면서 반짝반짝 눈을 빛낸다.
“어…. 여자애들이 보기엔 좀 끔찍한 건데.”
“괜찮아. 나 삼류 스플래터 무비 좋아해! 수유리도 나랑 같이 자주 봐서 적응했어!”
내가 찍은 게 삼류 스플래터 무비랑 같겠냐!
주변에 다른 여자애들이 볼까 말까 고민하지만 이런 기회는 없을 거다 하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는데, 조민호는 떠나고 싶었는지 물러나려다 뒤에 애들한테 막혀서 빠져나가질 못하더니 사색이 된다.
내가 보여주려 하는 건 엘리펀트로스 우두머리의 사진, 이른바 노모 사진이다.
김학준 차장이 사전 발표에 쓴 자료는 이곳저곳이 모자이크해서 뉴스에 내보낸 거니까. 얘들이 잘 못 봤겠지.
사실 조민호를 조금 놀려주고 싶어서 말을 꺼낸 건데 저렇게 사색이 되어서 두 눈을 질끈 감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지네.
인증기를 켜서 홀로그램 창을 크게 띄웠더니 당장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오다가 "우욱."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 이거, 켄타우…로스가 아니네?”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뜬 김창현은 어라? 하는 표정이 됐는데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펀트로스 우두머리의 사진이네요. 이게 원본이군요. 놀라워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공주가 조민호의 자리에 앉아 홀로그램 창에 떠오른 사진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흘린다.
그 모습을 한고은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더니 다시 홀로그램 창에 뜬 사진을 보더니 날 보며 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거 같은데도 되게 크게 보여! 실제로는 얼마나 큰 거야?”
“이 녀석이 서면, 지금 창밖에서 이쪽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야.”
주변에서 히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몇몇 애들은 창밖을 내다본다.
화면을 슬라이드 하니 몇몇 여자애들은 안색이 나빠지면서 헛구역질을 하더니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그 틈에 사색이 된 조민호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교실을 뛰쳐나간다.
“15m나 된단 말인가요? 그걸 두분이서 잡다니, 훌륭하세요.”
그리고 계속 화면을 넘기다가, 위상 세계의 늪지대 이곳저곳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대부분은 검증 때 찍은 사진으로, 토막 난 뱀 이형종 들과 반쯤 타올라서 연기를 뿜고 있는 늪지나 벼락에 지져진 곤충과 거머리, 나무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이 바뀔 때마다 "히익~! 뱀 크기 좀 봐!" 라던가 "으아앙! 거머리 무지 커!"라던가 "저런 늪지대에서는 1초도 못버틸꺼야~!" 등등의 소리가 들리면서 감탄과 공포와 징그러움이 가득한 웅성거림이 주변을 채운다.
후후. 나도 이제 관심이나 주목에 조금 익숙해졌다고.
…그 빌어먹을 기자들 덕분에 말이지!
“아, 이번 검증 때 찍은 사진이군요! 늪지대라니….”
“공주님은 이런 사진 같은 거, 쉽게 보셨을 거 같은데 신기하신가요?”
한고은은 자꾸 끼어드는 공주가 맘에 안 드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를 바라보며 약간 날이 선 투로 말을 걸었다.
“리디아라고 불러 주….”
“공주도 능력자야. 사진 같은 게 아니라 직접 봤겠지.”
“…….”
“어? 진짜?”
공주는 내 말에 입을 다물어버리고 놀란 눈으로 날 본다. 한고은이나 다른 애들도 공주만큼 놀라면서 공주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잠시 당황하던 공주는 방긋 웃으면서 한고은에게 말했다.
“공주가 아닌 리디아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저는 공주라고 불리우지만 머나먼 방계이고 능력자가 되어 왕실에 불려 프린세스의 칭호를 받았을 뿐이랍니다.”
음. 조금 기분 나쁘게 해서 본심을 엿볼까 해서 말을 끊고 능력자인 걸 알려버렸는데 공주는 다시 상냥한 얼굴이 되면서 한고은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근데 방계? 직계에서 아무리 멀어져도 왕실의 피가 이어지면 공주라고 불리는 거 아닌가?
“능력자가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여자아이였으니까요. 여러분들이 불러주시는 공주라는 칭호는 부담스러워요.”
공간 지각으로 공주의 표정을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방금 발언이 진심인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이 거짓말할 때는 특유의 반응이 있어서 공간 지각으로 얼굴을 세심하게 집중하면서 감지하고 있으면 저노무시키, 지금 거짓말하네. 라는 느낌이 왔거든.
뭐, 공주의 사정 같은 건 알 바 아니니까 그냥 신경 꺼야지.
“으…응. 그래! 잘 부탁해. 리디아.”
“앗, 저는 반장인 수유리에요. 잘 부탁해요. 리디아!”
오오. 여자애들도 공주의 진심을 알아챘나 보다. 털이 곤두선 고양이 같던 한고은도 경계를 한 단계 풀고 슬금슬금 다가가네. 수유리는 워낙 구김살이 없으니까.
공주는 여자애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날 힐끔거리지만, 아침 일도 그렇고 별로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서 곧 신경을 꺼버렸다.
1교시 선생님이 오시는 게 공간 지각으로 보여서 인증기를 끄고 제대로 앉으니 프랑이 내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리고 교실 뒤편으로 날아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도 힐끔거리면서 바라보는 공주였다.
“앗! 선배니이이이임!!”
4교시를 마치고 점심을 위해 식당으로 가는 도중 날 발견한 학생회장 이유미는 덮치듯이 날아들며 내 허리에 다이빙하려 했다. 하지만 더는 내 허리를 허락해줄 수 없어!
마나 모드 - 가속을 켜서 잽싸게 달려가 점프하려는 이유미의 어깨를 잡아 누른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진 이유미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학생회장. 오늘은 너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무…엇인가요, 선배님?”
“오늘, 우리 학교에 영국 왕실의 공주님께서 문화교류의 목적으로 한 달간의 단기 유학을 오신 것을 알고 있을 테지.”
“네에.”
이미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한 이유미는 내 뒤쪽의 한고은 들과 함께 서 있는 공주에게 시선을 돌리며 "진짜 공주님?"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니 지금의 나보다는, 그녀를 학생회 명예 임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 고작 한 달이지만 영국 왕실의 공주님이 학생회 멤버라는것도 메리트가 클 테지?”
내 말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이유미. 좋아, 그 자세다.
“한 달 뒤면 공주님은 돌아가신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아닌 공주님을 설득할 때다.”
“그러네요!”
“좋아. 가라!”
“네!”
그리고 이유미는 도도도 달려가서 나와 키가 비슷한 공주에게 반짝반짝 눈빛으로 올려보면서 열심히 학생회에 대해 어필하기 시작한다.
“좋아. 당분간 날 귀찮게 안 하겠군.”
“공주님을 제물로 바친 거냐….”
“누가 들으면 아름다운 공주님을 산제물로 바친 사악한 흑마법사인 줄 알겠네. 난 어디까지나…. 왜 벌써 돌아와?”
“공주님께서 승낙하셨어요! 그러니 이제 선배님만 오시면!”
뭣이?! 놀라서 공주를 돌아보니 방실방실 웃으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저, 저런 지조 없는 공주님을 봤나!!
결국, 오늘도 허리에 이유미를 매달고 교내식당으로 향하니 강주찬이 슬쩍 웃으면서 입을 연다.
“자업자득이야.”
큿….
공주는 의외로 소탈한 성격이었다. 딱히 가리는 음식 같은 것도 없고 한국에 왔으니 한국 음식을 먹어보겠다며 한식백반을 주문해서 받아왔다.
그리고 오이소박이를 먹어보더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연신 맛있다고 감탄사를 흘리고 새하얀 쌀밥과 해물 된장국을 수저로 한 입 떠먹어보더니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의 표정을 짓는다.
“하아아. 저 작은 것에 행복해하는 공주님이라니…! 크흑, 내 심장!”
“못 먹고 자란 게 아니고?”
식탁 맞은편에서 한고은 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심을 먹는 공주는, 솔직히 나쁜 애 같지는 않은데 첫인상이 워낙 나빠서 별로 정이 안 간다.
하지만 김창현 이놈은 벌써 아침의 일을 잊었는지 헬렐레…. 아, 이놈은 아침에도 화 안 난 모습이었지.
“뭣이?! 공주님이신데 못 먹고 자랄 리가 있겠냐!ㅇ
내 말을 들은 김창현은 격분하는 척하더니 내 목에 팔을 둘러 조이기 시작한다. 이놈은 내가 신체 강화 3단계 정도 된다는 걸 안 뒤로는 이렇게 물리적인 공격을 해올 때가 늘어났다.
퍽
“캑!”
물론 수도치기 한방에 퇴치당하지만.
더운 날 속을 진정시켜주는 점심을 먹고 나서 한고은네들은 공주한테 학교 안내를 시켜준다며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나도 에어컨 빵빵한 교실로 돌아가야….
“블루 지니어스 경도 같이 안내…해주면 안되나요?”
…무슨 경?
내 별명을 최종진화시켜 부르는 공주한테 인상을 팍 찡그려 주니 공주는 말끝을 흐리려다가 끝끝내 마지막까지 말을 끝맺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김창현이 강주찬의 어깨를 죽어라 내려치며 낄낄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난 그 별명 안 좋아해.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나랑 싸우자는 걸로 받아들이겠어.”
“아….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날 흘겨본 한고은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웃음 짓는 공주한테 다가가더니 날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서하는 이상하게 블루~ 응응응응을 싫어해. 별로 나쁘지 않은데 왜 저리 싫어하나 몰라?”
“저도 능력자 연합에서 칭호가 내려오면 다들 기꺼워하는 모습만 봤어요. 어느 분은 칭호로만 불리우길 원하셔서 블루 지…. 서, 서하 경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
다시 내 별명을 부르려 하길래 찌릿하고 노려봤더니 움찔하면서 말을 고쳤다.
그나저나 경sir 이라니.
“내 DNA가 그 별명을 거부하는거야. 아무튼 부르지 마.”
“네.”
빙긋 웃는 공주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애들 뒤를 따라 학교 시설물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데, 덥다.
더워.
더워 죽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싫다고 할걸! 강주찬하고 김창현이 축구하러 가버리고 조민호도 거기 따라갈 때 나도 가버릴 걸 그랬어! 그랬으면 그냥 교실로 들어가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에 짜증이 살살 올라오려 하는데 어디서 났는지 썬캡을 쓰고 있는 강소라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더워~?”
“그래 덥다…. 더워. 교실로 돌아가 버릴까….”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데~. 나중에 여름은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
“그땐 에어컨 아래에서 안 나올 거야.”
기껏 점심으로 시원한 평양냉면을 먹었는데 그 시원함이 10분도 안 돼서 다 사라졌어!
“신체 강화라도 더위는 어쩔 수 없구나~?”
“끄으응.”
그건 아닌데, 그냥 숨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로 슉 들어왔다가 슉 나가버리는 게 싫어! 찜통에 갇힌 기분이라고.
재잘거리는 한고은과 수유리 사이에 공주가 끼어서 이야기를 받아주고 그 뒤를 세쌍둥이가 따른다.
그리고 나와 강소라와 프랑은 는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아까부터 운동부실이나 체육관, 운동부의 운동장이나 학교 애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을 안내해주고 학교 여기저기에 있는 공원이나 벤치, 유명 예술가들이 조각한 조형물들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즉 땡볕 아래를 돌아다닌다는 거다!
“야, 한고은. 좀 들어가는 게 어때. 직사광선 많이 받으면 피부 타고 주근깨 생긴다고. 영국 사람들은 피부도 약하다고 하잖아.”
견디다 못해 한고은을 불렀더니, 내 말을 들은 녀석은 나와 하늘과 공주를 번갈아 보다가 공주에게 햇볕이 따가우니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다!
“아, 저는 태양을 좋아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ㅇ
컥?!
“하아아….”
차가운 음료수 캔 하나를 뽑아서 손에 쥐고 시원한 교실로 돌아오니 그제서야 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고은은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며 한숨을 푹 쉬는 날 보더니 날씨가 그렇게 더운가? 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레이드 다니면 사막이나 그런 곳에 갈 때도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버틸려구 그래?”
“그건 일이잖아. 일할 때 불평할 순 없으니까 견뎌야지.”
“…뭐야 그게.”
난 어처구니없다는 한고은의 표정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곳에서 고작 더위 가지고 투덜거리다가 소중한 목숨 날려버릴 일 있어?”
내 말에 수유리나 강소라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한고은은 할 말 없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봤다.
“후후. 서하 경은 공과 사가 명확하시네요.”
“그게 당연한 거 아냐?”
“맞아요. 하지만 그 당연한 걸 모르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러면서 조금 쓴웃음을 지은 공주는 날 보며 다시 입을 연다.
“아침에는 죄송했어요. 생각이 짧아 많은 분께 민폐를 끼쳤네요.”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야. 한다면 그때 길이 막혀서 오래 기다린 녀석들에게 할 말이지.”
그러면서 한고은 들을 돌아보니 내 시선을 따라가던 공주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한고은네들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한고은은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나한테 성난 눈빛을 보내지만 모른척하면서 매너 모드로 인증기를 켜서 영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주가 왔어.]
[영국 왕실 공주가 우리 반에 전학 왔는데 알고 있었어?]
띠링
[re.공주가 왔어.]
[영국 방계 중에 하나가 문화 교류차 방문한다고 연락은 받았는데 공주일 줄은…. 이름이 뭐니?]
[re.re.공주가 왔어.]
[리디스 이슬라 마리에타]
[re.re.re.공주가 왔어.]
[직계가 아니네~? 우리 서하한테 꼬리 치려고 보낸 년이구나? 처리해줄까?]
…처리라니. 무슨 처리? 어쩐지 단어 선정에서 살기가 묻어나는 거 같아서 애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공주를 슬쩍 돌아보니 세쌍둥이가 내 쪽을 바라본다. 시선을 돌려 다시 문자 답장을 보냈다.
[re.re.re.re.공주가 왔어.]
[아침에 누나가 그러더라. 내 말과 행동은 이제 신중해야 한다고. 꼬리 치든 가랑이를 벌리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영은이도 괜히 이상한 행동 하지 마.]
[re.re.re.re.re.공주가 왔어.]
[이런 거?]
응? 첨부 파일 하나가 있어서 열어봤…다가 깜짝 놀랐다!
첨부 파일은 사진이었는데 사장 의자에 앉은 영은이가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새카만 슬링키 레이스 팬티를 입은 국부를 노출시킨 사진이었다!
이 여자가 정말!
깜짝 놀라서 인증기를 종료하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다행히 본 사람은 프랑뿐이었지만 프랑도 한숨을 폭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다시 인증기를 켜서 집에 가면 혼날 줄 알라는 문자를 보내놓고 인증기를 껐더니 한동안 콕콕거리면서 문자가 계속 왔지만 계속 무시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길래 다시 켜서 확인해보니 여러 통의 문자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 "ㅠㅅㅠ" 등등의 제목으로 와있어서 대충 훑어보고 종료했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가니 애들이 돌아오는 게 보인다. 여자애들도 삼삼오오 교실로 돌아오더니 공주를 보고 눈을 반짝였지만, 딱히 일부러 다가오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흥분이 식으니까 진짜 리얼 공주랑 대화하는 게 좀 부담스러워졌겠지. 거기다 내 주변에 있다는 점도 한몫 했을 테고.
그날은 공주와 더는 대화를 나누는 일 없이 수업이 끝났고 공주는 자길 데리러 온 새카만 롤스로이스 팬텀을 타고 경호원들과 함께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골목이라거나 주택의 옥상이라거나 여기저기에 있던 대충 서른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복귀하던데 역시나 경호원들이겠지?
…별로 문제 되어 보이는 건 없어서 나도 그 모습을 공간 지각으로 지켜보다가 택시를 불러서 타임리버 빌딩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제 이야기를 봐주시고 추천 선작 후원 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